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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 동이(東夷) 서(序)는, 대륙(大陸)을 말한다.
동방(東方)구이(九夷) 고향(故鄕)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
2020년 02월 25일
○ 한국사(韓國史)는, 조선사(朝鮮史)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조선사(朝鮮史)는, 한국사(韓國史)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이러한 질문(質問)을 한다.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을 말한다면 : 〈한국사(韓國史)는 조선사(朝鮮史)를 담을 수 있지만, 조선사(朝鮮史)는 한국사(韓國史)를 담을 수 없다.〉고 본다.
고조선(古朝鮮)이란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일컫는 말로, 기원전(紀元前 : BC) 2,333년에서 출발(出發)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以前)의 ‘한국(桓國)=한국(韓國)=한국(汗國)’등의 역사(歷史)는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韓國史)【한(桓)=한(馯)=한(汗)=한(韓)=한(漢)】」가 올바른 표현(表現)이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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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선대국(先代國)’은 누굴까? 선뜻 ‘조선(朝鮮) 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대답(對答)할 수 있을까? 또
…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36년! 일제강점(日帝强占)때는 정확(正確)히 뭐라고 불러야 하며,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는, 왜 임시정부(臨時政府)라고 하면서, 남의 나라(他國) 땅, 상해(上海)에 있었는가?
자국(自國) 땅에서 도저히 이룰 수 없으므로, 남의 나라(他國)로 옮겨 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만들었다면, 그 이름은 당연(當然)히 ‘대한제국(大韓帝國) 망명정부(亡命政府)’래야 맞는 말이 아닌가?
➨ 위의 글에서 말하는 ‘임시정부(臨時政府)’라는 명칭(名稱)을 놓고 보면,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 또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땅은,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었던 대륙(大陸)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일제(日帝)의 눈을 피해 남부(南部 : 上海)로, 서남(西南 : 重慶)으로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지휘(指揮)했다. 또는 활동(活動)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表現)이 아니냐!」는 것이다.
… 일제(日帝)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난 지 어언 75년! 반세기(半世紀)를 넘고 또 반세기(半世紀)의 반(半)을 넘긴 기나긴 세월(歲月)이 지났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올바른 설명(說明)을 해주는 이가 없다. 특히 ‘사학계(史學界)’는 꿀 먹은 뭐처럼 전혀 말이 없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지금, “세계(世界)10대 경제대국(經濟大國)”이라고 한다. 〈반도체(半導體)·휴대폰·티브이등의 전자제품, 조선(造船), 자동차(自動車)등으로 대표(代表)된다>면서 “엄지척”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 실상(實狀)을 보면, “엄지척” 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일까?
‘돈·돈·돈·돈’으로 대표(代表)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는, 모든 것이 오직 “돈”뿐이다. 또 하나 웃기는 것은,
◇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종교(宗敎)의 자유(自由)'는 어디까지 허용(許容)되어야 하는가?
◇ 한국(韓國)의 '집회결사(集會結社)의 자유(自由)'는 어디까지 허용(許容)되어야 하는가?
◇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언론출판(言論出版)의 자유(自由)'는 어디까지 허용(許容)되어야 하는가?」
➨ <이들의 "자유(自由)"보다는,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이 우선(于先)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國家)와 국민(國民)’들보다 "종교(宗敎)의 자유(自由)가, 집회(集會)결사(結社)의 자유(自由)가, 언론출판(言論出版)의 자유(自由)"가 우선(于先)시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걸 혼동(混同)한다거나 어설픈 이유로, 변명하는 하는 것은 궤변(詭辯)이다. 무엇을 우선(于先)시 해야 하는지 조차 구별(區別 : 區分))하지 못한다면, 바로 <나라의 불행(不幸)이요,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의 불행(不幸)이다.>
● 자조적(自嘲的)【스스로 자기(自己)를 비웃는】인 이야기지만, 냉정(冷靜)하게 현실(現實)을 보자. :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의 정신세계(精神世界)나 의식수준(意識水準)도 10위… …웃기는 얘기, 유엔(UN)회원국(會員國) 193개【2011년 기준】나라(國) 중에서, 아마도 000위쯤 되지 않을까?
지들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알지도 못하는,
일제(日帝)강점기(强占期)시대(時代)를 찬미(讚美), 찬양(讚揚)하는,
친일(親日)매국노(賣國奴)들을 찬미(讚美)하고, 찬양(讚揚)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망령(妄靈)을 찬양(讚揚)하는,
종교국가(宗敎國家)를 찬양(讚揚)하는,
이런 나라의 국민(國民)들 의식수준(意識水準)이 높다? 고 한다면,
그걸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일이 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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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朝鮮王朝)」는 곧 ‘동이(東夷)의 나라’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재야학계(在野學界)는, 또 말하기를, ‘중조(中朝)의 나라, 중토(中土)의 나라’라고 주장(主張)한다.
그렇다면 그 증거(證據)는 무엇이며, 무엇으로 그 주장(主張)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問題)는 기본상식(基本常識)일게 분명(分明)한 일이다.
대륙(大陸)사서(史書)라고 하는 역사서(歷史書)중에서 「후한서(後漢書) 또는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북사(北史), 통전(通典), 자치통감(資治通鑑)」등을 보면 : 「동이(東夷)는, 중토(中土)의 토착민(土着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이 이러한 사실(史實)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거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세뇌(洗腦)의 영향(影響)으로, 사고(思考)를 할 수 없다거나,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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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書 卷85 東夷 列傳 第75 / 序
(1)《昔堯命羲仲宅嵎夷,曰暘谷,蓋日之所出也.夏後氏太康失德,夷人始畔. :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을 우이(嵎夷=于夷)에 살도록 명(命)하고는 ‘양곡(暘谷)’이라 하였다. 그곳은 대략(大略) 해가 나오는 곳이다. 하후씨(夏后氏)의 태강(太康)이 덕(德)을 잃어버리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반(叛)하였다. 自少康已後,世服王化,遂賓於王門,獻其樂舞. : 소강(少康)이후부터는, 대대로 왕화(王化)에 감복되어 복종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우이(嵎夷)는 왈(曰) 양곡(陽谷)이다〉라고 하였다.
양곡(陽谷)이란 해(日)가 떠오르는 동방(東方)의 땅을 말한다.
동방(東方)이란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의 동(東)쪽 지방을 망라(網羅)하는 말이다. 또 우이(嵎夷)란, “욱이(郁夷)=우이(隅夷)=우이(于夷)=양이(陽夷)”를 일컫는 말이다.
우이(嵎夷) :〈우이(嵎夷)는, 욱이(郁夷)=우이(隅夷)=우이(于夷)=양이(陽夷)〉다.
◆ 우공추지(禹貢錐指) 권04 : 《嵎夷既略,釋文:嵎音隅.傳曰:嵎夷,地名.正義曰:即堯典宅嵎夷是也.王氏曰:略,為之封畛也. : 우이(嵎夷)를 경략(經略)하였다. 석문(釋文)에 : 우(嵎)의 음은 우(隅)이다. 전(傳)에서 이르기를 : 우이(嵎夷)는 땅 이름이다(地名)라고 하였다. 정의(正義)에서 이르기를 : 곧 요전(堯典)에서 우이(嵎夷)에서 살게 했다고 하는 것이다. 왕(王)씨가 이르기를 : 략(略)은 봉(封)받은 땅이다(封畛)라고 하였다. 渭按:後漢書:東夷有九種,曰:畎夷,幹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 호위(胡渭)가 이르기를 : 후한서(後漢書) : 동이(東夷)는 아홉 종류가 있는데, 견이(畎夷)·간이(幹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라고 일컫는다. 중략.》
《嵎夷,堯典疏雲:尚書,考靈曜及史記作禺銕.渭按:五帝本紀作鬱夷. : 우이(嵎夷)는, 요전(堯典)소(疏)에서 이르기를 : 상서(尙書), 고령요(考靈曜)와 사기(史記)에는 우철(禺銕)이다. 호위(胡渭) 안(按) :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울이(鬱夷)다. 張守節曰鬱音隅.夏本紀,仍作嵎夷.司馬貞曰:今文尚書及帝命驗並作禺鐵,在遼西.鐵古夷字也. : 장수절(張守節)이 말하기를, 울(鬱)의 음(音)은 우(隅)이다. 하본기(夏本紀)에서는 거듭 우이(嵎夷)라 하였다. 사마정(司馬貞)은 이르기를 : 금문상서(今文尙書)와 제명험(帝命驗)은 나란히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다. 철(鐵)은 옛 이(夷)자이다. 중략. 堯典傳雲:東表之地稱嵎夷.暘,明也.日出於穀而天下明,故稱暘穀.暘穀,嵎夷一也. : 요전(堯典)의 전(傳)에서 이르기를 : 동(東)쪽 땅을 지칭하는 것이 우이(嵎夷)다. 양(暘)은 밝음이다. 태양이 나오면 천하(天下)가 밝아져, 옛 부터 칭하기를 양곡(暘穀)이라 하였다. 양곡(暘穀)은, 우이(嵎夷) 하나이다. 중략(中略). 通鑒:唐高宗顯慶五年,命蘇定萬伐百濟,以新羅王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是亦以東夷為嵎夷也. : 통감(通鑒) :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5년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백제(百濟)를 치게 하고,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嵎夷道)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니,
우이(嵎夷) :〈우이(嵎夷)=우이(隅夷)=우이(于夷)=양이(陽夷)=욱이(郁夷)〉는, 땅의 이름이다(地名). 우이(嵎夷)는, 또한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의 하나인데, 곧 양이(陽夷)이며, 이곳은 해가 뜨는 곳이다.
우이(嵎夷)의 땅은, 요서(遼西)지방에 있다. 우이(嵎夷)는 곧 양곡(暘穀)으로 해가 떠오르면 천하(天下)가 밝아지는데, 양곡(暘穀)은 우이(嵎夷)이다.
우이(嵎夷)는 요서(遼西)에 있고,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의 하나이며, 이곳에서 해가 떠오르면, 천하(天下)가 밝아진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반도(半島)지방(地方)일 수는 없다.
동방(東方)이 어떻게 반도(半島) 땅일 수 있을까? 이건 매국(賣國) 사가(史家)들이 조작(造作)한 것이다.
➨「東表之地稱嵎夷.暘,明也.日出於穀而天下明,故稱暘穀.暘穀,嵎夷一也. : 요전(堯典)전(傳)에서 이르기를 : 동(東)쪽 땅을 지칭하는 것이 우이(嵎夷)다. 양(暘)은 밝음이다. 태양이 나오면 천하(天下)가 밝아져, 옛 부터 칭하기를 양곡(暘穀)이라 하였다. 양곡(暘穀)은, 우이(嵎夷) 하나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게 가장 중요(重要)한 구절(句節)이라고 본다.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속에서는,
《요(堯)의 명(命)으로 희중(羲仲)이 욱이(郁夷)에서 살았다.(堯命義仲居郁夷). 금문상서(今文尙書)와 제명험(帝命驗)은 나란히,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다. 철(鐵)은 옛 이(夷)자이다. 嵎夷,今文尙書及帝命驗竝作.禺銕,在遼西.銕古夷字也》
《집해(集解) : 〈인(駰)안(案) : 욱이(郁夷)는, 상서(上書)에서 우이(嵎夷)이다.〉 공안국(孔安國)이르기를, 〈동(東)쪽의 땅을 우이(嵎夷)라고 일컫는다(駰案,郁夷,尙書作嵎夷.孔安國曰,東表之地稱嵎夷).〉 색은(索隱) : 〈욱이(郁夷)는 또한 땅의 별명(別名)이다.(郁夷亦地之別名也)〉. 정의(正義) : 〈우공(禹貢) 청주(靑州)에서 이르기를 : 우이(嵎夷)는 이미 경략(經略)하였다. 안(按) :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이다.(禹貢靑州云.嵎夷旣略.按,嵎夷,靑州也)》라고 하였다.
《공전(孔傳)에서는 : 〈동(東)쪽의 땅을 우이(隅夷)라고 한다(東表之地稱隅夷)〉고 하였고, 설문(說文)에서는 : 〈우산(隅山)은 요서(遼西)에 있다. 이르기를, 우이(隅銕)이며, 양곡(暘谷)이다〉라고 했고, 설토용서고문훈(薛土龍書古文訓)에서는 : 〈우이(嵎夷)는 바닷가【또는 하(河)】모퉁이의 여러 이(海隅諸夷)〉라고 했으며, 〈동파서전(東坡書傳)에서는 : 동방의 해상【當在東方海上 : 또는 동방(東方)의 하상(河上)】에 있다〉라고 했다. 한서(漢書)를 주한 사고(師古)가 이르기를(師古曰) : 〈우이(嵎夷)는 , 땅의 이름이며, 곧 양곡에 소재(所在)한다(嵎夷,地名也,即陽谷所在)〉》고 하였다.
◆ 後漢書 卷 11 . 劉玄劉盆子列傳第 1 :《中略.大司徒鄧禹時在長安,遣兵擊之於郁夷,反為所敗,禹乃出之雲陽.九月,赤眉復入長安,止桂宮.注:郁夷:郁夷,縣,屬右扶風也. : 후한서(後漢書)11 유현유분자열전1 : 대사도 등우(鄧禹)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병사를 보내 욱이(郁夷)를 쳤으나, 반대로 패하였는바, 등우(鄧禹)는 이에 운양을 나왔다. 9월, 적미(赤眉)가 다시 장안(長安)에 들어와, 계궁(桂宮)에 머물렀다. 주(注) : 욱이(郁夷) : 욱이(郁夷)는 현(縣)으로, 우부풍에 속했다.》고 하였다.
注 : 郁 夷 : 郁 夷, 縣, 屬 右 扶 風 也. : 주(注) : 욱이(郁夷) : 욱이(郁夷)는, 현(縣)으로, 우부풍(右扶風)에 속했다.》고 하였으니,《욱이(郁夷)는 상서(尙書)에서 우이(嵎夷)(郁 夷, 尙 書 作 嵎 夷)》라고 하였다. <욱이(郁夷)=우이(嵎夷)>라는 뜻이다.
곧 「우부풍(右扶風)에서 관할(管轄)했던 “욱이현(郁夷縣)”이다」 그렇다면 위의 많은 학자(學者)들이 주해(註解)한 “동방(東方)”이란 “대륙(大陸)의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어떤 자(者)가 동방(東方)이 “반도(半島) 땅”이라고 했는가? 누구도 반도(半島) 땅이라고 하지 않았다.
20세기(世紀)의 매국(賣國)사학자(史學者)들이 만들어낸 조작품(造作品)속에서만이 “반도(半島)”라는 해설(解說)이 난무(亂舞)할 뿐이다.
➨「우부풍(右扶風)」은, 경사(京師 : 長安)를 수호(守護)하는 서(西)쪽의 요충지(要衝地) 땅으로, 이곳은 삼보(三輔)중의 하나다. 서(西)쪽 이민족(異民族)들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에 대비(對備), 정예병(精銳兵)들이 주둔(駐屯)하고 있던 곳이다. 우부풍(右扶風)은, 기산(岐山)의 동남(東南)쪽 위수(渭水)의 북(北)쪽에 있으며, 장안(長安)에서 함양(咸陽), 무공, 우부풍(右扶風), 봉상(鳳翔), 보계(寶鷄) 등을 거쳐 하서회랑(河西回廊)쪽으로 가게 된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보면 : 우부풍(右扶風)은, 호수(戶數) 216,377 / 인구(人口) 836,070 명에, 속현(屬縣)이 21개 현【戶 二 十 一 萬 六 千 三 百 七 十 七 , 口 八 十 三 萬 六 千 七 十. 縣 二 十 一】이라고 하였으며, 21세기(世紀) 현재(現在)의 기준(基準)으로보아도 대도회(大都會)라 할 수 있다. 기원전(紀元前)의 인구(人口)가 ‘8십만(十萬) 명(名)’ 이 넘었다고 하니 말이다. 「욱이현(郁夷縣)」은, 주석(註釋)에서
욱이현(郁夷縣)의 욱이(郁夷)는, 《시(詩)에서 「주도(周道) 욱이(郁夷)」라고 하는데, 병수사(洴水祠)가 있다. 왕망(王莽)은 욱평(郁平)이라고 하였다.【郁夷,詩,周道郁夷.有汧水祠.莽曰郁平.】》라고 하였으며,
주석(註釋)에서는 《욱이(郁夷) :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 「소아(小雅)사모(四牡)의 시(詩)에서 이르기를 : 『사모비비(四牡騑騑),주도왜지(周道倭遲)』라고 하였다. 【師古曰:小雅四牡之詩曰,四牡騑騑,周道倭遲】 한시(韓詩)에서의 욱이(郁夷)라는 글자는, 사신(使臣)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길이다.【韓詩作郁夷字,言使臣乘馬行於此道】라고 하였다.
「욱이(郁夷)란 우이(嵎夷)」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땅의 이름(地名)이며, 곧 「욱이현(郁夷縣)이며, 다른 이름으로 우이현(嵎夷縣)」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땅이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 대륙(大陸)의 장안(長安) 서(西)쪽 우부풍(右扶風)의 속현(屬縣)으로 있었다. 곧 요충지(要衝地) 땅이다.
이러한 견해(見解)해 볼 때, 위와 같은 많은 선현(先賢)들의 기록(記錄)과 설명(說明)으로 볼 때, “동방(東方) 구이(九夷)”란,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넓고 넓은 동서남북(東西南北) 땅에서 살아가던 옛 종족(種族)들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총칭(總稱)하여 「동방(東方)의 땅에서 사는 이(夷)족」이라고 하여 ‘동이(東夷)’라고 불렀다.”는 것이 가장 올바른 표현(表現)이다.
더불어 설명(說明)한다면 : 서력(西曆) 660년, ‘당고종(唐高宗)’이 ‘김춘추(金春秋) 또는 유백영(柳伯英)’에게 주었다는 ‘우이도(嵎夷道)행군총관(行軍摠管)’이란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대륙(大陸)의 동남방(東南方) 땅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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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桀為暴虐,諸夷內侵,殷湯革命,伐而定之.至於仲丁,藍夷作寇.自是或服或畔,三百餘年. : 걸(桀)이 포악해지니 여러 이(諸夷)가 내지(內地)에 침입(侵入)하여 왔는데, 은(殷)의 탕왕(湯王)이 혁명(革命)하고,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중정(仲丁) 때에 이르러 람이(藍夷)가 침입하였다. 이로부터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3백여 년간 계속하였다. 武乙衰敝,東夷□盛,遂分遷淮﹑岱,漸居中土. : 무을(武乙)에 이르러 (은나라가) 쇠약(衰弱)해지자, 동이(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산(岱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토(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내지(內地)란 당시의 대륙의 땅에서 걸왕【傑王 : 하(夏)의 말(末) 왕(王)】이 있던 5백리(百里) 이내(以內)의 땅을 말하는 것이 된다.
무을(武乙) 때에 이르러 나라가 쇠약(衰弱)해지자, 강성(强盛)해진 동이(東夷)들이 점차 회수(淮水) 대산(岱山)등지로 몰려와 중토(中土)로 뻗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수(淮水) : 사독【四瀆, 고대에 長江, 黃河, 淮水, 濟水를 가리켜 일컫던 말】중의 하나로, 하남성(河南省) 남단 동백산(桐柏山)에서 발원하여 안휘성(安徽省)을 거쳐 강소성(江蘇省)으로 유입되는 강(江)으로 길이는 약 1,100㎞에 달한다고 한다. 귤(橘)이 회수(淮水)를 건너오면 탱자가 된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대산(岱山) : 동악태산(東岳泰山)이다. 산동성(山東省)에 위치한 오악 중의 하나이며 태산(泰山)·동악(東岳)·태악(太岳)·대산(岱山)등으로 불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한 곳인데, 양사언의 시(詩)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동이(東夷)의 일부가 살기 좋은 이러한 곳까지 진출(進出)하여 하(夏)나라를 위협(威脅)했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 반도(半島) 땅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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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管﹑蔡畔周.乃招誘夷狄.周公征之.遂定東夷. :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周)나라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초유(招誘)하였는데, 주공(周公)이 이들을 정벌함으로서 동이(東夷)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後徐夷僭號,乃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 :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어 왕호(王號)를 칭하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西)쪽으로 하(河)의 상류(上流 : 河上)에까지 이르렀다. 중략(中略).》
위의 글 중에서 〈後徐夷僭號,乃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 :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칭(僭稱)하고는,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西)쪽으로 하(河)의 상류(上流 : 河上)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는 내용(內容)을 살펴보기로 하자.
종주(宗周)는, 천자국(天子國) 주(周)를 뜻하는 말이다.
서이(徐夷)는 또한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의 하나다. 이들이 구이(九夷)와 함께 서(西)쪽에 있던 주(周)나라를 쳐, 하상(河上)까지 진출(進出)했다는 이야기다.
하상(河上) : 황하(黃河) 상류(上流)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전한서(前漢書)나 후한서(後漢書)등에서 말하는 하상새(河上塞)의 위치(位置)를 보면, 하서(河西)지방을 일컫는다. 따라서 하상(河上)이란 최소한(最小限) 영하성(寧夏省)을 관통(貫通)하는 하(河)의 서(西)쪽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때【대략 기원전(紀元前:BC) 500-510년 경(頃)】구이(九夷)들은 대륙(大陸) 땅 곳곳에 진출(進出)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記錄)은 말 그대로 「동방(東方) 구이(九夷)들이 좁디좁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문(漢文) 한자(漢子),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 똑같은 고전(古典)을 보면서, “반도(半島) 땅, 반도(半島) 땅” 하는 이들을 보면, 그 뱃장이 참으로 부럽다. 도대체 어디에 반도(半島) 땅이라는 설명(說明)이 있다는 것일까? 귀신(鬼神)이 곡(哭)하다 말고, 뒤로 벌러덩 넘어질 일이다.
◇ 수십만(數十萬)년 전(前)부터, 수만(數萬)년 전부터, 동방(東方) 땅에서 살던 무리(衆)들을 토착민(土着民)이라고 해야 옳다. 동방(東方)의 이(夷)가 바로 그런 예(例)이다. 한국사(韓國史)니 조선사(朝鮮史)니 하는 역사전개무대(歷史展開舞臺)는,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明白)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 조선사(朝鮮史)를 공부(工夫)한다거나 연구(硏究)하는데 있어, 위와 같은 이야기는 기초(基礎)상식(常識)으로 알고 있어야, 그 다음으로 연결(連結)되는 조선사(朝鮮史)연구(硏究)가 오류(誤謬)에 빠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고전(古典)이라고 하는 한문(漢文)으로 된 역사서(歷史書)나, 지리지(地理志)등 그 어디에도 반도(半島) 땅 이야기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다만 근세(近世)에 새롭게 편집(編輯)되고, 교감(校勘)되어 편찬(編纂)된 것들 중에서 반도(半島)라고 할 수 있는,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들에도 반도(半島)라는 직접적(直接的)인 설명(說明)은 없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또 이들이 만든 ‘한글’해설서(解說書)에서만이 등장(登場)하는 것이 반도(半島) 땅이다.
이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일제(日帝)제국주의(帝國主義)도 사라졌고, 서구(西歐)열강(列强)의 압력(壓力)도 사라졌다.
이들이 원(願)하고자 하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들이 목적(目的)으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거짓에서 거짓으로, 또 거짓으로 거짓을 메꾸다보니, 75년이나 이어졌다는 것일까? 이건 아닐 게다. 오늘도 일제(日帝)의 후예(後裔)들로부터 여러 명목(名目)으로 “후원(後援)하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2020년 02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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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부풍을 고지도에서 찾아보니 " 부풍 " 이란 지명으로 장안 서쪽에 분명히 있습니다. 이곳이 아주 중요한 전략거점이었다니 놀랍습니다.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많은 역사적 상식은, 그저 20세기로부터 갑자기 출현한 역사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원전에 인구 80만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는 부풍(우부풍)을 생각해 보면, 또한 그곳에 동방의 구이(九夷)들 중에서 "嵎夷(우이)"라는 동이(東夷)의 한 부류가 살고 있었으며, 그곳이 고향이다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중원 대륙의 땅은 구이(九夷)들의 고향(故鄕)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 4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죠.
일련의 기록으로 볼 때, 동방(東方)이란 반도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관심과 성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