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지난해 뎀님의 소개로 구입한 책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지요. 삶의 현장에서 몸소 체득한 꾸밈없는 이야기들...
ㅎㅎㅎ 그런데 사실 제가 만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잡식성이긴 해요.
어쨌거나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는건 참 좋은 책이라는 증거겠죠?
늘 좋은책 소개해 주시는 뎀님께 감사의 말씀 전하면서...^^
존 버거...
런던태생으로 미술비평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 비평가.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가 살면서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 해오고 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에는 사진이 없다.
말 그대로 글로써 사진을 찍듯이 작가가 거리에서 일터에서 여행을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을 섬세하게 묘사한 스물 아홉편의 사진같은 이야기이다.
때론 철저하게 관찰자 시점에서,
때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때론 작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는 가운데,
이 모두에는 결국 사람을 향한 애정과 관심과 존중을 담아내고 있다.
스물아홉편의 포토카피 가운데...
어머니의 장미꽃 한 다발이 여운처럼 남아 마음을 아리게 했던
<마르셀의 여름>의 정원을 기억해내고,
중학생 사춘기 소녀 가슴속에 별 하나 심어준 알퐁스도테의 <별>에서
스테파네트를 짝사랑하던 목동이 되어 별이 빛나는 프로방스 언덕을 배회하게 만든,
<잔에 담긴 꽃 한 묶음>을 옮겨본다.
괜찮을 거라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전에도 종종 그랬듯 마치 내게 무슨 신비한 것이 있기라도 한 양,
또 동시에 내가 바보이기라도 한 양 나를 바라보았다.
마르셀은 거의 여든의 나이였다.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인생의 삼분의 일 정도는 행복했을 것이다.
해마다 넉 달은 소와 함께 알파주(알프스 지방의 산간 목초지-역자)에서 보냈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해발 천칠백 미터 고도에서 보낸 것이다. 철벽 같은 산의 장막에 둘러싸여 그는 평화를 누렸다.
내가 바보처럼 말하는 그 행복 말이다.
산에서는 개 두 마리와 암소 마흔 마리 정도, 그리고 수소 한 마리와 함께 살았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마을 사람들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즐겨 물었다. 마치 사람들이 엊저녁 텔레비전 연속극 내용을
묻는 것처럼 그렇게 묻곤 했다.
그의 진정한 삶은 그 산 위에 있었다. 오두막이 자리한 평평한 바위턱을 스쳐 지나가는 낮과 밤,
계절과 햇수 들의 그 끝없는 흐름 위에, 어김없고 하릴없는 일상을 띄우면서, 또 치즈를 만들면서.
바위턱에서는 번갯불이 가까이에서 흩어졌고, 마치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게 다리 아치가 내려다
보이듯 무지개가 내려다 보였다.
산 위에 조금만 있어 보면 외롭다는 생각은 사라진다. 발가벗고 살기 때문에. 발가벗은 사람은
또 다른 차원의 동반자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물론 마르셀이 옷을 벗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밤에도 옷을 입은 채로 잔다. 그럼에도 알파주에서
혼자 한 주 두 주 지내다 보면, 영혼은 그 위도리를 벗기 시작하고 이윽고 알몸이 되면서,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의 눈에서 그것이 읽힌다.
영혼은 그렇다 쳐도, 가축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늘 있었다. 두 마리 개가 소들의 이름을
죄다 알고 있을 정도지만, 그럼에도 소가 길을 잃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곳 산에서
는 개연성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소나무숲이 지금 막 걸음을 멈춘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은하수가 마치 모기장처럼 가깝게 보일 때도 있다. 어느 8월 아침에는 우유 짜는 헛간에서 똥
치울 때 쓰는 외바퀴차의 손잡이가 얼어 버리기도 한다.
갈라지고 닳고 마디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마르셀의 손은 아주 따뜻했다. 굳은 살갗 밑에 예민함을
감추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쓰이지 않게 된 옛 단어들 같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함께 신년을 맞은 후 차로 그의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였다. 그때 벌써
소들을 데리고 알파주로 올라갈 6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렴 그리 될 거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마치 메아리가 되돌아오는 바위 앞에 선 사람이 그러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머리를 저었다.
지난 6월, 마르셀의 산으로 다시 가 보았다. 풀 뜯는 소도, 종소리도, 개도 없었다. 이름 없는 들꽃
들만 무성했다. 무심히 꽃을 꺾기 시작했다. 이런 고도에서는 같은 꽃이라도 들판에서보다 훨씬 선명
한 색깔로 핀다. 근처 봉우리들엔 갈가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페러글라이더가 스무 개
정도 떠 있다. 상승기류를 타고서, 뛰어내린 산모퉁이보다 더욱 높이 올라간다. 이즈음 그 자리는
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으로 통한다.
마르셀의 빈 오두막 문을 밀었다. 기차의 칸막이 방만한 방이 둘 있다. 나는 속으로 번져 가는 감정을
누르며, 유리잔에 물을 채우고, 한 묶음 손에 들고 간 꽃을 꽃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하루가 저물 때면
거기 앉아 나는 커피를, 마르셀은 우유를 마시곤 했었다. 그가 가 버리고 없는 지금, 그 의자에 다시
앉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소떼들의 종소리 뒤로 고함치며 욕지거리하며 다가오는 마르셀의 목소
리가 저 정적 속에서 들려 올 때까지, 나는 거기 가만히, 가만히, 서 있었다.
차례...
1. 자두나무 곁의 두 사람
2. 무릎에 개를 올려 놓고 있는 여인
3. 오마 가는 길
4. 라코스테 스웨터를 입은 남자
5. 유모차의 여인
6. 턱을 괴고 있는 젊은 여자
7. 가죽옷에 경주용 헬멧을 쓴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남자
8. 바위 아래 개 두 마리
9.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집
10.자전거를 탄 여인
11.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
12.풀밭 위의 그림
13.시편 139: "당신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니..."
14.거리의 배우
15.잔에 담긴 꽃 한 묶음
16.길가에 엉켜 쓰러진 두 남자
17.말고삐를 든 남자
18.시프노스 섬
19.전구를 그린 그림
20.안티고네를 닮은 여자
21.얘기하고 있는 친구
22.소 곁에 앉은 두 남자
23.가슴을 풀어헤친 남자
24.사빈 산맥의 집 한 채
25.바구니 안의 고양이 두 마리
26.샤프카를 쓴 젊은 여인
27.식사 테이블에서
28.19호실
29.반군 부사령관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김우룡 옮김 / 열화당
첫댓글 초록님, 일요일 아침이라 느긋하게 뜨락에 온 참입니다.. 초록님의 책이야기는 늘 고맙습니다..서재를 밝히려는 마음도 고맙고,..사진같은 글,. 초등생의 글쓰기 입문기면 하는 말인데,..어쩌면 글은 엑쓰레이인지도 모릅니다,.. 뼈보다 어려운 마음을 찍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