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에는 많은 암행어사 비가 있다,. 전국에 남은 암행어사 비가 제일 많은 지역이어서 암행어사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군수를 지낸 홍범식의 비도 여러개 있어 조사를 하였다..
홍범식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풍산(豊山).
조선 선조의 부마 홍주원의 10대손으로,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다.
1871년 7월 23일 충청도 괴산군 일도면 인산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인산마을)에서 아버지 홍승목(洪承穆)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1888년(고종 25) 식년 진사시에 3등 232인으로 입격한 뒤 1902년 내부 주사(內部主事)를 시작으로 관직에 들어섰다. 이후 혜민원 참서관(參書官)을 거쳐 지방관으로 나가 1907년 태인군수, 1909년 금산군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2]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금산군 객사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자결 당시 유서를 10여 통 남겼으며 홍범식의 품에 있던 유서는 일제가 압수한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홍범식의 비는 태인에 있는 피향정에 있으며, 여러 비와 같이 있다.
고종 42년 을사(1905) 4월 3일(을사, 양력 5월 6일) 흐림
42-04-03[10] 전 참서관 홍범식의 둘째 아들 홍명희를 숙선옹주의 사손으로 정하게 할 것을 청하는 비서감 승 홍승두의 상소
○ 비서감 승 홍승두(洪承斗)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의 일문(一門) 가운데 고(故) 영명위(永明尉) 집안의 숙선옹주(淑善翁主)의 사판(祀版)은 지위가 특별하고 예(禮)가 중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손(祀孫)인 전(前) 참봉(參奉) 홍규식(洪奎植)이 처첩(妻妾) 모두에게 자녀가 없습니다. 삼가 국전(國典)에 따라 족인(族人)인 전 참서관(參書官) 홍범식(洪範植)의 둘째 아들 홍명희(洪明熹)를 양자로 들여 뒤를 잇게 하도록 한 집안의 정론(定論)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통(二統)이 없고 임금과 부친이 중대합니다. 이러므로 아버지가 낳고 임금이 만들어 준다는 것이 고금에 통용되는 의리입니다. 지금 신이 가문의 떳떳한 도리를 바로잡는 일을 담당하였지만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기에 감히 외람되이 숭엄하신 성상께 번거롭게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특별히 처분을 내리심으로써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로 하여금 숙선옹주의 대를 잇게 하고 제사를 받들도록 해 주시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
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예식원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순종 3년 기유(1909) 4월 27일(을사, 양력 6월 14일 월요일) 맑음
03-04-27[02] 이호승 등에 대한 인사를 행하였다
○ 내부 주사 이호승(李浩升)을 양천 군수(陽川郡守)에, 정3품 이명헌(李明憲)을 적성 군수(積城郡守)에, 정3품 김홍규(金鴻圭)를 영춘 군수(迎春郡守)에, 금산 군수 김우식(金宇植)을 태인 군수(泰仁郡守)에, 태인 군수 홍범식(洪範植)을 금산 군수(錦山郡守)에 임명하였다. 훤야삼사랑(萱野三四郎)을 경부(警部)에 임명하고, 탕목해오랑(湯目亥五郎)을 재무서 주사에 임명하였다.
소호당문집 제10권 / 전(傳)
홍범식전 무오년(1918) 〔洪範植傳 戊午〕
홍범식(洪範植)의 자는 성방(聖訪), 그 선계(先系)는 풍산(豐山) 사람으로, 뒤에 조선 한성(漢城)의 사족(仕族)이 되었는데, 범식은 괴산(槐山)의 향제(鄕第)에서 태어났다.
12대조 대사헌 이상(履祥)은 선조(宣祖) 때의 명신으로, 성품이 돈후하고 경술(經術)을 좋아하였으며, 당론(黨論)이 나뉘어 다투던 때에 홀로 우뚝 서서 세류에 휩쓸리지 않았고, 두루 어울리되 편당을 가르지 않았다. 그 뒤 자손들은 대대로 그 가훈을 지켜 비록 노론(老論)의 명가(名家)가 되었지만, 그 당류(黨類)를 따라 다른 당파를 편벽되게 미워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우길(祐吉)과 부친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 승목(承穆)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숭반(崇班)의 높은 지위에 이르렀지만, 온화하고 공손한 풍모를 가지고 있어서 더욱 사대부들이 칭송하였다.
범식은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평소에는 옷조차 감당하지 못할 듯하였다. 그러나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성스러웠고, 남을 대하는 데는 후덕하였으며, 천성적으로 문학을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입으로 글을 외우고 시를 읊조리기를 그치지 않았지만, 명예(名譽)ㆍ이세(利勢)ㆍ구마(狗馬)ㆍ성색(聲色) 따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모두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고종(高宗) 25년(1888) 성균 진사(成均進士)에 선발되었다. 광무(光武) 연간에 내부 주사(內部主事)가 되었다가 곧 해직되었고, 얼마 안 있어 혜민원 참서관(惠民院參書官)으로 승진되었다가 곧 해직되고, 몇 년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었다.
순종(純宗) 융희(隆煕) 원년(1907) 태인 군수(泰仁郡守)에 제수되었다. 그 때 군읍(郡邑) 장리(長吏)들은 탐학이 풍조를 이루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고, 두 해 전에는 일본 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우리나라를 협박해서 통감(統監)을 하여 나라 안에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자, 이토 히로부미는 수비대를 출동시켜 공격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행적이 있는 사람들이나 걸출하다고 이름이 난 사람들이 또한 많이 잡혀서 살해되니, 여러 고을이 소요해서 편안하지 못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태인은 더욱 심하였다. 범식은 개연히, 사군자로 관리가 되어 난리를 만나서 난리 때문에 관리의 직무를 회피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일어나 관직에 나아갔다. 말 한 필에 동자 하나를 데리고 군내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진무(鎭撫)하고, 여러 수비대장에게 말을 해서 그 수하 장졸들이 백성들을 멋대로 살해하지 말게 하였다. 이 때문에 태인 백성들 중 거의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 아주 많았고, 다른 고을의 백성들 중 무고하게 체포되어 태인을 지나는 자들 중에도 또한 그 때문에 죽음을 면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늘 받는 녹봉 외에는 비록 한 푼이라도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일로 구황이나 수리 사업과 같은 것에는 마음을 다하여 행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태인의 백성들은 감복하게 되었다. 태인군 38개 마을에서는 모두 목비(木碑)를 세워 그 덕을 기리고, 인근 고부(古阜)와 정읍(井邑) 등의 고을에서도 또한 목비를 세우자, 범식은 사람을 시켜 경내의 목비를 거두어 불태우게 하였다.
순종 융희 3년(1909)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자리를 옮겨서도 정사는 한결같이 태인 군수 때와 동일하게 하였다. 그 해 겨울 의병장 해주(海州) 안중근(安重根)이 청(淸)나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 죽여 나라의 원수를 갚았다. 일본은 크게 분노하여 서둘러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려고, 평소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던 대한제국 일진회(一進會)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과 대한제국의 합병 논의를 앞장서서 주장하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8월 대한제국 백성들의 논의를 따른다고 공공연하게 떠들면서 군대를 파견하여 인천(仁川)을 압박하고, 고종 만세절(萬歲節)에 합병의 일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범식이 고종 만세절에 합병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면서 “아, 나는 이미 백 리의 땅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이 되어 나라의 멸망을 구할 힘이 없으니, 속히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라고 하고는, 미리 편지를 써서 부자(父子)와 친우(親友)들과 영결하였다. 고종 만세절 저녁이 되자 관속들을 물러가게 하고, 홀로 객사(客舍)에 가서 북향하고 대궐에 배례를 드리며 장차 죽으려는 이유를 고하였다. 한 늙은 군사가 그 의중을 눈치 채고 와서 울면서 그만두기를 청하였지만, 범식은 몸을 숙여 흙을 집어서 그 군사의 얼굴과 눈에 뿌리고는, 몰래 객사 북쪽으로 가서 소나무 가지에다 명주 끈을 걸고 목을 매다니, 그 때가 4경이었다. 늙은 군사가 눈을 비비고 보니 범식이 보이지 않아, 그 속하를 불러 불을 밝히고 찾다가 소나무 아래에 이르러 목을 매단 것을 보고 끈을 풀어서 내렸지만,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래서 서로 가슴을 치고 “사또, 사또!”하면서 크게 통곡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군자는 “홍범식이 맨 처음 대한제국이 망한 것 때문에 죽은 뒤로, 대한제국의 유신민(遺臣民)과 관료들 중 따라 죽은 사람이 몹시 많으니, 홍범식 같은 이는 천하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대한제국 선왕(先王)들이 일찍이 도(道)로 능히 선비를 길렀음을 알게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범식이 죽을 때 나이는 40세였다. 《일완시고(一阮詩稿)》가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일완은 그의 자호이다.
벽초 홍명희 부친으로 많은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나라가 없어지니 자결을 하여 충심을 보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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