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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성(patternity)과 행위자성(agenticity) 뇌는 믿음의 엔진입니다. 뇌는 감각을 통해 들어온 데이터에서 자연스럽게 패턴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이러한 패턴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첫 번째 과정인 ‘패턴성(patternity)’은 의미가 있거나 의미가 없는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으려는 성향이다. 두 번째 과정은 ‘행위자성(agenticity)’이다. 이것은 패턴에 의미, 의도, 행위기관을 부여하려는 성향이다. 우리의 뇌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사건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의미 있는 패턴을 도출해내게끔 진화했다. 이런 패턴들은 믿음이 된다. 일단 믿음이 형성되면 뇌는 믿음을 지원할 수 있는 확증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확증은 믿음에 대한 확신을 정서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믿음의 강화 과정을 가속하고, 믿음을 공고히 하는 긍정적인 피드백 루프(되먹임 회로)를 계속 순환시킨다. 믿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일단 믿음이라는 것을 형성시키고 믿어야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
우리가 생각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신뢰할 만한 것인가? 전통적으로 믿은 신앙이나 관습, 체계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우리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옳은 것인가?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회의론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대종사님은 이런 과학자보다 더 과학자적으로 같았어요. 의심을 제기해야지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심이 없어서라고 말하면 종교는 도그마에 빠집니다. 이런 정당한 의심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회의론자입니다. 대종사님은 이런 관점에서 상당한 회의론자입니다.
전음광 선진님이 수필한 대종사님의 법문을 보면,
(참고) 잠시 강의를 멈추시고 읽어보신 후에 설법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과학자보다 더 과학자 같은 대종사님(월말통신 25호) 대종사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시어 나는 이 산천에서 보고 얻은 것보다도 절실히 느낀 것은 어느 기독교 신자의 독실한 신념을 본 것이다. 여행하며 들른 여관의 주인이 기독교 신자였던지 기도와 찬송가 등을 늘 했으며 말과 행동이 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신앙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기쁘고 희열에 차있음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법에 대한 제군의 신앙 정도를 비교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 전체가 그만한 신앙을 품었다면 우리는 목적한 바 공부와 사업이 곧 성취될 것이라 여겨진다. 어느 날 내가 그 주인에게 어느 때부터 예수를 믿었으며 예수를 믿은 결과 어떠한 이득과 헤로움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예수를 믿은지 20여년이며 하느님이 주신 혜택은 무한하다고 말하면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 했다. 그는 본시 경성인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금강산에 구경갔다가 여관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여관을 개업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도중에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큰 일을 당하였다. 그 때 만약 내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낙망하여 일생을 그르치기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실한 믿음으로 이 역경을 통해 이겨내고자 하여 같은 곳에 다시 여관을 건축하고 다시금 부자가 되었다. 이 일을 보면 이 사람은 예수에 대한 독실한 신념이 이같은 행복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존심과 체면 그리고 편안함을을 놓고 따로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처와 둘이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모두가 그와 같은 실행을 한다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이후 그는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도 일반사람들과는 다르신데 혹시 어느 종교를 믿고 계십니까? 그때 나는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나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다 허망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자유한 불상을 존중하고 받들어 복락을 구하는 사람이나 공허한 하늘을 향하여 죄와 복을 말하는 사람이나 허망하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것을 믿는 사람은 흙이나 돌보다 무감각한 사람이며, 저 공허한 하늘보다 더 허망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느 해 피서를 위해 유명한 사찰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법당에 대형 황금 불상을 모시고 일반 승려가 그 앞을 지날 때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예불하고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 효성스러운 아들이 부모를 봉양함과 다름없이 정성스럽게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이 우상을 불신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위기에 혹시 어떠한 영험이 있는 것도 같아서 존엄한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부정 신념이 굳은 까닭에 ‘저것이’ 하는 무시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불상의 능력을 시험해 보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승려들이 없는 틈을 타서 홀로 법당을 향하여 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일 우상에 영험이 없다면 이거니와, 있다면 그를 공격하는 나에게 어떠한 벌을 주든지 심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어찌하랴’는 공포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무릎쓰고 시험하리라는 용기를 내어 불상의 뺨을 때리고 허리를 쥐어박아 보았다. 그런 후 돌아올 때에 몸과 마음은 심히 무서워 떨렸다. 가슴은 공포의 자극을 받아 요란하게 뛰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의 마음은 안정을 얻지 못하였고 나는 공포 중에서 잠들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생각난 것은 어제 불상에게 한 일이었다. 동시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죽은 것 같이만 여겨졌다. 내가 이게 영혼이냐 아니냐 하여 주변 사람에게 말을 붙여보니 평소나 다름없이 대하여 그때야 비로서 살아있음을 알았다. 이후 생각해 보니 ‘만일 부처가 영험이 있다면 나에게 어찌 벌을 주지 않았으며, 설사 자비롭게 보아 벌은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잘 때 꿈에라도 어찌 혼내지 않았는가? 과연 “불상은 힘이 없는 것이다.”라고 확정하였다. 2천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내 모른다고 할지라도 지금 있는 각 사찰의 불상은 의심할 여지 없이 무영물(無靈物)(령스러움이 없는 물건)이다. 또 어느 때에는 예배당을 왕방往放한 결과, 모든 사람이 “하늘 아버지, 하늘 아버지.”하며 “복을 주십사, 병을 나수어 주십사.”하고 혹은 예수가 천天의 독생자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代하여 십자가상에 정사釘死하였다 하며 인간의 부귀 빈천과 수명 복락을 다 하늘이 자유 천단한다고 주창主唱한다. 그 소리를 들은 나도 평소에는 심상하던 창창한 하늘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 것 같이만 생각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처는 이미 허망한 것이거니와, 혹 하늘에나 어떠한 영험이 있는가?’하는 희망도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또한 믿기가 어려우므로 하늘을 또 한번 시험하기로 내정하였다. 집에 돌아와 긴 막대로 하늘을 겨누며 치며, “이 하늘아, 영험이 있느냐? 없느냐? 영험이 있다면 있는 표정을 하고 없으면 가만히 있거라.”하였다. 그러나 나의 내심은 ‘저 하늘이 만일 영험이 있어 죄를 주면 어찌하랴?’는 무서운 생각이 또 난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벌은 내리지 않는다. ‘혹 하늘이 듣지 않았는가?’의심하여 재차 대성질호大聲叱號로써 무수히 욕하였다. 그러나 이내 별 일은 없고 말았다. 이 시험이 있은 후부터는 하늘도 부처와 같이 허망한 것이며 그것을 믿는 사람도 따라서 허망한 사람이라 단정하는 동시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사람으로서 믿지 못할 것이라고 자인自認하였노라. 그러나 이것은 무식한 나의 일시적 망동妄動인지도 모르나니, 군은 20여년을 두고 신信해 올 때에 마땅히 하늘의 소재처와 영험 유무를 알을지라, 하늘에 대한 나의 불경不敬한 언사와 행동을 용서하고 그 계신 곳과 생긴 모양을 가르쳐 줌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때에 그는 역시 의심다웁다는 듯이 “글쎄올시다. 저도 20여년을 신信해 올 때 이것이 제일 해결키 어려운 문제입니다. 거룩하신 천부天父께서 있기는 기필적 있으리라는 것을 자신하오나, 그 어느 곳에 계신다는 것만은 사실 변증키 어렵나이다.” 다시 말을 돌린다. “그러나 하느님이야 이 우주 강산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나이다.”한다. 그때에 나는 옆에 있는 주반珠盤(주판)을 얼른 들어 그에게 보이며, “그러면 여기에도 있느냐?”하였다. 그는 매우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거기야 있겠습니까?”한다. 나는 또 “이 주반에는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어느 곳에는 있겠는가? 그 소재처만 알려 준다면 나는 곧 믿겠노라.”하였다. 그는 끝내 대답할 바를 얻지 못하고 매우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현저하며 개구開口 이래 도도하던 열변이 극도의 침묵으로 잠긴다. 그때에 나는 내심으로 미소를 금치 못하였으나 여하간 그 사람에 한하여는 하늘의 소재는 비록 모른다 할지라도 독실한 신념이 행복을 주었다는 것만은 사실로 증명하는 것임을 절실히 느꼈다. 이것이 곧 금강산 구경에서 얻은 나의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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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소감을 얘기하시면서 이렇게 신앙에 자각이 없는 타력신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데, 우리 원불교같이 자타력을 병진하는 원불교는 원만한 신앙을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마무리 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렇게 셔머같은 과학자보다도 신앙을 분석하는 것을 더 과학자적으로 분석하세요. 그동안 전통적으로 받아들였던 신앙을 실험해보셨습니다.
한 번 밑에 회보를 읽고 강연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신앙하는 사람과 신앙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회보 7호) 통괄적으로 그 인류의 각양 각색된 신앙이 결과를 조사하야 신앙 그것이 인류생활에 실익이 잇는가? 폐해가 되는가는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 신앙의 표적이 허무맹랑한 미신이 되엿든 진정한 사실이 되엿든 신앙하는 자의 자체애 잇어서는 무한한 실익을 받는다고 할 수 잇다. 웨 그러느냐하면 분별이 많은 사람의 마음은 근본 사사하고 요망한 것인지라. 그것이 자주력을 얻기 전에 어느곳에나 의지하고 구속을 받음이 없이 자행자지 한다면 그 간악한대 떠러지기 쉬운며 악을 행한후에도 참해할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고로 이 신앙의 표적을 두지 안은 사람의 마음은 족히 무서워 하고 꺼릴것이 없어서 무근지목과 같고 부평초와 같하야 생각 나는대로 욕심 발하는대로 자행자지 하게 되매 부지 중 무수한 죄악을 쌓게 되는 것이요, 또는 이 신앙 독특해서 발생되는 섭리의 천연 감회가 없음으로 그 마음이 독하고 냉정하야 돈후한 덕성을 찾을 수 없는 반면에 잔인성이 충만하야서 모든 악을 행할 요소가 만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 생활을 하는 사람은 첫째, 그 신앙의 표적에 마음을 의탁하고 구속을 받게 됨으로 어른을 모신 어린이의 마음과 갓치 스사로 경성하야 자유방종적 악행을 못 하는 것이며, 혹 창졸간 악을 행하엿드래도 반성과 참회하기에 빨을 것은 물론 신앙의 자발적 감화하에 양심이 풍부하야 모든 선을 행할 요소가 만하여지는 것이니, 그럼으로 신앙을 두지 안는 자가 열가지 죄를 짖게된 경우이면 신앙을 둔자는 이, 삼가지의 죄밖게 짓지 안는 것이며, 그 반면 칠 팔가지의 죄는 도로여선으로 화할지니라. 일로 보면 인생은 누구나 한가지의 신앙은 가져야 할 것이며 이와같이 신앙은 인생 생활에 절대 불가결한 조건이라 할 것이다. |
원불교에서 신앙이란 어떤 신앙인가라는 질문에 당면합니다. 이것을 잘 밝힌 내용이 교의품 4장 내용입니다. 두산백과사전에서 신앙이란 ‘절대적 타자(他者)나 절대적 자기에 대한 신뢰적·합일적(合一的)인 태도’라고 되어있습니다. 교회용어사전에서는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신앙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생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내가 스스로) 신앙을 가진다'는 표현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심이 생기다'로 표현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맞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신앙하면 떠오르는 것은 절대적 존재, 신비체험, 고난, 역경, 기도 등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원불교에서 신앙은 곧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교의품 4장에 일원상 신앙의 핵심을 전달하고 계십니다.
또 여쭙기를 [일원상의 신앙은 어떻게 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 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할지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편협한 신앙을 돌려 원만한 신앙을 만들며, 미신적 신앙을 돌려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한 것이니라.] |
대부분의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절대자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며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다른 종교와 좀 다릅니다. 가족이 신앙의 대상입니다. 옆에 있는 동지가 신앙의 대상입니다. 원불교 인이라면 여기까지는 그래도 끄덕여 질것입니다. 그러면 물컵이 신앙의 대상일까요? 네 신앙의 대상입니다. 공기가 신앙의 대상일까요? 네 신앙의 대상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신앙의 대상일까요? 네 신앙의 대상입니다. 왜 물컵이 신앙의 대상일까요? 왜 공기가 신앙의 대상일까요? 왜 코로나바이러스가 신앙의 대상일까요? 그렇다면 반대로 왜 신앙의 대상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오래된 관념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잘 빼먹는 중요한 신앙이 대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법률입니다. 교통법규도 신앙의 대상입니다.
원불교에서 신앙은 일원상의 신앙이고 일원상을 신앙은 천지만물 허공법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일원상의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는 것입니다. 물컵도 우리에게 죄복고락(罪 福苦樂)을 줄 권능이 있습니다. 물컵을 잘 못 사용하면 고통스러울 수 있고 물컵을 잘 못 사용하면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마이크 잘못 사용하면 여러분들에게 불쾌감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잘 못 대처하면 무수한 고통을 유발하게 됩니다. 우주 만물을 잘 활용하여 최대의 가치를 나투고 은혜를 생산하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물컵은 물컵의 가치를 공기는 공기의 가치를 나투게 하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도에서 말하는 잘 가려서 믿는 것이고, 원만한 진리에 맞는 진리의 대상이고, 정당하고 사실다운 방법으로 신앙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바이라스를 막기 위해 절대자에게만 기도하는 것은 좁은 대상이며 허망한 대상이며 미신스러운 방법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신앙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는 행동을 하는 것이 신앙의 활동입니다. 우리가 일원상을 신앙하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신앙하는 것이며, 공기를 신앙하는 것이며 가족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절대적이고 인격적인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은 일원상의 신앙이 아닙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일원상一圓相이 부처가 아니다. 우주만물이 부처인 줄을 가르치기 위해서 강연히 도면圖面으로 그린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원상=사은=우주만물 허공법계 부처님 신앙의 대상은 우주만물 허공법계(또는 천만사물) 신앙의 태도는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 신앙의 방법 직접불공(진리불공, 실지불공) |
두 번째로 신앙의 도는 타력신과 자력신을 아울러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타력신은 대상을 설정하고 나가는 것이 타력신입니다. 그리고 자력신은 내 안의 성품을 자각하는 것이 자력신입니다. 밑에는 참고하세요.
회보 55호에 나타난 대종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력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지견이 명석하야 그 신앙처의 가부와 신앙의 결과까지 확실히 알고 믿어감을 일음이요, 타력 신앙이라 하는 것은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자립적 시비 판단은 없다 할지라도 신앙 상대물의 형식을 믿거나 또는 지도자의 말을 믿음을 일음인대, 자력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믿는 바인 만큼 변동이 없는 신앙이라 할 것이나 타력 신앙은 그 형식을 믿었고 혹은 사람의 말을 믿어 그야말로 타력에 의지하는 것인 만큼 경우에 딸아서는 혹 변동될 수도 있는 신앙이다. |
세 번째는 연원 계통을 성심으로 공경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큰 스승, 그 법 그 법의 계통을 성심으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통이란 원불교 교단의 법맥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대종경 선외록에서 대종사님은 법을 맡은 사람이 나의 법 계통을 올바로 받지 아니하고 사의(私意)로 사법(私法)을 내어 교법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중근과 신앙 계통을 즉 법맥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초창 당시에 도산(道山)을 두대하는 사람들과 삼산(三山)을 두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도산은 그 사람들의 신앙 계통을 직접 나에게 대었으나 삼산은 미처 대지 못하고 이단같이 되어 장차 크게 우려되므로 내가 삼산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일이 작은 일 같으나 앞으로 큰 해독 미침이 살인 강도보다 더 클 수도 있고, 또한 삼산이 함정에 빠져버린 후에는 내가 아무리 건져주려 하여도 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고 제재하였더니, 삼산이 그 말을 두렵게 듣고 두대하는 사람들을 이해시켜 신앙 계통을 바로 잡고 공부에만 독공하더니, 결국 중근을 무난히 벗어나 참 지각을 얻었느니라. |
이게 중근기때 많이 발생하거든요. 내가 뭔가 아는 것 같고, 스승이 아는 것과 내가 아는 것이 차이가 나면 자기 나름대로의 파벌을 만드는 거죠. 그게 연원계통을 무시하고, 법맥을 끊어버리는 거죠.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얻은 경로를 돌아 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대종경 서품 2에서> |
예수의 심통제자가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 것이요 내게서도 나의 심통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대종경 전망품 14에서> |
이 두 사례가 연원계통을 잇는 사례입니다. 하나는 부처님께, 하나는 예수님께 연원계통을 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넷째는 신성을 일관하는 것이니, 그 믿음이 환경과 시일을 따라 물러나거나 끊어지지 아니하고 어떠한 어려운 경계를 당할지라도 한결 같은 신성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경에서 신성이 물러나십니까? 환경은 순경(順境) 역경(逆境) 공경(空境)이 있습니다. 그리고 왜 시일이 지나면서 신성이 끊어질까요?
정산종사님께서는 순경은 내 마음을 유혹하는 경계요, 역경은 내 마음에 거슬리는 경계요, 공경은 내 마음이 게을러진 경계니, 법강항마할 때까지는 방어에 주로 주력하고 항마 후에는 이 모든 경계를 노복처럼 부려 쓰나니라.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역경이 설산이라면 순경은 화산이라, 설산에서 죽으면 송장이라도 남지만 화산에서 죽으면 다 타서 흔적조차 없느니라.」 |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공부가 깊어질수록 역경보다 순경에 신성이 물러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역경에서는 마음이 괴로우니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들고 공부심을 챙기게 되지만 순경에서는 순경인지도 모르고 순경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명예가 돌아오거나 재산이 늘어나거나 하여 마음이 편해서 공부에 권태증이 생기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즐거움이 지속됩니다. 하지만 위태로운 행복입니다. 마음의 힘이 없다면 한 번의 역경으로 무너질 수 있으면 복이 다하면 무너질 수 있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즐거움의 상태입니다. 마음에 힘이 있다면 있어도 행복하고 없어도 행복합니다.
대산종사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역경이 올 때에는 빚을 갚을 때다. 항상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맞고 순경이 올 때에는 빚을 지는 때이니 마음에 항상 미안한 생각을 가지면 이것이 인과(因果)에 토가 떨어진 사람이며 해탈 도인이다. 불보살들은 환난(患難)을 당할 때 몇 생을 뛰어 오른다. 그리고 그 큰 힘을 쌓는다. 대종사님께서도 그리하셨고 정산종사께서는 9년간이나 병중에 계셨으나 그 기간에 삼동윤리(三同倫理)를 내놓으셨다 |
여기계신 모든 분들이 환경에 신성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신성으로 환경을 지배하는 힘 있는 공부인 되시고 관념적으로 하지 마시고 온 우주 법계 삼라만상을 신앙하세요. 시간 특정 장소에서 신앙하는 사람은 원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네 가지 신앙을 통해 원만한 신앙을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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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은혜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밀운교우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