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걸 교수의 'CRM 클리닉']
1990년대부터 시작된 기업들의 정보화 노력의 결실로 이제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기업들은 SAP나 오라클과 같은 기업 통합 정보시스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정보 인프라가 있어도 꼭 필요한 정보를 볼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여전히 기업들이 접근하기 힘든 정보 중 하나가 바로 자신들의 고객 관련 정보이다.
예를 들어 '햇반'은 CJ가 만들고 '바나나우유'는 빙그레에서 만들지만, 정작 CJ나 빙그레는 햇반과 바나나우유를 소비하는 고객 정보를 보기 힘들다. 그 정보는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대형 유통회사들의 데이터베이스 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운대' 관람객 정보는 CGV나 롯데씨네마 데이터베이스에, '난타' 고객 정보는 티켓링크나 인터파크의 예매 데이터베이스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근에는 많은 기업들이 고객관계관리(CRM) 부서를 만들고, 마일리지와 같은 회원 관리 제도를 도입해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콜센터 등 관련 IT시스템들을 도입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CRM에 투자를 한 기업들 중 많은 기업들이 아직 투자 대비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서비스회사의 경우 1000만 명이 넘는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조사해 보니 고객들의 주소, 휴대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제대로 갱신되지 못해 30% 이상의 정보가 부정확했다. 그런데도 고객들에게 매년 수백만 부의 카탈로그와 이메일·문자를 발송하다 보면 추가 매출로 인한 이익보다 비용이 더 커질 수 있다.
또한 1인당 수십만원씩의 보조금까지 주어 가면서 경쟁사 고객 빼오기 경쟁에 여념이 없는 우리나라 이동통신사들의 경우 고도의 CRM 시스템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정 기간만 지나면 대규모의 고객 이탈이 반복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영업을 지난 10년간 되풀이해 왔다.
해외 선진 유통회사의 고객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던 국내 굴지의 한 백화점 CRM 부서장은 추석 캠페인 결과가 전년 대비 겨우 1~2% 남짓한 매출 증가를 기록하자 상사로부터 "차라리 옆 부서처럼 은행잎이나 주워 고객들에게 감사 엽서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란 혹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업 고객을 주로 상대하는 B2B 기업들의 CRM 투자 결과는 어떨까? B2B 기업들의 경우 CRM 시스템을 영업사원들 대상으로 구축하기 마련인데, 최초의 CRM 구축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고객이나 자사 영업사원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회사 자체의 내부 목표(수주 증대, 영업 생산성 향상, 영업 프로세스 개선 등)에만 집중해 실제 영업에는 도움이 안 되는 무늬뿐인 CRM 시스템을 만들어 영업사원들에게 사용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영업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자신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만 활용될 시스템에 어느 영업사원이 정확한 고객 데이터를 신속하게 입력하겠는가?
지난 10년간 필자가 KAIST에서 수행했던 국내 기업들의 CRM 진단 결과를 정리하여 보면 CRM 프로젝트가 실패한 대부분의 기업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공통적으로 관찰됐다.
첫째, CRM을 '기업과 고객 간의 윈윈 파트너십 구축과 유지·발전 프로세스'로 정의하지 않고 '타깃 마케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 프로세스' 정도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즉, '기쁨 주고 사랑받는' CRM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채 '사랑만 받으려고 달려가거나' 조금 더 심한 경우는 '기쁨 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고객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까지도 서슴없이 추진하였던 것이다. 연 7.5% 확정금리 개인연금에 가입한 고객들을 변동금리 상품으로 갈아타게 하기 위해 조직적인 캠페인을 벌였던 국내 보험회사들은 수백억원대의 CRM 시스템을 가동한다 해도 결코 자사 고객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다.
둘째, CRM을 시작한 기업들치고 회사의 미션이나 핵심 가치 선언문에 '고객 만족, 고객 중 심, 고객 제일' 등 고객 관련 표어가 안 들어간 기업이 없지만, 실천은 달랐다는 점이다.
실패 기업을 보면 그러한 미션이나 핵심 가치가 CEO로부터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직 구성원들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져 매일 매일 수많은 고객 접점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실패 기업들은 CRM이라는 경기 종목의 속성을 착각했다. CRM이란 기업이 존속하는 한 지속적으로 유지·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인프라로, 육상 종목으로 본다면 마라톤에 가깝다. 그러나 많은 기업들은 6개월마다 성과를 발표하는 6시그마 프로젝트와 같이 100m 달리기 종목으로 착각했다.
향후 본 칼럼에서는 국내외 기업들이 지난 20여 년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CRM 관련 경험과 사례 및 노하우를 소개함으로써 우리 기업들이 세계 각국의 다양한 고객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돈독한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는 학습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