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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역사) 백제왕계보와 신찬성씨록
가라모리스 추천 0 조회 402 09.04.14 11:22 댓글 2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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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4.14 11:34

    첫댓글 온조왕과 다루왕의 사이의 계보를 찾는 일은 바보스런 일입니다. 온조왕 사후에 고구려와 백제는 흉노의 좌우현왕과 같은 개념으로 백제는 고구려의 분국이었습니다. 기록하지 않은 것을 굳이 찾으려하니 머리가 아픈 것이죠. 신라사초에는 백제왕의 이름이 구지왕부터 등장합니다. 다루왕,기루왕,개루왕의 흔적이 삼국사기를 통해 비추어 볼 수 있을 뿐 왕의 이름도 없는 분들입니다.

  • 작성자 09.04.14 11:47

    정성일 선생님의 생각이 잘못된것 같습니다. 백제의 분국은 온조왕-다루왕 계열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항상 추모왕을 기점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형제라 생각했다면 일례로 온조왕이나 다루왕을 기점으로 만나야합니다. 이는 중간에 왕통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온조~다루 사이에서 말이죠.

  • 작성자 09.04.14 11:49

    그래서 저는 AD.42년에 남하한 재사공주의 다루왕이 온조왕의 다른 다루왕에게 패퇴하여 망했고, AD.42년에 재사공주와 다루왕이 남하합니다.(가야의 정견모주 설화가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 작성자 09.04.14 11:49

    이비가지=온조왕, 정견모주=재사공주, 뇌질주일=온조왕의 아들 다루왕, 뇌질청예=재사공주의 아들 다루왕

  • 작성자 09.04.14 11:50

    이 설화가 후대로 오면서, 정견모주, 청예, 주일 등으로 바뀐 것이지요.

  • 09.04.14 12:11

    뇌질주일은 파사이사금기에 연대가 열나 내려갑니다. 파사 33년 158년-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가야세주 정견(正見)이 죽어 아들 주일(朱日)이 섰다. 스스로 아시금(阿豉今)이라 칭하였다.

  • 09.04.14 14:32

    유리왕의 재위는 서기18년 사망으로 끝이나고, 대무신왕은 서기28년에 즉위합니다. 가운데가 공백인데 이 부분에 온조왕이 있습니다.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를 그대로 공백으로 보라는 이야기가 이 부분에서 설명이 가능하고, 태조왕(국조왕) 궁이 성이 고씨인 연유도 이 부분에 있으며, 소노부(송양, 유리)가 계루부(온조)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여기에서 설명이 되고, 고구려가 백제의 조상국이라는 이야기도 역시 여기에서 설명이 되고, 고구려가 온조를 굳이 주몽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도 역시 여기에서 설명이 됩니다.

  • 작성자 09.04.14 14:44

    라디오님//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온조계설화에서 가야계설화로 바뀐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 작성자 09.04.14 14:46

    정성일님// 유리이후에 온조(AD.18~AD.28)가 즉위하고 무휼이 성장하여 온조가 양위하는데 백제에서는 물러난 온조를 대신해 재사공주의 아들 다루왕이 즉위한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 작성자 09.04.14 14:50

    그리고 그 재사공주의 아들 다루가 AD42년 온조의 다른 아들 다루에게 패퇴하고 남쪽의 다파라국지역으로 가서 가야를 건립하고 다파라국의 세력은 신라에 흡수되거나 규슈섬으로 내려가는 거죠.

  • 09.04.14 15:13

    선민님// 고구려사초는 읽어보셨죠. 서기42년 재사공주의 아들 다루가 남하를 하자, 대무신왕이 감군을 붙여줍니다. 대무신왕이 마루를 붙여주었을 거라 생각하시는지... 대무신왕이 원했던것은 신라와 다루군의 양패구상이기에, 다파신을 붙여줍니다. 왜냐 신라와 다파신은 본래 상극이거든요. 신라초기에 낙랑이 수시로 신라를 괴롭힙니다. 이는 고구려가 시킨일이죠. 또 왜가 수시로 쳐들어오는 것은 낙랑으로 왜가 들어왔기 때문이죠. 낙랑이나 왜나 글자만 다르지 똑같은 사주를 받고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 작성자 09.04.14 11:55

    그러면 여기서 궁금점은 석탈해는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 작성자 09.04.14 11:56

    AD.42년에 남하한 재사공주와 다루왕이 가야를 건설하는데, 이 가야의 위치가 바로 다파라국입니다. <다파라국의 영토는 현 가야 영토와 백제 남부, 그리고 규슈열도를 아우르는 지역입니다.>

  • 작성자 09.04.14 11:57

    다파라국은 한반도에서 세력을 잃고, 규슈에 야국을 건설하였고. 다파라국의 왕자 다파신이 AD.42년에 신라로 건너옵니다.

  • 작성자 09.04.14 11:58

    왜 다파신이 하필이면 신라냐, 다파신의 선조는 협보인데. 협보는 고구려에서 반란한 자요, 백제의 국모 소서노와는 철천지 원수이므로 이 둘과 역시 적대관계에 있는 신라에 망명한 것입니다.

  • 09.04.14 14:42

    일본열도의 문명은 규슈에서 시작하지 않아요. 일본 혼슈섬 정중앙에서 시작합니다. 일본의 옛수도는 나라(奈良)市인데 이름이 낙랑하고 비슷하죠. 제가 알기로는 일본학자들은 혼슈섬에서 출발하였다며, 자신의 독자문명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선민님이 옛날에 말한 사도섬에서 육지로 오면, 그곳에 신라왕의 비가 있고, 그 지역이 일본문명의 출발지입니다. 규슈라는 것은 우리끼리의 이야기이고, 일본은 혼슈지역입니다.

  • 작성자 09.04.14 14:48

    왜는 야국과 달라요. 왜는 신무계죠. 야국은 숭신계에요. 나중에 야국이 왜를 멸망시키는데 이게 응신이에요. 응신은 곧 백제태자 길수죠. 백제와 가야가 연합하면서 백제의 태자가 야국으로 건너가 응신이 되요.

  • 작성자 09.04.14 14:49

    즉 혼슈섬의 문명은=신무계(일본토착민) 규슈섬의 문명은=숭신계(고구려+낙랑+신라계열)이죠. 백제와 가야의 연합시점이 응신의 등장시점과 거의 비슷하죠.

  • 09.04.14 20:12

    신무계열은 협보의 계열이고, 후에 박씨계열로 바뀌었죠. 열도의 역사에 특이한 것은 열도와 백제가 처음으로 만난것은 왜의 신공여왕시절이고 백제의 근초고왕 시절인데도 지금의 일본은 백제를 시조국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파사의 시절에 유리왕과 아혜후의 아들 후복태자가 다파라국의 왕비의 남편으로 가죠. 후복은 신라의 전선100척을 치장하여 왜로 가는데, 아마도 이때 협보가 세운 다파국을 전복한 듯 합니다.

  • 09.04.14 20:20

    그런데 풀리지 않는 것은 연오랑이라는 인물의 출자입니다. 오랑을 다파라군으로 하였다는 기사인데, 비미호이전에 왜국에서 큰 난리가 있어 피신해 온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복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 일본서기가 불명확한 부분이 많아 판단하기 힘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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