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기독교 비판 ; 그 정당성에 대한 검토 - 문 성 학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
[한글 요약]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크게 말해서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소위 하나님의 나라 라는 것은 강자들에 대한 약자들의 원한감정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둘째로, 신이란 무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셋째로, 기독교 도덕은 노예도덕이다.
넷째로,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이란 숨겨진 허무주의의 표현이다.
다섯째로, 기독교 성직자들은 인간의 자기증오를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의지를 관철시킨다.
니체는 기독교를 전적으로 심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한다. 이 논문은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그가 의지하는 심리학의 자폐성으로 인하여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종교나 형이상학은 심리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심리학적 전제다.
그는 심리학의 한계 내에서 종교와 형이상학을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가설의 관점에서 그는 기독교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측면을 날카롭게 폭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심리학이 절대화되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주장이나 종교적 믿음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일단 인과법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의지의 자유란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리하여, 니체 심리학의 자폐성은 그 자신의 심리학적 가설을 반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해버린다. 일단 그 가설이 받아들여진 후에는, 모든 것은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며, 그 가설에 불리한 것은 의도적으로건 비의도적으로건 배제된다. 이런 식으로 니체의 심리학적 자폐성은 니체 그 자신이 끊임없이 비판했던 독단적 형이상학을 형성한다. 니체는 영원한 생성을 가정하는 독단적 형이상학의 체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I. 니체의 의문부호
무신론적 실존 사상가로 혹은 생철학자로 간주되는 니체는 1884년 10월 15일에 태어나서 1900년8월 25일에 5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생동감 넘치는 대담한 필체로 현대철학의 문을 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1900년에 죽었다는 사실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일체의 근대적인 것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명실공히 현대적인 철학의 개시자가 되었다.
현대 사상사의 흐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과장해서 말한다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철학계의 현실이지만,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때로는 예언자적 사상가로, 때로는 기독교적인 신의 살해자로, 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은밀한 신의 추구자로, 혹은 최근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정한 선구자로 이해된다. 니체에 대한 이런 다양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고대의 유산과 2천년에 걸친 크리스트교의 규정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유럽 사람들이 걸어온 길, 이 길에 붙여진 하나의 무서운 의문부호"라는 사실에 유보 없이 동의할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전 역사가 걸어온 길에 대해 커다란 의문부호를 붙이지만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정표가 아니고 폭풍이며 … 교사가 아니고 독촉자이면서 경고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상계의 이정표가, 현대철학의 현관에 서 있는 이정표가 된 것이다.
니체는 "나는 생에의 의지로부터 나의 철학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이 말은 우리가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니체 철학의 기본 개념은 생이다. 생이란 본래 성장하려는, 존속하려는, 힘을 기르려는, 권력을 확대 강화하려는 본능을 간직한 것"이다. 그러나 구라파 역사 2500년에 있어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희랍 시대를 제외하고 이 '생'이 그리고 이 생을 받쳐주고 있는 자연(대지)이 중시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철학의 역사는 삶의 전제들에 반대하는, 삶의 가치감정에 반대하는, 삶을 위해 편드는 것에 반대하는 은밀한 분노이다. 철학자들은 이 현세와는 모순되며 이 현세를 나쁘게 말할 실마리를 부여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긍정하는 데 망설이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비방을 가르치는 거대한 학교였다.
소크라테스 이후 구라파 역사는 이성의 이름으로 생을 단죄하고 억압했으며 피안의 이름으로 대지를 멸시했다. 특히 기독교는 생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를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소크라테스의 영향하에서 그 뿌리를 확고하게 내린 주지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인 사고방식은 모든 생의 근본조건인 원근법적인 것을 천박한 상대주의로 경시했다. 니체는 '생'을 부여받은 자가 생을 멸시하고,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가 대지를 저주하며, 본능에 따라 살면서 본능을 부끄러워하며, 생존을 위해서 원근법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 자가 절대적 객관성을 꿈꾸는 것은 일종의 병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생과 대지와 본능의 복권을 시도한다. 이는 곧 소크라테스 이후 구라파 역사 2500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의 임무, 인류 최고의 자기 각성의 한 순간을 준비하는 것, 인류가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아득히 바라다보며, 우연과 승려들의 지배로부터 탈출하여, 왜? 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을 최초로 전체로서 제출하는 하나의 '위대한 대낮'을 준비하는 것 …, 이 임무는, 인류가 스스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신적으로 통치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최고로 신성시된 부정에의 본능, 부패에의 본능, 데카당스에의 본능이라는 가치개념들 아래에서 유혹적으로 지배받아 왔다고 하는 통찰에서 필연적으로 생긴다.
우리는 본고에서 기독교의 규정을 받으면서 2천년에 걸쳐 이어온 서양 역사에 대해 니체가 붙인 의문 부호가 과연 정당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차라리 하나의 감탄부호 혹은 적어도 하나의 쉼표를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한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그의 비판이 자폐적 심리학에 기초해 있으며 그의 자폐적 심리학은 결국 하나의 또 다른 독단적 형이상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 예수와 기독교
니체는 기독교에 대한 전대미문의 공격을 한다. 그는 글자 그대로 기독교와 사투를 벌인다.
기독교 도덕의 비밀의 폭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대 사건, 하나의 진정한 대파국이다. 그것을 백일하에 밝혀내는 자는 정말 하나의 불가항력(force majeure)이요 하나의 운명일 것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두동강 낸다. 사람은 그 이전에 살거나, 아니면 그 이후에 산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기독교와 그 근원으로 오해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기독교의 똑바른 역사를 말하겠다. 기독교란 말부터가 하나의 오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다. 그리고 복음도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 순간 이래로 복음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벌써 그가 몸소 생활한 바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것이야말로 나쁜 소식, 즉 禍音(Dysangelium)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전도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니체가 본 예수는 어떤 유형의 인물인가? 니체는 자기 특유의 심리학적 기독론을 전개한다. 예수는 심리학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이기 위하여" 죽었다. 이것이 니체가 본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예수)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다. 다시 말해서, 재판관, 포리(捕吏:Häschern), 고소자 및 모든 종류의 중상과 조소를 앞에 둔 그의 태도, 십자가 위에서의 그의 태도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닥칠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최악의 사태를 도발하고 있다. … 그리고 그는 그에게 악행을 가한 자들과 더불어서, 그들 안에서, 기도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도는 행동하는 것이며, 하나의 다른 행동을 통해서 구별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악의를 지닌 자에 대해서 말로써나 마음에 있어서나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 이방인과 동족,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구별하지 않는 것. 그는 어떤 이에게도 화내지 않고 어떤 이도 경멸하지 않는다.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고, 또한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아내의 부정에 대한 증거가 있는 경우에도 아내와 헤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원칙이며, 모든 것은 하나의 본능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직 기독교적인 실천만이, 즉 십자가 위에서 죽은 자가 살아있었던 것과 같은 삶만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역시 그와 같은 삶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에게는 불가결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는 어느 세상에서나 가능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과 영혼불멸과 부활과 천당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아 생전에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는 "스스로 천국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스스로를 영원이라고 느끼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반면에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천국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가 없다 ― 에 대한 깊은 본능"을 소유한 인물이다. 니체는 예수가 체험하고 말한 축복을 하나의 심리학적 현실로 설명하고 있다.
천국이란 마음의 한 상태이다. 그것은 '이승을 넘어서' 있는, 혹은 '죽음 뒤에' 오는 그 무엇이 아니다. … 천국에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것은 천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하는 하나의 경험인 것이다. 그것은 도처에 있으면서 또한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면 복음서에 등장하는 '죄', '천국', '영생', '성령', '회개'니 하는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에 의하면 이 모든 것들은 축복과 구원의 심리학적 현실을 전달하기 위한 기호에 불과한 것들이다.
야스퍼스는 니체의 예수가 말하는 축복 받은 자의 특징을 다음처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축복 받은 자의 행위의 근본적인 특징은, 외부 세계를 무시해버리고 외부 세계에 관해서 마음의 동요 없이 통과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사실은 첫째로 어떠한 경우에도 반항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긍정하고 있다. 이런 태도를 예수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인간이 외부 세계에 대해서 차별을 두고 교섭을 한다고 하는 관련이 무너져서 통상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이 불명확한 상징이 되고, 이 상징을 빌어서 본래의 현실인 축복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니체가 해석한 예수의 본래 목적이므로, 예수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하다. 예수는 모든 종교, 예배상의 모든 개념, 모든 역사, 모든 서적에 대해서 무지하다. 예수는 문화를 모른다. 니체의 예수는 외부 세계를 부정할 만한 이유를 한번도 느낀 적이 없다. 이미 대립이 없기 때문에 죄와 벌이라는 개념도 없다. 셋째로 부정될 현실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사고 체계에서는 죽음도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니체의 예수'와 같은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니체가 {안티크리스트} 30절에서 제시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야스퍼스는 다음처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어떠한 접촉도 지나치게 심각하게 느끼기 때문에 접촉되는 것을 더욱 꺼린다고 하는, 괴로움 및 자극에 대한 극도의 감수성은 현실을 현실로서 본능적으로 증오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항하는 것을 거의 견딜 수 없는 불쾌로서 느끼고, 오로지 반항하지 않는다고 하는 점에서만 축복(즉 쾌감)을 인정한다고 하는, 괴로움 및 자극에 대한 극도의 감수성은 모든 혐오감, 모든 적의를 본능적으로 물리친다. 남는 것은 오직 유일한 최후의 가능성으로서의 사랑이다.
니체가 가혹하게 공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하는 예수의 이런 복음을 화음으로 바꾼 장본인은 바울이다. 니체에 의하면, 바울은 증오의 화신이요 환각의 천재다. 예수는 신과 인간의 간격을 제거하고 신인 합일의 내면적 생을 자신의 복음으로서 최후까지 실천하였는데, 바울은 십자가 위의 희생이란 관념을 삽입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간격을 넓히고 그 중간에다가 원죄, 심판, 부활 그리고 신앙에 의한 구원 등등의 여러가지 환상을 개입시켰다. 이리하여 바울은 생의 의미를 사후로, 피안으로, 배후세계로 옮겨 놓았다. 예수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현실의 내면적 생의 긍정 대신에, 피안을 신앙하는 자학의 체계가 등장한다. 생의 중심이 생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안의 무 속에 놓이게 된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에 의하면 바울은 "최초의 기독교도", 혹은 "기독교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니체는 바울에 의해 예수의 본래적 가르침이 다음처럼 왜곡된다고 생각한다.
1. '참된 삶'과 '거짓된 삶'이라는 대립은, '차안의 삶'과 '피안의 삶'으로 오해되었다. 2. 덧없는 개인적 삶과 대립되는 '영원한 삶'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불멸'로 오해되었다. 3. 헤브라이적 아라비아적 습관으로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형제가 되는 것은 '화체의 비적, Wunder der Transsubstantiation으로 오해되었다.
4. '부활'은 '참된 삶'으로 들어가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일은 사후 어느 때엔가는 들어가게 될 역사적인 뜻밖의 사건이 되었다.
5.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자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생명 관계였거니와, 이는 '신성의 제2격'이 되어, 모든 인간 ― 가장 비열한 자를 포함하여 ― 의 하나님에 대한 아들의 관계, 바로 이것을 제거하였다.
6. 신앙에 의한 구원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방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가르쳐진 삶의 실천 이외에는 달리 없다는 것은 무언가 불가사의한 속죄 ― 이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 성취된다 ― 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앙으로 뒤바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바울 신학의 지배하에 놓인 현재의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사실상 기독교도라는 것은 전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도' 즉 이 천년 동안 기독교도로 불리어졌던 것은 단지 하나의 심리학적 자기 오해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야말로 정확하게 예수가 그것에 반대하여 설교했던 것이며, 그것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그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 바로 그것이다. 바울의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전도시켰다. 니체가 보기에 바울 신학은 복수와 보복의 동기에 인도되어 예수를 해석한 결과물이다.
예수는, 니체가 생각하는 바로는 기독교를 낳은 근원이 아니고, 기독교에 의해서 이용되는 여러가지 수단 중의 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가 표시한 진리는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전도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 최초의 진리에 배반하여 그 진리가 점차 상실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전혀 예수와는 별개의 근원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바울 신학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현재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유태교적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의 기독교는 그 반유태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최후의 유태적 귀결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이 설교하는 기독교의 이상은 철두철미 빈혈증적이고 반자연적 이상이다. 빈혈증적 이상이란 세계를 공허하고 창백한 것으로 보고 그 정신화와 감각초월을 완전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반자연적 이상이란 세계를 모순되고 추악한 것으로 보는 입장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이하에서 유태교 최후의 귀결로서의 바울의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고찰하고자 한다.
III. 니체의 심리학적 기독교 비판
① 증오에의 의지로서의 기독교 천국
니체는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증오의 종교임을 밝히기 위해 좋음(優)과 나쁨(劣)의 계보학적 기원에 대해 고찰한다.
어원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양한 언어로 표현된 '좋음'(Guten)이란 단어가 본래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은 내가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시사점을 주었다. 나는 여러 표현들이 동일한 개념의 변형에 귀착됨을 발견하였다. 즉 어느 언어에 있어서나 신분적인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이며, 여기에서부터 '귀족적 영혼의', '고귀한', '고결한 영혼의', '특권을 지닌 영혼의' 등의 의미로서의 '좋음'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 발전과 항상 평행하여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발전에서는 '비속한', '평민적인', '저급한' 등이 결국에는 '나쁨'이란 개념으로 바꾸어진다. …… 도덕계보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점은 나에게 하나의 본질적인 통찰로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은 잘 이해될 수 있다.
'좋은'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는 사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판단은 '좋은 것' 그 자체로부터 즉 고귀한 사람들, 강력한 사람들, 높은 지위의 사람과 고매한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 이들은 모든 저급한 자, 야비한 자, 저속한 자, 하층 계급의 인물들과 자신들을 대비하면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행위를 좋은 것으로 달리 말해서 일급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한다.
선(Gut)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그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을 말한다. 악(Schlecht)이란 무엇인가? 약함에서 유래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힘이 증가되고 있는 감정, 저항이 극복되고 있다는 감정을 말한다.
니체는 강자들, 힘이 있는 자들, 요컨대 '좋은' 사람들 위주의 이런 평가양식을 "기사적 귀족적 평가 양식"으로 부르고 약자들, 범속자들 즉 '나쁜' 사람들 위주의 평가 양식을 "성직자적 평가 양식"으로 부른다. 기사적, 귀족적 가치판단은 강한 육체, 혈기 왕성하고 넘치는 건강, 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전쟁, 모험, 사냥, 춤, 격투경기, 그리고 일반적으로 강하고 자유롭고 쾌활한 행동에 속하는 모든 것을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서 성직자적인 고귀한 평가양식은 ……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니체가 옹호하고 있는 귀족적 평가 양식은 일종의 힘의 윤리로서, 힘센 자가 선하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람들이 흔히 도덕적인 대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순수'와 '불순'의 대립도 처음에는 단지 신분적 차별의 표시로서 대립했을 뿐이다.
'순수한 자'란 처음에는 단지 몸을 씻는 자, 피부병을 유발시키는 어떤 음식을 멀리하는 자, 하류 계층의 불결한 여자와는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자, 피를 혐오하는 자를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 이상의 그 무엇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강한 것이 악이 되고 약한 것이 선이 되는 도덕상의 반란이 유태인에 의해 발생했다.
이 지상에서 '고귀한 자', '강력한 자', '지배자', '권력자'에 대항해서 행해진 모든 것조차도 저 성직자적 민족인 유태인들, 그들의 적과 정복자에 대항하는 데 있어 궁극적의로 적의 모든 가치를 轉到하는 것, 즉 가장 정신적인 복수행위만으로 만족했었던 유태인들이 이들에 대항하여 행했던 것에 비하면 말할 가치조차 없다. …… 유태인이야말로 끔찍스런 논리로 그리고 가장 깊은 증오(약함의 증오)의 이빨로 감히 귀족적인 가치등식( 좋은 = 고귀한 = 강력한 = 아름다운 = 신에게 사랑받는)과 정반대의 가치등식을 즉 "불쌍한 자만이 선한 자이고, 가난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만이 선한 자이며, 괴로워하는 자, 궁핍한 자, 병자, 추한 자만이 경건한 자이며, 신의 축복을 받는 자이며, 지복은 오직 그대들에게만 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너희 고귀한 자, 강력한 자는 영원히 악한 자, 잔인한 자, 탐욕스러운 자, 음란한 자, 탐욕스러운 자, 신을 모르는 자다. 또한 너희는 영원히 축복받지 못하는 자, 저주받을 자, 멸망할 자이니라!"라는 등식을 제출했다.
약자들은 <우리는 악인과는 다른 것, 즉 선인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선인이란 모름지기 억압하지 않는 자,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신에게 복수를 맏기는 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기며 사는 자, 우리처럼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이 적은 자, 그리고 우리처럼 인내심이 강하고 겸손하며 공정한 자인 것이다>라고 무력감에서 생긴 복수심 서린 간계로 서로를 일깨운다. 유태인이 일으킨 도덕상의 노예반란은 이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반란은 기이하게도 계속적으로 성공했다. 그들은 약자들의 약함 그 자체는 그들의 본질이요 행동이며 피할 수 없고 제거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그들 자신의 수양에 의해 의도되고 선택된 자질이요 소양이요 공적인 것처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사람들은 보복하지 않는 무력을 선량으로, 겁 많은 비열을 겸허로, 증오를 품는 상대에 대한 복종을 순종으로 약자로서의 비공격성과 약자들에게 풍부한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문전에서 서성거리며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것을 인내로, 복수할 수 없는 무력이 복수하지 않는 관용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그 출발에 있어서 약자들의 종교다. 약자들은 강자들에게 멸시받고 구박받음으로써 강자들에게 원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들은 언젠가는 강자들에게 복수하기를 염원한다. '두고 보자'는 원한이 약자들의 무의식에 누적된다. 힘이 있는 자는 '나중에 보자'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보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권한이다. 약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두고 보자'라고 한다. 그러나 약자들은 죽을 때까지 '두고 보자'를 실행하지 못한다.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지만, 약자들에게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소원을 죽음 너머로 연기시킨다. 이승에서 강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약자들은 그 복수를 저승으로 넘긴다. 이렇게 해서 약자들은 천국을 창조하는 것이다. 약자들이 발명해낸 천국에서는 '힘이 있음'이 죄악으로 규정된다.
단테가 경외심을 일으키는 천재성을 갖고서 그의 지옥의 문 위에다 <나까지도 영원한 사랑이 창조하였나니>라는 銘文을 걸었던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과오를 범한 것으로 생각된다. … 오히려 기독교의 천국과 그 <영원한 축복>의 문 위에다 <나까지도 영원한 증오가 창조하였나니>라는 명문을 걸어두는 것이 훨씬 옳았을 것이다.
니체는 천국이 원한감정에 의해 만들어 졌음을 성 아퀴나스의 말을 인용해서 주장한다. "위대한 교사이며 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명을 들어 두는 것이 좋다. '천국에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은'라고 말하면서 그는 어린 양처럼 부드럽게 말한다.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그것으로 해서 자신의 축복을 더 기쁘게 여기리라>" 테르툴리아누스 역시 세계 심판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날이 오면 또 다른 구경거리가 있다. 그것은 저 최후의, 그리고 영원의 심판의 날, 이교도들이 예기치 않게도 자신들이 웃음거리가 됨을 보게 될 그날에는 그처럼 낡은 오래된 세계와 그 세계의 수많은 소산이 송두리째 하나의 거대한 불길 속에서 타버리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얼마나 광대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지겠는가! 얼마나 탄복할 것인가?! 얼마나 웃어야 할 것인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얼마나 의기양양해서 춤출 것인가!" 그러나 이 얼마나 엄청난 원한감정인가.
유태인의 증오 ― 가장 깊고 가장 숭고한, 다시 말해서 이상을 창조하고 가치를 전도시키는 증오, 지상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증오 ― 의 나무 줄기에서부터 마찬가지로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하나의 새로운 사랑이,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깊고 가장 숭고한 사랑이 자라났던 것이다. 다른 어떤 줄기에서 그것이 자라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랑이 본래적으로 저 복수에의 열망을 부정하는 어떤 것으로, 유태적 증오심의 정반대물로서 생겨났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진실은 그 정반대인 것이다!
② 무에의 의지로서의 기독교 신
포이어바흐는 신이란 인간이 자신의 소원과 이상을 객관세계에 투사하여, 그것이 마치 독립된 실재인 것처럼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다"는 유명한 말을 한다. 그에 있어서 신은 허구일 뿐이다. 니체는 인간이 신을 발명하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을 더 철저하게 분석하여, 결국 신에의 의지란 생부정의 의지요 (허)무에의 의지임을 밝히려 한다. {권력에의 의지}에서 니체는 다음처럼 말한다.
우리가 현실의 사물과 상상된 사물에 대해서 빌려준 모든 미와 장엄은 인간 자신의 재산이며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변호로서 되돌려 받기를 요구한다. 시인으로서의, 사상가로서의, 신으로서의, 사랑으로서의, 권력으로서의 인간 ― 오오 그가 자기 스스로를 가난하게 하고 또 자기 자신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온갖 소유를 施與했을 때의 왕자다운 아낌없음이여! 그가 찬미하고 예배했던 것 또 그가 찬미하는 바로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의 가장 큰 無私함이었다.
포이어바흐도 "신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빈곤하게 되어야 하며, 신이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떤 심리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신에게 넘겨주고 자신에게는 보잘것 없는 것만을 남겨 두는가? 강렬한 생의 고조에서 경험하는 권력의 감정은 그것이 뜻밖에 나타나 인간을 압도할 때,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의혹을 느낀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나같은 인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이리하여 그는 하나의 '보다 더 강한 인격'을, 하나의 '신성한 자'를 가정하게 된다. 그리고는 인간은 원래 자신의 것인 것들을 신의 탓으로 돌린다.
권력의 감정은, 그것이 갑작스레 압도적으로 인간을 덮칠 때는 ― 그리고 모든 엄청난 감정의 경우는 이러하거니와 ― 스스로의 인격에 대해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자신이 이 놀라운 감정의 원인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으며, 이리하여 그는 이런 경우를 위해 어떤 더욱 강한 인격을, 어떤 신성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감정이 극단적으로 솟구쳐 올라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저질렀을 때, 흔히 "그 때 나는 뭔가에 씌였다"고 말하곤 한다. 자신의 행위를 자기가 아닌 존재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끌어들여 설명하려는 이런 태도에서 니체는 종교가 발생하는 최초의 싹을 본다.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소위 '피타고라스 정리'를 발견했을 때, 그 발견의 모든 공로를 신에게 돌렸으며, 감사의 마음으로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영리하고 강하고 생기에 넘치는 종족이나 인간은 종교나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신에 대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신은 생의 충실에 대한 감사의 감정에서 신을 신앙하는 것이기에, 이 경우에는 신이 행복과 향상의 상징으로서 자기 속에 반영되며, 자신의 생이 신과 융합됨을 느끼게 되며 생을 극도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약자들, 인격 분열자들, 불합리한 생성이 지배하는 삶을 삶으로 직시하고 받아들일 용기를 결한 자들이 상상 속에서 날조한 허구들로서의 신은 인간 위에 군림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으로 표상되므로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생을 약화시키고 부정한다. 종교의 기원, 신의 기원에 대한 니체의 심리학적 설명에 따르면, 종교니 신이니 하는 것은 결국 인격의 통일에 대한 의혹의 소산이요 인격의 분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위대하고 강건한 것을 존재하지도 않는 초인간적인 것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 그것에 귀속시킴으로써 인간에게는 보잘것 없는 것, 왜소하고 빈약한 것만을 남겨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전자를 신이라 칭하고 후자를 인간적인 것이라 칭한다.
니체는 신을 도덕적 신(심판의 신, 정의의 신)과 창조의 신(최고 실재로서의 신)으로 나누어 심리학적 분석을 가한다. 도덕적 신 관념의 기원은 다음처럼 설명된다. 태고의 종족은 그 존립을 조상의 희생과 노력에 힘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부채를 희생과 노력을 통해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채권자로서의 조상과 그 권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에 대한 채무의 의식은, 이 논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 종족의 권력 자체가 증대함에 비례하여 증대하고, 상상력에 의해 증대하는 두려움이 마침내 가장 강대한 권력을 가진 종족의 조상을 신으로 만든다. 이 신은 상벌의 신이요 심판의 주제요 정의의 신이다. 창조의 신은 다음처럼 설명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여 의지가 행위의 원인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 의지는 동기의 결과이며 동기는 궁극적으로 자아 혹은 주관에 인과율적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견해에 의하면 이는 허구적 인과율이다. 원인으로서의 자아니 원인으로서의 의지니 하는 것들은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본원적 생의 과정뿐이라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시 이 '내면적 사실' 즉 자아니 의지니 하는 것들이 행동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외부세계에다 투사하여 세계를 하나의 신성한 절대적 의지가 만들어낸 세계로서, 하나의 절대적 의지가 원인이 되어 만든 세계로서 간주한다. 즉 세계의 모든 생기의 배후에 하나의 행위자로서의 주체를 설정하는 심리과정이 창조자로서의 신의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無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신에의 의지는 곧 무 즉 허무에의 의지요, 따라서 기독교는 자각되지 않은 허무주의요 은밀한 허무주의며, 허무를 직시하지 못하는 비겁한 허무주의다.
③ 노예에의 의지로서의 기독교 도덕
기독교는 약자들의 종교다. 유태적-기독교적 종교가 보호하려고 했던 인간들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인 삶의 실패자들 혹은 부적응자들이다. 그들 약자들에게 있어서 선이란 것은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모든 것이다. 동정, 자비의 손길, 온정, 인내, 근면, 사랑, 친절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덕목들은 보편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선인 것들이 아니라 축군의 존립과 요구를 위해서 선인 것들이다. 그것들은 강자들에게 유리한 덕목들은 아니다.
니체는 도덕을 주인도덕(Herrenmoral)과 노예도덕(Sklavenmoral)으로 구분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인도덕은 기사적 귀족적 평가양식에 근거한다면, 노예도덕은 성직자적 평가양식과 연결된다. 귀족도덕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주인도덕은 생을 긍정하고 권력에의 의지를 강화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을 예찬한다. 예컨대 자긍심, 강함, 진취성, 도전, 등등이다. 니체는 문헌학자 답게 선의 어원학적 의미는 강함이며 악의 어원학적 의미는 약함임을 밝히고 있음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러나 畜郡도덕으로 불리기도 하는 노예도덕은 자긍심보다는 겸손을, 강함보다는 약함을, 진취성에 수반되는 불안정보다는 평온함을, 도전적 성품보다는 순종을 중시한다. 강자들에게 멸시받는 약자들은 그들은 무리지어 스스로에게 말한다. <우리끼리는 서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친절하자>. 무엇을 위하여? 물론 강자들을 뒤집어 버리기 위해서. 즉 원한 감정의 충족을 위해서인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축군도덕에는 1. 강대자 독립자에 대한 축군적 원한본능, 2. 행복자에 대한 고난자 실패자의 원망본능, 3. 비범자에 대한 범속자의 본능이 숨어 있다. 축군들은 그들의 이러한 불순한 본능을 이타주의니 평등주의니 동정이니 하는 말들로 포장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축군들의 원한 감정의 표현일 뿐이다. 이타주의는 자기를 위하기보다는 타인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 교설로,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평등주의는 인간의 왜소화 평균화를 초래하며, 동정이란 삶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마취제요 독약이다. 니체는 유럽 전체가 예수 주위에 운집했던 불쌍한 소규모 유랑집단의 도덕에 종속하게 된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물론 니체는 기독교의 영적 인간들이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제공함으로써 유럽에 어느 정도 가치 있는 기여를 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유럽인의 왜소화와 평균화"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고 생각한다. 초인의 도래를 위해 니체는 말한다.
약자와 장애자는 멸망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인간애의 첫 번째 명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멸망하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④ 숨겨진 허무주의로서의 기독교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앞서 1882년에 출간한 {즐거운 학문}에서 이미 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근세 최대의 사건, 신이 죽었다는 것은 기독교의 신에 대한 신앙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되게 되었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지금껏 사람들은 신에 대한 신앙이란 곧 무에 대한 신앙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지가 제공하는 평안함 속에 몸을 맡기고 살아 왔다. 그들은 말하자면 비자각적 허무주의자였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줄기차게 진행되어온 과학의 발전은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신의 죽음의 사건은 근대 과학적 세계관의 논리적 귀결이다. 신의 죽음은 이제 플라톤적 기독교적 형이상학 및 도덕의 전 체계가 붕괴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이제 허무를 자각하고 직시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했다.
일찍이는 신을 모독함이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 모독자도 죽었다.
그러면 허무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 가치가 그 가치를 상실해버리는 것, 표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무엇을 위해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허무주의의 원인을 심리학적으로 다음처럼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한다.
첫째는 우리가 모든 사건 가운데서 실제로는 그 속에 있지도 않은 어떤 의미를 탐구할 때에 허무주의가 발생한다. 이 경우 허무주의는 장기간에 걸쳐 힘을 낭비했다는 의식이요, 헛수고를 했다는 고통의 의식이 수반된다. 예컨대 도덕적 세계질서가 있다고 믿는 자는 이런 허무적 심리상태에 빠지게 된다. 둘째로는 모든 사건 가운데서, 또한 모든 사건 하에서, 어떤 전체성이나 체계성이나 조직화가 기초를 놓았을 때에 허무주의가 발생한다. 경탄이나 외경을 갈망하는 영혼은 어떤 최고의 지배, 통치형태라는 총체적인 사고에 도취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결과 인간은 그 자신보다 무한히 탁월한 전체자와 상관하고 의존해 있다는 깊은 감정에 빠지게 되며, 신의 한 양태가 된다. 세 번째로, 허무주의 최후의 형식으로서 생성이 지배하는 전 세계를 미망으로 판결하여, 이 존재의 피안에 있는 하나의 세계를 참 세계로 날조할 때, 허무주의가 발생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세계를 조립한 것은 심리학적 욕구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그렇게 할 권리를 전혀 갖고 있지는 않다고 깨닫건 못 깨닫건 허무주의의 최후의 형식이 생겨난다.
니체는 일종의 범허무주의론을 제창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는 허무로부터의 탈출은 원천 봉쇄되어 있다. 단지 삶의 허무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째로 삶의 실상은 허무인데,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종교적 신앙이나 형이상학적 체계에 자신을 의탁하여 무지의 평안함을 누리는 허무주의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허무주의를 무자각적 허무주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무자각적 허무주의자의 무의식 속에는 삶의 허무한 실상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은밀한 욕구가 숨어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비겁한 허무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삶의 강자만이 살아남는 냉엄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음으로써 날조된 관념계의 환상 속에서 심리적으로 자기 기만적인 평온과 만족을 누린다.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던 꿩이 짚단에 머리를 처박은 상태에서 안도의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다. 니체는 이런 허무주의를 '수동적 허무주의'(passive Nihilismus)로 명명한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약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으로 허무의 현실을 직시하기를 꺼린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타당하였으나 이미 그 무근거성이 폭로된 가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다만 삶의 安穩을 위해 사용한다. 이는 정신의 힘이 쇠퇴하는 징후를 보인다. 둘째로 삶의 허무를 인식하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자포자기적 허무주의를 특별히 자기 식으로 명명하지는 않는다. 셋째로 허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직시하면서 허무를 환상으로 치장하지 아니하고 허무로 받아들이면서 용감하게 살아가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니체가 '능동적 허무주의'(aktiver Nihilismus)로 부르고 있는 이 허무주의자는 정신의 힘이 상승하는 징후를 보인다. 능동적 허무주의는자는 용감한 허무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은밀한 허무주의로서의 기독교, 생에 대한 크나 큰 적대자로서의 기독교를 니체는 다음처럼 고발한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도덕이건 종교이건, 현실의 어떠한 점과도 접촉을 하지 않는다. 아주 공상적인 원인(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혹은 부자유한 의지)과 아주 공상적인 결과(죄, 구원, 은총, 벌, 죄사함)만이 있을 뿐이다. 공상적인 존재(신, 정신, 영혼) 사이의 교통. 자연적 원인이라는 개념이 아주 결핍되어 있는 공상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자연과학. 도덕적 종교적 특질을 가진 기호 언어인 회개, 양심의 가책, 악마의 유혹, 신의 접근 같은 것들의 도움을 받아 쾌 불쾌의 일반적 감정을, 예컨대 교감신경의 상태를 스스로 오해하여 해석하는 공상적인 심리학. 공상적인 목적론(신의 나라, 최후의 심판, 영생) ― 이런 순수한 허구의 세계가 꿈의 세계와 구별되는 점이란 후자가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있음에 반해서 전자는 현실세계를 왜곡하고, 그 가치를 더럽히고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⑤ 자기증오의 조장자로서의 기독교 승려
사람들은 흔히 양심의 가책은 인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신의 음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양심이란 것의 20%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20%는 종교적인 거리낌에서, 20%는 선입관에서 오는 공포에서, 20%는 허영심에서 생기는 꺼림직함에서, 나머지 20%는 관습상의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면서 양심의 선천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 니체는 양심의 선천성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억측적인 비판과는 달리 흔히들 신의 음성과 결부시키는 '나쁜 양심'(schlechtes Gewissen)의 기원 그 자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낸다. 그는 놀랍게도 다음처럼 말한다.
도대체 자기의 양심에다 '나쁜 양심'이란 것을 발명해 낸 자는 누구인가. 바로 원한의 인간이다!
기독교 승려야말로 나쁜 양심의 발명자들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물론 '승려들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그 답이다.
승려들은 그들이 인간의 최고의 유형으로서 통용된다는 것, 그들이 지배한다는 것, 권력자까지도 지배한다는 것, 그들이 신성불가침의 존재라는 것, 공격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들이 사회에 있어서의 최강의 권력이며, 절대로 대체될 수 없고 경멸 당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관철시키려 한다.
그러면 '나쁜 양심'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양심이 발명된 심리학적 메커니즘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승려들이 그들의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기능 하는가? 그리고 양심의 가책은 왜 자기증오에의 의지가 되는가? 인간은 본래 건강한 본능적 공격성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노예도덕에서는 인간의 공격성은 경원시된다. 그것은 평화와 질서의 적이며,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노예도덕가들은 인간의 건강한 본능적 공격성을 죄로 규정한다. 그러나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내부로 향한다" 이리하여 자기 외부를 향해 발산되어야 할 인간의 본능적 공격성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바로 이것이 나쁜 양심의 기원이다.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항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구축해 놓은 저 끔찍한 방벽 ― 무엇보다도 형벌은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지만 ― 은 야성적이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이 인간 자신에게 대항하도록 만들었다. 적대감, 잔인성, 박해와 습격의 쾌감, 변화와 파괴의 쾌감, 이 모든 것이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쁜 양심'의 기원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인 양심의 가책은 인간을 그의 동물적 과거로부터 억지로 떼어낸 결과로 생긴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외부를 향하는 공격성을 느낄 때마다, '남을 공격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하면서 자신을 책망하고 욕하고 채찍질하고 물어 뜯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외부로 향해야 할 자신의 공격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공격성을 바깥으로 발산할 수 없게 된 인간은 그렇게라도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런 자기 공격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내면화된 죄의식인 나쁜 양심의 가책은 마치 인간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신의 음성으로 착각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드디어 자신의 본성을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공격에는 공격의 쾌감이 수반되는 데, 자신의 본능적 공격성 그 자체를 공격하면서도 인간은 쾌감을 느낀다. 즉 자신의 본능적 공격성을 잠재웠다는 사실에서, 자신은 자기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신의 음성에 따랐다는 점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양심의 가책은 도덕성의 징표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학대와 자기증오의 표식이며, 양심에 따르는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쾌감이란 자기학대를 통해 얻는 새디스트적인 쾌감, 즉 병적인 쾌감인 것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도덕의 엄청난 협소함과 규칙성 속에 강제로 밀쳐 넣어진 인간은 참을 길이 없어 자기 자신을 찢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길들이기 위해 설치한 울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혀 상처 투성이가 된 이 동물, 황야에의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 고문대와, 위험한 황야에 몸을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궁핍한 동물, 이 바보, 그리움에 지치고 절망해버린 이 죄수야말로 '나쁜 양심'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양심의 가책을 인간의 선천적 본능으로 오해하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축군들은 도덕상의 노예반란은 승리를 굳힐 수 있었다. 기독교적 양심의 가책에서 부터 동정, 자비, 친절, 인내, 자기희생, 자기부정 등등의 축군도덕들의 덕목들이 도출될 수 있었다. 병든 양심이야말로 모든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를 위한 전제"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왜 나쁜 양심이 승려들의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기능 하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노예도덕은 원래 자연적 건강성의 징표인 인간의 공격본능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죄의식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었다. 강자들에 대한 원한 감정에서 만들어진 노예도덕은 이 지상에서 강한 자는 악한 자이고 약한 자는 선한 자라는 도덕공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선한 자인 약한 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강한 자를 대적할 수 없으므로, 강한 자 즉 악한 자를 벌하는 신이라는 허구를 만든다. 신은 남을 공격하는 자를 영원한 불로써 심판한다는 협박이 효력을 가지려면, 보편적인 죄의식(양심의 가책)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 승려들은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공격성을 보편적인 죄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들은 모든 인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다. 기독교 승려들의 영토는 죄의식이 있는 모든 곳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은 죄인임을 설교한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피안과 무의 다른 이름인 벌하는 신이라는 허구에 의지하여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대 강화해 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니까.
IV.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정당한가?
니체는 {반기독자}(Der Antichrist)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기독교에 대한 이 영원한 탄핵을 모든 벽에다, 벽이 있는 곳에는 어느 곳에나 써 붙이고자 한다. 나는 장님마저도 볼 수 있는 글자를 갖고 있다. 나는 기독교를 하나의 커다란 저주라고 부른다. 가장 커다란 하나의 내면적인 부패라 부른다. …… 나는 그것을 하나의 영원한 인류의 오점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숙명이 비롯된 그 흉일을 기점으로 하여, 기독교의 첫날을 기점으로 하여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왜 오히려 기독교 최후의 날을 기점으로 하여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가? 바로 오늘을 기점으로 하여? -- 모든 가치의 가치전환!
이로써 나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며, 나는 나의 판단을 내린다. 나는 기독교에 유죄를 판결한다. 나는 기독교에 대해서 일찍이 탄핵자가 말한 모든 탄핵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탄핵을 한다. 기독교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패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부패된 것이며, 가능한 마지막까지 부패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기독교는 부패에 저촉시키지 않고서는 무엇이나 그냥 두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모든 진리를 허위로, 모든 성실을 영혼의 비열로 만들었다. 그래도 역시 나에게 기독교의 '인도주의적' 축복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히 말해 보려무나!
우리는 이제 '감히' 기독교를 변호해보고자 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나의 저서에 있어서는 비할 바 없는 한 사람의 심리학자가 말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좋은 독자들이라면 도달하는 아마도 최초의 통찰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비판 역시 심리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 스스로 공언하기도 한다. 그는 세개의 논문으로 구성된 책인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에 대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다음처럼 자평한다.
첫째 논문의 진리는 기독교의 심리학이다.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듯이 '정신'에서 탄생되지 않았고 원한의 정신에서 탄생하였다는 것.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반동이며, 여러가지 고귀한 가치의 지배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라는 것.
니체에 대한 우리들의 비판은 심리학을 절대시하는 그의 심리주의를 겨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위대한 심리학자 니체에게 '심리학이 전부가 아니다'는 말부터 해두고자 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원한의 종교라고 생각해서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인간이 복수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최상의 희망으로 가는 가교이며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다"고 말한다. 또 "그대들 나의 친구들이여, 마음 속에 남을 처벌하려는 강한 충동을 가진 모든 자들을 신뢰하지 말라"고, 그리고 또한 "그러나 만약 당신에게 적이 있다면, 그에게 악을 선으로로 갚지 말라. 그것은 그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대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했음을 증명하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물론 복수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사랑으로 위장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기독교인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랑의 행위가 숨겨진 복수심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복수심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복수심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니체처럼 심리학에 의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게서 보듯이 그는 복수심에서 해방되기 위해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니체의 심리주의가 니체 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니체의 말대로 우리가 우리의 적에 대해 은혜를 베푸는 것은 적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수치스럽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화를 내라. 그리고 만약 당신이 저주를 받을 때 그를 축복하는 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함께 저주하라.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는 약간이라도 복수하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다.
은혜를 베풀면서 은밀한 우월감을 느끼는 자는, 자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적의 자존심을 짓밟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적과 자신을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서 적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는, 적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적과 나를 하나로 만들기에 ― 그의 은혜는 적의 반발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우리가 삶에서 이런 진정한 사랑과 같은 것, 심리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 심리학을 넘어서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으로 복수심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심리학자 니체는 심리학을 넘어서는 것을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입장에 숨어 있는 심리학적 동기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형이상학의 심리학에 대해서. 이 세계는 가상이다. 따라서 어떤 참된 세계가 존재한다. 이 세계는 제약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무제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이 세계는 모순에 가득차 있다. 따라서 어떤 모순이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이 세계는 계속 생성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 이들 추론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 (중략) … 고뇌가 이러한 추론을 행하도록 고취시킨다. 즉 근본에 있어서 그것은 그러한 세계가 있다면 좋겠다 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이런 자폐적 심리학이야말로 삶의 독약인 것이다. 예수에 대한 니체의 심리학적 분석도 이런 자폐적 심리학의 전형적인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영미문화권에 니체의 수많은 저술들을 번역 소개하였으며, 그 자신 탁월한 니체 연구가이며, 니체 숭배가인 월터 카우프만조차도 바울과 예수에 대한 니체의 심리학적 분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니체의 {반기독자}에서의 예수에 관한 '정신사학적 연구'(psychohistorical study) ― 비록 이것은 {서광}에서의 바울에 관한 절보다도 훨씬 더 길지만 ― 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심리학적 설명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상징해주는 말로서 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이나 종교를 단지 자연에 대한 공포심 혹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 혹은 조상에 대한 채무 의식에서, 혹은 인격의 분열에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심리학의 월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니체의 심리학적 월권은 그의 형이상학적 태만으로 이어진다.
무신론은 그(니체)에게는 자명한 사항이다. 단 일순간이라도 무신론에 회의를 거는 따위의 일은 그에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그는 종교를 못보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혹자는 니체가 '춤추는 신'에 대해 언급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를 무신론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마르크스가 '정신'이란 개념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설령 신에 대해 언급했다 하더라도, 그에 있어서 신이란 생을 초월하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단지 생에 의해, 생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는 철두철미 심리학자로서 종교와 철학을 이해했다. 그는 '심리학의 한계 내에서' 종교와 신과 형이상학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이겐 핑크는 이에 대해 다음처럼 적절한 비평을 한다.
그의 비판이 깔고 있는 기초적인 전제, 즉 그의 독단적인 무신론, 신의 죽음이란 그의 확신이 정밀하게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전제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모든 종교는 가장된 생의 경향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종교가 제시하는 생존을 위한 이상을 권력에의 의지를 척도로해서 비판한다 할지라도, 대체로 종교를 비판한 것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니체는 "하나의 개념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단 하나의 현실을 설정해 보라. 그러면 기독교 전체는 무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만약 삶의 중심을 삶 속에다 두지 않고, 오히려 피안 즉 무 속에다 잘못 옮겨 놓으면, 그것은 결국 삶에서 중심을 제거시키는 것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에게 <하나의 현실 즉 가상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신을 설정해 보려무나, 그러면 니체 철학 전체는 무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 니체는 "순수한 정신이란 하나의 순수한 우둔함이다. 신경계통과 감관, 즉 육체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를 오산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빵 없이 살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니체에게 <순수한 육체란 하나의 순수한 맹신이다. 사유와 이성 즉 영혼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를 오산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 니체 자신도 초기에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육체와 정신의 조화가 중요함을 말한다. 루이 꼬르망의 견해에 의하면, "니체에게 정신과 육체는 밀접하게 연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분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 건강과 도덕적 건강의 균형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보충적인 삶의 두 양상을 나타내다." 그러나 점차 이 양자의 상보성보다는 차별성과 대립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에 대한 본능의,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아폴론적인 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하게 된다. 발터 니그에 의하면 니체의 바로 이런 태도가 니체 자신의 운명을 파멸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니체는 삶의 중심을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삶의 중심을 삶 아닌 것 즉 죽음에서 찾아야 한다는 삶의 역설을 모르고 있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라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의 삶이 생존의 본능적 저차원에 머무르는 것을 방지하여 의미추구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학하는 것이나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 추구적인 활동의 표본이라면, 죽음은 인간의 의미 추구활동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철학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신앙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의미추구적 삶으로서의 인간의 삶의 구심점이다. 사람들은 밝은 곳의 중심이 광원이듯이, 삶의 중심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밝은 곳의 중심은 광원이지만 삶의 중심은 죽음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죽음이 삶의 구심점임을 즉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이 의미추구적 목적추구적이게 됨을 인식하게 되며, 죽음이 삶의 구심점이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죽음은 인간에게 죽음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해 보여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은 인간이 삶에서 의미를 추구할 때 만나게 되는 가장 포괄적인 상징이다. 사람들은 이 상징을 신, 조물주, 부처, 알라, 야훼, 천지신명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에 있어서,
'기독교의 신'이란 동시에 '초감성적인 것' 일반과 이에 대한 여러 해석들, 즉 존재자 '위'에 내걸려지면서, 존재자 전체에게 목적과 질서, 요컨대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과 '규범', '원칙'과 '규칙', '목표'와 '가치'를 대표하는 명칭이다.
삶을 의미 추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한, 우리는 이런 이상과 규범 목표와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 지상에서 이상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하였던가를 스스로 자문해 본 일이 있었던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현실이 오해되고 비난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거짓이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양심이 교란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신이 그때마다 희생되어야만 했던가? 하나의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성전이 무너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법칙이다. 나에게 이 법칙에 위배되는 경우를 제시해보려므나.
사실 공산주의의 이상을 세우기 위해 인류가 치렀던 대가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니체의 주장을 전적으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독단적으로 세워지고 강압적으로 시행되기를 강요받는 이상의 폐해를 인류는 너무나 빈번히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무런 이상도 설정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류가 '자폐적 이상'의 폐해를 빈번히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이상이든 이상에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인간이 이상에 매달리는 것은 칸트 식으로 말해서 인간의 자연적 소질이다. 인간에게는 형이상학에 대한 자연적 소질이 있다는 말이다. 니체 자신이 확신했던 법칙, 즉 "하나의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성전이 무너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니체 역시 기독교의 이상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초인의 이상을 설정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니체는 신의 문제를 너무 가볍게 다루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그로서는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수가 없었다.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은 심리학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의 영토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모든 종교적 형이상학적 주장은 심리학적으로 해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독교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측면을 날카롭게 파헤쳐 폭로했다. 그러나 일단 심리학을 절대화하게 되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주장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것은 마치 일단 인과법칙을 절대화하게 되면, 의지자유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단 인간의 행위조차도 인과적으로 결정된다는 가설을 받아들이고 나면, 인간의 모든 행위도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듯이 보이게끔 되어 있다. 이는 그 가설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가설은 그 가설로 설명되지 않는 사례에 대해 맹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가설로 세워지는 순간에 확정된 이론이 되어버리는 자폐적 가설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다른 가설로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해진다는 심리학적 이기주의의 가설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성적인 동기에서 행해진다는 프로이드의 가설이 있다. 이런 가설들은 가정되는 순간에 반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기 때문에, 가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고집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모든 종교적 형이상학적 주장은 심리학적으로 해부될 수 있다는 니체의 가설도 바로 이런 자폐증을 앓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자폐적 심리학은 하나의 독단적 형이상학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자신의 자폐적 심리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결국 하나의 독단적인 형이상학적 가설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을 심리학에로 환원시키려 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끝내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독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영원한 생성'의 개념이다. 호울게이트(Stepen Houlgate)는 니체가 반복해서, 변화하며 따라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은 고정된 정식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또한 정확하게 규정될 수 없으며, 언어나 사유는 삶을 판단이라는 정적인 형식으로 얼려서 표현할 수 있을 뿐 생성의 과정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지적한 후, 이런 독단적 공리가 ㅡ 삶은 일체의 초월적 형식이나 목적과 의미를 결하고 있으며 ㅡ 세계는 신적인 질서가 없는 혼동이며 ㅡ 혼란의 세계에 단순화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언어나 의식이며, ㅡ 따라서 진리 혹은 사실이란 없고 단지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허구주의 인식론(fictionalist epistemology)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니체의 전 사상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독단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알렉산더 네하마스는 이점을 보다 함축적으로 다음처럼 표현하고 있다.
니체가 크리스트교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타기할 만한 특징들을 폭로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폭로와 고발이 정당한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암시한다면, 그는 자신의 원근법주의를 위반하고 그 자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독단주의의 전통에 다시 빠지는 것이 된다.
허구주의적 인식론의 기초인 니체의 원근법주의가 니체 자신을 공격하게 된다. 그는 형이상학적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독교 역시 하나의 원근법적 해석체계로 인정해주어야 하며, 기독교가 틀렸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근법주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이 존재하건 하지 않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대인의 심적인 태도를 표현한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런 의미도 풍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이 교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반문할 때, 그런 의미를 풍기고 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죽는 것은 신이 아니라 ― 사실 죽는 신은 신이 아니다 ― 신을 믿는 인간의 마음이다. 신을 올바로 믿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신의 성전이 아니라 신의 무덤이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단지 탈선한 기독교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 그 자체를 비판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이 탈선한 기독교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기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한, 니체는 신의 존재 문제를 너무 독단적으로, 너무 경솔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신비적 종교체험과 그 체험의 의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Abstract]
An Examination of Nietzsche's Criticism of Christianity
Moon Sung-Hak (Kyungpook Univ.)
Nietzsche's criticism on Christianity runs as follows : ① the so-called Kingdom of God was created by the hate of the weak toward the strong. ② God is nothing else but another name for 'nothing'. ③ Christian morality is slave morals. ④ belief in the Kingdom of God, which does not really exist, is an expression of nihilism. ⑤ Christian priests provoke self-hate of man. Nietzsche analyzed and criticised Christianity totally from the viewpoint of psychology. This paper tries to show that Nietzsche's criticism of Christianity is not correct because of the autism of his psychology. According to Nietzsche, every religion and metaphysics can be analyzed psychologically. This is Nietzsche's psychological hypothesis. In the light of this hypothesis, he insightfully disclosed the "human all to human" aspects of Christianity. However, we must bear in mind that once psychology is viewed in absolute terms, a metaphysical maintenance which cannot be psychologically accounted for seems not to exist. This is as like as that once the casual law is accepted, free will seems not to exist. The autism of Nietzsche's psychology excludes the possibility of disproving his psychological hypothesis. Once the hypothesis is accepted, everything may be interpreted to support it. In this way Nietzsche's psychological autism leads to a dogmatic metaphysics which Nietzsche himself criticizes. Consequently, he contradicts him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