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움직씨다. 생활로서 수행한다. / 동봉 스님
'삶'이란 '사랑' '사람'과 더불어 그 어원이 같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올바른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성실한 삶이요 움직임이다.
또한 삶에서 사랑을 빼버린 사람이란 목석과 같다.
따스한 정이 없다. 말로만 사람이지 실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람을 찬피 동물 (冷血動物)이라 한다.
'살암'에서 삶과 사람으로 언어의 변천을 가져왔고,
'살앙'에서 사람으로 언어가 달라졌다면 그 어근(語根)은 '살'이다.
살은 인간이 지닌 육신이다,
그 육신은 세포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허나 '살'의 근본적인 의미란
육신으로서의 삶만이 아니라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삶을 한문으로 표기한다면 '생활[生活]'이 된다.
생활이란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지상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초목(生)을 의미하며, 습기를 머금고 리드미컬하게 성장해 감[活]을 뜻한다.
자연의 성장이 생(生)이라면 그 자연을 성장하게끔 하는
여러 가지 조연이 활(活)이다. 따라서 생이 질료인(質料因)이라면
활은 보조연(補助緣)이 된다.
우리 인간[사람]이 참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넉넉한 사랑이 보조연으로 존재할 때 가능하다.
삶은 동사다. 명사가 아니다. 생활이란 명사와는 거리가 멀다.
'사랑'도, '사람'도 역시 동사다. 움직씨다. 이름씨가 아니다.
초목이 자라고 성숙하여 여러 가지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 흘러 높고 낮은 기온을 번갈아 나타내는 것처럼
사람도 사랑도 삶도 똑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한 곳에 상주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분명히 파악하고 인식하며 실천하는 것이 수행(修行)이다.
수행이란 한자가 표기하는 것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行] 두드리고 [攵] 닦는것[彡 ]이다.
수행은 우리네의 삶 그 자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수리하고 행함이다. 불교에서는 수행해 감에 있어서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 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한자에서 척촉 (行) 이라 표기한다.
척 (彳 ) 과 촉( 亍 )이 합하여 행(行)이 된다.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가면서 조심스럽게 떼어 놓고
쉬엄쉬엄 가라는 뜻이다.
쉬엄쉬엄 가라는 말은 놀면서 가라는 말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가라는 말이다.
번뇌로 덮인 여래장(如來藏)의 문을 노크[攵]하고 들어가
그 번뇌의 먼지와 티끌을 말끔히 털어 [彡]버리고
본래로 간직된 여래를 계발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수(修)요 행(行)이다.
수행은 삶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마음의 티끌을 터는 것부터가
우리의 일반적 삶 속에서 한 발짝도 떨어져서는 불가능하다.
중국의 빠이짱(百丈)선사가 내걸었던 '일과 수행[一日不作一日不食]'이나
구한말의 용성 (龍城1864~1940)선사의 '선농일치 (禪農一致)'사상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발밑을 돌아보라 [照顧脚下]'는 말이 선가(禪家)에서는 전해 내려오고 잇다.
이 말은 진리가 바로 우리들이 들숨날숨 [呼吸]을 쉬며 살아가는
당처(當處)에서 한 치도 떨어져 있는 게 아님을 뜻함이다.
다리 아래, 발밑이란 우리가 행동하는 바로 그곳이다.
왜 하필 다리이고 발인가. 모든 생명들이 다리를 갖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움직임이다. 걸어감이다. 실천(實踐)이다.
실제로 움직여가는 데에 진리가 있음을 표현하려 함이다.
얼굴이나 손이나 옷차림은 말쑥한데 양말바닥은 새카맣다.
특히 흰 양말을 즐겨 신는 사람은 더욱 새까맣다.
발이 깨끗한 여인을 안아주고 싶다는 말이 있다.
하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난 여인의 발은 사랑스럽다.
발밑을 살펴보란 말은 쉽게 지나쳐버리는 자신의 당처,
바로 그 곳에 진리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인식시켜 줌이다.
우리의 몸이 지구(地球)와 맞닿는 점이 바로 발이다.
우리의 몸은 발바닥을 통하여 지구와 대화를 나눈다.
발바닥으로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교섭한다.
대지의 흙냄새를 맡는 것은 코가 아니라 발바닥이다.
대도시에서 시멘트, 아스팔트 때문에 흙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최악의 불행이다.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대지의 기운을 먹고 인류는 성장한다.
초목이 자라고 꽃과 곡식이 자라고 온갖 곤충이 성장하고
숱한 동물들이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은 대지의 기운 덕분이다.
대지는 어머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이다.
생명은 어머니의 품에서 성장하며 여인의 따스한 손길을
늘 기다리는 자궁회귀(子宮回歸)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두 가지 부류로서의 생명만을 간직한 채 존재한다.
벌거벗은 여인과 그 여인을 쫓아가는 남성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만 애욕을 나타내는 언어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자궁회귀성, 흙으로 돌아가려는 갈망을 표한한 말이다.
인간은 죽어서라도 끝내 대지의 품, 어머니의 품안에 안긴다.
살아서는 여인의 품이었지만 죽어서는 여인을 심볼로 표현해 놓은
그 본체에 안긴다. 우리는 대지를 밟고 서서
거기서 갖가지 삶을 영위하면서 존재한다.
대지는 자신의 살이 으깨지고 짓밟히면서 보람을 느낀다.
한 생명을 잉태하고, 고통을 수반하면서 그 생명을 낳아
고난과 시련을 감내하면서 훌륭한 존재로 성장하게 하지만
자신의 공(功)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대지도 마찬가지다.
인간에 의해, 동물에 의해, 초목의 뿌리가
자신의 살을 비집고 들어오더라도 그저 묵묵할 뿐이다.
많은 생명들을 키워가지만 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해 한용운 큰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은 흙발에 짓밟혀주고, 눈비를 맞으면서도
모든 생명(衆生)을 건네주는 나룻배가 되겠다. 하신 것도
보살의 자비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지는 보살이다.
모든 여인은 자비로운 보살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신도를
'보살' 이라 칭하는 것도 타당한 호칭이다.
'보사(保寺)님'이 아니라 그대로 '보살님'이다.
이처럼 발밑을 살펴보라는 말 속에는
보살의 자비, 불교의 진실이 들어있다.
대지와의 만남이 있고 실천으로서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마음 닦을 당처(當處)임을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늘 염송하는 경전 가운데 [천수경(千手經)]은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지닌 관자재보살(觀世音菩薩)의
공능을 표현한 경이다.
숱한 눈과 거기에 비례한 '손'을 가졌다는 것은
사색하는 보살인 동시에 일하는 보살임을 뜻함이다.
손이란 발과 마찬가지로 '일'을 상징한다. 일은 '생활' 그 자체다.
일하면서 사색[철학]하고 있음이다.
손은 어루만짐이요 제도함이다. 보살이나 부처님을 구분할 때
무드라[印契)로써 판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비 승려인 행자생활 때 밥 짓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고
땔나무를 하며 갖가지 잡역을 함은 그 자체가 바로 수행임을 가르침이다.
행자생활 때 이미 중노릇이 무엇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모두 배우는 것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로버트 풀검의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도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생활로서 수행한다. 수행 바로 그 자체가 생활이어야 한다.
삶은 정지되어 있는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다.
월간 불광 / 199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