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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 夜
李 鐘 桓
1
노 익주는 꿈속처럼 자꾸만 공중을 뜨려는 걸음걸이를 멈추고 붉은 벽돌담을 한번 돌아보았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오늘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되어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3·1절 기념행사가 끝나면서 간수장이 특사로 가출옥할 사람들을 불러내었지마는, 익주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질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기에 재차 “노 익주!” 하고 약간 큰소리를 질렀을 때사, “네? 네,” 대답은 하면서도 그래도 미심쩍은 허리로 엉거주춤 일어섰던 것이다.
하기야 만 삼년 가까운 동안의 감옥살이를 익주만큼 충실하게 해낸 사람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모범수가 되어보겠다던가 하는 심사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다만 파렴치한 자기의 죄과에 대하여 정성껏 보응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서투른 목도채에 시뻘겋게 어깻죽지가 벗겨져나가도 그는 그저 묵묵히 바윗돌을 날랐고, 손끝이 아릿아릿 피가 맺혀도 이를 꽈악 악물고 벽돌을 쌓았다.
육체의 고통이 못 견디겠으면 못 견디겠을수록 그만큼 마음의 고통이 가벼워지는 즐거움으로 알았다.
그래서 동료들이,
“저자식은 평생 콩밥만 썩히다가 뒈지려나? 제 집 일하듯 하게!”
하고 핀잔을 던지기도 했다.
만기 출옥이 아니라 별로 마중나온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린 것이 될 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기에 더 가슴이 벅찬 얼굴들로 철문을 나오고 있었다.
어린애 업은 여자죄수 한 사람 외에는 대개 낯익은 친구들이었다. 언제나 뻘건 옷 퍼런 옷만 입고 살다가 이렇게 다들 평복을 하고 보니 반갑기는 하면서 친근감보다 되려 서먹서먹한 느낌이었다. 형무소 안에서는 반말이 아니면 해라로! 농지거리를 하던 사이였으면서도 어점쩝하게 공대를 하게 되는 것부터가 스스로 우스울 지경이었다.
전차 종점에서 각각 갱생의 성공을 비는 인사들을 나누며 제 갈데로 헤어져갔다.
익주는 전차로, 혹은 버스, 합승 등으로 기쁨을 못 참아 하며 사라져가는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자 새삼스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같은 하늘이면서 붉은 벽돌담 속에서 이고 살던 국한된 그것과는 달리 봄의 윤기를 담뿍 뿜는 넓고 푸른 하늘이었다.
한숨이 하나 저 폐부의 아랫골짜구니에서부터 후루루 몰려나온다. 오래 목은 콩밥 냄새와 함께 온몸에 내리씌워졌던 중압감이 후련하게 가시어져나가는 기분이다.
솔개가 한 마리 날갯죽지를 좍 펴고 멋지게 한바퀴 원을 그린다. 형무소 안에서는 그처럼 부러워하던 날짐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익주 자신 솔개의 날개 위에 올라탄 것만 같이 홀가분하게 바라보아진다.
자유는 참으로 상쾌했다.
울음이 나도록 상쾌했다.
전차 떠나는 소리가 찡찡 난다.
그제사 익주는 몸을 바로잡으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닥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一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것은 참 어처구니없는 당면한 긴급과제다. 전차를 타든 버스나 합승을 타든, 그렇잖으면 그냥 걷든, 하여간 어디로든지 가기는 가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다시한번 되뇌이면서 아뭏든 마악 며나려는 전차에 발을 올려놓고 보았다.
ㅡ—가면서 생 각하지·……
기름때에 절은 실장갑 낀 손을 내미는 차장을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표 내시오!” 소리가 나기까지 그는 전차표를 사지도 않고 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땡! 소리가 하나 나고 움직이기 시작했던 전차가 멎는다.
“표 사와서 타시오.”
점잖은 차장의 명령이다.
전차를 내리면서 그는 웃음이 나왔다.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당한 것이 무안해서라기보다 〈사회〉를 잊어버리고 있은 자신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유쾌했다.
전차에서 내린 데는 종점에서 약 십 미터 가량 내려온 곳이었다. 표를 사서 전차를 탈까 하다가 그는 그냥 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디로 가야 할 곳도 작정되어 있지 않은, ……여디에도 갈 곳 없는 그에게 급히 서둘러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독립문을 지났다.
——새 인생의 출발!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발걸 음이 공연히 자꾸 빨라지려고 한다.
—―새 봄과 더불어 새 출발!
무언가 향기 낀 언덕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설레임이다.
아까 예치제에서 받은 칠천 팔백 구십오 환. 꼬기꼬기 구겨진, 헌 군대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 꼬옥 틀어박아놓은 밑천―글자 그대루 피땀의 대가로 얻어진 돈이다. 일천 날이 넘는 감옥살이에서 보아진, 이야말로 티 하나 섞이지 않은 깨끗한 돈이다.
—―이것을 가지고 나는 내 새 인생을 건설하는 것이다!
로터리가 나왔다.
그는 발을 멈출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제는 정말 어디로고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터리!
길이 사방으로 나 있는 이 로터리를 어느 쪽으로 돌아야 빛나는 새날이 열릴 것인가!
그의 운명을 점쳐주기라도 하는 듯, 빨강, 파랑, 노랑 불들이 쨀그랑 소리를
내며 명멸하고 있다.
—―도대체 서라는 것인가 가라는 것인가? 가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렇잖으면 돌아가는 것 인가?
그제사 그는 여기가 서대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서대문으로 깨달아지는 찰나 그의 머릿속에 동구스름한 한 여인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무래도 그때는 그가 미쳤던 것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환장을 하지않고 배길 수 있었단 말인가.
1·4 후퇴 때.
인민군에서 도망나와 늙으신 어머니를 남겨두고 남쪽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익주는 재순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러 갔다.
한밤중의 개울가에 인기척은 없었지만,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무서워 두 손을 꼬옥 감싸주며,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잘 있어!”
눈 딱 감고 돌아서는데,
“잠,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재순은 잊어버린 거라도 있는 듯 저희집으로 달려가더니 잠시 후에 조그만 보자기를 하나 끼고 재빠른 걸움으로 뛰어나왔다. :
“어서 가!”
익주의 의아해 하는 눈치야 아랑곳없이 재순은 앞장서서 내닫는 것이었다.
대구까지 내려와 반년 남짓에 익주는 좌판 가게를 하나 마련해놓고 군에 들어갔다. 이미 그들은 장래를 굳게 약속하고 있었다. 말로써 한마디 입에 담아본 적은 없었지마는 그 이상의 맹서가 마음속 깊이깊이 새겨져 있는 터였다.
그리고 두 해 동안, 익주가 꼭 한번 공무로 나왔던 길에 잠깐 만났을 뿐인 그들 사이에는, 전선과 후방 사이로 뜨거운 사연의 편지만 오고갔다.
그러다가 대수롭지 않은 발꿈치의 부상으로 약 한 달 가량 서울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남의 눈에는 잘 모를 정도의 잘름거리는 발걸음으로 제대되어 나왔을 때, 이미 재순은 대구 천지에서 찾아볼 길 없었다.
환도를 한다면 한다고 알려라도 주었을 텐데 아무 소식 없이 떠났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의 말대로 서울로 간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육군병원을 찾아주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불길한 예감이 익주의 전신을 전율시켰다.
그러고 보면 처음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한 다음으로 한번밖에 편지가 오지 않았고, 그것마저 두어 장 될락말락한 짧은 문안뿐이었다.
그는 불이 뿜는 분노를 참지 못하면서, 서울역에 내리는 길로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남대문 시장에서 달러장사하는 재순을 찾아내고 말았다. 우선 옷맴시 몸맵시가 몰라보리 만큼 화려해진데 익주는 눈이 휘둥그래져야 했다.
당황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가까운 다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자는 것을 익주는 기어코 셋방 들어 있다는 아현동으로 가자고 몰아세웠다. 집에 가보아야 모든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차근차근히 얘기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재순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은 모양으로 집으로 데려가더니 그동안에 된 일들을 순순히 고백 했다. 어떤 청년의 도움으로 달러창사를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청년과 정식으로 약혼을 했다는 것.
“익주씨한테 신세진 건 그 사람이 갚아주기로 했어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마치 무슨 사무를 정리하듯 술술 내뱉는 말투에 익주는 저도 모르는 새 따귀에 손이 올라가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흥분이 약간 가라앉는 것을 기다려 익주는 달래기 시작했다.
이북 고향에서의 어릴적 얘기부터, 삼팔선을 어떻게 넘어 대구에서 어떻게 고생 하며 살아왔느냐는 등을 돌이켜보며 그럴 수가 있겠느냐고 간곡히 타일렀다.
“응? 재순이!”
익주는 목멘 소리를 삼키며 재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때까지 그들은 한번도 포옹을 해본 적 이 없었다. 완고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그들은 혼인하기 전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로 알아왔던 것이다.
팽팽하게 성숙한 여인이 된 재순의 몸뚱아리를 비로소 팔안에 넣으면서 익주는 떨리는 감격으로,
“그 사람과는 내가 해결지어줄 테니 조금도 염려할 것 없어. 재순이! 우리, 곧 결혼하자구! 응? 오늘로라도!”
그러나 재숙은 한결같이 눈을 내리깔고,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찬기만 돌았다.
익주는 머리끝까지 치미는 불덩어리를 겉잡지 못하면서 와락! 낚아채 여인을
깔고 눌렀다.
—―진작 이랬어야 하는 것을!
정복을 당하고 나면 설마! 하는 심사였다.
재순은 소리를 지를 듯 쌔근거리며 반항했다. 그러나 익주의 억센 팔힘을 견디어낼 수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발버둥치는 꼬락서니가 얄미워서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했다.
투둥탕! 마루를 올라서는 발소리가 있었다. 미닫이가 확! 열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바로 재순과 약혼했다는 사내였다.
강간―—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소름끼치는 죄명이었다.
아현동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히 광화문 쪽으로 방향이 정해지고 말았다.
—―떨어버려야 한다. 악몽 같은 그 일은 머릿속에서 떨어버려야 한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의 발걸음은 이제 제법 분주히 놀려지기 시작했다. 동대문시장 앞까지 와서야 발을 멈추었다.
—―시장에서 흑 무슨 창사할 거라도 없을까·…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되는대로 한바퀴 휘 돌아보았다. 그가 가진 밑천으로는 장사라고 이름붙은 것이라고는 엄도 낼 수 없었다. 정 한다면 한길가에 앉아 하는 빵장사나 될까.
하여간 하루 이틀 연구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선 쌀밥을 한 그릇 사먹었다. 무던히 먹고 싶던 쌀밥이다. 노긋노긋한 밥알들이 그대로 혓바닥 위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단맛이다. 한 사발 더 먹고 싶었으나 참았다. 한푼이라도 아꼈다가 장사 밑천을 삼아야 하니까.
남대문시장으로 가보았다.
동대문시장이나 별다를 게 없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왔다. 어디 잘 곳을 마련해야 했다. 어디 싼 하속이라도 없나싶어 팥죽 파는 아주머니 한테 물어보았다.
“정거장 앞에 가면, 자는 데만 삼맥 환 주면 될 거예요.”
자는 데만 삽백 환이면 오십 환짜리 상밥을 두 끼씩만 먹는대도 하루 사백 환이 달아난다. 그러다가는 며칠 안 가서 밑천을 털고 나서게 된다.
“어디, 공원 같은 덴 없을까요. 그냥 잘 수 있는데 말이에요.”
서울이라고는 육군병원에 한 달포 입원해 있었을 뿐이라 어디가 어딘지 통 지리나 사정을 알지 못하는 터다.
“남산공원이나 파고다공원에 더러 가 잔다고 합디다만, 요샌 추워서 어디…….”
추운 것쯤 그까짓 대수로울 것 없다.
이왕이면 파고다공원으로 가보자 했다. 마침 오늘이 3·1절이기도 하거니와 그 유명한 공원에서 하룻밤 새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싶었다.
공원에는 별로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벤치가 반가왔다. 훌륭한 침대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뒷문 곁에 있는 벤치에는 벌써 한 패가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먼 전등불에도 그것은 거지에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한테 딱 붙어 쪼그리고 자는 모양이었다.
—―거지!
봄기운이 돈다고 하지마는 겨울이 풀렸다뿐이지 아직도 싸늘한 공기에 잠긴 밤을 공원에서 자는 거지 속에 끼어 있는 익주 자신도 별수없이 거지에 틀림없을 성싶었다.
—―거지!
그러나 이렇게 속으로 뇌이면서 빈 벤치에 걸터앉아 그는 짐짓 입가에 웃음을 띠어보았다.
—―나는 절대로 거지는 아니다!
하는 증거를 스스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고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비록, 거지들과 같이 공원에서 자는 신세지마는 나는 이제부터 〈참〉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참〉 그것만 가지고 싸워나갈 것이다. 아무리 고루거각에 베개를 높이 하고 자는 사람이라도 〈참〉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인생인 것이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혼연히 솟아오르는 미소가 떴다. 자랑스러운 마음이었다.
감옥 삼년 생활에 뼈저리게 체득한 그의 인생관이다. 어느 모로 본다면 감옥이란 많은 사람에게 좋은 수양도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보자기를 베고 드러누웠다.
전차 자동차의 삑삑거리는 소음이 들리기는 했지마는 조용한 공원 공기였다.
종잡을 수 없는 오만가지 상념들이 떴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아직도 형무소에 남아 있흔 수많은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사박사박하는 고무신 소리가 난다. 감았던 눈을 비시시 벌려보았다. 한 여인의 그림자가 앞을 지나간다. 어린애를 업고 보퉁이를 들었다. 지나가던 그림자는 잠깐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다시 되돌아서더니 맞은편 벤치에 털썩 주저앉듯이 걸터앉는다. 땅이 꺼져라고 한숨이 길다. 업힌 아이가 빽빽 운다. 여인은 아이를 앞으로 둘러안으며 젖을 물린다.
또 하나의 거진가 하다가 문득 아까 그 한숨소리가 거지가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희미한 달빛에 동그란 얼굴이 하얗다. 순간, 어디선가 보던 여자같이 생각되었다.
—―시장에서?
아니다. 분명히 어디서 보던 여자 같은데, 그것도 오늘, 과히 오래지 않은 전 시간에 어디서 보던 얼굴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순 외에 서울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더구나 여자.
—―전차 속에서 잠깐 보았던가?
그도 아니다.
—―오라!
그제사 생각이 난다.
오늘 형무소를 같이 나온 여자 죄수다. 철 이른 흰저고리다 싶었던 인상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확 뱐가운 정이 솟았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쪽 벤치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뭐라고 할말이 없다.
“애기가 추운 모양이지요.”
싱거운 소리지마는 달리 뭐라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눈을 환히 뜨고 난데없이 나타난 사나이를 울려다본다. 그 환히 뜬 눈속에 눈물이 홍건히 고여 있음이 불빛에 반짝이는 것으로써 알 수 있었다. 눈은 이내 경계하는 빛을 띠었다.
“나도, 오늘, 서대문을 나온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뵈니 괜히 반가와서요.”
남이 들으면 참 우스울 쑥스러운 소리였으나 마음에 있는 그대로였다.
“그러세요?”
그제사 여자의 뺨에 반 이지러진 미소가 뜨며 눈물이 주룩 굴러떨어진다.
감옥이라는 남다른 길을 거쳐나온 사람끼리 이렇게 서글픈 밤을 같이 맞고 있다는 사실이 무슨 숙명이기나 하듯 친근감을 불러주는 성싶었다.
“애기를 우유라도 먹여부시지요.”
콩밥을 먹어온 엄마에게 젖이 신통할 리 없어서 우는 게 아닌가 여겨졌다˛
“글쎄요. 젖이 시원치 않긴 해요.”
익주는 곧 공원을 달려나가 목장 우유를 한 병 사들고 왔다.
“자, 따끈해요. 어서 멕여보세요.”
“아이, 이렇게 신셀 져서…….”
여인은 미안해 하며 두 손으로 받는다.
“점심밥을 한 그릇 사 먹고 나오는데, 글쎄 어떤 녀석이 주머니를 탁 채 달아나지 머에요. 그래서…….”
“아니 저런, 그래 그놈을.”
“달아나버린 걸 어떡해요. ……·두 해 동안 모은 돈인데…….”
여인은 울먹하고 고개를 떨군다.
“아니, 그놈을.”
익주는 당장 그놈의 주리를 틀어주고 싶은 충동이었다.
우유병이 어린애한테 너무 커서 잘 먹여지지 않았다. 마시기도 전에 캐키기만 한다.
익주는 다시 달려가서 고무 젖꼭지를 하나 사 왔다.
아이는 거의 한 병을 다 먹고야 잠이 들었다.
“그런데 추워서, 어린애하고 어찌 여기서 잘 수 있겠어요.”
익주는 남의 일 같지 않게 걱정이 되었다.
“하긴, 감방보다 못하구만요.”
쓸쓸히 웃음 띄우는 여인에 따라 익주는 하하하 하고 큰소리로 웃음이 나왔다. 정말 서글픈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나, 돈 얼마 있읍니다. 조금도 사양 마시고, 가까운 여관으로 가십시오. 애기가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울 검니다.”
익주는 안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괜찮아요. 꼭 껴안고 자지요 머.”
“그럴 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한데서 재워서는 안됩니다. 자아, 나가시지요.”
여인은 아예 따라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익주는 이 여자가 나를 의심해
서 이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여기서 자기로 작정했고, 또 자도 아무 일 없읍니다. 조금도 미안해 하실 것 없읍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익주는 여인의 보퉁이를 들었다.
“아이, 미안해서 어떡해요.”
“염려마세요. 조금도 그런 생 각을랑 마시고.”
익주는 앞장서서 공원을 나와 전차길을 건너 골목으로 들어섰다. 될 수 있으면 큼직한 여관으로 들여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저분한 하숙 같은 데서는 젊은 여자몸이라 혹시라도 어떤 봉변을 당할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큼직한 간판 붙은 여관으로 여인을 들여보내놓고 내일 아침 식사값까지 해서 숙박료를 미리 지불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린애를 눕혀놓고 나와, 여인은 공손히 허리를 굽힌다.
“무슨 말씀을.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한번 들러 뵙지요.”
혼자 여관을 돌아서 나오면서 익주는 흐뭇한 즐거움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첫발을 내디딘 날 무엇인가 장한 일을 치른 것 같았다.
공원으로 돌아와 아까의 벤치에 놓여 있는 보자기를 보고서야 잊어버리고 갔었구나! 했다. 그냥 있어준 것이 반가왔다. 헌 옷가지밖에 아니지마는, 이런 판국에 헌옷 한가지가 어딘가.
다리를 쭈욱 펴고 드러누웠다.
—―참되게 살면 그만이야! 참되게만 살면 하나님이 도우실 거야.
반달이 싸늘한 밤하늘에 구름도 없이 걸려 있다.
2
달은 익주 자신처럼 쓸쓸해 보였다. 넓디넓은 세상에 단 혼자 나둥그러져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사내에게, 역시 끝없는 하늘을 홀로 가는 반쪽달의 차가운 감촉은 외로움을 한층 돋구어주기에 알맞았다: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온다.
달 그림자가 산산이 부서져 반짝반짝 눈 하나 가득 번져온다. 눈귀로 눈물이 찍 떨어진다. 한줄기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은 솟았다. 바삭바삭한 몸뚱아리에서 눈물은 어찌 마르지 않았나 싶다.
이북에 혼자 남아 계시는 어머니. 재순의 배신. 고달팠던 형무소 생활. 그리고 앞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막막한 현실……·!
그러다가 어떻게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녘 해서 추위에 잠이 깼다.
어떻게 두 다리를 오그리고 새우잠을 잤던지 허리께가 뻑적지근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먼동이 트여올 무렵, 견디다 못해 일어나 앉았다. 쪼그리고 앉았노라니까 이가 덜덜 떨린다. 이러다가 병이 나지 않을까 싶어진다. 오싹 오한이 끼친다. 좀 몸을 녹일 방법은 없을까 싶다. 엊저녁 그 여자의 말마따나 형무소보다 못한 〈사희〉다.
—―역시, 이삼백 환 애끼지 말고 하숙에라도 들걸 그랬나보군.
슬며시 후회가 난다.
새벽 하늘에 검은 연기가 마구 솟아오르고 있다. 이렇게 일찍 웬 연긴가 싶었다. 한참만에사 목욕탕 글뚝임을 알 수 있었다.
—―옳지, 목욕을 하자! 그게 좋겠군. 몸을 푹 녹이고, 그리고 형무소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자!
참 좋은 생각이다.
추위를 풀기에는 아주 안성마춤이다. 공원을 나와 굴뚝 연기를 연줄로 목욕탕으로 갔다.
벌써 문이 열려 있었다.
탕에는 두어 사람밖에 없었다.
무럭무럭 김이 피어오르는 탕에 흥건히 몸을 잠그었다. 맑은 물이다. 형무소에서 그 땟국이 뻑뻑한 목욕물도 감지덕지던 일이 생각난다.
다시금 자유는 참 좋구나 했다.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으면 좋을 성싶다.
실컷 담그고 있다가 숨이 답답해져서야 탕을 나와 대강 몸을 씻고 콘크리트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더운 물에 녹아내린 몸이 나른하게 졸음을 불러온다. 한참이나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땅땅 소리가 난다. 한쪽 구석에서 안마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저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신나게 두드리는 안마장이 솜씨에 익주는 놀라운 눈을 보냈다. 다드미 소리같이 장단을 맞추어가며 따당 땅땅 따다당 땅 하고 얻어맞고 앉았는 중년신사는 조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어지간히 좋은 기분인 모양이다.
그러자 문득 익주는, 안마장이는밑천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훅 들었다.
—―그래! 안마를 배우자! 안마장이가 되자!
노동만으로, 맨주먹 밑천으로 돈벌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싶어지며 금방 가슴이 설레인다.
“저, 안마 한번 하는데 얼마씩인가요.”
옆에 있는 사람보고 물어보았다.
“이백 환이라지요 아마.”
한 사람 하는데 이백 환이라. 열 사람이면 이천 환, 한 달이면 육만 환. 목욕집에 얼마씩 세를 물 테지만, 그렇더라도 얼마나 좋은 장산가!
익주는 바싹 호기심이 당겼다.
안마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익주는 안마장이 앞으로 갔다.
“나 좀 해주시오.”
“네, 네, 이리 앉으세요.”
돌려놓아주는 나무걸상에 걸터앉았다.
수건을 어깨에 펴고 물을 한 바가지 끼얹더니 안마를 시작한다. 어깨에서부터 팔, 등, 목, 머리, 손가락끝에 이르기까지, 신나게 주무르고 치고 한다. 두드리되 그냥 두드리는 게 아니다. 곳에 따라 손바닥으로 따당 땅 치기도 하고 곳에 따라 두 주먹으로 뺙 뺙 소리를 내며 다듬이질 시늉을 내기도 한다. 천천히 때리다가 가다가는 우박이 쏟아지듯 재빨리 놀리기두 하는 품이 이만저만 익숙한 솜씨가 아니다. 주무르되 그냥 주무르는 것이 아니다. 심줄을 잡아당기는가 하면 때로는 맞잡아 비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르 꼬옥 누르는가 하면 버르르 떨면서 밍기작거리고 내려가기도 한다. 어딘가를 누르면 전신에 전기가 찌르르 퍼지기도 하고 또 어딘가 가서 근육을 잡아당기면 온몸의 힘이 쑤욱 빠지는 감이기도 하다. 아찔하게 아픈 듯 간지러운 듯하기도 하고 녹작지근 시원하기도 하다.
유심히 주의를 기울이고 만지키고 있노라니까 기기묘묘한 기술에 절로 탄복이 되었다. 확실히 이백 환어치는 되고도 남는다. 그리고 안마란 장님만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멀쩡한 성한 사람도 한다는 것이 반가왔다.
—―밑천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장사로는 그만이로구나!
익주는, 자기도 부지런히 배우면 족히 해낼 수 있으리라 싶은 자신이 들었다.
한 십오 분 가량이나 되었을까. 어쩌면 한 삼십 분이나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안마가 끝났다.
“저, 안마는, 얼마나 배우면 할 수 있는가요?”
익주는 놀라운 얼굴로 물었다.
금니빨이 누렇게 번쩍 거리는 안마장이는,
“네? 이거요? 뭐 그렇지요. 한 삼년은 보통 배워야 하지마는, 글쎄, 잘하는 사람이면 한 일년?”
익주는 그만 질리고 말았다. 적어도 일 년이라니 어처구니없었다. 이까짓걸 가지고 일년이라니! 그러나 익주 자신은 배우기 시작만 하면 금방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려운가요, 그게?”
“그래도 밥벌인데 그렇게 쉽기만이야 할라구요. 보기와는 다르지요.”
“댁에는 몇 해나 하셨나요?”
“나요? 동경서부터니까 한 이십여 년 됩니다.”
“이십 년!”
익주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역시 그만한 관록이 있어 보인다. 쪼들어묵 이맛살이나 물바가지 만지는 솜씨부터가 오랜 경험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마장이는 손이 비니까, 물바가지들을 챙기고 콘크리트 바닥의 땟물을 씻어 내리기도 하코, 밖에 나와서는 옷장표 신장표를 일하는 아이를 거들어 챙겨주도 했다.
익주는 옷을 입고 안마값을 치르면서 다시 물었다.
“여기서, 몇 시까지나 일하시나요?”
“누구, 나요?”
안마장이는 조금 의아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네.”
“밤 열시면 대개 끝나지요.”
“그럼, 저녁에 한번 찾아와 뵈도 괜찮겠읍니까.”
찾아오겠다는 말에 안마장이는 익주의 옷차림 이랑을 쓱 한번 훑어보고 나서,
“왜 그러시우.”
아까와는 딴판이다. 이제 손님은 아니다. 자기에게 볼일이 있는, 어딘가 무슨 부탁이 있는 사람이다. 옷을 벗었을 때의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때와는 달리, 다 꾸겨진 헌 군대옷을 입고 나서는 젊은 사람을 아래위로 고개를 놀리며 훑어보는 것이다.
“안마하는 얘기를 좀 들으려고요.”
“안마하는 얘기라니, 그게 무슨.”
“그저 좀.”
안마장이는 다시한번 익주의 아래위를 꼬나보고는,
“좋두룩 하시지.”
뱐말을 내던지고 흥미없다는 듯 탕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목욕탕을 나오는 익주는 새정신이 났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목욕 같은 목욕을 한 탓도 있겠지마는, 안마가 어떻게 시원했던지 거뜬한 기분이 상
쾌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공원 뒷담에 붙어, 팥죽장수 비빔밥장수 상밥장수들이 길가에 벌써 늘펀히 앉아 있다.
그는 지계꾼들 틈에 끼어 팥죽 한 사발로 아침 요기를 해버렸다.
여관을 찾아가기에는 아직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았으나 공연히 궁금증이 나서 전차길을 건너갔다. 우유를 한 병 사들었다.
여인은 벌써 머리를 곱게 빗고 아침상을 물리고 있는 참이었다.
익주를 보자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엊저녁 어두운데서 보기보다 훨씬 태가
나 보였다.
“애기가 잘 잡디까.”
익주는 애기 인사밖에 할말이 별로 없었다.
“네, 덕분으로 잘 잤어요. 어서 이리 앉으세요.”
여인은 아랫목께를 가리키며 익주를 앉게 하고 나서 자기도 살포시 치맛자락을 여미며 비스듬히 벽에 기대는 듯 앉는다.
“정말 뭐라고 말씀 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너무 감사해서…….”
여인은 고개를 숙여 새삼스레 공손한 인사를 한다.
“천만의 말씀을.”
익주는 여인이 아랫목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 말이 준 따뜻한 여운이 얼른 가시어지지 않고 가슴 밑창에 아른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오래 들어보지 못한 말소리였다. 고향 있을 때 어머니에게서 듣던 말이고, 대구 피난 살 때 재순에게서 들어보던 말이었다. 이제 어머니도 재순도 그리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낯선 서울거리, 같이 형무소에서 나온 여자에게서, 설사 여관방에서일망정 노릿노릿하게 장판지가 탄 온돌방 아랫목에 앉으라는 권함을 받는 마음이 마치 오래 떠나 있던 가족을 만난 듯 반갑고 포근하게 젖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늘 아래에서, 이 순간 그래도 통사정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익주에게 있어서는 이 여자요, 이 여자에게 있어서는 익주밖에 없을 성싶었다.
“아 참, 식사를 어떡 허셨어요.”
여인은 혼자 여관방에서 따끈한 아침상을 물리고 있는 것이 미안한 듯 익주의 누런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막, 지금 팥죽을 한 그릇 먹고 오는 길입니다.”
“저런 그래서 아침이 되시겠어요?”
“아주 맛있었읍니다. 새벽녘에 좀 춥길래 목욕을 가서 한탕 하고 나오는 길에 뜨끈뜨끈한 팥죽을 한 사발 먹었더니 아주 그만이군요.”
“호, 호호.”
여인은 우습다는 게 아니라 역시 미안함을 표시하는 그런 웃음이다.
“그래, 어디, 가실 데가 있읍니까.”
“……”
여인은 대답 대신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한숨을 하나 푹 쉰다. 그것으로써 모두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기 때문에 걱정이겠군요.”
남의 일 같지 않게 익주는 걱정이 되었다.
“남편이 부상을 임고, 육군병원에서 삼년을 앓다가, 결국…….”
“쯧쯧쯧…….”
익주는 절로 혀가 차졌다.
“둘다 이북서 왔었기 때문에, 어디 의지할 곳이 있어야지요. 어린거 하나를 데리고, 어떻게든 허비고 살아보려고 했었지만, 완전 실망하고 말았어요. ……
하다 하다 해볼 길 없어 한강엘 뛰어들었어요. 어린것을 떠밀어넣고…….”
여인은 여기에서 또한번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토한다.
“그랬는데 끝까지 죄가 많을라니까, 에미 혼자 구조를 받아 살아났지 머에요. 뱃속에 들었던 게 죽지를 않아, 형무소 안에서 해산을 하고…….”
여인은 우유병을 빨고 있는 어린애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다시 한숨이다. 익
주는 마치 이래도 너희가 살 수 있나, 어디 살 만하거던 한번 살아보아라 하고
운명의 신이 내동댕이쳐 내버린 남녀끼리가 여기 한자리에 만나게 된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내 죄값으로 이 여인을 나한테 맡겨주신 게 아닌가 하고도 생각되었다. 아마도 그러리라 싶었다.
그렇다면 다시 더 내려갈래야 갈 데 없는 새빨간 밑창에 굴러떨어진 한 남자 와 한 여자는, 기어코 이 시련을 돌파하고 칠전팔기해서 개굴창을 벗어나보여 주리라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익주는 두 주먹이 불끈 줘어졌다.
“나도 이북에 어머니 한 분 두고, 군대에 들어갔다가 부상을 당해, 퇴원하자 곧……, 어떤 실수로 서대문 신세를 진 사람입니다. 꼭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 같군요. ……·어디 의지하실 데가 없으시다니 같이 힘써서 한번 세상을 이겨 나가보지 않으시렵니까.”
여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익주는 자기 마음에 우러나는 대로 용감히 말했다.
“정말, 꼭 친동기간을 만난 것 같아요. ……·그렇지만 괜히 짐만 되지 않겠어요.”
“마찬가집니다. 내게도 돈이라고는 지금 육천여 환뿐입니다. 그러나 설마 하
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습니까.”
여인은 오롯이 웃었다.
웃으니까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하나 옴팍 파인다. 익주의 말에 동의하는 표시를 다정스럽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편으로 자꾸만 절망의 구렁팅이로 떨어지려는 두 사람에게 꼭같이 불끈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나 좀 나갔다 오겠읍니다. 어디 좀 싼 여관이나 하숙을 구하토록 하겠읍니다, 그리고 내 일터도 좀 알아보고요.”
익주는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네, 그래 주세요. 괜히 비싼 여관에 들어 있을 필요 없어요.”
여인은 마루로 따라나오며 말했다.
“아, 그리고.”
익주는 주머니에서 백환짜리 다섯 장을 꺼냈다.
“이걸로 점심에 뭐 좀 사 자시두록 하세요.”
“아이, 점심은 무슨 점심예요. 해가 길기나 해요 머.”
“그래도 그렇잖습니다. 당분간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애기 우유도 한 병 더 사고요.”
“……·네, 아이 우유나 한 병 살까요.”
여인은 미안쩍어하며 돈을 받는다.
“그럼 다녀오겠읍니다. 편안히 좀 누워 쉬십시오.”
군대화 끈을 졸라매고 난 익주가 군대식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어둡기 전에 빨리 돌아오세요.”
등뒤에서 여인의 말소리가 들린다. 익주는 주춤하고 한 발을 밖으로 내디딘 채 뒤를 돌아보았다.
―― 어둡기 전에 빨리 돌아오세요.
이 말에 이상하게 익주는 〈아내〉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여자의 뺨에는 다시 보조개가 파였다.
익주는 곧 얼굴을 바로 돌리고 말았다. 더 오래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의식적으로 꺾어봄으로써 굳은 의지를 자랑 삼아보는 심사였다.
맑은 아침 이다.
오늘도 역시 하늘은 푸르르고 공기는 향그럽다.
남대문시장 쪽으로 갔다.
남대문시장이라야 마찬가지 천하 낯선 데지마는, 그래도 시장 같은 데라야 당장 그날 벌이라도 찾아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제 한바퀴 돌아본 터이라 오늘이라고 다른 뾰족한 수가 나타날 턱 없겠지마는 그래도 그리로 발걸음을 옮겨놓아볼 수밖에 별도리 없었다.
시장은 여전히 복작거리고 있다. 이제는 불과 육천 환 남짓한 돈이 남았을 뿐이다. 이것으로 세 식구가 먹고 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 밑천이 다 거덜이 나기 전에 한시바삐 무엇이라도 붙잡아야만 된다. ……·초조한 발걸음이 쓸데없이 바쁘게만 동동거려질 뿐 신통한 게 생각나지도 않고 발견되지도 않았다.
—―우선 방부터 구해야지.
어제 시장 팥죽 팔던 아주머니가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서울역 앞으로 가면
자는 데만 삼맥 환이면 된다고 했다.
시장을 타고 그냥 서울역 쪽으로 넘어가면서 하숙을 토파보았다.
하숙집은 많았다.
한 달에 만 오천 환짜리도 있고, 하룻밤만 빌리는데, 불을 때면 삼백 환이고
불을 때지 않으면 이맥백환짜리 방들도 있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옆 판자집 한칸 방을 불 때달라고 해서 우선 하루치 삼백 환을 선금 주어놓았다. 한 달로 빌리면 좀 싸게 되겠지마는, 그런 형편이 안되니까 우선 하루하루를 살아갈 도리밖에 없다.
방을 빌려놓고 시장 쪽으로 넘어오면서, 방 하나로써 여자와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펀뜩 들었다.
당장 돈 없는 생각만 하고 여자와 함께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판에 방을 따로따로 가지지 못하는 사정을 여자는 이해해 주리라 싶었다. 보통 여자들이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지마는 그 여자는 충분히 알아주리라는 생각이 든다.
느지막해서 오십 환짜리 비빔밥을 한 그릇 사먹고, 오후에는 역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피기만 하다가 해가 졌다.
—―어둡기 전에 빨리 돌아오세요……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일찌감치 여관으로 갔다.
“방, 얻으셨어요?”
여인은 안았던 애기를 내려놓고서 일어서서 맞아주었다.
“네, 뭐, 형편없는 하꼬방이지마는 그냥, 아쉬운 대로 쓰긴 하겠어요.”
“얼마씩인데요. ”
“하루에 삼백 환씩.”
“잘됐군요. 이련 여관은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럼 곧 그리 가지요.”
“그러실까요.”
종로로 나와 전차를 탔다.
여자와 같이 전차를 타고 가면서 익주는 새 살림을 시작하는 것 같은 가볍지 않은 흥분을 느꼈다.
얻어놓은 방으로 오자, 여자는 걸레를 빨아 깨끗이 훔치고 나서 익주를 들어
오라고 했다.
“아주 좋아요. 뜨뜻한데요.”
여인은 제법 안도의 빛을 보이면서 아랫목을 짚어본다.
익주도 푸근히 가라앉는 마음을 느끼며 여자와 마주 바람벽에 기대앉았다.
“어떡헐까요. 저녁을 또 사먹으려면 돈이 들 텐메, 이왕이면, 풍로 하나 하고 냄비만 있음 쌀 사다가 끓여 먹었으면 좋겠지요?”
수줍음 머금은 보조개를 보이면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여자가 말한다.
“정말 그게 좋겠군요. 그렇지만 어린애를 데리고 어떻게……”
익주가 체면을 차리자 여인은,
“호, 호호호……."
한참이나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웃고 나서,
“아이참, 아이없는 예편네가 어디 있어요, 흐호호호.”
허리를 꼬며 또 웃어댄다.
딴은 그러고 보니 우스운 소리 같기도 하다. 익주는 조금 부끄러워진 이마를
쓱 문질렀다.
어린애를 업은 여인을 앞세우고 시장으로 나가, 남비, 풍로, 밥공기 둘, 양은 수저, 그리고 반찬이랑을 사들고 들어왔다.
여자는 신이 나서 불을 피우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내일은 구공탄을 사다가 피우도록 해야겠어요. 숯은 너무 비싸서, ……·불도 오래 쓸 수 있고.”
여인은 분주히 부채질을 하면서 방에 앉아 있는 익주를 쳐다본다.
미소로 익주는 대답했다. 방바닥에다 그냥 놓고 먹는 저녁이지마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이는 식사였다.
익주는 오래 오랜만에 푹 마음을 놓고 수저를 놀렸다.
――정말이지, 삼십이 된 사내가 설마 굶어죽을라고! 무슨 짓을 하든지 살아나갈 구멍은 있을 테지!
“왜된장이라 맛이 없군요. 내일은 조선된장을 사다가 찌개를 끓일께요.”
발그레 물든 여인의 얼굴은, 날씬한 콧대가 어딘가 매서움을 띠면서도 아름답게 빛난다.
ㅡ행복이라는 감정이 이런 걸 거야.
익주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수십 년 지기보다 더 가까울 수 있는·…·그것도 그냥 지기가 아니라, 부부처럼 아늑하고 미더운 이해심으로 감싸인 감정을 서로 가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거짓말같이 신기로우면서, 또 오랜 부부와는 달리 이성으로서 처음 만나는 흥분이 둬섞여 설레어오는 가슴이 행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었다.
늦어진 저녁을 마치고 한참 더 이얘기 저얘기 하다가 익주는 종로 쪽으로 슬슬 걸어올라갔다.
아침에 갔던 목욕탕 안마장이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3
――석 달만 매우면!
익주는 그런 자신이 들었다.
남들이야 삼년이 걸리건 일년이 걸리건 익주 자신은 석 달만 배우면 안마장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루 평균 열 명씩 만질 셈치고, 하루에 이천 환, 한 달이면 육만 환·…·또 이런 공상을 해본다.
――육만 환!
끔씩 스러운 돈이 다.
목욕탕에 세를 만환 낸다면 오만 환! 오만환이면 세 식구가 살림해나가는 데
는 풍족할 것 같았다. 안마를 배우는 동안의 석 달은 지게꾼 노릇을 해도 좋다. 군대에서 단련하고 형무소에서 익숙해진 노동, 그까짓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다행히 몸은 강철 같다.
상냥스러운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보조개 패인 뺨에 그 말소리가 들린다. 늑진하게 대래졌으면서 찰기있는 그 말소리.
――이제 비로소 새 인생이 개척되는 것이다.
비록 부부도 아니요 형제도 아니지마는, 오히려 그 어느 것보다도 더 피부가 통하고 피가 통하는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전차를 내려 목욕탕으로 가면서도 한껏 부풀은 가슴이 벅차기만 하다.
목욕집에는 아직 불이 환하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 안마양반 계신가요?”
“네, 들어오세요.”
“아니 저, 잠깐 만나기로 돼 있어서요.”
“올라와서 기다리시지요. 아마 곧 끝날 겁니다.”
친절한 주인영감 말에 익주는 마루로 올라가 긴 나무걸상에 앉았다. 아직도 손님들이 더러 드나들었다.
한참이나 기다려서 안마장이는 나왔다.
“일 마치셨어요?”
“응, 왔군.”
안마장이는 아까보다도 더 반말인지 해라인지 모르게 끄덕이며 옷장 대신 쓰는 바구니를 꺼내려가지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려다가, 무슨 생각이 났든지,
“요, 앞 골목에 들어서면 바로, 왼손편에 빈대떡집이 있어. 거기 가서 기다리시지, 나 곧 그리고 갈 테니.”
하고 익주를 건너본다.
“그럭 허죠.”
익주는 한걸음 먼저 나가서 가리켜주던 대로 빈대떡 집에 들어갔다.
술꾼들이 두세 패 왁자지껼 떠들어대고 있었다.
술을 할 줄 모르는 익주는 빈대떡을 하나만 시켜놓고 몇 젓가락 집지 않고 있는데 안마장이가 들어왔다.
“이거 미안합니다, 바쁘신데.”
익주는 일어서서 반겨 맞으며 나무걸샹을 권했다.
“아니, 머. 나는 일이 끝나면 언제나 이집에서 한 곱뿌씩 하고 들어가는 버릇이 돼서. …·한잔하지 않고는 하루를 산 것 같지 않거던? 하하하.”
짱그러진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서 누런 금니빨을 번쩍 드러내고 웃는다.
“마침 잘됐음니다. 한잔 하시지요. …·저, 사실은 안마를 좀 가르쳐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네에, 아이구 그걸 어떻게 배울려고, 젊은 양반이. 나, 아무래도 무슨 그런 볼일이 아닌가 했지.”
안마장이는 다시한번 자랑스럽게 금니빨을 드러낸다.
이쯤 되면 일은 됐다싶었다.
익주는 약주를 시켰다.
“사실은 군대에 갔다오니, 뭐 할일이 있어야지요. 마침 아침에 목욕 왔다가,
영감이 하도 재미있게 두드리는 걸 보고 문득 그 생각이 난 겁니다.”
“헐수 할수 없어서 그짓을 하지, 글쎄 새파란 젊은 사람이 뭣땜에 그런 걸…….”
술잔을 기울이며 안마장이는 약간 배를 퉁기는 눈치다.
“전들, 오죽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됐겠읍니까. 그저 한 식구 살리는 셈 치시고 좀 가르쳐만 주십시오.”
“글쎄, 그게 그렇습니다. 하루 이틀에 되는 것두 아니구 말씀이야…….”
“더도 말고 한 석 달만 가르쳐주십시오. 목돈이 없으니 월사금을 드릴 수는 없구, …·됐읍니다. 저녁마다 이집에서 약주 한 잔씩을 대접 해드리지요. 그러면 나두 품팔이를 해서라도 하루하루 치러나갈 수가 있을 테니까요.”
“글쎄, 그, 저엉 원한다면야 나두 좋긴 한데…….”
거나해지자 안마장이는 동경서 살던 얘기를 자랑삼아 꺼내기 시작했다.
“그땐 참 좋았읍니다. 거긴 남탕 여탕 할것없이 맘대루 댕기면서 안마를 했거던 ? 일본 여자들 참 안마 좋아합니다. 살살 만져주면 슬슬 녹아나지요. 근데 정말은 녹아나는 건 이쪽이거던? 생각해보슈. 빨가벗은 여자의, 고 말랑말랑한, 눈결 같은 흰 살을, 어깨로, 등어리에서 엉뎅이께로, 아유 말 맙쇼. 돈은 받을 게 아니라 이쪽에서 도로 줘야 할 판이지 하하하. 정말 오줌을 싼다니까,
하아 하아 하하. …·아닌게아니라, 사실 그 재미로 이걸 배웠지.”
안마장이는 술잔을 쭉 들이켜고 나서,
“그러다가 안마 잘한다고 한 계집이 반해가지고, 한동안 몰래 붙어살기도 했
다니까.”
또한번 웃어제 낀다.
그러고 있는데 목욕집에서 일 보는 총각아이가 안마장이를 찾아왔다.
“아, 계시군. 저, 주인아저씨가 잠깐 오시래요.”
총각아이는 뛰어온 모양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일어서기를 재촉한다.
“주인아저씨가 왜 나를 오래.”
“글쎄 빨리 가시자니까요.”
“그래, 가마.”
“곧 오세요.”
“그래 이자식아, 간다잖니.”
취기가 약간 도는 듯한 안마장이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젊은 친구, 술이 들어가면 또다른 생각이 난단 말이야, 하하하.”
익주의 목을 껴안는다.
주정을 하는 모양이다.
익주는 집 생각이 났다.
아까부터 익주는 밤의 잠자리를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가 눕고, 가운데 어린애를 눕히고 맨 웃목에 익주가 누워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마는 방이 워낙 콧구멍만 해놓아서, 그러더라도 여자가 얼마나 불편해 하랴 싶었다. 혹은 불안해 할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재순과 손을 맞잡고 월남해 와가지고도, 한집에 살면서 언제나 불을 끄고 나서야 옷을 벗기 마련이었고 되도록 간격을 많이 두고 눕게 노력했고, 자리에 누워서는 숨소리라도 행여나 거칠까 주의하곤 했었다.
“어서 볼일 보십시오. 그럼 낼 밤에 다시 찾아오지요.”
“아따, 이친구가 어지간히 서두르기는, 제길 색시 너무 초저녁부터,”
그러는데 문이 열리고 목욕집 주인 영감이 들어왔다.
“응, 이 사람이야.”
목욕집 주인이 익주를 보고 하는 소리다. 목욕집 주인 뒤에는 순경이 하나 따라 들어왔다.
“어이구, 나으리 웬 일이십니까.”
안마장이는 순경을 보고 굽실 하면서,
“자, 이리 앉으세요. 한잔 하십시다.”
안마장이는 호들갑을 떨면서 순경의 손을 잡으려고 한다.
“잠깐, 두 분 다 밖으로 좀 나오시오.
순경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이르고는 먼저 밖으로 나간다.
“아따, 안마장이 술도 쉬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면서 안마장이는 일어선다.
익주도 영문을 모르는 대로 따라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파출소까지 좀 갑시다:”
익주는 도무지 무엇이 어떻게 됐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파출소에는 왜 그러십니까, 나으리. 안마하시게?”
안마장이는 그냥 농조로 지껄이며 어슬렁 어슬렁 순경 뒤를 따른다.
“그럼 나는 들어가보겠읍니다.”
목욕집 주인 말에 순경은,
“그럭 허세요. 그 사람은 파출소로 갔지요?”
“네, 먼저 갔읍니다.”
파출소 문을 들어서니, 목욕을 갓나온 살결이 뿌옇게 불은 중년 신사가 하나 와 있었다.
“저, 이양반이 시계를 잃어버렸다는데,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보니 없어졌다는 거야.”
순경은 안마장이와 익주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네, 바로 이 주머니에, 이, 윗주머니에 넣어뒀읍니다.”
중년 신사는 저고리 가슴포켓을 가리키며 눈이 둥그렇게 되어가지고 파출소 안이 찡 울리는 큰소리로 설명을 한다.
“혹, 보지 않았소?”
순경은 안마장이 쪽을 노려보았다.
“아니, 이 나으리가 생사람을 잡아도 푼수가 있지, 아니, 나보고 도둑질을 했단 말씀입니까?”
안마장이는 정색을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니, 혹, 못 보았느냐 말이오.”
“아, 여러 말할 것 없이 뒤져보면 알게 아닙니까, 손쉽게. 원 이런 참, 나 살다가 벨끌을 다 보겠어.”
“그럼, 잠깐 몸조사를 하겠소.”
순경은 안마장이의 옷 주머니를 다 뒤졌다. 담배 부스러기와 돈 이삼천 환 가량이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익주에게로 순경은 눈살을 돌렸다. 익주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당신, 아까 목욕집에 들렀다지?”
“네.”
“목욕도 안하면서 뭣하러 들렀어.”
“이 양반 좀 만나려고요.”
“무슨 일루?”
“안마를 좀 배워보려고요.”
“그래, 마루에 올라가 있었다지?”
“네, 주인 영감이 올라와 기다리라고 해서 잠˙깐 올라가 걸상에 앉았었읍니다.”
“옷장 있는 데로 간 적은 없나?”
"네 없읍니다. 거울 있는 쪽에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잠깐, 몸 좀.”
순경은 익주의 옷 주머니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뿐 아니라 발가벗고 본대도 겁날 것 없다.
“이건? 이건 누구 시계요.”
순경 손끝에 시계가 하나 달려나온다.
“아 그겁니다. 바로 내 시겝니다.”
중년 신사가 달려와서 시계를 받아들었다.
익주 양복 저고리 왼쪽 주머니에서 시게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정말 탄복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새 시계가 언제 익주 주머니에 들어왔단 말인가!
딱! 하고 순경의 손이 익주의 뺨으로 올라붙었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
“아니 이런 멀쩡한 친구 같으니라구! 아니 그래, 새파란 친구가 도둑질을 해 ?·…·원 난 또 안말 배우겠다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순 도둑놈일세그려. 큰 일날 뻔했네 큰일날 뻔했어!”
안마장이의 침이라도 밸을 듯한 말투에 익주는 와락 속으로 무엇이 치뻗는 것을 느꼈다.
——저놈이구나!
아까 목욕집에서 나올 때 먼저 나가서 기다리라고 한 기나 또 빈대떡 집으로 총각아이가 찾아왔을 때 익주 목을 껴안고 무어라고 주정하듯 지껄여대던 일! 틀림 없는 안마장이의 짓이었다.
“앉아!”
순경의 호령이다.
익주는 꼼짝해볼 도리가 없었다. 분명히 제 주머니에서 나오는 시계를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변명이 소용될 리 만무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그래도 익주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벙벙한 채 딱 잡아떼었다.
“이자식이?”
이번에는, 앉으라는 소리도 없는데 픽! 주저앉고 말았다. 구둣발길로 호되게
정강이께를 채인 것이다.
“주소가 어디야.”
순경은 권총대를 끌러놓고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
“주소가 어디냐 말이야!”
“남대문시장 저쪽입니다.”
익주는 목이 졸린 심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동 몇 번지냐 말이야!”
“잘 알 수 없읍니다.”
“이런 망할 자식이? 제집 주소도 몰라?”
“집이 없읍니다.”
“원, 자식이라곤. 그럼 어디서 자고 댕겨!”
“엊저녁엔 공원에서 잤읍니다.”
“엊저녁은 공원이고 그제 저녁은 또 어디야.”
“……”
“안 들려?”
“서대문서 잤읍니다.”
“서대문 어디 말이야?”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익주는 거짓말하지 않고 살기를 맹세한 사람이다.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형무소 문을 나온 것이다.
“뭐 ? 형무소? 이자식아, 이틀을 못 참고 또 도둑질이야?”
“오오라 전과자로군그래. 어이 정말 큰일날 뻔했는걸? 원, 저런 멀쩡한!”
안마장이의 말이다.
익주는 부르르 치를 떨면서 안마장이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저런 도둑놈이
있을까 싶었다.
대강의 취조가 끝나자 순경은,
“두 분은 돌아가시오.”
한다.
“잠깐!”
익주는 안마장이를 불렀다.
안마장이는 순간 켕기는 눈알이 되며 돌아본다.
“당신은 나를 믿어주겠지요. 내가 결백한 걸 당신만은!”
익주는 다시 형무소에 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만 누구라도 자기의 결백을 인정해주는 한마디 말만 듣고 싶었다. 그것으로 만족할 것 같았다.
“아니 이런 딱한 친구라곤! 그래 제 호주머니에서 뻔히 시계를 꺼내놓고도 무슨 딴전을 차릴 수작이야 응? 수작이!”
안마장이는 코방귀를 킁! 뀌는 것이었다.
“정말! 정말, 한마디 말도 못해주시겠소?”
“아니, 이 딱한 친구 봤나, 내가 무얼로 네가 안 훔쳤다는 걸 알 수 있단 말
야, 응?”
“중거? 양심을 증거로, 당신의 양심을 증거로!”
익주는 목메어져왔다.
제발 이사람 입에서,
—―그래, 너는 결백하다!
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조금도 그를 원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심정이다.
“원, 미친 자식을 다 팠네, …·그럼 나으리, 갑니다.”
안마장이는 문을 밀려고 한다.
익주는 벌떡 일어나 그를 붙잡았다.
“좋아요! 아무말 안해도 좋습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익주는 주머니에서 남은 돈을 있는 대로 십환짜리 한장 안 남기고 꺼냈다.
“미안하지만 이걸, 내가 약도를 그려 드릴 테니 우리집에 좀 전해주세요. 제
발 부탁입니다.”
애걸하다시피 매달리며 익주는 사정 했다.
“아니, 이거, 그래 난, 도둑놈 심부름이나 하란 말인가? 원, 참…….”
딱 잡아떼고는 발길을 돌린다.
익주는 머리끝이 쭈뼛 한꺼번에 일어서는 분노를 느꼈다. 목덜미에서 등골로 전기가 통하는 듯 찌릿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시퍼런 불꽃이 튀기는 눈앞에 권총이 있었다.
눈깜박할 사이의 일이었다.
빵! 빵!
총소리가 두 방 울리고 안마장이가 뱅그르 돌아 툭 쓰러지면서 어깨 밑으로 피를 쏟았다.
순경들이 달려들어 손목에 수감을 채우고 하는 동안 익주는,
“참되게 살겠단 말이다! 참되게 살겠단 말이야! 근데 왜, 근데 왜 못 살게 구느냐 맡이야!”
하고 악쓰듯 부르짖었다.
본서로 달리는 백 차에 올려앉혀, 익주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젯밤보다 조금 배가 부풀은 듯한 반달이 여전히 차갑게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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