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5 07:36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입니다. 이제 그는 얼마 안 있으면 청와대를 떠나야 합니다. 퇴임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조선일보와 자신의 5년 임기를 되돌아보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촛불시위를 놓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촛불 시위는 계획적으로 한 거라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진보 단체들이 다 모였다고 한다. 나중에 보니까 이미 그 사람들이 '이걸 (시위를) 크게 한번 해서 정권을 뒤흔들겠다'는 계획이었다고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에 일어난 촛불시위가 진보 단체들이 정권을 흔들려고 계획적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 촛불시위의 시작은 MB 교육 정책을 반대한 청소년들의 '촛불문화제'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전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몰입교육,놀토 폐지, 학교 자율화 등의 교육 방향을 정합니다. 이후 4월 15일 이명박 정부는 학교에 자율성을 준다는 명분으로 '학교자율화' 정책을 발표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학교자율화'정책이 발표되자 청소년들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이명박 정부의 '학교 자율화 반대 촛불 문화제'를 갖습니다.
▲4.19 학교자율화 반대 촛불문화제에 등장했던 피켓. 출처:인터넷뉴스 바이러스.
'0교시 !야자보충!우열반!학교자율화반대 청소년연대'라는 이름으로 모인 200여 명의 청소년들은 '교육과학기술부를 교육사육부로 바꿔라','0교시 할거면 밥 먹고 학교오란 말 하지 마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이명박 정부의 '학교자율화 정책'을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촛불문화제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직접 겪는 교육 정책의 문제점을 평화적인 집회로 바꾸어보겠다는 청소년들의 순수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촛불문화제가 등장한 배경은 2002년 11월 30일의 효순,미선 두 여중생 사망을 추모하는 촛불 추모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8년 11월30일 광화문에 모인 효순,미선 추모 촛불(좌)미국에서 흔히 죽은 이를 애도하는 촛불 추모 모습(우)
미군의 무지막지한 장갑차로 꽃다운 두 아이의 생명이 짓이겼지만, 그 미군들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고, 그것에 분노하고 그 두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광화문 앞에 모였습니다. 1만여 명의 사람이 1만여 개의 촛불을 켜고, 두 아이를 위한 추모의 촛불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촛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민들이 할 수 있던 유일한 자신의 표현으로 시작됐고, 이것이 2008년 청소년들의 '촛불문화제'로 이어졌습니다.
' 조직적인 정권 흔들기 VS 자발적인 참여'
이명박 대통령은 4월15일부터 19일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합니다. 이 정상회담에서 쇠고기 수입협상의 문제가 어떠한 검토도 없이 급속하게 논의됩니다.
여기에 'MBC PD수첩'의 광우병 위험성 보도가 나오자 촛불문화제로 모였던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쇠고기 수입협상이 가져오는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이 퍼지기 시작하고, 이것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로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출처:오마이뉴스.
4월 중순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5월2일 한 인터넷 카페가 개최한 '제1차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 그동안 모였던 청소년들이 주축으로 시민이 함께 참여하며 본격적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직적인 진보 단체들이 뒤에서 조정하여 청소년들이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가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참여 동기를 조사한 결과 대부분 자발적인 참여였습니다.
▲촛불집회 참여 중고생 8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출처:서울신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중고생 800명을 대상으로 718개의 유효설문지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참여한 중고생 71%는 자발적 참여였고, 이중 친구의 권유도 18%였습니다. 결국, 90%에 가까운 중고생들은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처음부터 촛불집회가 쇠고기 반대 시위가 아니었다는 부분입니다. 처음 이명박 대통령의 학교자율화 정책을 반대하던 청소년들은 점차 이명박 정부의 정책 대부분에 반대로 이어졌고, 이것이 쇠고기 협상반대 촛불집회로 확대된 것입니다.
중고생이 시작한 촛불집회는 이명박 대통령을 몰아내거나 정권을 흔들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이명박 대통령의 교육정책을 반대했고, 미국산 쇠고기 협상을 계기로 이명박 대통령 퇴진의 구호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민은 정부의 정책을 반대할 자유와 권리가 있으며, 청소년들이 먼저 이런 권리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를 몰아내기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이라고 퇴임을 앞둔 2013년 2월까지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국민보다 자신을 더욱 사랑했던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경찰청장 불러서 '절대로 사람이 안 다치도록 하라'(경찰이)후퇴해도 좋고 (시위대가) 청와대 들어와도 좋으니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명박 대통령이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한 이유는 앞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몇 명 다치면 정권을 바꿀 수 있다고도 했다"
즉, 진짜 국민이 다치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몇 명이 다치면 이것이 정권교체에 대한 진짜 촛불집회로 확대될 수 있으니 이명박 대통령은 경찰에게 촛불집회 시위를 제대로 막으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촛불집회에 등장했던 컨테이너를 우리는 흔히 '명박산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촛불집회를 막아낸 명박산성은 어청수 경찰청장의 작품인데, 어청수 경찰청장과 이명박 대통령의 보은인사는 2년 전에 작성했던 글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정치] - '명박산성'어청수,MB 보은으로 화려한 컴백.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나뉩니다. 촛불집회를 '진보의 새 물결을 열어준 희망의 사건'이라는 측과 '위험한 세력들이 주도한 불순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로 극렬하게 나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정치에서 대통령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747공약. 출처:MB의 추억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세력과 이념적인 대결로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보수적이라는 이념적 지향이 당선된 요인이 아니라,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과제가 가장 중요하게 적용되어 당선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념상 포용력을 조금만 발휘했어도 안정적 국정운영이 가능했던 인물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경제보다 더욱 극우화된 모습을 보였고, 이는 구시대적인 이데올로기의 대결을 더욱 고착화했습니다.
이명박 정권 초기 자발적인 청소년들의 참여로 시작됐지만, 점점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가게 된 배경은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뉴라이트와 보수 세력의 촛불집회에 반대하며 행동했던 여러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 신문과 6월10일 열렸던 대규모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가 열릴 예정이었던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뉴라이트 전국연합,국민행동본부 등 보수 단체가 개최한 '법질서 수호 및 FTA비준촉구 국민대회'출처:오마이뉴스
뉴라이트와 국민행동본부,선진화국민회의 등 보수 단체가 진짜 자발적인 시민단체로 행사를 진행하고 행동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뉴라이트는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를 만든 단체답게 정부의 지원 속에 MB정권 5년 내내 나름의 성과급을 받았습니다.
[현대사] - 뉴라이트 대통령이 만들어 낸 친일민국의 실상
[현대사] - 친일 뉴라이트 연합,한국을 접수하다.
[현대사] - 뉴라이트민국,민주평통까지 장악하다
[현대사] - 친일 뉴라이트연합,국가인권위원회 점령.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인 실리보다 철저하게 자신의 사람만으로 불통의 정부를 만들었고, 이를 비판한 세력을 자신을 공격하는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바꾸어버렸습니다.
0교시 수업을 반대하고 영어 몰입교육의 비효율성을 지적했던 청소년들의 시작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MB정부의 보수세력들은 모든 것을 '불순 세력','좌익세력','빨갱이' 등으로 매도했습니다. 결국, 누군가의 외침은 '정권을 전복하는 세력'이 되고, 이런 세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MB정권하에서 '애국자'로 바뀐 것입니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집회 초기, 그가 국민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고 소통하면서 진짜 '실용주의 대통령'으로 역사 속에 남았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그를 비판했던 '아이엠피터'는 그가 퇴임하면서 한 가지는 깨닫고 청와대를 떠났으면 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너무 사랑하는 애정결핍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역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지 아직은 모르지만, 국민을 사랑하지 않았던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그와 함께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과 국민의 심판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