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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06-29(음) | 고종, 동래 부사 윤치화를 소견하며 일본의 습속과 변방의 방어 등에 관하여 대화함 |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렇게 불러서 만나보려 한 것은 실로 이 땅이 두 나라의 접경인데다 왜(倭)의 습속이 교활하기 때문이다. 이미 조약(條約)을 새로 정한 것이 있는데, 변방을 견고히 지켜 백성을 다스리는 정사에 있어 십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마음을 다하여 내 뜻을 널리 펴 나가 이렇게 특별히 불러서 만나보는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신은 재주와 식견이 부족한데 외람되이 변방의 임무를 맡았으니, 장차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너무도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해는 곧 흉년이 든 뒤끝이다. 다른 해와는 다르니 방수하는 일과 구제하는 계책을 잘 조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흘러 전하는 말을 듣건대, 기근이 심할 뿐만 아니라 전염병까지 돈다고 하니, 백성의 실정을 생각하면 너무도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동래와 의주(義州)는 모두 변방의 방어에 있어 요충지이다. 의주가 비록 대국(大國)과의 경계 지역이라 하더라도 동래를 이 의주에 비교하면 더욱 각별한 곳이다. 왜인들은 출입이 일정치 않고 교활함과 속임수만을 숭상하니, 잘 막아 금해야 한다.”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신이 아직 부(府)에 도임하지 않아 그곳의 일들을 상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전하는 말을 들으면 근래 왜인들이 출입할 즈음에는 매번 이들을 통솔하는 자가 있어 그들이 폐단을 일으키는 바가 예전 같이 심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연(新延)은 올라왔는가?”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신연이 올라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신연의 하인(下人)이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은가?”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전에 일찍이 외임에 제수되었던 적이 있는가?”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역임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서 동래까지 1000리는 되는가?”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서울에서의 거리가 980리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로(西路)로 가는 이정(里程)에 비하면 1000여 리는 될 듯하다.”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언제쯤 임소에 도착하겠는가?”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그 사이 비가 올지 햇볕이 날지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만, 장차 18일쯤에는 임소에 도착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 출발을 할 터인데, 어디에서 밤을 지낼 것인가?”
하니, 윤치화가 아뢰기를,
“내일 출발할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방(關防)의 중요함이 이와 같고 기근의 염려가 또 이와 같으니, 잘 내려가서 잘 다스리도록 하라.”
丁丑六月二十九日申時, 上御迎春軒。 東萊府使入侍時, 同副承旨朴憙陽, 假注書金商翼, 記注官尹善柱, 別兼春秋金羽均, 以次進伏, 東萊府使尹致和, 進伏楹外訖。 上曰, 史官分左右。 憙陽曰, 下直東萊府使, 使之進前, 奏職姓名乎? 上可之。 致和進前奏職姓名訖, 上曰, 今此召見, 誠以此地爲兩國接壤, 且倭俗巧黠, 旣有約條之新定者, 其固圉治民之政, 不可不十分着念故也, 爾其悉心對揚, 勿負此特爲召見之意也。 致和曰, 臣才識淺短, 猥膺邊寄, 將不知何以圖報, 萬萬惶懍矣。 上曰, 今年, 卽歉荒之餘也, 與他年有異, 防守之節, 拯濟之策, 須善措處, 可也。 致和曰, 聖敎至此, 敢不盡心, 而聞流傳之言, 則非徒飢饉, 且有癘疫, 言念民情, 極爲憧憧矣。 上曰, 東萊·義州, 俱係邊防重地, 而義州雖是大國之交界, 以東萊較義州, 尤爲別焉, 蓋倭人出入無常, 專尙巧譎, 善爲防禁也。 致和曰, 臣旣未到府, 凡事姑未詳悉, 而轉聞之則近日倭人出入之際, 每有領率, 其作弊, 不至如前日云矣。 上曰, 新延上來乎? 致和曰, 新延上來矣。 上曰, 新延下人之所傳, 如是乎? 致和曰, 然矣。 上曰, 其前曾經外除乎? 致和曰, 未經矣。 上曰, 自京距東萊爲千里乎? 致和曰, 距京爲九百八十里矣。 上曰, 比西路里程, 似可爲千有餘里也。 致和曰, 然矣。 上曰, 何時到任乎? 致和曰, 其間雨暘, 未可預料, 而將於十八日到任矣。 上曰, 今日將爲離發, 而宿於何地乎? 致和曰, 擬於明日發行矣。 上曰, 關防之重如此, 飢饉之憂又如此, 善爲下去做治也。 致和曰, 下敎諄是諄複, 臣謹當殫竭圖報矣。 上命東萊府使先退, 憙陽曰, 宣諭別諭, 何以爲之乎? 上曰, 出去爲之也。 上命史官就座, 又命退, 承·史以次退出。
★接壤(접양)다른 구역의 땅과 서로 맞닿음 /경계를 접하다 ,인접하다
1878-08-24(음) | 충청 수사 이교복, 서산 근해에 정박한 일본 수심 측량선의 정황에 대해 지방관들이 탐문한 내용을 보고함 |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교복(李敎復)이 이양선을 문정(問情)한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이번 달 19일에 도착한 서산 군수(瑞山郡守) 박규동(朴奎東)의 첩정(牒呈) 내용에,
‘15일 미시(未時)에 장고도(長古島)에 가서 바라보았는데, 선체는 과연 돛대가 셋인 배[三帆船]였으며 새까만 선체 가운데 연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군(本郡) 경내가 아니므로 문정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날 신시(申時)쯤, 저들의 종선(從船) 1척이 본리(本里)에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뭍에 내린 10여 명 가운데 4명이 곧바로 군수(郡守)의 하처방(下處房)으로 들어와서는 먼저 절하더니 무릎 꿇고 앉았습니다. 그 중에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기에 어느 나라 사람이고, 무슨 일로 여기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말하기를,
「작년에 정부(政府)에서 약조한 것에 대해 주관(主管)께서는 들어보지 못하였습니까? 우리는 수심을 측량하기 위해 왔습니다.」
하였습니다. 4명의 성명은 무엇이라 하는지 물어보았더니, 그가 성명을 써서 보여주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육군 소위(少尉) 가이즈 미쯔오(海津三雄). 하나, 해군 소위 가토 시게나리(加籐重成). 하나, 해군 소위보 후쿠치 구니카네(福地邦鼎). 하나, 외무성(外務省) 어학생도 다케다 쿠니타로(武田邦太郞). 이 중에 쿠니타로가 우리말을 할 줄 알았습니다. 대선(大船) 안에는 모두 몇 사람이나 있으며, 사환(仕宦)은 몇 명인지 물었더니, 사환은 21명이고 이하는 110여 명이라고 답하였습니다. 주장(主張)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물었더니, 해군 소좌 마쓰무라 야스타네(松村安種)이라고 답하였습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병든 이는 없는지, 땔감과 식량은 떨어진 것이 없는지 물었더니,
「땔감과 식량도 넉넉하고 사람들도 아직은 무양(無恙)합니다. 그런데 지금 타고 온 종선으로 바다 위에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점심[午飯]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바람도 역풍이고 조수도 빠져버려 대선까지 갈 수 없게 되었는데, 쌀은 배에 있지만 땔감과 찬거리는 다 떨어졌습니다.」
라고 하기에, 닭 5마리, 달걀 30개, 땔감 3속(束), 소금 3홉(合)을 청하는 대로 내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말하기를,
「닭 값은 내일 가져 오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감영에서 신칙한 대로 접대하고 위문한 물건에 어찌 값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자청한 물건은 전례대로 값을 치를 것입니다. 귀관(貴官)의 관직과 성명을 써주십시오.」
라고 하기에 군수가 관직과 성명을 써서 주었더니, 그가 내일 다시 뵙겠다고 말하고는 배에 올라 곧바로 본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산 위에 깃발을 꽂거나 바위 위에 흰색으로 칠을 하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을 군수도 왕왕 볼 수 있었는데, 기표(旗標)를 꽂을 때 붉은 기를 꽂기도 하고 흰 기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종선의 형태는 머리와 꼬리가 뾰족하여 쪼개진 오이[破苽] 모양 같았습니다. 옷차림은 검은색이나 회색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잇달아 도착한 해당 군수의 첩정 내용에,
‘일본인들이 다시 오겠다고 약조하였는데, 기한을 어기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리(將吏)를 뽑아 탐지하도록 하였더니,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저들의 배에 올라가 보니, 저들이 서간 1장과 돈 1냥(兩)을 내어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땔감과 반찬값이니 관가로 가져가 납부해 주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관가에서 주도록 한 물건인데 만일 받아가서 납부하면 저희에게 죄를 물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일본인이 크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구해달라고 요구한 물종에 대해 값을 치르는 것이 이미 정부의 약조에 있으니, 이러한 뜻으로 관가에 가져가서 납부하시오.」
라고 하기에, 감히 가져 와서 납부하였습니다.」
그들이 보낸 서간을 열어 보았더니, 땔감과 찬거리를 구해준 일에 대해 더없이 감사하며 돈 1냥을 보내니 물건 주인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뜻으로 문안을 작성한 것이었는데, 애초에 성명을 기록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값으로 치른 돈을 돌려보내는 것도 서로 다투는 일이 될 듯 하고, 답서를 지어 보내는 것도 혹 격식을 맞추지 못할까 염려되어 다만 소주(燒酒) 1병과 살아있는 닭 30마리, 계란 50개를 장리를 선정하여 궤급(饋給)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잇달아 도착한 홍주 겸임 전 영장(洪州兼任前營將) 조희인(趙羲仁)의 첩정에 따르면,
‘홍주 경계 부근의 여러 섬에 일본인들이 세운 깃발을 따로 사람을 보내어 적간(摘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효자도(孝子島)에 세운 깃발 2면 중 1면은 가운데가 붉고 테두리가 흰색이었으며, 1면은 가운데가 희고 테두리가 붉었습니다. 저두도(猪頭島)에 세운 깃발 1면은 가운데가 붉은색 원이고 흰색 바탕이었습니다. 육도(陸島)의 호숫가 두 곳에 세운 깃발은 모두 흰 바탕에 붉은 색 테두리였습니다. 목도(木島)에 세운 깃발은 완전히 붉었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육도(陸島) 육도는 경기도 안산에 하나 있고, 충남 보령시에 하나 있다. 보령의 육도는 우리나라 유인도에서 가장 작은 섬에 속한 편이다. 면적 0.06km2, 해안선 길이 1.6km, 최고점 21.9m이고 28가구, 56명이 거주하며 대천항과는 11.5km, 오천항과는 8.3km 거리에 있다. 보령 천수만의 여섯 개 섬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데 그 섬 가운데서 지대가 가장 높고 육지와 가까운 섬이라 '육도(陸島)'라고 부른다. 유인도인 월도 허육도, 무인도인 오도 안마도 등과 군도를 이루며 천수만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이곳은 너무 좁아서 농사를 지을 땅이 거의 없다. 그래서 주민들의 주업은 어업이다. 섬 주변의 조류가 급하여 난장망과 주목망의 형성이 잘 되어 어획량이 많은 곳이었으나 지금은 예전과 같지가 않다. 그 이유는 주변에 거대한 간척지들이 들어서고 물 흐름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인용[네이버 지식백과] 보령시 육도 [陸島] - 지대가 가장 높고 육지와 가까운 섬 (한국의 섬 - 충청남도, 2021. 06. 15., 이재언)
▶육도(陸島)'는 호湖변에 존재해야 또한 강에 조수에따라 드나들수 있다는 사실
狀啓以爲今月十九日到付瑞山郡守 朴奎東牒呈內十五日未時至長古島望見船體則果是三帆船而船體純黑中有煙筒而非本郡境故問情不爲擧論同日申時量彼從船一隻來泊本里下陸十餘人中四人直入郡守下處房中先拜跪坐而有解我言語者故問何國人以何事來此彼曰昨年政府約條主管未得見聞耶吾等測水次來問四人姓名云何彼書示姓名中一陸軍少尉 海津三雄一海軍少尉 加籐重成一海軍少尉 補福地邦鼎一外務省語學生徒武田邦太郞而邦太郞能解我言問大船中合幾人仕宦幾人答仕宦二十一人以下一百十餘名問主張人誰也答海軍少佐 松村安種也問船中諸人俱無疾病柴糧亦無窘乏答柴糧優數人姑無恙而今此從船駕海遍行不食午飯風逆潮落未及大船而米雖在船柴饌俱乏云故鷄五首鷄卵三十箇柴三束鹽三合依請施給則彼曰鷄價明當持來云故我曰依營飭接慰之物何可論價彼曰吾等自請之物依例給價而貴官職姓名書示之云故郡守書給職姓名則彼以明日更逢爲言仍乘船卽向本船所住處山上挿旗巖上塗白等事郡守所見處往往有之而旗標或挿紅色或立白色從船體樣頭尾竝尖狀如破苽衣樣或黑色或灰色繼又到付該郡守牒呈內彼人更來有約違期不來故定將吏探知回告內登上彼船則彼人書簡一張錢一兩出給曰此是柴饌價傳納官家云故曰自官家許給之物若捧納難免罪責云則彼人大叱曰求請物給價旣有政府約條以此意傳納官家云故玆敢持來納上云圻見彼書則柴饌求給之事感謝無比錢一兩送之分給物主之意措辭而初無姓名記錄價錢還送似是相持答書修送或慮失格只以燒酒一壺生鷄三十首鷄卵五十箇定將吏饋給云鱗次到付洪州兼任前營將趙羲仁牒呈內州境附近諸島彼人所建標旗別遣摘奸則孝子島所建旗二面內一面中紅邊白一面中白邊紅猪頭島所建旗一面紅心白質陸島湖邊兩處所建旗竝白質紅邊木島所建旗全紅云
1878-08-26(음) | 충청 수사 이교복, 일본의 수심 측량선 일행과 나눈 문답 내용과 병세가 심각한 함장 이하 선원들의 치료를 위해 건물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대해 보고함 |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교복(李敎復)이 일본 선박과 문답한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이번 달 22일에 도착한 우후(虞候) 이교신(李敎臣)의 첩정(牒呈)에 따르면,
‘이번 달 20일 진시(辰時)에 화륜 종선(從船) 1척이 와서 정박하고 일본인 6명이 뭍에 내려서는 먼저 지난날 묵었던 청사(廳舍)를 내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내 허락해 주었습니다. 저들 가운데 다케다 쿠니타로(武田邦太郞)이 군사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기를 청하였는데, 준엄한 말로 물리쳤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억지로 청하기는 어려우나,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의 산수를 둘러보게 해 주시고, 동문과 남문에 올라가 보게 해 주시기를 재차 요청합니다.」
라고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대도독(大都督)께 여쭈어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이내 일어나서 나갔습니다. 같은 날 신시(申時)에 화륜 종선 1척이 또 진두(津頭)에 정박하였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조금 전에 나가더니 지금 무슨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지금 풍랑으로 인해 유숙하러 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묻기를,
「이 강의 수심을 측량하는 데 하루면 족할 것인데 연일 두세 차례씩 얼굴을 바꾸어가며 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도입니까.」
하였더니 그가 답하기를,
「조수(潮水)가 매일 다르게 바뀌어 지금까지 측수하고 있습니다.」
하고는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나갔습니다. 이번 21일 진시에 화륜 종선 1척이 다시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일본인 3명이 뭍에 내리자마자 먼저 지난날에 묵었던 청사를 내어주기를 청하기에, 이내 들어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또 함께 수심을 측량할 교리(校吏) 2명을 내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었더니, 저들이 측수는 하지 않고 배를 돌려 선창(船艙)으로 옮겨 배를 댔습니다. 일본인 5명이 각기 무슨 물건을 가지고 내리더니, 잠시 후에 기구를 설치하고 영내(營內)를 이모(移摹)하였는데, 인가(人家)와 수목(樹木)이 완연(宛然)히 그림과 같아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또 한산사(寒山寺)로 가서 영내 지도를 이모하기를 다시 앞서 한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같은 날 미시(未時)에 돛을 말아 올린 종선 1척이 서문 밖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7명이 뭍에 내려서는 또 지난날에 묵었던 청사를 내어주기를 요청하기에 이내 들여보냈습니다. 저들 가운데 한 명은 해군 주계부(主計副) 소메카와 유키요시(染川行義)라는 자였고, 한 명은 해군 츄군 이죠(中軍醫桑)이라는 자였으며, 한 명은 아사야마 겐조(淺山顯藏)이라는 자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함장이 앓고 있던 지병이 근래 들어 창기(瘴氣)가 더욱 심해졌고, 또 9명이 병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습한 곳에서 치료하기가 어려우므로 따뜻한 곳에서 조섭(調攝)하게 하고자 하오니, 관청 건물과 여염집을 빌려주시기를 원합니다. 병자 뿐 아니라 의상(醫桑)과 사환(使喚)이 모두 10명이니 도합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집을 빌려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저들의 배가 문득문득 드나드는 것이 참으로 우려스러운데, 이런 와중에 아무리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라고는 하나 가벼이 먼저 허락하는 것은 어렵고 신중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에 치보(馳報)하오니, 헤아려 처분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忠淸水使 李敎復以日本船問答馳啓
狀啓以爲今月二十二日到付虞候 李敎臣牒呈內今月二十日辰時火輪從船一隻來泊而彼人六名下陸先請前日所接廳舍故仍許之彼人中武田邦太郞請見鍊習故峻辭却之彼曰難以強請又請登高周觀山水又請登東南門故我答以當稟告大都督云矣仍起出去同日申時火輪從船一隻又泊津頭故我問曰俄間出去今何又來彼曰今以風浪留宿以來我問曰此江測水一日足爲而連日數三換面而來果何意耶彼答曰潮水每日變異故至今測水仍爲經宿其翌出去今二十一日辰時火輪從船一隻又爲來泊彼人三名卽爲下陸先請前日所接廳舍故仍許入而又請校吏二人眼同測水故又爲許施則彼人不爲測水回船移泊於船艙彼人五名各持何樣物下來移時設機具移摹營內人家樹木宛然如畵毫無錯落又去寒山寺移摹營內地圖又如是同日未時擧帆從船一隻來泊于西門外七名下陸又請前日所接廳故仍許入則彼人中一曰海軍主許副染川行義一曰海軍中軍醫桑一曰淺山顯藏言曰艦長所患宿病近以瘴氣添症又有九名病非尋常濕處難治欲爲溫攝願借公廨與閭家而非但病人醫桑與使喚俱爲十名合二十人可容之室借給云彼船閃忽出入誠爲可憂中雖曰治病輕先許之事係難愼玆以馳報參商處分之地
1878-09-10(음) | 충청 감사 이명응, 결성현・원산진・서산군 일대에서 수심을 측량하는 일본 배의 정황을 탐문하고 물건을 주고받은 내용을 보고함 |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명응(李明應)이 일본 선박을 문정(問情)한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이양선 종선(從船) 1척이 지난 달 26일 결성(結城) 성호포(星湖浦)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이 문정하고 접대하여 위로한 후, 요청한 물종들을 요구한 수대로 갖추어 지급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접수한 결성 현감 이완진(李完鎭)의 첩정에 따르면,
‘27일 새벽 물때에 홍주 장교(洪州將校) 김상오(金尙五)가 원산진(元山鎭)의 지토선(地土船)을 타고 와서 본 포에 정박하였습니다. 그가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홍주 염성포(鹽城浦)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 화륜선에서 기치(旗幟) 3면(面), 석탄 10포(包), 석회(石灰) 1포를 내어주며, 장교를 택정하여 이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종선에 가져다주라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이렇게 받아 왔다고 하는데, 받아온 물건을 저들의 종선에 전해 주자 일본인 6명이 이내 뭍에 내려 기치 1면을 본포의 모래밭에 꽂았습니다. 깃발의 생김새는 대나무로 자루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6,7파(把)는 되었으며, 기폭(旗幅)의 경우 위는 희고 아래는 붉었는데, 양목(洋木)으로 만든 것 같았고 길이와 너비는 모두 1파는 되어 보였습니다. 또 본현 모액포(牟額浦)로 가서 배를 대더니, 흰 깃발 1면은 앞쪽 모래밭에, 1면은 뒤쪽 모래밭에 꽂아 세웠습니다. 저들의 배가 이내 다시 본포로 돌아와 정박하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도처에 깃발을 세운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랬더니 일본인이 말하기를,
「포구 근처에 깃발을 세우고 암초[石嶼]에 회칠을 하는 것은 함장의 지시가 있기에 제가 거행하는 것이니,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귀읍(貴邑)의 지토선 1척을 징발하여 귀읍의 장교 1명과 함께 우리나라 화륜 대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보내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전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청한 대로 배 1척에 장교를 함께 가게 하여 방금 신칙하여 보내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다시 치보할 계획입니다. 저들의 아침 저녁 식사는 원산진의 지토선은 붙잡아 두고 그들이 떠날 때까지 해당 배 위에서 스스로 밥을 지어먹게 하였으며, 식량으로 쓰일 쌀 외에 땔감과 물·채소·황육(黃肉)·생닭(生鷄)·달걀·소주(燒酒) 등의 물건과 일용 기명(器皿) 따위에 이르기까지 요청하는 대로 제공해 주라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하나하나 제공할 계획입니다.’
하였습니다. 잇달아 들어온 결성 현감 이완진의 첩정에 따르면,
‘지토선 영접 장교(地土船領接將校) 백민용(白敏用)이 28일 아침 물때에 일본인 2명과 함께 돌아왔는데, 저들의 작은 종선 1척도 함께 왔습니다. 실어 온 물건은 깃대[旗竹] 3개, 유리병 2개, 찬합(饌盒) 1좌(坐), 상평전(常平錢)이 담긴 전대[橐子], 그리고 보따리[袱封] 3덩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정박하고 있는 저들 종선에 전해 주었습니다. 다시 온 일본인 2명의 성명을 묻자, 저들이 적어 보여줄 필요 없다며 다시 본포의 지토선 1척을 빌리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청한 대로 뽑아서 보내주었더니, 저들 2명이 이내 그 배를 타고 저들의 대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본포의 모래밭에 꽂힌 깃발 1면을 모액포 모래밭 오른편으로 옮겨 꽂았고, 성호(星湖) 나루[津頭]에 있는 암초와 선소포(船所浦) 나루에 있는 암초에 각각 석회를 칠하였습니다. 땔감과 물·채소·생닭·달걀 등은 요청하는 대로 잇달아 보내주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잇달아 도착한 원산 별장(元山別將) 최금달(崔錦達)의 첩정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요청한 과일 종류 가운데, 감 100개, 배 50개는 본진에서 구하여 장교를 보내 전해주었으나 석류는 널리 구해보아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물물은 계속 신칙하여 길어 보내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어서 접수한 수군 우후(水軍虞候) 이교신(李敎臣)의 첩정에 따르면,
‘8월 28일 술시(戌時)에 일본인 아비루 유사쿠(阿比留祐作)와 동래 장교(東萊將校) 김성진(金成振)이 짐꾼 3명을 거느리고 남문 밖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전날 머물렀던 토병청(土兵廳)에 들어가 자리하고 그들이 온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함장의 명령으로 물종들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물건이라니 무슨 물건이며, 무슨 연유로 남문을 통해 온 것입니까?」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원선이 있는 곳에서 물을 길어다 주는 배를 따라 왔는데, 감영이 있는 곳까지 오지 못하고 겨우 10리 밖에 있는 갈마리(渴馬里)에 정박하였습니다. 뭍으로 오다 보니 자연히 남문을 경유하게 되었으며, 물종이란 것은 바로 우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더니 소매 안에서 기록한 종이 2봉을 꺼내었습니다. 하나는 수군 대도독(水軍大都督))께 드린다는 것인데 물종으로 소면(素麵) 1갑(匣), 각오적어(刻烏賊魚) 1파(把), 갈분(葛粉) 1갑, 환절부(丸切麩) 200개, 장유(醬油) 1준(罇), 대구(大口) 10개를 적은 것이었으며, 하나는 서산 군수(瑞山郡守)께 드린다는 것인데 물종으로는 각오적어 1갑, 각곤포(刻昆布) 1갑, 고야두부(高野豆腐) 100개, 장유 1준, 대구 10개를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굳게 거절하며 받지 않았더니 그가 말하기를,
「귀 지방에 와서 적잖이 폐를 끼치고 있으니, 감사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이로 인해 함장께서 5, 6가지 물건을 보내는 것이니, 바라건대 웃으며 받아 주시고 물리치지 마십시오.」
하고 누누이 말하기에, 어쩔 수 없이 우선 받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 우작(祐作, 유사쿠)은 동래 장교와 함께 하룻밤 묵은 뒤, 저들의 원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하였습니다. 함께 도착한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 이교복(李敎復)의 첩정에 따르면,
‘8월 28일 술시에 일본인 아비류우작이 동래장교 김성진과 함께 짐꾼 3명을 거느리고 본부 갈마리에서 본영 서문 안에 있는 사공청(沙工廳)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후(虞侯)를 보내어 찾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기록해서 가져온 종이와 물종들을 와서 바쳤습니다. 그래서 열어 보았더니, 물건 이름들을 나열해 적은 것일 뿐이었습니다. 물종들을 살펴보니, 소면 1갑은 2말(斗) 정도 되었는데 곡궤자(穀樻子) 1좌(坐)에 담아 왔으며, 각오적어 1파는 마치 가늘게 썰은 남초(南草: 담배) 모양이었는데, 종이로 주머니로 만들어 봉하였습니다. 갈분(葛粉) 1봉은 1말 정도 되었는데, 곡궤자 1좌에 담아 왔으며, 환절부(丸切麩) 200개는 빙설과(氷雪果) 모양처럼 만들었는데 겉은 누렇고 안은 흰 색이었습니다. 장유 1준은 색깔은 검은데 별로 짠 맛이 없었습니다. 대구어 10개는 꽤 큰 대구를 말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모두 봉하여 두고, 처분이 내려지기를 기다려 거행할 계획입니다. 저들이 우의를 표시하기 위해 물건을 보냈다고는 하나, 혹시라도 주고받는 예를 잃을까 하여 간지(簡紙) 100폭(幅), 생배[生梨] 30개, 홍시 100개, 생합 1두(斗), 쇠고기 10근(斤)을 내어 주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요청하는 물건들을 바라는 대로 잘 헤아려 지급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보내 온 물종은 이미 우의를 표시하기 위함이라 하였고 또 이에 대해 회사(回謝)하였으므로, 우선 받아두라는 뜻으로 문안을 작성하여 제송(題送)하였습니다.”
하였다.
1878-09-22(음) | 일본 해군경 가와무라 스미요시, 전라도・충청도 각 만을 측량한 관계 서류 사본을 외무성에 전달함 |
전라·충청 양도(兩道) 각 만의 측량 보고서 사본을 체송(遞送)하는 건
부속서: 8월 18일자 동해진수부(東海鎭守府) 장관에게 이첩(移牒)한 아마기함(天城艦)의 보고 및 부속(附屬) 부기(附記) 1에서 6까지
외출 제724호(外出第七百二十四號)
아마기함(天城艦)이 조선국 전라·충청 양도(兩道)를 측량하고 그곳 항구의 모습 등을 별호(別號)와 같이 보내왔습니다. 따라서 조만간 약도 등을 제출하면 회람하겠습니다만. 우선 급히 별지를 첨부하여 이를 통달(通達)합니다.
메이지 11년 10월 17일
해군경 가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義)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님
별지
一. 전라·충청 양도의 비인(庇仁)·옥구(沃溝)·결성(結城)·해미(海美) 지방 견문기 1책
一. 동(同) 수로잡지(水路雜誌) 1책
一. 조선국 충청도 천수만문(淺水灣門) 그림 1엽
一. 조선국 충청도 결성현(結城縣) 하성호(下星湖) 안의 약측도(略測圖) 1엽
一. 조선국 충청도 해미 근해 약도 1엽
一. 조선국 전라·충청 양도의 경계인 장포강(長浦江) 약측도 1엽
一. 조선국 전라도 옥구만(沃溝灣) 약도 1엽
一. 조선국 천수만문(淺水灣門) 원점 및 나침 편차 추산부(推算簿) 1책
一. 조선국 천수만문 경위도(經緯度) 추산부(推算簿) 1책
一. 조선국 천수만문 투연부(投鉛簿) 1책
一. 조선국 측량 각소(各所) 기사(記事) 1책
합계 11종
(후략)
출전 ㆍ『日本外交文書』 11, 문서번호 149
★장포강(長浦江) 지명안나옴 한반도 금강錦江 ,장포강이 금강일수없음 부르던강이름 달리쓸리가없음
★하성호(下星湖)성호星湖없음 성호의아래쪽(하성호)이던 아니던 호수흔적도안보임 星湖이익선생만유명
▼ ◆인용 독립기념관 의병자료
메이지(明治) 39(1906)년부터 44(1911)년까지 러일전쟁[日露戰役] 후에 있어서 한국폭도봉기 일건(一件)
발신일: 1906-06-07
발신자: 제2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데와 시게도오(出羽重遠)
수신자: 제2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데와 시게도오(出羽重遠)
메이지(明治) 39년 6월 7일
6월 7일 목포(木浦)에서 들은 한국 서안의 정황
6월 7일 목포(木浦) 이사청(理事廳)에서 알게 된 의병의 소재 및 그 진행방향은 별지의 도면상에 간략하게 표시한 것과 같음.
군산(群山) 방면의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하 목포(木浦)에서 파견된 정찰인(순사 2명, 한국인 1명)은 고창(高廠)에서 흥덕(興德)에 이르는 도로상에서 전주(全州), 태인(泰仁) 방면에 의병이 있음을 듣고 전진을 중지하였다고 함. 홍주성(洪州城)에 있었던 민(閔) 아무개[某]는 덕산(德山) 서쪽의 해미(海美)로 도주해 버린 흔적이 있다고 함.
군산(群山) 방면의 사정에 대한 답사와 그 연안 순시는 차제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그럼에도 광주(光州)에 파견했던 동운(東雲)호와 연(漣)호 2척은 연료량이 부족하여 겨우 24톤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죽부(竹敷)로 귀항시키고, 부운(簿雲)호와 하(霞)호 2척을 이끌고 6월 8일 목포(木浦)를 출발하여 군산(群山)으로 향하기로 결정을 하였음.
그런데 6월 7일 오후 11시 목포(木浦) 이사청(理事廳)의 통보에 의하면, 태인(泰仁)과 정읍(井邑)의 폭도가 담양(潭陽)을 거쳐 광주(光州), 나주(羅州) 쪽으로 향할 것 같은 상황이어서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의 상태가 걱정되어 즉시 순사 4명과 헌병 약간 명을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에 파견했다는 취지의 연락이 왔기 때문에, 해상의 상태를 순시하고 즉시 목포(木浦)로 귀항하기로 하였음.
이상 우선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39년 6월 7일 목포(木浦)에서
카사마(笠間) 10구축대(驅逐隊) 사령(司令)
데와(出羽) 제 2함대 사령장관(司令長官) 각하[殿]
덧붙여 동운(東雲)호와 연(漣)호 2척은 연료 적재 후에 즉시 목포(木浦)로 귀항할 것을 명령해 두었음을 아울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전주(全州) 목포(木浦)간 전신선이 절단됨.
군산(群山) 방면의 정황은 불명
*(지도 설명)
홍주(洪州)의 수괴 민(閔)의 탈주 방향
의병이 배를 많이 모아 해적행위를 한 지역
6월 5, 6일경에 의병 100여 명이 담양(潭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음. 이 부근에는 여전히 1,000여 명의 의병이 있는 것으로 보임.
6월 7일에 목포(木浦)에서 파견된 정찰자의 도착 위치
부사(府使)가 인민에게 죽창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함. 그의 사람됨은 수구파(守舊派)로서 적도들과 내응하려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임.
6월 7일 마산(馬山)을 거쳐 일본으로 관통하고 있는 새로운 전신선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순항(巡航) 보고
5월 30일 수요일 날씨 맑음, 풍향 북동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04 한난계(寒暖計) 71
오전 7시 명령에 따라 동운(東雲)호, 연(漣)호, 하(霞)호를 이끌고 좌세보(佐世保)를 출항, 동 10시에 소치하(小値賀) 수도(水道)를 통과, 오후 7시에 한국 거문도(巨文島)의 해밀턴(Port Hamilton, ハミルトン) 항에 닻을 내림. 입항에 즈음하여 항구에 있던 어부(본국인[本邦人])에게 해적의 모양을 물었으나 충분한 대답을 얻지 못함. 거문도(巨文島) 부근에는 해적의 출몰 일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신함. 오후 11시 반에 명령에 따라 하(霞)호를 좌세보(佐世保)로 회항시킴.
이 날 오전은 전투준비와 전투조련을 실시하고 오후는 함대운동과 기류(旗旒)신호 연습을 실시함.
5월 31일 목요일 날씨 맑음, 풍향 동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33 한난계(寒暖計) 81(水道)오전 7시 해밀턴 항을 출항, 동 11시에 횡견(橫見) 수도를, 오후 1시에 명진(鳴津)나루터[渡]를 통과하여 동 3시에 목포(木浦)에 닻을 내림. 곧바로 이사관(理事官)에게 가서 해적의 정세에 관해 묻고 본 소대의 임무를 말함. 동 이사관은 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곧바로 군산(群山)의 이사관(理事官)에게 전보로 알아보았음. 그 답전은 다음과 같음.
귀전을 배송(拜誦)함. 당 항구 부근에서는 현재 특별히 해적이라 칭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요시미(녹도(鹿島)와 사시미(호도(狐島)) 부근에 15, 6명의 승무원을 태운 적선(賊船) 152척이 인천행 어선 또는 빙선(氷船)을 위협할 소지가 있으나 아직 피해자로부터의 고소는 접하지 못함. 그밖에는 평온함.
이상의 전보에 의해 외인(外烟)열도 부근에 출몰하여 약탈을 행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처음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음.
6월 1일 금요일 날씨 맑음, 풍향 남서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38 한난계(寒暖計) 83
오전 7시에 연(漣)호가 출항함. 화원반도(花源半島) 서쪽에서 자차수정(自差修整)을 시행함.
오후 1시 출항시 하도(下島) 부근에서 연(漣)호와 만나 함께 북행하여 면도(綿島) 수도, 재원서(在遠西) 수도를 지나 안마도(鞍馬島)로 향하던 도중에 본국인[本邦人]의 범선 및 한국인의 어선을 만났으나 달리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음. 오후 5시 20분 안마도(鞍馬島)의 정박지 안으로 들어가 항구 안을 일주함. 그 안에는 어선 10척 정도가 있었던 것 외에는 의심할 만한 점은 없었음. 동 5시 반에 항구 밖으로 나가 북4도 동의 침로로 어청도(於靑島)로 향함. 동 8시 50분에 동 섬의 정박지에 닻을 내림. 항구 내에 는 1척의 범선(帆船) 및 2, 3척의 어선이 있을 뿐임.
닻을 내릴 때 정박지를 탐조(探照)하기 위해 탐해등(探海燈)을 켰으나 육상에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함.
이 날 잡업(雜業)을 함.
6월 2일 토요일 날씨 맑음, 풍향 북동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27 한난계(寒暖計) 78
기상(起床)후 바로 육지를 탐색하게 함. 그 보고는 다음과 같음.
재주(在住) 일본인 150명
순사 1명
우편취급소 1
음료수는 우물을 사용함.
교통통신은 주로 어선을 이용하여 인천(仁川)을 왕복시키고 1개월에 약 3회로 함.
재주(在住) 일본인의 다수는 어부 및 소상인으로 판매하는 물품은 일용품이 가장 많음.
오전 8시 반에 출항하여 외형도(外炯島)로 가서 동 정박지 내를 일주하고 항구에 있는 어선(본국인이 승선)에 물어본 바, 해적은 호도(狐島) 이서(以西) 지역에 출몰하는 일은 없으며 충청남도(忠淸南道)와 전라북도(全羅北道)의 연안을 노략한다는 것, 적도는 모두 한국인(韓人)으로 주로 안면도(安眠島) 부근에 횡행한다는 것, 2개월 정도 전 호도(狐島)에 내습했다는 것 등을 알게 됨. 또한 그 배의 승무원 중 1명은 인천(仁川)에서 돌아오는 도중 적선에게 습격을 당하였는데 총탄이 20발 정도 발사되었다고 함. 또한 지금부터 약 2주일 전에 옹도(瓮島) 부근에서 참살당한 일본인의 사체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함.
그 후 인천(仁川)의 헌병 순사가 연안을 수색했으나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양민은 공황상태에 있음을 고함.
동운(東雲)호가 이러한 정보를 얻고 있는 사이에 연(漣)호는 육상을 정찰하여 ソクテイ島에서 일본인 석공 1명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탐지함.
이로써 해적이 호도(狐島) 이동(以東)에서 출몰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연(漣)호로 하여금 녹도(鹿島)를 수색하게 하고 동운(東雲)호는 호도(狐島)로 향함.
오전 11시 40분에 호도(狐島)의 북쪽 연안에 이르렀는데 한 어선이 국기를 게양하고 와서 마중함. 그 어선의 승무원은 모두 적도에게 약탈을 당했으며 어제 그들의 주박에서 벗어나 호도(狐島)에 이른 것이라고 함. 그들의 현적(現籍)과 성명은 다음과 같음.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房吉) 29세 야마구치현(山口縣) 구마게군(熊毛郡) 히라오쵸(平尾町) 805번지
가네코 쓰네마쓰(金子常松) 44세
미야시타 스케이치(宮下助一) 26세 나가사키현(長崎懸) 아마쿠사(天草) 사이와 촌(村)
동 데쓰지(鐵次) 22세 동 상
우라카와 다메시치(浦川爲七) 23세 나가사키현(長崎懸) 아마쿠사(天草) 미야타쵸(宮田町)
동 아라기치(荒吉) 22세 동 상
이 중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 房吉)는 한국인(韓人)을 수부(水夫)로 고용하여 1척의 어선에 탔으며, 가네코 쓰네마쓰(金子常松) 이하 5명은 다른 1척의 어선에 승선하여 지난달 29일에 보령포(保寧浦) 일각에 있는 군입리(軍入里)에서(고기낚시용 미끼를 구입하기 위해서 갔던 것임) 적도의 습격을 받고 약탈을 당했음. 이에 3일 앞서 오오쓰치 한우에몽(大土半右エ門)(히로시마현(廣島縣) 사에키군(佐伯郡) 에노구치촌(江ノ口村))이 탄 배가 カウル島(안면도(安眠島) 서쪽의 백주(白洲) 수도를 통해 들어가는 곳)에서 약탈을 당했다고 함.적도(賊徒)는 앞에서 말한 6명의 소지금을 모두 빼앗고 어선 및 선구 일체를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고, 이들을 보령부(保寧府)를 경유하여 홍주(洪州)로 보내는 도중 일본병이 온다고 알리는 자가 있어 곧바로 6명을 버려 두고 도주함에 감신히 군입리(軍入里)로 도망쳐서 마을 사람들의 호의로 선구 등 일체를 찾아 어제 호도(狐島)로 돌아왔다고 함. 그들 중 1명은 머리 부분에 타박상을 입었고 양손 엄지손가락에도 부상을 입고 있음. 이 외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房吉)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손에 세게 포박을 당하여 생긴 부상을 입고 있었음. 따라서 간호원으로 하여금 그에 상응한 치료를 하도록 조치함. 이미 말한 가네코 쓰네마쓰(金子常松)가 빼앗긴 금액은 50여 원이라고 함.
또 말하기를 4월 23일에 적도 수백 명이 녹도(鹿島)에 내습하여 소총을 쏘고 한국인을 위협하여 그들 가운데 15, 6명을 부상시키고 돈 300여 원을 빼앗아 갔다고 함.
이 밖에 ベ-カ-島(白牙島) 부근에서 20일쯤 전에 행방불명[行衛不明]이 된 본국인[邦人] 3명(이 가운데 2명은 남자, 1명은 부인)이 있다고 함. 앞서 말한 오오야나기 후사키치(大柳房吉)가 진술한 바에 의거해 고찰해 보니, 이 곳의 폭도는 배일당(排日 )의 일원으로서 빈번히 돈을 모아 거사할 자금으로 쓸려고 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일본인에 대한 욕설은 극도에 달하고 있다고 함.
오후 2시에 닻을 올림(호도(狐島)를). 동 3시 40분에 백아도(白牙島)에 도달하여 항로를 안면도(安眠島)에 가깝게 잡고 남하하여 군입리(軍入里)로 향함. 오후 7시 45분에 닻을 내린 즉시 장교 1명과 하사, 졸병 10명을 파견하여 육지를 정찰시킴. 이때 탐해등(探海燈)을 비추어 시위적인 운동을 행함. 파견원이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 달리 의심할 만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 부근에 산재해 있는 적도의 행동으로 보아 영향을 끼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으로 확신함.
또 군입리(軍入里) 부근에는 항상 1, 2명의 첩자가 있어서 보령(保寧) 및 홍주(洪州)에 있는 적괴와 기맥을 상통하여 연안에 정박하는 어선이 있으면 즉시 사람을 보령(保寧) 부근으로 보내어 이를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연(漣)호는 사장포(沙長浦) 정박지에 닻을 내림.
이 날 오전에 화재조련과 함선 안의 대청소를 실시함.
6월 3일 일요일 날씨 흐림, 풍향 남서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11 한난계(寒暖計) 71
오전에 내통포(內筒砲) 사격을 실시하고 기관병에게 시위 목적으로 육지를 산책하게 함. 연(漣)호는 오전 8시에 닻을 올려 연도(煙島)에 도착하여 동 섬 부근에서 내통포(內筒砲) 사격을 실시함.
오전 11시에 출항하여 연도(煙島) 동쪽 편에 있는 정박지에 이름. 본국인[邦人]이 승선한 어선이 있음을 발견하고 해적의 정세를 물었으나 달리 참고로 할만한 사실이 없었음.
동 정박지는 서풍을 피하는 데 매우 적합한 곳으로 당시에도 다수의 범선이 정박하고 있었음.
오후 1시 35분에 장포강(長浦江) 입구에 도달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동 3시에 군산(群山)에서 닻을 내리고 그 지역의 부이사관(副理事官)에게 본 소대의 행동 및 탐지해서 얻은 사항에 대해 통고함.
군산(群山) 이사청(理事廳) 소속 아이자토(愛里) 경부(警部)의 담화에 의하면, 금년 봄부터 계속하여 죽도(竹島), 연도(煙島), 위도(蝟島) 부근에서 해적이 횡행하여 4월 초순에는 법성포(法聖浦)에 20명 정도씩이 승선한 해적선 2척이 입항한 일이 있고 또 수일 전에는 연도(煙島) 연안 8리 정도의 지점에서 약탈을 당한 일이 있다고 함. 적선(賊船)이나 적도(賊徒)의 특징, 목표는 달리 지적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하나 대체로 대형의 한국선박(韓船)에 2, 30명이 승선하여 소총 및 탄약류를 적재하고 있다고 함.
드물게는 군복[兵服]을 착용하고 선복(船腹) 부분에 총구멍[銃眼]을 설치한 것도 있음. 혹은 보통의 한국인(韓人) 복장으로 목표한 어선에 접근하여 선내를 구경시켜 달라고 말하거나, 혹은 우리들은 해적을 단속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며 틈을 타서 순식간에 곤봉류를 가지고 위협하여 손발을 묶은 다음 약탈하여 사라진다고 함.
또한 최근 홍주(洪州)에서 격퇴된 적도(賊徒)의 수괴를 민종식(閔宗植)(이전의 참판(參判))이라 하고, 5월 13일 처음으로 서천(舒川)에서 일어나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여 우리 헌병과 순사 70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으나, 별효과도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 이에 그 급박함을 경성(京城)의 수비대(守備隊)에 알렸고 동 수비대에서는 2개 중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격파함. 적도는 비인(庇仁)과 남포(藍浦)를 거쳐 홍주(洪州)에 거점을 둠. 5월 31일 마침내 홍주(洪州)의 공격으로 거의 완전히 격멸되었음. 그간 정찰임무에 종사했던 경부(警部)와 순사(巡査) 각 1명은 적에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함.
이상으로 볼 때, 해적은 모두 홍주(洪州)를 근거로 하는 폭도의 수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해적질로 군수용의 금품을 약탈하여 크게 사용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됨. 따라서 위의 적도를 평정한 뒤에는 결국 연안도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함.
6월 4일 월요일 날씨 흐림, 풍향 북서풍, 풍력 1, 해상 조용함, 청우계(晴雨計) 29.93 한난계(寒暖計) 83
오후 1시에 출항, 동 2시에 강을 벗어나 오른쪽에 있는 군산군도(群山群島)를 향함. 도중에 함대운동을 실시함. 동 4시에 연(漣)호는 곧바로 정박지로 향하고, 동운(東雲)호는 관지도(串芝島)의 서쪽 지점에서 정적이 감돌았기 때문에 항해하면서 내통포 사격을 실시하고, 동 6시 반에 횡경도(橫境島)의 남쪽에 있는 정박지에 닻을 내림.
6월 5일 화요일 날씨 흐리고 안개, 풍향 북서풍, 풍력 1, 해상 평온, 청우계(晴雨計) 30.13 한난계(寒暖計) 70
새벽부터 농무가 내습, 정오경에 안개가 점차 걷혔음으로 오후 1시에 출항함. 위도(蝟島)의 동쪽 1리를 지나 다시 남하하여 오후 6시 반에 함평만(咸平灣)으로 들어가 도리포(道里浦)에서 닻을 내림. 이에 앞서 함평만(咸平灣)내에서 동운(東雲)호는 타기(舵機)에 고장을 일으킴. 그래서 즉시 닻을 내리고 이를 점검해 보았는데 「롯트」접합용 톱니바퀴에 기름찌꺼기가 차 있는 것을 발견했음.
이 날 잡업을 실시함.
6월 6일 수요일 날씨 비, 풍향 북동풍, 풍력 2, 해상 온화, 청우계(晴雨計) 20.02 한난계(寒暖計) 69
오전 7시에 출항함. 동 9시에 수도(水島)의 수통(水通)을, 동 10시에 면도(綿島)의 수통(水通)을 통과하여 동 11시 목포(木浦)에 닻을 내림. 이 날 오전은 전투준비와 조련을 실시하고 오후에는 잡업을 행함.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순항항적도(巡航航跡圖)
*(지도 설명) ▣자료 원문 지도 있으나 교열된것같은 장포강입구에서 강을 거슬러올라가 1시간25분지나 군산도착
동운(東雲)호의 정박장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정박장
연(漣)호의 정박장
동운(東雲)호의 항로
연(漣)호의 항로
동운(東雲)호, 연(漣)호의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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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