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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마당 스크랩 길상사(吉祥寺)와 김자야(金子夜)
협화 추천 0 조회 532 12.02.04 00:2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길상사(吉祥寺)와 김자야(金子夜) 협화(協和)

2011/07/03 12:17 수정 삭제

복사 http://blog.naver.com/ash856/30112274999

詩人 白石과 吉祥寺 施主 金英韓(金子夜)의 러브스토리. 안승환 글.

 

 백석의 일생에는 여섯명의 여자가 등장한다.첫사랑이며 久遠의 女人 통영의 蘭, 기생 子夜를 떼어놓기 위해 부모가 맺어준 두번의 결혼을 통해 부부의 연을 맺었던 두 아내와 잠시나마 사랑을 고백했던 기자 최정희와 기생출신 金子夜, 1945년말 세번째 결혼하여 3남2녀를 낳고 평양문단에서 1959년 黨性이 약해 삼수 ('삼수갑산에 가드라도'하는 속담의 고장) 집단농장으로 강제이주된 소위 '붉은편지사건'으로 삼수농장에서 여생을 함께하고 1995년 83세로 임종을 맞아준 마지막 여인 조강지처 리영희이다.첫사랑 통영의 蘭은 백석에게 영원히 구원의 여인으로 남았다. 올백 머리에 모던보이 백석은 여성편력이 유별난 도화살이 낀 시대의 풍운아였다. 도화살이 낀 남자에게는 여성이 꼬리를 물고 달라 붙는다. 그런 남자를 맞이하는 여인은 눈물 마를날이 없다. 김자야는 백석을 챙겨주지못한 미안함과 후회스러움으로 백석의 생일날인 7월1일에는 물한모금 마시지않고 하루종일 굶고, 절절히 그리워하며 기막힌 사랑의 순애보(殉愛譜)로 살다가  당시 싯가 1천억원의 吉詳寺를 시주하고,<백석,내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내사랑 백석>이라는 글을 남기고 '창작과 비평사'에 2억원을 기증하여 평생을 그리워했던 백석의 이름을 붙여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여 2년마다 수상자에게 1천만원을 수여하고, 고교 장학재단을 세우는 등 오늘 실로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남겼다.

 
 
 
 
김영한 [金英韓,一名金眞香(예명), 金子夜(金子夜는 백석이 지워준 애칭)]
출생: 서울 1916년 7월1일~1999년11월14일.83세 사망.
학력: 중앙대학교 영어 영문학 학사
 
 
 
백석(白石) : 본명  백기행(白夔行), 시인

출생-평북 정주 1912년 7월 1일 - 1995년.83세 사망.

학력-1929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1934년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전문부 영어사범과 졸업 

데뷔-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

 
 길상사 가는 길
지하철;4호선한성대역6번출구에서 마을버스2112,1111번타고 홍익사대부고 하차
자가운전:광화문-삼청터널-북악스카이웨이방향 직진-삼선교방향 우회전-길상사
길상사 전화: 3672-5945~6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인들의 참선을 위해 오전10시부터 5시까지'침묵의집'개방

 

 *길상사는 김영한(金英韓,一名 김진향,김자야)여사가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사들여 제3공화국시절 대형요정이 되어 대원각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해오다가 지금의 길상사가 되었다.김영한씨는 법정스님의'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차 L.A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평과 40여동의 건물(당시 싯가 1천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법정스님은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 본사인 순천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吉祥寺'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김씨는 1999년 11월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목욕재계후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유골은 49재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있고, 헝가리 원광사,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있다.그녀는 1939년 60년전에 헤어진 詩人 白石이라는 애인을 가슴 절절히 그리워하고 있었다.이 여인은 어떻게 한 남자에 대한 순정과 열정을 이토록 고스란히 지닌 순애보인생을 살아왔을까.

1천억원이라는 큰 금액을 기부한 연유에 대해 묻자 "그것은 백석 시인의 한줄 詩만큼의 가치도 못한것"이라고 했다 그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그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라는 기자질문에 "사랑하는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습니까?"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 비평에 2억원을 출연해 자기가 사랑하는사람의 이름을 붙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토록했다.만주로 따라가지 못한 미안함과 그를 悲運에 빠뜨린 죄책감으로 늘후회하며 살았다.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1일은 하루종일 음식을 먹지않았다.사랑하는사람을 뒷바라지도 못하고,제대로 아껴주지못한 자신에대한 질책이라고했다.

----*****----

그녀는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1남4녀중셋째딸로 태어났다.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다. 영한의 형제자매는 차례로 중학교까지 다 다녀서 동네에서 개화가정으로 소문이 났다.1932년 할머니친척 탄광업자가 인감도장과 집문서를 위조해 은행에 저당잡혀 사업에 실패하자 빈털털이가 됐다.32세 어머니가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15세 영한은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갔다.우물가에서 빨래하는중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는 사고가 났다.고된 시집살이를 견디지못해 도망쳐나왔다.이모와 만주로 가서 일본인만이 다니는 안동고녀에 학업을 계속했다.이모가 아들을 낳자 육아를 맡아야했고 이후 서울집으로 돌아왔다.그녀가 기생이 된것은 둘째언니의 소학교동창인 김수정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면서부터였다.김수정은 기생으로 가무의 1인자가 되어있었는데 그것이 몹씨 부러웠다.수정은 다옥동의 큰 집에 화려한 세간을 차려놓고 심부름아이를 두고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기까지 하지않는가.수정과 함께 조선권번(朝鮮券番)으로 들어가 금하 하규일의 양녀가 되어 眞水無香.참으로 맑은물은 향기가 없고 잡스런 냄새를 풍기지말라는 진향(眞香)이라는 예명을 받고 궁중아악과 가무의 가르침을받는 동기(童妓)가 됐다.전통궁중 가무연수 3년간 으뜸성적을 받았고 수료식에는 무산향(舞山香)과검무(劍舞),춘앵전을 독무로 추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춘앵전은 자태와 용모가 8할이상 점하는 고난도의 춤이다.그녀의 어머니는 결핵을 앓다가 임종무렵 "아무리 우리집이 이리 됐기로서니 네가 기생이 무슨말이냐.나 죽은후에 비록 구루마꾼이라도 좋으니 마음착한 홀아비 만나 가정을 이루도록해라.어떤자리에서라도 아버지 함자와 본관은 절대로 말하지마라.어머니가 세상떠난뒤 그녀는 금강산 옥천암에서 한달동안 탈상하고 돌아왔다.어머니병간호하던 시절 파인 김동한이 잡지<삼천리>에 수필기고를 부탁해왔다.그때 쓴 글이<눈오는 밤>으로 한 중년남자가 눈위에서 비틀거리더니 넘어지는데 오버코트 호주머니에서 귤이 쏟아지는 상황을 묘사하여"저 남자는 저렇게 취중에도 자기가정을 생각해서 사랑하는가족들에게 갖다주려고 귤봉지를 호주머니속에 갈무려 두었던것이다"이 글로해서 그녀는 문학기생으로 불렸다.1933년 중일간 충돌이 벌어지면서 일제압박이 거세졌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한다.  영한은 분노를 느끼면서 신문지에 먹으로 가갸거겨를 또박또박 썼고 우리시조를 필사하기 시작했다.기생이 조선어 글씨를 쓴다는 소문이나서  조선어학회 학자 해관 신윤국의 제의로 동경유학을 가게된다.1935년 그녀 나이20세때였다.도꾜문화학원 3학년에 편입을 신청했다.조선어학회에서는 영한의 성적이 우수한것을 보고는 하와이로 유학보낼계획을 세우고있었다.이듬해1936년 조선어학회 구속사태가 일어났다.신윤국도 함남 홍원형무소에 수감됐다.졸업을 앞두고있던 영한은 함경도로 달려갔다.그러나 사상범인 그를 면회할수가 없었다.영한은 기생복색을 갖춰 함흥권번으로 들어갔다.함흥권번 관할 가장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간 바로 첫날 함흥영생고보 교사 송별회에서 영어교사 백석과 한자리에 앉게됐다.이순간이 영한의 일생일대를 뒤흔드는 남자 백석을 맞이한것이다.<내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묘사한다."당신은 첫대면인 나에게 대뜸 자기옆으로 와서 앉으라고했다.그러곤 당신이 마신 술잔을 꼭 나에게만 건네는것이었다.말없이 연거푸 기울이는 술잔에 용기를 얻은 당신은 더덥석 나의 손목을 잡았다.꼭잡힌 나의 손목에는 이미 불꽃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되었다"그런데 백석은 진향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죽기전에 우리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진향으로서는 전혀 예상치도못한 말이었다.처음보는 사람을 보고 마누라라니..죽기전 이별이 없다라니..이 말에 진향은 어쩔줄몰랐지만 가슴속으로 차오르는 행복감에 깊이 떨었다고 고백한다.이날 백석은  취기에 젖어 느슨히 풀린몸을 그녀에게 기대며 이렇게 말했다."오늘부터 마누라뜻대로 내몸을 맡아주어야해요"백석26세,진향22세였다.이제 백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좀 돌아보자.   

백석(白石혹은白奭,본명 백기행)은 1912년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김영한은 집에서 보내오는 편지겉봉에 기행대신 기연이란 이름을 쓰는것을 보았다고 술회했다.백석은 정주에 있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가난하여 1년간 집에 머물면서도 문학에 정진해 1930년조선일보 제2회 신춘문예 공모에서 <그 母와 아들>로 소설부문에 당선됐다.이후 백석은 정주에서 금광으로 큰 돈을 모운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주)가 지원해준 장학금으로 1930년(19세)도꾜유학을 가게된다.백석은 1931년 청산학원교회에서 세례를 받은것으로 돼있다.그는 영어를 잘했는데 일어 러시아어 독어 프랑서어도 상당히 잘했다.1934년 귀국해 조선일보 교정부 기자로,잡지<여성>에서 편집기자로 일한다.신문사생활1년간 산문을 주로 발표하다가 1935년<정주성>으로 시단에 데뷔했다.이듬해 첫 시집<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정가 2원이었는데 이렇게 비싼 시집은 처음이었다고한다.그런데 백석은 1936년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자리를 옮긴다. 그해 2월 조선일보에<편지>로 산문 하나를 싣는다.아가씨를 사랑하는 일련의 정황을 말해주는데"남쪽바닷가 낡은항구의 처녀하나를 나는 좋아했습니다.머리는 까맣고 눈이 크고 코도 높고 목은 선이 길게 패이고 키가 호리낭창했습니다.그가 열살이 못되어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죽고 홀어머니와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않는 따뜻한 이 낡은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았습니다"이 낡은 항구의 처녀는 통영출신의 박경련(1918~?,백석은 이 여인을 蘭이라 불렀다)이다.1935년6월 소설가친구인 허준의 결혼식에 간 백석은 피로연에서 조선일보 기자이자 친구인 신현중(1910~1980)의 소개로 18세 이화고녀생 박경련을 만났다.까만 머리, 큰 눈,높은 코,깊이 패인 목선,호리낭창한 키의 아름다운 여인을 본 시인 백석은 첫눈에 반해버렸다.허준이 처가인 통영으로 신행을 떠날때 백석은 신현중과함께 백경련을 만나기위해 갔으나 그녀는 없었다.백석은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을듯한 심정이라며 詩<통영>을 썼다.1936년 1월백석은 신현중을 채근해 다시 통영으로 갔다.겨울방학으로 내려간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그녀는 이미 서울로 올라가고 없었다.허탈하게 귀경한 백석은 1월23일자 조선일보에 詩<통영>을 발표했다.두달 뒤인3월에 백석은 다시 통영으로 갔다.조선일보에 사표를 낸 그는 함흥으로 떠나기전에 이 여인을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기때문이다.박경련의 사촌오빠를 통해 알아보았으나 이번에도 그녀는 집에 없었다.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기생 진향을 만난것은 그해 가을이었다.한 여인 '란'에게 이미 마음이 팔려 속을 절절 끓이고 있을무렵 그는 기생 진향을 만나 첫 자리에서'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라고 말을 한것이다.22세 여인의 가슴을 뭉클하게한 그 한마디.그녀의 일생을 바꾼 그 한마디는 외로운 백석으로서도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기생의 미모와 거기다 문학적소질을 겸비한 진향에게 비록 기생일지라도 마음에 있는 말을 한것은 틀림없을것이다.진향에게는 자신에게 서슴없이 말해주는 마누라라는 호칭은 그녀에게는 일생일대의 감동이요 영광이었다.그해 늦가을 두사람은 서로 멀지않는곳에 하숙을 정하고 왕래했다.진향은 학교일과가 끝나는대로 손쌀같이 들어서는 백석을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덤쑥잡아 찬바람에 시린손을 저고리속 가슴에다 녹여주기도 했다. 어느날 둘이서 함흥거리의 사진관앞을 지나면서 진열장속 여자사진을 외면하는 백석에게 진향이 이유를 물은즉'나는 당신말고 다른여자는 아예 눈도 주기싫어'...진향은 발걸음이 가벼웠다.하루는 책방에서 진향이<子夜吳歌>라는 唐詩選集을 사왔다.백석은 그 책을 펼쳐 이백의 詩를 읽고는 진향에게 말했다.'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거요. 이제부터'子夜'라고 하겠소.백석은 예쁜여자를 만나면 예쁜이름을 지어주는 취미가 있었다.

날씬한 체구에 긴머리 헤어스타일로 조선일보앞을 걸어서 나타나면 장안이 훤했다고 친구들이 말할정도였다.함흥의 차가운 겨울이 다가오고있는 어느하루 둘이서 걷는데 백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울아버지가 방학이 시작되는대로 곧장 올라오라는 편지가 왔다고 말했다.그녀는 밤11시에 함흥역으로 배웅을 나갔다.너무나 추운 날이었기에 기차가 오기도전에 그녀는 손을 흔들고 역사를 빠져나왔다.그런데 백석이 갑자기 기차에서 내려 따라왔다.깜짝놀란 자야가 어찌된일이냐고 묻자 당신이 혼자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쓸쓸해져서 내일 떠나기로 했다고 말한다.백석은 떠난뒤 날마다 편지를 보내왔다.그러다가 한동안 편지가 뚝 끊겼다.자야는 밥을 먹어도 食不甘,자리에 누워도 寢不安에 몸져누웠다.백석은 무엇을 하고있었을까?그는 마음에 자리잡고있었던 다른여자'란'과 결혼할 궁리를 하고있었다.서울에 온 백석은 허준에게 도움을 청해 그와함께 통영으로 청혼을 하러갔다.이화고녀를 졸업한 경련은 고향집에 내려가 있었다.삼랑진행 완행열차를 7시간여 타고 구마산행 시골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통통배로 통영에 닿으면 거기서부터 명정까지는 걸어야하는 머나먼길이었다.백석은 갓을 쓰고 술을 받아들고 댕기 한감을 끊어서 박경련의 어머니를 찾아 청혼례를 올렸다.그러나 민족지사 집안의 여인인 모친은 백석의 청혼을 거절했다.자야에게 보내던 편지가 뚝 끊어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자야가 쓴<내사랑 백석>에 쓰인 그의 고백은 부모가 강요하는바람에 장가를 들었다고했다.백석은 여성.신간호2권10호에 실린 자신의 시 한편을 자야에게 보내주었다.


바닷가에 왔다.
바다와 같이 당신이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생각하고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것만 같구려

 

통영바닷가에서 썼을 이 詩는 좌절당한 박경련(란)과의 미련에 대한것 보다는 자야에 대한 미안함과 돌이켜 뉘우침섞인 고백이 담긴것 같다.이후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 장춘으로 함께 떠나자고 제의한다.1937년 4월 백석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자신에게 경련(란)을 소개시켜준 절친한 벗 신현중이 약혼녀와 파혼하고 경련(란)과 결혼하는 일이 일어난것이다.신현중누나인 신순정이 통영에서 박경련(란)의 가정교사를 한적이 있었는데 그때문에 경련(란)이 포천에 있는 신순정의 집으로 자주 놀러갔다.신현중 자신은 약혼녀가 있어 경련(란)을 친구 백석에게 소개해주었으나 약혼녀가 여의치않아 마음을 바꾼것 같다.신현중은 항일학생운동을 했던 독립지사로 198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고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내가 생각하는 것은>부분


내가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흰 바람 벽이 있다>부분

 

함께 만주로 가자는 제안을 받은 자야의 생각은 복잡했다.그녀는 고민을 하다가 백석의 앞길을 험난하게 할 존재가 되고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 몰래 서울로 와버렸다.청진동에 숨어살고 있는 3개월쯤뒤에 백석이 나타나서 하룻밤을 지내고는 부랴부랴 함흥으로 돌아갔다.가면서 남긴 누런 미농지 봉투에는 친필로 쓴 詩<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들어 있었다.이 詩를 읽고 자야는 다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이로부터 20일이 지난 1938년6월 백석이 다시 불쑥 찾아왔다.조선축구연맹에서 주최하는 고등축구연맹전이 경성운동장에서 열리게되어 선수를 인솔하는 교사로 왔다는것이다.학생들을 서울시청옆에있는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백석은 자야의 집으로왔다.학생들은 교사가 없는 밤에 거리를 쏘다니다가 풍기단속반에 걸렸다.백석은 징계에회부되고,여자고보로 발령이 나서 사표내고 서울로 와 버렸다.(백석은 여러모로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억력이 좋고, 일어  영어  러시아어 독어 프랑서어를 잘하였으니 언어적 재능도 특출하였지만,영생고보 학생들에게 영어교사이면서 미술과 문예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축구를 즐겨했는데 수준급은 아니드라도 날렵한 몸매로 선수급에는 들만한 정도였다고 합니다.인솔학생 축구선수들과찍은 사진, 문예부학생들과 찍은 사진을 보아도 충분히 느낄수 있습니다) 청진동에 비좁은 방에서 함께 살면서 조선일보에 다시 입사했다.명동길을 함께 산책하던 자야는 청색바탕에 카키색 줄무늬가 엮어진 넥타이를 하나 사서 백석에게 선물했다.단풍이 물들은 10월 어느 일요일 광릉으로 놀러가서 자야를 업고 개울을 건너는데 백석은 그만 엎어지고 말았다.젖은옷으로 몸은 차가웠으나 자야는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둘이서 단성사에 전쟁과 평화를 보고와서는 스크린에 나오는 나타샤를 보고 기가 죽었다.여배우 나타샤가 8등신에다 너무도 요염하고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백석이 준 詩<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에 그의 등뒤로 숨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것이다

 

1938년 백석은 잡지<삼천리>의 기자였던 최정희에게 사랑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2001년 유족들은 이때 보낸 백석의 편지를 <문학사상>에 공개했다.<사람을 사랑하다가 사랑하지 못하는때에 하나는 동무가되고 하나는 원수가 될수밖에 없다고하나 이 둘은 모두 사랑하는것이 되는것입니다>이때 백석은 최정희에게도 이 詩를 보냈다고한다.그녀의 유족들은 나타샤가 최정희라고 주장했다.자야는 1938년12월24일을 기억에서 영원히 지울수없는 날이라고 말했다.여느때와같이 신문사로 출근한 백석이 저녁에 돌아오지않았다.10여일이 지난뒤중학교 영어교사인 친구가 찾아와서 백석이 장가를 들었고 자야에게 면목이 서지않아 오지못하고 있다는것이다.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이날밤 늦게 백석이 들어왔고 오자마자 전등불을 짤깍 꺼버렸다.어둠속에서 가만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서럽고 한심해서 엉엉 울고말았다.'나 말이야 변한건 아무것도없어 두 사람은 다시 평온했으나 하루는 영어교사가 다시찾아와 백석의 집이 亂家가 됐다고 알려주었다.나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여러사람을 울리고 남의 가정을 파괴하다니...그녀는 명륜동 근처로 숨어버렸다.한달뒤 몹씨추운 겨울밤 백석이 어떻게 찾아냈는지 뒤창 담넘어에서 자야 자야하고 불렀다.그녀는 입을 악물었다.'그냥돌아가세요'마음으로 중얼거렸다.몸이 파들파들 떨렸으나 그러나 결국은 버선발로 달려나가 당신께 안기고 말았다고 자야는 술회했다.그뒤로 백석은 다시한번 장가를 더갔다.시련의 사나이인가.자야는 괴로움에 중국에서온 친구를 따라 상해로 갔다.고급무도장에 고운 치마저고리 입고 나갔을때는 외국인이 몰려와 인상적이라며 엄지를 치켜올렸다.달포가량 있으니 고향생각 백석생각이 갈증처럼 ?아올랐다.서울에 와서 그리던 백석을 만나니 '나 장춘가기로 결정했어'이한마디에 눈물이 왈칵쏟아졌다.'진작 떠나려고했는데 당신을 아니보고 갈순없었어' 꼭 가야하느냐고 묻자 '평안히 등을 붙일 단 한칸의 방이 이땅에는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자야는 자신이 더이상 그의 부모님과 아내들 사이에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싶지않았다."정히 돌이킬수없는 발길이라면 조용히 혼자 어디론가 떠나서 작품이나 많이 쓰세요" 이 말에 백석은 그 미남형 얼굴이 노여운 얼굴이 되어"어찌 그렇게 사람을 야멸차게 버릴수가 있소? 참으로 말 다한 사람이로군.어쩔수없지.정히 혼자 가라면 혼자가지" 백석은 뒤돌아 보지않고 떠나갔다. 이것이 마지막이될 줄은 자야는 몰랐다. 뒤에 또 만날수있겠지!하는 여성으로서의 사랑해주는 남자에 대한 자신감이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백석은 장춘에서 관청에 다니다가 창씨개명을 요구하는바람에 사표를 냈다고한다.자야는 인편에 한복 바지저고리와 검정두루마기 한벌을 지어서 보냈다.백석은 그옷을 즐겨입었다.1941년 생계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중국인 토지소작농생활까지 했다.1942년 단동에서 세관에 종사했지만 1944년 일제징용을 피해 오지광산으로 숨었다.해방직전 백석은 토머스하디의<테스>를 번역해 출판하기위해 잠시 상경했다.그때 자야를 찾고자했으나 만날수없었다.해방과함께 귀국한 그는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인 정주로갔다.1946년 조만식의 요청으로 통역비서가되어 평양의 조선민주당일을 맡았다.1947년 詩<적막강산>이<신천지>에 발표됐고1948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진다.1961까지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조선문학>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해왔다.

자야는 1953년 중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1955년 대원각을 인수했다.세월은 무심히 흘러 자야는 서울 하늘아래 요정의 안주인이 되어 뭇남자의 품에안겨 천억대 재산가가 되었지만 가슴속엔 오직 백석의 초상이 굳건히 변함없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왜 백석을 따라 만주로 가지않았느냐는 류시화시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영 헤어질줄 알았더라면 따라갔겠지요.잠깐인줄 알았어요.전에도 한 열흘 안 들어온적이 있었는데 속으로"너 함흥에 결혼식 올렸구나"라고 생각했었지요.또하나 급한 일은 동생 일본 성악공부 1년에 이삼백원 들었는데 그 뒷바라지도 해야 했구요.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거예요.자야는 평생을 가슴속에 간직해온 백석을<백석,내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내사랑 백석>이라는 글을 남기고 백석의 산소를 디뎌보지도 못한채 1999년11월4일 백석에 대한 가슴아픈 사연만 남기고 83세로 쓸쓸히 저세상으로 떠나갔다.자야의 인생은 백석이 전부였다!!!!!.그러나 남자인 백석은 그 속을 모르지요.위의 여섯 여자 중에서 이화여전 출신 첫째부인 문경옥씨는 외아들을 데리고 백석을 미워하며 따라 오지말라며 월남했다고 한다.오뉴월 서리가 맺힌다는 여자의 한이 백석의 그 끝없는 도화살낀 방황의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를 일이다.셋째부인 리윤희씨는 둘째아들 중축씨가 대필한 편지에서 백석과는 1945년말 결혼했으며 슬하에 3남2녀를 두고 평양 동대원에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 창작실에서 러시아소설과 詩등 번역과 창작활동에 몰두하며 살다가 1959년 '붉은편지사건'이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로 옮겨와 현재까지 살고있으며 남편은 1995년83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전했다.'붉은편지사건이란 1959년 천리마운동으로 黨性이 약한 작가들을 지방생산현장으로 내려보낸 운동이다.부인 리씨는 글밖에 모르는 남편이 삼수군으로 내려와 농장원으로 일했지만 농사일을 제대로못해 마을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전했다.백석은 도리깨질을 못해 처녀애들에게 배웠을정도였으며 너무 창피해서 달밤에 혼자 김매기를 연습했다고 한다.하지만 백석은 하루에 한사람을 열번을 만나도 매번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곤 할정도로 성품이 겸손해 삼수군 사람들중 백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농장생활중애서도 백석은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문학 창작지도를 했다.백석의 집에는 그의 창작노트등 그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것으로 밝혀졌다.장남 화제씨는 편지에서 아버지가 생존시 남겼던 번역소설원고도 이젠 많은세월이 흘러오면서 다 휴지로 써버렸다고 말했다.시인으로서 작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여 83세의 일기로 살다간 시대의 풍운아 백석의 만년은 너무나 쓸쓸했다.45~48년 해방후 3년사이 자야를 찾을법도 했다. 어쩌면 자야와 재회했을수도 있었겠으나 백석의 입장에서는 두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있고, 사회적 신분의 차이도 은연중에 느꼈을수도 있고, 자야와의 사이에  이루지못할 사랑의 벽은 너무나 커서 서로가 애달픈 추억만을 남긴채 재회를 못했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여전히 백석의 발자취는 여섯명의 여인중에 이루지 못한 사랑, 어쩌면 통영출신 蘭이 그에게는 더 절실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네번이나 머나먼 남쪽길을 가슴설래며 '蘭'을 찾아갔으나 끝내 이루지못하고 아쉬움만 남긴채, 통영을 제목으로 한 詩를 세편이나 쓴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수 있고, 끝내 구원의 여인으로 남은'란'을 보면 백석의 가슴한구석에는 여전히 그리움의자리가 란에게 잔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오히려 다가서지 못하고 안타깝게 지켜보며 애달파하는것이 진정한 사랑일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종적을 감춘 자야를 불쑥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뒤 떠나며 주었다는'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詩도 실은 최정희에게 먼저 보냈으나, 하지만 그런것은 시인의 사회적 활동에서 흔히 있을수있는 일이고 별 중요하지않는 일이지요.사랑은 각자가, 子夜나 蘭이나 최정희나 세 부인이나  백석 자신이나 고이 지키는것이 아름다운것입니다.백석과 자야 두사람은 문학적 기질이 풍부한  감성과 많은 글을 남겼고, 그래서 詩人과 小說家는 언어정화능력으로 순수문화를 만인에게 감명을 선사하는지도 모릅니다. 백석은 해금되어 수능시험에 출제되고, 자야는 백석 한 남자를 사무치도록 그리워하여 <백석,내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내사랑 백석>이라는 글을 남기고 길상사를 법정스님을 통해서 시주하고,문단에 '백석 문학상'을 남기고,장학재단 등 자야와 백석 두사람사이의 러브스토리는 오늘 세인의 아름다운 話題거리가 아닐수없습니다. 안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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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2.04 00:20

    첫댓글 시인은 언어를 정화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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