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다.
산행을 접고 애들이나 데리고 놀고 싶은 생각이 불끈.
그래도 오늘은 한 해의 마무리 산행이니 집을 나선다.
그저 조금 오다 말겠지 싶었는데 산성입구에선 오히려 눈발이 굵어지고 있다.
어찌할까 잠시 멈칫.
산에 오르기 뭣하니 둘레길이나 걷자고.
방향을 생각하니 예전 의상봉 개구멍이 있던 길이 요즘 둘레길일 테니 그리로 잡는다.
내려오는 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역시 입산통제.
우리는 둘레길로 간다.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금방 백화사에 닿는다.
아마 절집에 들어서는 것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대게 들머리로 잡는 곳이라 마음속엔 아직 산길에 대한 기대감에 둘러보기 어려웠을 게다.
눈이 세상을 감추어주니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처마 밑에서 무언가를 하시던 스님이 따끈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신다.
우린 처마 밑에 배낭을 내려 놓고 잠시 쉼을 갖기로 한다.
잠시 뒤 커피 2잔, 매실차 2잔을 건네주신다.
커피를 안 마시는 객을 위한 배려다.
그리곤 마지밥이라고, 산에 올라가서 드시라고 따끈한 밥을 한 덩이 건네주신다.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배낭에 챙긴다.
정이 듬뿍 담긴 커피 한 잔 마시며 절집을 돌아본다.
본전이 무량수전 옆 마애삼존불이 눈에 든다.
커피 값을 치룰 겸 건너가 본다.
멀리서는 산수유인줄 알았는데 이름표를 보니 백당나무란다.
눈 내리는 날, 빨간 백당나무열매와 삼존불의 조화가 참 아름다웠다.
간 김에 친구들을 부르고 법당 안을 들여다본다.
정걸하다. 역시 비구니 사찰이라 더 그런가 보다.
외벽 벽화들은 두 줄인데 윗줄은 심우도로, 아랫줄은 팔상도로 구성되어 있다.
절집에서 한참을 쉬고 나와 흥국사로 건너간다.
대개의 절집 유래가 그렇듯 이곳도 원효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천년을 소리 없이 지내다 숙종조에 중창했고,
영조가 눈 때문에 발이 묶여 하룻밤을 보낸 곳이라니
오늘 눈 때문에 이곳에 온 우리와는 250년의 연을 두고 이어진다.
예전엔 그리 큰 줄 몰랐는데 근자에 몇 번 다녀가며 보니 제법 규모가 되는 절집이다.
특히 일주문에서 불이문 가는 길은 은근히 마음을 다듬게 만드는 곳이다.
게다가 오늘 눈이 같이 하니 더욱 멋스런 자태를 가지고 있음을 본다.
친구들에게 잠시 쉬고 있으라 하고 나는 서둘러 지장전엘 다녀온다.
얼마 전에 가셨다는 G님의 명복이라도 빌어드릴 겸.
한 번도 대면한 적도, 말을 나눈 적도 없었지만 왠지 오랜 친구 같은 생각이 드는 분이다.
오늘 점심은 연신내 옹심이집으로 결정하고 버스를 타고 나와
감자옹심이, 메밀칼국수, 메밀전병까지 시켜 놓고 셋이 나누어 먹고 나온다.
그 새 눈은 진눈깨비로 바뀌었고 일찌감치 집으로 간다.
한강을 건너는 전철 안에서 눈 내리는 한강을 바라보고,
전철역에서 나무에 쌓인 눈을 바라보니 바닥엔 이미 발목이 찰 만큼 쌓여있음을 안다.
집을 가는 천변 길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눈사람이 병원과 갈리는 길에 서있다.
무지 오랜만에 보는 커다란 눈사람이다.
한 해의 마무리.
해가 바뀐다고 크게 달라질 게 없지만 그래도 또 하나의 매듭을 지을 때니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다.
특히 산행은 고작 30번 조금 넘었고, 지리나 설악 같은 큰 산은 고작 한 번,
덕유는 아예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지나갔다.
내년의 바람이 있다면 좀 더 자주 큰 산을, 먼 산을 찾는 열정이, 건강이 지피기를 바란다.
오늘은 절집을 두 군데나 다녀왔으니
‘一微塵中含十方’이란 말로 매듭지으련다.
‘작은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라는 화엄 철학으로 알고 있는.
또 한 살의 나이를 챙겨야 하는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올 한해,
매번 내게 속고만 살고 있는 아내,
애들 키우느라 정신없는 두 딸과 그를 도와주는 나와는 천양지차인 사위들에게,
그리고 나와 같이 산이건 어디건 같이 해준 친구들과
꼰대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직원들에게도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전하고 싶고
새해에는 조금 더 성숙된 사람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을 전한다.
1. 산성입구에서 백화사까지.
세월님은 오늘 본거지에 계시는 바람에, 바쁘신 것 같아 이 쪽으로 길이 잡혔다.
오래 전 가봤던 길이지만 옛 흔적은 거의 지워진 상태
다만 눈이 세상을 다 바꾸어 놓았다.
짧은 시간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눈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2. 흥국사 가는 길.
길을 건너, 창릉천을 넘어 흥국사로 길을 잇는다.
북한산에서 내친 이들이 노고산으로 오르려 준비 중이다.
바람도 없고 말 그대로 참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이다.
3. 흥국사에서
백화사를 나오며 G님이 생각났다.
백화사 주불전이 무량수전이니 게가 제격이었지만 놓치고 왔으니
흥국사 지장전을 찾아 짧은 기도를 하고 나온다.
내가 절집에서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거의 없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라 마음이 짠했기 때문일 게다.
예서 또 한참을 머물며 눈 내리는 풍광에 푸욱 빠진다.
바로 이 때 쯤 망월사 생각이 났다.
다음 주엔 눈 쌓인 망월사 보러 갈지 모른다.
4. 집으로 가는 길.
창릉천의 겨울 모습을 담고 연신내로 나가 맛난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헤어진다.
집 앞 전철역에 쌓인 눈은 기대 밖 풍광이었다.
부지런한 이다 만들어 놓은 커다란 눈사람은 눈의 양을 가늠케 한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눈 감상이다.
모두 한 해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엔 좋은 일로만 그득하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사진작품 / 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