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의 행복을 우선 추구하는 것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을 내세우면 세상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딱지를 부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중심주의를 부추긴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건강치 못한 나리시즘과 똑같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라고 얘기는 하지만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들은 내면의 뿌리싶은 결핌과 박탈감에서 오는 건강하지 못한 자기 탐닉에 빠진 것이다. 이를 사람들이 강인한 자아로 보지만 이는 결코 좋은 자아가 아닌 보잘 것 없는 자아일 뿐이다. 자신의 행복을 우선 찾는다고 남을 무시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자아관을 갖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야 하고 매우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나만의 목표를 정하라.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고 자존감이 낮은 경우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선생님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친구를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남한테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남들이 나에게 갖는 기대에 내 자신을 맡긴다. 이런 복종적인 관계로는 자존감을 절대 높일 수 없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정하여 목표로 세워야 한다.
시간을 내어 내가 누구인지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바쁘게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남들이 말하는 나'가 진정 나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알아야 한다. 매일 시간을 내서 일기를 쓰거나 해서 '내가 누구인지'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결코 난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저도 하루에 몇 번이면 난 안되, 역시 난 아니야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이기는 것은 어렵고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이 생각을 이기지 못하면 전 그냥 예전의 불행한 저로 남아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건 이제 싫죠? *^^*
자존감 높이기 - 자신을 위해 살기
우리는 항상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 교육을 받아왔다. 누군가 착하다고 해도 그 이유는 "그 아이가 압전하고 말을 잘득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도덕의 핵심이라고 간주되었고 이런 가치를 얘기하면서 자존감 보다는 '복종'에 더 관심을 보여왔다. 이런 복종은 우리의 자존감을 해칠 뿐이다.
여성 해방 운동을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과거에는 여성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해왔고 그것은 "여성들의 한"으로 승화되어서 고급스럽게 표현되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자존감을 버리라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자신의 어떤 성공적이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자식한테 모든 기대를 걸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이 올바른 어머니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아니면 "남편을 위해, 모든 기대는 남편에게 거는" 형태로 변했다.
하지만 이런 어머니의 사랑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 며느리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인한 고부간의 갈등, 아들을 독차지하고자하는 열망, 아니면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자식들이 크고 남편이 성공한 뒤 남는 것은 "나는 도대체 왜 살았나"하는 회의이다. 왜냐면 그들의 성공과 행복은 바로 나의 성공과 행복이 아님을 그때서야 깨닫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을 위해, 남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것으 결코 상대방도, 우리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어쩌면 이런 얘기를 듣고 그렇다면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인가요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기주의는 자존감을 높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이기주의, 나르시짐 등은 자아 도취된 것으로 "내가 무조건 우선"이며 나만을 위해, 나를 탐닉하는 것을 말한다. 남이야 어떻게 되는 나만 우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당차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는 내면 깊이 뿌리박힌 결핍상태와 박탈감에서 오는 상태이고 자기가 느낀 그런 박탈감을 남에게 느끼게 할려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격에만 열을 올리는 자아는 결코 건전한 자아는 아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와 반대로 남의 생각을 존중하고 의견을 들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남들이 자기를 해칠려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사랑안할까봐 불안해 할 필요가 없고 그렇기에 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인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는 이런 '복종'의 가치관을 넘어서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남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자존감 높이기 - 상처받은 자아 끌어안기
우리가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그대로 앉고 치유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그런 상처를 안겨준 사람처럼 되거나 무의식적으로 그런 자아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그런 자신을 영원히 용서안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원인은 과거에 있는데 현재의 우리와 관계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인간관계가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날 싫어하는구나 불평하거나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 당시 어린 시절의 우리 자아인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아무 힘도 없었었다. 그런 행동들을 하거나 그런 것을 당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 현재의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잇다. 그리고 그때의 느낌을 그대로 앉고 있다. 평상시에는 현재의 나 아래에 파묻혀져 있다가 어린 시절과의 비슷한 경험이나 상태가 일어나면 나를 지배하게 된다. 아니면 계속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나를 그대로 두면 항상 자신이 이분적이 되는 것 같고 뭔가 빠진 듯, 불완전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존감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린 이런 어린 시절의 나, 내 안에 남아있는 "어린 나"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나"의 상태를 알고 "어린 내"가 받은 고통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청소년 기의 "나"를 만나고 마찬가지의 만남을 해야 한다.
이는 각 나이의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하면 더욱 좋고 이를 통해 "내" 누구인지, "나 안에 어떤 자아들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이들을 다 "나"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자존감 높이기 - 자신을 받아들이기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자신을 거울속에서 찬찬히 보아라. 예쁜 부분도 있지만 없애거나 고치고 싶은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 보면볼수록 여러 생각이 떠올라 치를 떨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울을 향해 한번 이렇게 말해라."아무리 못나고 단점이 많더라도, 난 나를 솔직하게 받아들일거야"라고.
내 자신이 맘에 안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하지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맘에 들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이 최고이며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나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거짓없이
현실의 본인은 지금 거울에 서있는 사람이며 이 사람을 거부하기만 한다면 정말 아무런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심리적 두려움과 싸우지 말기
보통 남들앞에 말해야 하면 떨리기 마련이고 이때 사람들은 "괜찮아. 난 떨지 않아. 괜찮다고"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욱 초조해질 뿐이다.
이보다 숨을 들이쉬고 "맞아, 난 두려워"라고 인정한 다음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의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두려움을 느끼면 느끼는 거지 그것을 의식 안하려 하거나 거부할 필요까진 없지."
이런다고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을 인정치 않고 싸우려 할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져서 기쁜 맘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직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을 친구로 삼거나 어쨋튼 두려움을 용소하고자 해야 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아라. 정말 큰 위험이 자신 앞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맞아. 두려움이 크군. 하지만 난 잘해낼 수 있어"라고 말해라.
두려움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두려움으로 인해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 때문에 고통받지도 않게 될 것이다.
현실의 두려움도 수용하기
실질적으로 자기 바로 앞에 와 있는 두려움 역시 수용해야 한다. 예컨대 큰 수술을 앞두고 있으면 당연히 두려울 것이고 이는 자신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려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너무나도 두렵고 괴로워서 의사선생님한테 방사선실에 매일 2~3시간 있어도 되냐고 했다.
"그냥 기계들을 좀 보고 싶어서요. 기계하고 친해지면 맘의 준비가 되어 무섭지 않을 거 같아요."
그는 앉아서 그냥 기계를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현실로 수용했다. 이 기계들은 나를 돕기 위한 거지. 두렵고 고통을 줄지라도...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이 사람은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자신의 두려움을 수용해서 이긴 예이다.
주사 바늘을 내 편을 만들어라
우린 주사를 맞을 때 너무 아프기 때문에 미리 몸에 힘을 주게 된다. 그러면 주사는 긴장한 피부를 뚫어야 하기 때문에 아픔이 더 커질 뿐인다. 이때 주사 바늘이 내 몸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상상해서 긴장을 풀면 오히려 조금 따끔할 뿐이다.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이 두려움이든 쾌락이든 자신의 체험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체험을 계속 거스르면 좋지 않은 점만 강화되고 좋은 점들은 느낄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