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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5
김종우 목사
<사명을 받음, 계시록 1장>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마 27 : 5) 그 자리를 맛디아가 대신하였습니다.(행 1 : 26) 사도라 불린 제자들은 대부분 주님을 증거하다 순교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사도 요한이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우리가 보고자 하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렇게 당시를 설명해줍니다. 계 1 :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잘 아는 대로 기독교가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고난을 겪었고 다음으로는 로마 황제들에 의해서 핍박을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핍박 중 밧모라 하는 섬으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께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어쩌면 이를 위해서 끝까지 남겨두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10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우선 ‘주의 날’에 사도 요한이 음성을 듣습니다. 이 ‘주의 날’을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일요일 즉 ‘주일’로 가르치고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잘못입니다. 몇 군데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살전 5 :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후 2 : 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벧후 3 :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두 마지막 때 곧 주님 재림 때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사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따라오는 내용이 또한 그것을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소리였을까요? 주변 사람들도 들을 수 있을 만한 소리였을까요? 요한이 이 음성을 어떻게 들었는가 봅니다. 실제 소리라기보다는 ‘성령에 감동하여’ 들은 것입니다.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육의 소리라기보다는 영의 소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영의 실체는 누구일까요? 그것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더니 누가 보였습니다. 12 - 13절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음성의 주체는 바로 ‘인자 같은 이’였습니다. 뒤에 설명을 보면 분명 예수님입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17 - 18절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전에 죽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살아있다 하십니다. 더구나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말씀합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다른 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시를 내립니다. 무슨 지시입니까? 11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한 마디로 편지하라는 지시입니다. 어디에요? 일곱 교회에. 무슨 내용으로 보내라 하십니까? ‘너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무엇인가 볼 것입니다. 본 것이 있으니 그것을 편지에 쓸 것입니다. 일단 지금 본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왜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복음서에 보면 잘 아는 대로 ‘인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은 이전에 예수님이 육체로 세상에 살고 계시던 때의 모습이 아닙니다. 13 - 15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상상이 됩니까? 더구나 그 입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16절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입에서 검이 나온답니다. 무슨 무협지 보는 기분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우리 살고 있는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니고 영의 세계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사용하는 땅의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니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을 이해하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환상을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12 - 16절이 사도 요한이 본 그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주님을 보고 놀라서 그 자리에 엎드립니다. 17절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주님 앞에 엎드리자 주님이 요한에게 안수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명하십니다. 19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기록하라 명하시지요. 무엇을 기록하라 하십니까? 3 가지입니다. 네 본 것, 이제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될 일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 본 것 : 무엇을 보았습니까? 20절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우선 일곱 별과 일곱 촛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즉 별은 ‘교회의 사자’이고 촛대는 ‘교회’입니다. 한 가지 유의해둘 것이 있지요. 문자로 표현된 것과 실제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반복하지만 ‘별’은 ‘교회의 사자’이고 ‘촛대’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환상으로 보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한 예를 들어서 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꿈에 돼지 10 마리를 보았다고 합시다. 깨어나면 돼지우리를 짓습니까? 아닙니다. 복권 사러 갑니다. 환상으로 본 것과 실제 일어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예언’은 묵시라고 했습니다. 가려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선지자에게 꿈으로 또는 이상이나 환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생각하면 엉뚱한 이야기가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일곱 별과 일곱 촛대만 본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보았지요? 예,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세상에 계실 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가 달리 표현해야 한다면 땅의 육체가 아니라 ‘성령체’이셨다는 말입니다. 그 모습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은 우선 성령체이신 예수님과 일곱 별, 일곱 촛대입니다. 그런데 이 일곱 별이 비밀입니다.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비밀이니까 모릅니다. 다 아는 것을 비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비밀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언젠가는 풀립니다. 언제 풀릴까요?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때가 되어야 밝혀진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때는 마지막 때입니다.
둘째, ‘이제 있는 일’은 무슨 일일까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먼저 편지하라고 명하십니다. 일곱 교회에 편지하라시는데 왜 편지하라고 하실까요? 그 편지하는 내용이 계 2, 3장입니다. 그러니 계 2, 3장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전에 있었던 경험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이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주로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셔서 지시하십니까? 구약성경의 선지서를 보면 대충 짐작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등등의 선지서를 보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역사를 보았듯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잘 따르고 순종합니까? 구약성경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끝납니다. 잘 해서 망합니까? 그럴 리 없지요. 하나님을 등지고 그 말씀을 배반하였기에 하나님이 참다, 참다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얼마나 경고하십니까? 렘 35 : 15 “나도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좇아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거하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나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부지런히 보내서 경고해주어도 백성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새롭게 만드신 그 백성(그리스도인)이 잘 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됩니까? 우리가 교회사 2천년을 돌아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미리 보시고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경고하시겠지요. 아마도 그런 경고의 말씀이 담기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조금 뒤에 가서 자세히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지시하시기를 일곱 교회에 편지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그 때 편지합니까? 그게 아닙니다. 지금 환상으로 장래 일을 보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편지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겠지요. 그것이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편지하는 일은 그 당시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편지할 때도 당시의 사도 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편지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또 하나, 일곱 교회가 정말 일곱 교회일까, 꼭 일곱 교회에만 편지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중 어느 교회 일곱을 선택합니까? 지금 에베소, 서머나 등등 명명된 당시의 교회를 찾아서 편지합니까? 그거 아니지요. 그런데 일곱 교회를 일곱 촛대로 비유하였습니다. ‘촛대’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예,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소에 일곱 촛대가 있습니다. 촛대가 일곱이지만 사실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 일곱이라고 표현하지만 교회 전체를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 말씀하시는구나 생각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계 2, 3장에 가면 한 교회에 말씀하시면서 끝부분에는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계 2 :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셋째, ‘장차 될 일’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앞으로 나가면서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 가지를 여기에 기록합니다. 즉 요한계시록에 다 기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그리고 장차 될 일입니다. 염두에 둘 것은 이것이 당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모두 장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나(이미 2천 년이 지났습니다) 때가 되면 사도 요한의 역할을 할 주님의 종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 이런 지시를 받을 것이고 실제 편지도 하겠지요. 우리가 그 날을 그리고 그 주님의 종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9월이 오면’(Come September) 내용은 간단합니다. 지나간 여름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해변의 낭만이나 숲속의 고요함과 아늑함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금년 여름에 우리는 그런 낭만도 아늑함도 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잘 알듯이 코로나19와 부단히 싸워 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계속 변이 바이러스가 생성되고 있으니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야기되고 있듯이 그냥 코로나와의 공존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2년이 되어가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라는 일은 아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지요.
명절이 다가오지만 명절 기분이 나겠습니까? 올해도 가능하면 모이지 말라고 벌써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나마 문명의 이기 덕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 얼굴을 볼 수는 있습니다. 온라인 차례도 드리고 온라인 성묘도 하고, 참으로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이러다가 하늘에 계신 분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기대도 됩니다. 하기야 그곳으로 중계차가 갈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합니다. 불변의 법칙, 여기서 거기로 갈 수는 있어도 거기서 이리로 올 수는 없다. 그저 옛날 기록으로나 만날 수 있지요. 9월도 이미 출발하였으니 얼마나 빨리 달릴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있는 동안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보다는 가족과 주변 지인들을 위해서 말이지요.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가을, 살찌는 계절인가요? 살찌기보다는 건강하게 또 한 주를 맞으면 좋겠습니다. 9월에는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하며 살기 바랍니다. 돈 드는 일도 아니잖아요. ㅎㅎ
2021년 9월 4일 김종우 목사
<레미니센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나’를 잃어버립니다. 과거가 없는 ‘나’는 내가 아닙니다. 만약 내가 가족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본인이야 모르니까 알 수 없겠지만 그 가족은 큰 불행을 맛볼 것입니다. 과거를 간직하고 있기에 내가 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는 지나간 일이라고 지워버릴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트라우마로 때마다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치유하여 극복해야 합니다. 아무튼 아픈 것이든 좋은 것이든 우리는 과거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나로서 사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좋은 것을 많이 기억하고 살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되살려주는 작업을 직업으로 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요? 전에 그런 영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그의 정보를 얻어내서 사용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물론 앞으로의 세상에 그런 때가 올지는 모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기억을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주는 것입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무대 위에 그 사람의 과거 기억이 현실처럼 전개됩니다. 이런 기계가 가능할까 싶습니다. 물론 현재는 그저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날도 올지 모릅니다. 좋은 일일까요, 두려운 일일까요? 사업의 의미는 그것입니다. 고객의 과거 좋은 때로 인도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사가 됩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 세상은 그것을 악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동기는 선한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살상무기로 바뀝니다. 원자력은 그보다 더욱 막강한 힘으로 변질됩니다. 좋은 것을 좋게 사용하려 하지만 개인이나 한정된 집단 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한 무기로 바뀌어 등장할 수 있습니다. 발명가의 의도와는 전혀 별개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꿈을 꾸어야 하나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근본적으로 사람이 바뀌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고객을 즐겁게 행복하게 만드는 사업이지만 달리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용의자를 잡아다 강제로 기계를 사용하여 그의 기억을 살펴서 범행 현장을 재현합니다. 그래서 공범자나 진범을 찾아냅니다. 괜찮은 일인가요?
이 회상장치로 생활비나 벌며 무료한 삶을 이어가던 ‘닉’이 어느 날 눈에 찍히는 고객을 맞습니다. 소위 삶이 뒤집어집니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집니다. 고객으로 찾아온 ‘메이’는 자기의 잃어버린 목걸이를 되찾을 수 있도록 기억회상장치를 사용하고자 온 것입니다. 사업과는 별개로 사랑에 빠진 닉은 삶의 활력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메이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아무 기별도 없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건을 돕던 과거 회상 현장에서 메이에 대한 단서를 찾아냅니다. 이제부터는 그 사건도 생활비도 문제가 아닙니다. 메이를 찾아내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숨겨진 악행을 들추어내게 됩니다. 사건으로 휘말려 들어가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메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아픔을 하나 얹은 셈이지요. 그 때가 그립습니다.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 속에는 남아있습니다. 그 기쁨, 그 행복을 누려보기를 원합니다. 방법은 있지요. 기억회상장치로 들어가면 됩니다. 과연 행복한 삶입니까? 그렇게만 살 수 있습니까? 과거를 없앨 수도 없애서도 안 되지만 과거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누가 어떻게 생활비를 조달해줍니까? 현재의 삶 속에서 일해야 소득이 생깁니다. 과거에 빠져서도 안 되고 미래를 공상만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을 살아야 하지요. 과거는 현재를 받쳐주는 힘이 되어야 하고 미래는 현재를 끌어당기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는 어떤 사회로 되어 있을까요? 흔히 ‘지구 종말’을 상상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은 줄 압니다. 어떻게 끝났을까요? 초창기에는 핵전쟁이 대세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이야기들 - 우주전쟁, 기후변화, 환경오염, 질병감염 등등. 여기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전체의 해수면 상승으로 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도시들이 반은 거의 물에 잠겼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물 위를 다니는 것이지요. 차량도 열차도 움직이면 물위로 드러난 부분을 달립니다. 그리고 소위 부자들은 보다 높은 위치에서 거주합니다. 아마도 낮에는 기온이나 좋지 못한 환경으로 활동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주로 밤에 활동들을 합니다.
어떤 환경이든 사람들은 사랑하고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건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납니다. 더구나 과거의 범죄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잊지 못합니다. 복수를 꿈꾸며 기회를 틈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도 우리의 행복한 시간도 대부분 우리 가까이 있게 마련입니다. 괜스레 멀리 쳐다보며 딴 짓하면서 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 ‘레미니센스’(Reminiscence)를 보았습니다.
<작은 아씨들>
어린 시절은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성장하면 모두 자기들만의 자리를 찾아 여태 몸담아온 보금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 수는 없을까? 하는 바람을 가집니다. 사이좋은 형제들이라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랍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런 마음도 자연스럽게 시들어갑니다. 형제들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더 가까이 하고 싶어집니다. 엄마의 품도 떠나는데 형제들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자기들이 엄마 아빠의 자리를 이어가는 것이지요. 그렇다 해도 가끔은 옹기종기 모여 떠들며 놀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추억을 상기하며 그 때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어쩌다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주워 모으기도 합니다.
아빠는 전장에 나가 있고 엄마와 네 딸이 살고 있습니다. 아는 사실이지만 네 딸은 나름 성격들이 다릅니다. 맏딸 ‘메그’는 침착하고 조용한 품성이고 둘째 ‘조’는 확실하고 적극적입니다. 셋째 ‘베스’는 차분하면서 동정심이 많습니다. 막내 ‘에이미’는 깜찍하면서도 야무지고 자기 것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신앙심 깊은 부모의 착하고 동정심 많은 품성을 이어받았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견디며 자기네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잘 챙겨줍니다. 그렇게 남북전쟁 중에 있는 힘든 사회적 여건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아빠의 무사함을 기도하며 자매들은 명랑하게 자기네 삶을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이웃을 돕다가 오히려 병을 얻은 베스는 고비를 잘 넘깁니다. 그런 속에서 가족은 더 뜨겁게 결속됩니다.
바로 앞에는 크게 어려움 없이 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손자 ‘로리’가 이곳 네 자매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결국 함께 어울려 지냅니다. 로리가 특히 관심을 가진 상대는 활달하고 개성이 강한 조입니다. 로리는 음악을 좋아하고 조는 글을 씁니다. 작가가 꿈이지요. 둘이 은밀하게 사귀는 가운데 로리의 가정교사는 메그와 가까워집니다. 어느 날 로리가 오페라 관람권 4장을 가지고 자매 둘을 초대합니다. 로리와 가정교사, 그리고 메그와 조가 함께 갑니다. 막내 에이미가 자기를 뺐다고 화를 냅니다. 끝나고 기분 좋게 돌아오니 조가 애써 쓴 원고가 벽난로에서 불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기가 막힐 일이지요. 에이미를 잡아먹을 듯 붙잡는 것을 모두 나서 간신히 말리지만 화는 오래도록 풀리지 않습니다. 어느 날 조와 로리가 연못에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보려 쫓아갔다가 에이미가 물에 빠져 소리치는 것을 발견합니다. 둘이서 간신히 구해냅니다. 이전의 화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피붙이임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 로리는 작심하고 조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서로가 강한 성격의 사람이어서 조는 친구로는 가능하나 결혼은 안 된다고 거절합니다. 실망한 로리는 유럽으로 떠납니다. 한편 조의 가족은 종종 근처에 살고 있는 고모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고모는 자기 고집이 센 조보다는 싹싹한 에이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에이미에게 그림 소질이 있음에 주목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줍니다. 조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가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엄마가 위로해줍니다. 그리고 뉴욕으로 나가보라고 권합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조도 도시로 나갑니다. 그리고 독일인 철학교수를 만납니다. 진심 어린 충고와 다정한 태도에 마음은 가도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남들 따라하듯 글을 씁니다.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니 출판사의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유럽에서 로리는 에이미를 만납니다. 어느덧 숙녀가 된 에이미에게 마음을 줍니다. 물론 조 언니를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언니 생각을 하니 쉽게 내키지 않습니다. 그래도 베스 언니의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가보지 못하는 아픔을 위로해주며 가까워집니다. 또 한편 베스의 몸이 좋지 않아 점점 쇠약해집니다. 소식을 듣고 조가 달려옵니다. 베스는 조의 품에서 숨을 거두지요. 조는 베스의 유물을 챙기며 추억과 마음을 담아 글을 써서 뉴욕의 철학교수에게 보냅니다. 전에는 그의 충고가 마음을 아프게 건드려서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고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그의 아픈 진심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에게 먼저 작품을 보냈습니다. 그 글은 교수의 감동을 샀고 출판사의 환영을 받아 책으로 출간됩니다. 그 기쁨을 담아 출간된 책을 가지고 직접 조에게 찾아옵니다.
때가 되면 서로 자기 짝을 찾습니다.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모두 나이가 들고 늙어갑니다. 한 사람이 부부가 되고 가족을 만들고 자식을 낳아 기릅니다. 자라면 다시 그 자식들이 각각 나가서 그 반복과 회전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다만 어떤 이야기를 만들며 이어가느냐 그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네 역사입니다. 한 사람, 한 가족 나아가 한 사회 그리고 한 나라의 역사와 세계사가 됩니다.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기록되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러나 때로는 조그맣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서 후대 사람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감동시켜줍니다.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을 보았습니다. 몇 번 나왔는데 1994년 작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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