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羽公) / 임보
조령(鳥嶺)이란 산 밑에는
새를 치며 살고 있는 우공(羽公)이란 자가 있는데
코가 새의 부리처럼 비죽히 나오고
손과 발의 등에 털이 깃처럼 보송보송 솟아 있다.
그는 평생을 수수나 조밭을 일구며 지내는데
아직 곡식을 한번도 거두어 본 적이 없다.
이미 익기도 전에 새들이 다 나누어 갖기 때문이다.
이제는 새들도 그의 뜻을 대강 짐작하고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무리를 지어 하늘을 도는데
혹 밭두렁에서 낮잠이라도 들라치면
날개로 햇살을 가려
그의 얼굴에 그늘을 짓기도 한다.
잠 / 임보
사북(蛇北)이라는 곳을 지나다
십여 아름의 큰 싸리나무를 만났다.
지친 몸을 잠시 쉬러 그늘 밑에 드니
잠에 곯아 떨어진 자가 있다.
그가 베고 자는 것이
싸리나무 뿌리이겠거니 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구렁이의 잔등이 아닌가.
구렁이 또한 눈을 내리깔고
뿌리들 곁에 자는 듯 누워 있다.
얼마나 지났던가
자던 자가 부시시 깨어 일어나자
구렁이도 눈을 뜬다.
한 식구냐고 물으니
꿈속에서 처음 만난 사이란다.
그러자 구렁이놈
슬렁슬렁 기어 숲속으로 사라진다.
서원(書院) / 임보
지유(只有)라는 서원이 있는데
보통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더벅머리 한 학동이
서원 옆 개울에서 나물을 씻고 있다.
스승의 찬을 마련하려 함인가 보다.
여기에 든지 몇 해나 되느냐고 물으니
두 손을 들어 열 손가락을 펴 보인다.
많이 배웠느냐고 다시 묻자
이제 겨우 나물 씻는 법을 익혔을 뿐이란다.
학동들이 많은가 보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다섯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강(講)을 듣느냐는 물음엔
아직 스승의 얼굴도 뵈온 적이 없다는 대답이다.
목화밭 / 임보
목화밭이 십여 리 벋어 있다.
김매는 자들이 밭이랑에 떼를 지어 우굴거리기에
가까이 가 보았더니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 무리가 아닌가.
토숙(土叔)이란 자가 원공들을 길들여
목화 농사를 하고 있는데
놈들은 실도 뽑고
베도 짤 줄 안다고 한다.
사람들이 옷을 귀찮게 여겨 밭을 버려 두자
원공들을 달래 그렇게 하고 있는데
베를 가져가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 가을엔 우선 저놈들에게
잠방이라도 해 입힐까 보다고
토숙(土叔)은 소처럼 웃고 있다.
도화밀천(桃花蜜泉) / 임보
자운동(紫雲洞) 골짝은 온통 복숭아꽃 천지다
가도 가도 꽃과 벌들의 세상이다
흐르는 개울물에 목을 적시며 시장끼를 달래는데
그런 내 꼴을 보고 민망했던지
동행하던 목천(木川)이
자신의 발목을 꽉 움켜잡으라 이른다
휙 바람이 일더니
목천(木川)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의 도포자락은 날개가 되었는데
그는 한 마리 벌이었다
벌의 발에 매달려 떠 있는 나도
날개가 돋아 있다
우리는 한 도화밀천(桃花蜜泉)에 기어들어
꿀을 파먹다 이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던가
햇살이 너무 따가와 눈을 떴더니
집채보다도 더 큰 둥근 분홍 바위 위다
날개를 다시 펴고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는데
돌아와 보니
우리가 누웠던 곳은 한 알의
복숭아 열매였다
어느 새 익은 복숭아들이
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는 잘 익은 천도(天桃)를 골라 깨물면서
자운동(紫雲洞) 골짝을 흥얼거리며
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