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곳으로 외 1편
김이듬
지속적으로 찡그리며 살아왔다
무언가를 자세히 볼 때
낡은 플란넬 커튼 사이로 완벽한 바람이 불어올 때
창가 안락한 의자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때에도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눈을 비비거나 깜빡이는 횟수가 다른 이보다 훨씬 많았다
흐릿하며 캄캄한 매래에 관해 매일매일 호소했다기보다 정말로 눈이 나빴다
시력이 마이너스인가요?
수정체의 조절장치에 문제 있는 거죠?
선천적으로 근시입니다
눈앞의 것은 잘 보이니, 그게 어딥니까
안경점 할아버지가 유리 테이블 위에 신문을 펼쳤다
도수를 확인하다가 나는 너의 이름을 발견했다
프랑스 남부의 피레네 산맥 아래 산간지역으로 가지 않았구나
너는 한 마을에서 오래 버텼어
네가 고향 강가 늙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해말갛게 웃고 있는 사진이 신춘문예 당선자 이름과 함께 실려 있다
우리의 마지막 문답은 간결했었지
-너는 왜 먼 데만 바라보니? 자꾸 어딘가로 가고 싶으니?
-더 멀리 가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을 것 같아
내가 태어난 산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나는 다정하고 엄숙한 사람들을 피해 바람 속에서 맹금류를 따라갔다 선천적인 근시안을 부정하며 더 멀리 말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 내 앞에서 어렵사리 빛나는 시간을 회피했다 모르는 소리를 좇아 은빛 머리카락에 뾰족한 과일 향에 매료되면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며 오랫동안 서 있다가 멀리 남아있는 날들을 걱정하다가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던 저녁
너는 가까운 데서 나의 뺨을 꼬집으며 여전히 속삭일 테지 살랑거리는 나뭇가지처럼
친구여, 누가 더 많이 보았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이 울었는가로 대화하자
<누수하는 집>
#1
방랑도 사랑도 일도 때가 있다는 말
들은 말을 옮기는 나이가 되었다
네게 가고 싶지만 다리가 아프고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나온다시던
엄마의 말을 실감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그분 속에도 하얀 피부, 부드러운 뺨으로 노후를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이 살고 있고 있다는 걸
에어컨에서 물이 샌다 어지간하면 참다가
고장난 것을 알게 될 때는 그것이 꼭 필요한 폭염
눈보라를 바라보며 강은 왜 흘러가며 이름이 바뀌는지 궁금했던 계절이 다 지난 후
빨간 껍질을 뚫고 나온 사과는 더 이상 사과가 아니니까
서비스 기사가 펌프를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을 길어 올려 빼내는 힘이 부족한 부품만 바꾸면 된다고
나는 웃었다 엄마도 몸을 흔들며 웃었다
자꾸 끄덕거려서 버리려던 책상도 다리 한 개만 손봐주면 오래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웃는 동안 눈물이 올라왔다
#2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엄마 마지막 소원은
중환자실에서 내 손을 잡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자 집에 데려다줘
병을 고치러 간 병원에서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돌아가셨다
관을 매고 산으로 가던 이들이 소나무 관이라서 무거우니 쉬어간다고 했다
내려놓은 관이 움직이지 않는다며 돈 봉투를 뿌려달라고 했다
함잡이들이 짓궂게 가족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다
네 집은 멀어? 이런 모텔 말고 네 집에서 자고 싶다
어제 저녁에 뭐했어? 왜 전화 안 받았니?
기억이 안 나
누구나 범죄자처럼 철저한 알리바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가까스로 미지의 계절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그마한 모포를 두르고 모로 누워있을 때
추격당하던 무고한 도망자가 집에서 생포되는 영화를 보았다
양철 냄비 안에서 어죽이 끓고 있던 저녁이었다
연어가 회귀하는 곳에서 플래시를 켜고 기다리는 어부 아닌 사람들
둥근 식탁에 앉아 둘이 식은 죽을 먹었던
여러 해 전
엄마와 나는
묶어놓은 배와 물결 사이 얼음처럼
김이듬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경상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계간『포에지』로 등단했다.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달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과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 『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가 있으며 연구서적으로 『한국현대페미니즘 시연구』가 있다. 영역시집 『CHEER UP FAMME FATALE』이 있다.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올해의좋은시상, 22세기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출강, <책방이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