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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43) 정의에 관한 어떤 이해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올까?
공동체 회복 이끄는 정의, 법 논리 넘어 참사랑으로 완성해야
한국 현대사에서 ‘정의(justitia)’라는 단어는 가장 오염된 동시에 가장 애타게 추구된 가치였다. 1980년 5·18 민주항쟁을 유혈 탄압하며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은 역설적이게도 국정 슬로건으로 ‘정의 사회 구현’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구호 아래서 자행된 삼청교육대, 녹화사업 등의 무자비한 인권 유린은 위정자가 내세운 정의가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국가 권력이 오히려 정의의 근간인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이 역설은 우리 역사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당시 하느님의 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아모 5,24)고 외쳤다. 권력자가 부당한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내세운 정의가 ‘박제된 명분’이었다면, 김 추기경이 제시한 정의는 억눌린 자들의 몫을 되찾고 보편적 가치를 회복하는 ‘생동하는 질서’였다.
이러한 역사적 모순은 우리에게 정의의 본질에 대해 묻게 만든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지배자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강제하는 통치가 정의인가, 아니면 인간의 천부적 권리와 공동체의 참된 복리를 위한 저항이 정의인가?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론을 통해 이 비극적 모순을 해명할 진정한 정의의 기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항구한 의지’로서의 정의
토마스의 철학 체계에서 정의는 단순한 개인적 덕성을 넘어, 법치주의의 인격적 토대이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한다. 「신학대전」에서 토마스는 정의를 현명, 용기, 절제와 함께 사추덕의 하나로 분류하면서도, 그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위상을 부여한다.(II-II,58,12) 이는 정의가 개인의 내면적 수양에 머물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선(bonum commune)’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정의를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데 있어서 완전하고 항구한 의지”라고 정의(定義)한다.(II-II,58,1) 이 고전적 정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정의의 주체가 지성이 아닌 ‘의지’라는 사실이다. 정의는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 인식하는 지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마땅한 권리를 부여하겠다는 견고한 습성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스는 감각적 욕구는 비유하거나 비교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정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II-II,58,4) 즉, 정의는 고도의 지성적 숙고를 전제한 의지적 결단이자 인격적 습성인 것이다.
윤리적 위상의 측면에서 정의는 다른 덕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절제나 용기가 개인의 내적 정념을 다스린다면, 정의는 철저히 ‘타인과의 관계(ad alterum)’를 본질로 하며 ‘외적 행위’를 대상으로 삼는다.(II-II,58,11) 토마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를 ‘은유적인 정의’로 한정함으로써, 정의의 본질이 타자에 대한 존중과 사회적 적절성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II-II,58,2)
더 나아가 토마스는 정의를 ‘개별적 선(bonum singularis)’이 아닌 공동선을 향하는 ‘웅장한 덕’으로 평가한다. 정의는 모든 덕의 행위를 공동체의 이익으로 인도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법적 정의(justitia legalis)’와 동일시된다. 이러한 정의의 본질적 규정은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통해 사회 질서 속에서 구체화된다. 정의의 주체가 타인을 향한 올바른 의지임을 확인했다면, 이제 이 의지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 형태들을 고찰해 보자.
정의의 다양한 형태와 참사랑의 관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계승하고 심화하여 정의를 ‘일반적(법적) 정의’와 ‘특수 정의’로 명확히 구분하고, 특수 정의를 다시 ‘교환 정의’와 ‘분배 정의’로 세분화한다
첫째, ‘교환 정의(justitia commutativa)’는 사적인 개인들 사이의 상호 거래와 계약을 규제하는 정의다. 이는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철저한 ‘산술적 평등(수학적 동등성)’을 원칙으로 삼는다.(II-II,61,2) 예를 들어 소유권을 보호하고,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하며, 채무를 변제하고, 남에게 입힌 손해를 똑같은 가치로 배상(restitutio)하는 활동들이 모두 교환 정의의 영역에 속한다.
둘째, ‘분배 정의(justitia distributiva)’는 공동체(국가)가 개별 구성원들에게 공공의 재화, 관직, 명예, 영예를 분배하는 방식을 규율하는 정의다. 분배 정의는 절대적인 양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라, 각 개인의 기여도와 공동체 안에서의 위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배분하는 ‘비례적 평등(기하학적 비례)’을 원칙으로 한다. 즉, 공동체에 더 크게 공헌한 자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는 것이 비례에 의한 동등성이다.(II-II,61,2&4) 공동체의 지도자는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필요와 공헌도를 고려하면서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분배 정의를 현명하게 실행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을 토대로 성찰해 보면, 5·18 민주항쟁의 희생자들에게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이라는 몫을 돌려주는 것은 단순한 시혜적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 그들이 수행한 가치에 부합하는 정당한 몫을 배분함으로써 뒤틀린 사회적 비례를 바로잡는 분배 정의의 실현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에게 정의는 인간 사회의 기초가 되는 평등과 권리를 수호하는 동시에,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인정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덕인 종교와 참사랑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한다.(II-II,80,1) 오늘날의 윤리적 실천에 비추어 볼 때, 토마스의 통찰은 정의가 차가운 법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인격의 존엄성에 기초한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정의’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5·18 민주항쟁은 훼손된 정의의 습성을 회복하려는 공동체의 거대한 의지적 분출이었다. 당시 국가가 자행한 불법적 학살은 타인의 생명과 존엄이라는 ‘각자의 몫’을 찬탈한 명백한 불의(不義)이며, 이는 영혼의 생명인 참사랑을 거스르는 중대한 죄다.(II-II,59,4)
오늘날 우리가 5·18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과정은 파괴된 산술적, 기하학적 평등을 다시 세우는 배상의 절차이다. 정의가 배제된 채 급조된 화해와 평화는 기만적인 거짓으로 전락하기 쉽다. 정의의 요구에 철저히 응답함으로써 공동체의 도덕적 건강성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17) 피조물에 새겨진 하느님의 글자와 삼위일체의 흔적
꽃 한송이도 사랑으로 창조됐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들판에 핀 꽃 한 송이에서도 창조주의 섬세함을 읽어냈고, 흙길을 조심스럽게 기어가는 작은 구더기 한 마리를 보고도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라는 시편 구절을 떠올리며 사랑에 불타올랐습니다. 그에게 창조계는 단순한 물질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글자가 새겨진 성사적 존재였습니다.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가 증언하듯, 성 프란치스코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감성으로 사물에 숨겨진 비밀을 영적으로 간파하는 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창조계 관상은 13세기 위대한 신학자 성 보나벤투라와 복자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견고한 철학적·신학적 체계로 확립되었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2장 ‘창조의 복음’에도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함축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신비의 최고선이시기에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외부로 쏟아부어 피조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만물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심연에서 흘러나왔기에,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피조물이라도 그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과 고유한 구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류는 원죄를 저지르기 이전에는 피조물이라는 책을 영의 눈으로 정독하며 삼위일체를 또렷이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보나벤투라의 지혜를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만물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반영하는 한 권의 소중한 책을 쓰셨다”고 말하며,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공동 여정을 함께하는 신비로운 형제적 동반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둔스 스코투스는 온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육화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창조계의 우주적 설계도이자 완벽한 모델로 정해졌다고 직관했습니다. 그는 개별 피조물이 지닌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바로 이것임(Haecceitas)’이라는 독창적인 신학 개념으로 정의했습니다. 길가의 모래알갱이 하나조차 다른 어떤 존재로도 환치될 수 없는 고유한 독특함을 지니며,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무한한 생명을 단편적이고 유한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코투스는 개별자가 지닌 이러한 독특성과 차이를 통해 모든 창조물이 저마다의 다름 속에서 하느님의 선을 충만히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영적 통찰과 궤를 같이하며 오직 인간의 협소한 경제적 가치와 실용적 유용성만으로 만물을 함부로 평가하고 파괴하는 오만한 태도를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교황의 말처럼,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만물의 냉혹한 소비자이자 파괴자로 전락한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의 삶에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 숨겨진 하느님의 거룩한 심연을 바라보는 통찰의 눈을 ‘컨투이시오(Contuitio)’, 즉 영적 직관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직관을 통해 피조물에 깊이 새겨진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하고, 관계의 조화를 일구는 ‘호모 오이코노미쿠스(homo oikonomikus, 집의 인간)’로 거듭나야 합니다.
피조물의 비명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함께 귀 기울이며 이 영적 직관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회개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매이자 어머니인 이 공동의 집(oikos) 지구를 착취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찬가가 울려 퍼지는 거룩한 집으로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위한 환대] 환대에서 출발하는 청소년, 청년 사목 나와 너 그리고 우리
Ep7. 청소년과 청년이 순교성인에게서 배우는 삶의 길
오늘날 청소년과 청년은 대부분 무한 경쟁과 물질주의, 극심한 양극화 속에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하며 살고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신앙과 삶의 괴리는 청소년과 청년이 자기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어렵게 한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간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순교 성인들의 삶은 과거의 신앙 유산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신앙인에게 실존적 방향을 밝혀주는 가장 역동적인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먼저, 청소년과 청년은 순교 성인들의 삶에서 세속의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신앙의 가치를 삶의 기준으로 선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당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스스로 강학회를 조직하여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였다. 그들은 삶에 구경꾼이 되기보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이 속한 세상에 참여하여 사회 변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174항 참조) 이러한 삶은 오늘날 청소년과 청년이 세상이 정해준 안락함과 성공 기준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복음적 가치를 용기 있게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해 준다.
또한, 순교 성인들이 박해를 피해 그들끼리 모여 형성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 속에서 차별 없는 형제애와 환대를 배울 수 있다. 초기 신앙 공동체는 엄격한 반상 제도와 가부장적 질서를 넘어 양반과 천민, 남성과 여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느님 자녀로 일치하는 친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소년과 청년은 이러한 순교 성인들의 모습을 본받아, 혐오와 고립이 만연한 오늘날의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편견 없이 포용하고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환대하는 법을 터득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교 성인들의 삶에서 청소년과 청년은 신앙의 능동적 주체성을 배울 수 있다. 순교 성인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증인으로 세상을 살아갔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사제를 요청하고, 교우촌을 형성하여 서로의 신앙을 돌보았으며, 어렵고 모진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순교 성인들의 삶은 복음화의 주체로서 일상에서 신앙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 모범이다.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 청년에게 복음화의 주체로서 일상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법을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옥중 고초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 평화를 간직했던 순교자들의 영성은, 미래의 불안에 짓눌린 현대 청소년, 청년에게 참된 자유를 누리고, 희망하는 법을 알려준다.
이처럼 순교 성인들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청년 그리스도인에게 급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도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길을 제시해 준다. 그들의 삶은 청소년·청년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확고한 빛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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