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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의 하나님
창세기 31:1~16
창세기 30장은 라헬이 레아를 질투한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우리가 읽은 창세기 31장은 라반의 아들들, 야곱의 외사촌이요, 처남들이 야곱을 시샘하는 이야기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 대해서 시기한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의 번성에 대해서 극도로 과장하고 있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현실보다 확대되어 보이는 법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고 “선생님, 선생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따라 갑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저 몇 사람 가는데 다 가는 것처럼 보인 것은 시기의 감정에서 생긴 것입니다.
도대체 라반의 아들들이 그처럼 떠들어대는 ‘큰 거부가 되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그것은 한 떼의 갈색양, 그리고 얼룩진 염소들, 약간의 낙타와 나귀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한 소위 ‘큰 거부’였습니다. 이것은 ‘큰 거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기하는 눈으로 보니까 이처럼 얼마되지 않는 것이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야곱이 가진 소유가 모두 부정하게 얻어진 것처럼 야곱의 성실성을 비열하게 비난했습니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주장입니다. 그들은 야곱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라반의 아들들이 사실을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면 야곱의 비위가 상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언제나 선한 양심을 조심스럽게 지켜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적인 번성이 지니고 있는 허무요, 괴로움입니다. 또 이러한 외적인 번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웃을 시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가 창립된지 4년만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보이는 면으로도 눈에 띄게 자랐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시기의 눈으로 보면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면 지옥의 자식들은 저주를 합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여러 말을 했지만 라반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비교적 라반이 야곱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지만 그 표정이 이번에는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의 표정을 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했습니다.
라반은 본래 그 성품이 야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그 표정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잠언 23장 6절에는 ‘악한 자의 눈’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눈’으로 보는지, ‘시기하는 눈’으로 보는지 그 보는 것이 다릅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도전에 위협을 느끼고 이스라엘 진영에 도전자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급한 마음에서 이스라엘의 숙적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람에게는 자기 딸을 주겠다고 공고했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이 놀랍게도 골리앗을 죽이므로 풍전등화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 회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약속대로 다윗을 사울 왕이 사위로 삼았으나 그후에 들리는 여론은 사울로 하여금 미칠 정도로 다윗을 시기하게 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날로 돌아가는 다윗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를 의식하게 된 사울은 시기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 되었고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시기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울 왕은 명예와 인기 때문에 사위인 다윗을 시기했고, 라반은 재산 때문에 사위 야곱을 시기했습니다. 기분 좋지 않은 표정은 가정의 평화와 사랑을 깨뜨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라반의 노한 표정 때문에 그의 가정이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최대의 축복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야곱은 하란을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에 의해서 된 것이었습니다. 3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세히 보십시오. 야곱의 입장이 퍽 난처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시기 전에는 그의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하란에 온 것이 하나님의 명에 의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떠나라는 지시가 있기 전에는 그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어렵기 때문에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도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가는 길이 평탄해도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사람은 다윗의 말한 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왜냐 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아버지의 손에 꽉 붙들려 가는 아이는 두렵지 아니합니다. 아버지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에서 특별히 우리 눈에 띄는 것은 13절 말씀에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하란을 향해 떠나오다가 들판에서 밤에 잠을 자는데 나타나서 그에게 보여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잠에서 일어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면서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면서 야곱이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다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이란 말씀은 우리의 하나님은 처음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그때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벧엘은 야곱이 처음으로 은혜를 받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처음 은혜 받은 때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야곱에게 그때 아무것도 찾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전혀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찾으시고 우리가 일깨움을 받고 자신만 바라보던 집착을 버리고 올바른 길로 인도되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야곱처럼 잠자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항상 깨어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깊은 잠에 빠져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옛날 야곱에게만 있은 일이 아니고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기도하기 위해 이 예배당에 나와서 이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면서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나는 이 예배당에 들어올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줄을 내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내가 앉았던 자리를 생각하면서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외로워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벗이 되셨습니다. 내가 두려워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담대하게 했습니다. 모든 세상의 샘물이 말라 버렸을 때 비로소 영원한 샘이 달콤하고 시원한 시냇물로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벧엘의 하나님, 이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지금 근심 중에 있다고 해도, 혹은 외로움에 사로잡혀 돌베개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또 집과 가정과 친구들을 다 잃어버리고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고아의 신세가 되어 보호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지경이 된다고 할지라도 오, 벧엘의 하나님, 나의 피난처시며, 보호자시며, 공급자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을 찾으셨고 야곱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의 야곱만큼 불행한 사람을 보기도 어렵고, 하나님을 만난 그 이튿날의 야곱만큼 행복한 사람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저는 이 시간 간구합니다. “오, 벧엘의 하나님, 옛날의 야곱처럼 이 예배당에 나올 때는 외롭고,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나왔으나 주님을 뵈옵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있게, 행복하게 이 하나님의 집을 떠나게 하옵소서.” 야곱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도,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 뵈면 달라집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본 후에 제자들의 형편과 부활하신 주님을 뵈온 후의 형편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더구나 벧엘에서는 사다리가 있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이 사다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다리가 있습니다. 이 사다리는 하나님과 우리가 교제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다리가 없이 어떻게 하나님과 야곱이 교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다리와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길은 열려져 있습니다. 이 길은 지금도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다리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을 잘 사용합시다. 여러분의 모든 소원을 위로 올려 보내십시오. 분명히 이 길을 따라 올라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사와 간구와 고백을 모두 올려 보내십시오. 분명히 이 모든 것이 열납될 것을 믿습니다. 이 사다리는 바로 이런 것을 위한 통로가 되기 위해서 벧엘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축복하여 모든 것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천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천사는 깨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곤해서 잠들 때에도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집에는 보초가 없어도 천사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벧엘의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을 것이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게 될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사람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권에서 벗어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말로 다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늘까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옛날 야곱이 하나님으로 경외했던 하나님은 지금도 역시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참새들은 하루의 일과 중 첫 과제가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조반을 먹지 않은 채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이들에게 먹이를 공급하십니다. 새장 안에 들어 있는 새는 시간에 따라 주는 양식을 걱정없이 먹고 삽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중에서 마음껏 기르시는 새보다 애완용으로 새장 안에 가두어서 기르는 새가 죽는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굶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앞으로 우리의 여정이 끝마칠 때까지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야곱의 마음에 있는 소원을 풀어 주셨습니다. 야곱이 “내가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말했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고 축복해 주실 줄 믿었습니다. 저 밖에서 들려오는 가축들의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야곱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땅에서 내게 주신 것이구나”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한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신 것을 감사드려야 하며, 비록 소유가 적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분수에 넘침을 감사해야 합니다.
혹 어떤 분은 “글쎄 그것도 웬만큼 있어야 감사하지.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비하면 다 부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과 맺은 또 한 가지의 약속은 그가 그리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밧단 아람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는데 이로써 하나님께서 벧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더욱 굳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이 돌아가기 어려운 조건도 많았습니다. 재산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무사히 돌아오게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섭리하시는 중에 아주 신비로운 길을 걷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지혜로우신 계획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시련과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범선이 항해하기에 가장 알맞는 바람은 항구를 향하여 똑바로 불어 가는 바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측면으로 부는 바람이 배의 속력을 가장 더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으로 향해 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바람은 흔히 우리가 기대하듯이 천국 방향으로 곧장 불어 가는 바람이 아니라 우리의 가는 길을 힘들게 하는 역풍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완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상은 그렇지 못하고 우리가 근심하고 염려하던 일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축복을 오히려 안겨 줄 때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을 다 이행하셨습니다. 야곱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꼭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주리라고 약속하신 모든 것을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에게도 꼭 같은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너무 풍성하고 은혜스러워서 다시 이 말씀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한다면 오히려 황금에다 동으로 도금으로 하는 것과 같고 흰 백합화에 흰색을 더 칠하려는 것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두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벧엘의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우리 또한 자신을 주께 바치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값으로 산 바 된 것이므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 가장 은밀한 곳으로부터 진실한 심정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여, 주는 영원토록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맹세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마음 속에 생수 같이 솟아오르는 기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벧엘의 장소만 하나님께 드릴 것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우리가 이르는 모든 곳을 주의 이름으로 벧엘이 되게 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별해 드린 이 예배당만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하는 부엌이든지 응접실이든지 침실이든지 작업실이든지 가게든지 사무실이든지 부대든지 어디든지 모든 곳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여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또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젊은이가 취직을 하고 첫봉급을 받았습니다. 온 가족이 기뻐했습니다.
믿음 있는 어머니는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대답하면서도 우물우물하더니 재차 독촉하니까 “은행에서 새 돈으로 바꿔서 드리려고 해요.” 하면서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꿔서 십일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어머니, 십일조 드리는 게 정말 힘들어요.” 하고 고백을 하더랍니다. 그러나 계속 그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넘치는 것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기름을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무엇 때문에 이것을 허비하느냐?” 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낌없이 드렸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허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벧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계셔야 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저 높은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는 사다리이십니다. 이 사다리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벧엘의 하나님을 꼭 만나서 이 예배당에 들어오실 때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셨는지 모르지만, 두려움과 근심,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이 예배당을 떠나실 때는 평안과 기쁨, 감사와 찬송으로 떠나 이 세상 어디든지 여러분이 이르는 곳이 벧엘,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