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 ]
이 영화는 별 다섯 개의 걸작이라는 평과 별 하나짜리 졸작이라는 평으로 관객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 폭력미학의 거장이라는 별명의 샘 페킨파 감독의 가장 잔인하고 허무주의적 시각은 성질 더러운 주인공이자 술집의 피아노 연주자인 베니(워렌 오츠 분)를 따라,(사진, 주인공 베니)
현대의 멕시코를 페킨파의 전설적인 영화 <와일드 번치>의 악몽 같은 서부만큼이나 지옥 같은 곳으로 묘사한다.멕시코의 대지주 엘 제페는 가르시아가 자기 딸을 임신시켰다는 이유로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베니는 그 현상금을 차지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미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있는 가르시아의 목을 잘라 파리 떼가 달라붙는 그의 머리를 자루에 넣고 제페의 농장으로 향한다. 가는 동안 베니는 창녀 이젤라와 얽히며 가르시아의 목을 노리는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과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인다. 마침내 제페의 농장에 도착해서는 페킨파 특유의 총알이 난무하는 묵시록적(사진, 가르시아의 관을 파내는 베니)
결말을 맞이한다.
이 영화는 샘 페킨파 영화들 중에서도 폭력성이
가장 짙다는 평을 받았다. 슬로우모션 기법이 적극 활용돼서 영화 촬영기법으로 꽤 의미 있는 작품이다. 가차없는 폭력성 때문에 상영이 금지된 나라도 여럿 있었다.
그동안 워낙 폭력성이 짙어서 영화사들로부터 편집권을 완전히 행사하지 못했던 샘 페킨파 감독이 유일하게 모든 감독권 및 편집권을 마음껏 행사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가르시아의 머리는 간접적인 묘사로만 등장하고 카메라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이 좋아한다는 영화중 하나다.(사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오면 백만불을 주겠다는 제페)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김신조 일당의 1.21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들이 박정희 목을 따러 왔(사진, 애지중지하는 가르시아의 머리)
다고 해서 이 영화는 제목 때문에 졸지에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에서의 목이 박정희의 목을 연상시킨다고해서 그랬다는데 참으로 웃기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 간략한 줄거리
멕시코 갱의 보스인 제페는 자신의 딸을 임신시킨 가르시아의 목을 잘라 오는 사람에게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말한다. 이에 제페의 부하이자 동성연애자인 두 킬러가 술집 바의 주인인 베니와 함께 가르시아의 목을 가지러 떠난다. 베니는 자신의 애인이자 창녀인 엘리타로부터 가르시아가 이미 죽어서 묘지에 묻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베니와 엘리타는 백만 달러의 꿈에 부풀어 가르시아의 묘지로 향한다. 무덤을 파헤쳐 가르시아의 목을 잘라 올 작정인 것이다.(사진, 베니와 엘리타)
베니는 도중에 만난 오토바이족들을 처치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라이벌인 다른 멕시코 갱들에게 걸려 엘리타는 죽고 그는 모진 구타를 당한 뒤 가르시아의 목을 빼앗긴다. 이후 죽은 시체의 목을 놓고 피 튀기는 대결이 진행되면서 베니는 잔인하게 라이벌들을 처치할 뿐만 아니라,(사진, 피터지는 총격전을 벌이는 베니)
두 명의 동성연애자 킬러까지 무참하게 살해한다. 마침내 가르시아의 목을 갖고 제페에게 도착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페와의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었다.
[ 폭력미학의 거장, 샘 페킨파 ]
샘 페킨파는 ‘폭력미학의 거장’ 혹은 '폭력의 피카소'라고 불려지는 감독이다. 상당히 독특한 별칭들이다. 그는 영화에서 폭력을 미학으로 승화시킨, 거의 그 시초가 아닐까 싶다. 폭력의 그 순간순간,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잡아내는 여러 감독들이
그를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살아있을 때에 자신이 만든 그 영화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고생 심하게 했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심한 찬반양론에 부딪혔던 감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는 알콜 중독자였으며 70년대 넘어서는 아예 약물 중독자까지 되어버렸다. 60세가 채 못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 원인도 어쩌면 결국 다 그의 영화 때문인 것도 같다. 샘 페킨파는 처음엔 TV시리즈의 대본 작가로 시작한다. 그 후 영화감독, 대본 작가로 활동했지만 실상 그의 영화의 전성기는 극히 짧았고, 그가 남긴 영화들은 걸작 칭호를 서슴치 않고 받을 만한 영화도 거의 없는 폭력으로 가득 찬 서부극 감독으로만 기억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작가주의 정신을 찾아보기 힘든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 속에 1960~70년대를 쓸쓸하지 않게 만든 대표적인 감독이며 그가 남긴 영화의 정신이 후대에 이르러 어떤 형태로든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장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 그의 영화 세계를 통틀어 특별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점은 그의 영화 이전의 서부극들이 존 웨인은 거칠지만 언제나 우직하고 선하며 그의 상대역들인 인디언들은 언제나 악인으로 그려지던 세계에선 천지개벽할 일이었을 것이다.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페킨파의 영화 <와일드 번치>는 총격전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슬로모션을 사용해 죽음의 처절함에서 묘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그 뒤 슬로모션은 샘 페킨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지만(사진, 와일드 번치)
그 후 그의 후배 감독이자 그에게 지극한 오마주를 바친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등의 영화에서 슬로모션은 고스란히 계승된다.
그의 경력은 <건스모크>, <서부인>, <라이플맨>같은 TV서부극의 대본 집필과 감독으로 시작해서 영화 <지독한 동료>로 영화 감독에 데뷔했으며, 이후의 작품 <대평원 >, <던디 소령>에서 웅장한 서부의 경관, 신사도가 사라진 서부를 떠도는 원한에 찬 인물, 특히 무시무시하고 사실성이 돋보이는 절묘한 총싸움 등과 같은 공식이 이미 형성되었다.
그러나 페킨파는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세 번째 영화인 <던디 소령>을 만들 때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 그 자체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와 충돌을 빚고 그는 할리우드를 떠난다. 그런 페킨파의 재기를 알린 작품이 바로 <와일드 번치>였다. 자동차가 막 등장하던 무렵의 서부, 과거 총잡이들과(사진, 철십자 훈장)
무법자들이 설쳐대던 서부가 해체되던 시기에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아빠진 남성들의 윤리를 위해 싸우는 총잡이들의 모습을 장렬하게 묘사한 이 폭력 서부극은 페킨파를 일약 폭력미학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말년에 마약과 알콜중독에 빠져들기도 했던 페킨파의 영화인생은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엉망진창이 되다시피 한 그의 개인사와 그 근본을 흔들어 놓았던 미국 영화사에 대한 영향 등으로 점철되었다. 페킨파의 모든 영화는 세상의 주류 질서를 삐딱하게 보는 관점(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곧 사라질 인물들이거나 주류 질서에 대해 반항적인 인물들이다.)과 강력한 남성중심주의, 폭력미학의 강한 매력을 발산한다. 샘 페킨파 감독은 미국 현대사와 할리우드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했던 영화작가였던 것이다.
페킨파는 영화에 관해선 꽤나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뭐, 아무래도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으니 원인이었겠지만 무엇보다도 편집권을 많이 빼앗겼던 것도 그를 많이 절망시켰다고 한다.(사진, 게터웨이)
단순히 자신의 영화를 가리켜 '폭력을 숭배한다'느니 하는, 한 면만 보고 내지르는 비난들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14편이라는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고 그중에서 <와일드 번치>,<게터웨이>,<철십자 훈장>,<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관계의 종말>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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