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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4)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기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17-24절)
첫째연인 1-8절(알레프)에서 시편 119편의 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둘째연인 9-16절(베트)에서는 그런 복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간직해야함을 강조했다.
셋째연은 17-24절로, 각 절(행)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셋째 글자인 ‘기멜’로 시작된다. 셋째연, 그리고 넷째연에서 주로 다루는 공통 주제는 ‘고난’이다. 오늘 살펴볼 셋째연은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길을 찾고 그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119:17–24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9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24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이 기도에서 핵심은 19절이다. 시편 기자는 19절에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보여주고 있고(“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그에 따른 올바른 반응도 보여주고 있다(“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이 말씀이 뼈대이고 나머지 말씀은 거기에 살을 입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땅에 살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올바른 인식과 반응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교훈을 얻기 원한다.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인식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시편 119편의 배경에 저자의 고난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고난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먼저는 17절의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에 고난에 대한 암시가 있다. 꼭 ‘죽겠는’ 상황은 아닐지 몰라도 ‘잘 살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었다고는 할 수 있다. 만약 현재 그가 충분히 ‘잘’ 지내고 있었다면 이런 기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헤쳐나가고 이겨낼 수 있었어도 이런 기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도움(개입하심)을 구하고 있다. 그럴 필요를 느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절에서는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라고 말한다. 나그네는 단순히 여행객이나 떠도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이방인(이주민, 이민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간다는 의미로서 보다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는데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의미가 좀 더 강하다는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은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당연히 차는 오른쪽 차선으로 다니는 줄 알았는데 왼쪽 차선으로 다녀야 하는 나라도 있다. 사용하는 화폐 단위, 거리 단위, 무게 단위 등도 달라서 들어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도 그렇다. 언어가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은지, 이렇게 말해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옷을 입는 것도 더 신경이 쓰인다. 익숙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모든 문화적인 것들을 한번 더 생각하고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피곤함이 된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익숙해지기는 한다. 하지만 훨씬 더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 있고 어떤 것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언어가 그렇다. 정말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대해서 사람들은 항상 어느 정도의 한계를 느낀다. 아무리 그 나라에서 몇 십 년을 살았어도 모국어로 체득한 언어와 나중에 배운 언어는 다르게 느껴진다. 음식도 비슷한 면이 있다.
다른 어떤 요인이 없어도 단지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방인의 삶은 쉽지 않다. 그나마 사람들이 그런 고충을 알고 이해해주고 도움을 주려고 하면 조금 낫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이방인에 대해서 호의적이기 보다 오히려 적대적이라면 어떨까?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기보다는 괴롭히고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조롱하고 놀림감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방인의 삶은 비할 수 없이 어려워진다. 사실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지금도 시골에서는 ‘외지인(타지인)’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단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 중 하나가 아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경계한다. 소외시킨다. 알려야할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멸시하기도 한다. 시골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가 남아 있는 곳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여력이 있다면 다른 곳에 가서 살거나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거기 사는 수 밖에 없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자신이 이 땅에서 그런 나그네라고 말한다. 자신은 이 땅에 속해있지 않다. 이방인이다. 그는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데(17, 23절), 그의 주인(왕)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다. 당시 이 땅의 왕이 누구였는지, 혹 그 자신이 왕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왕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셨고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자기 백성을 삼으신 언약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시편 기자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따라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가 지금 경험하는 고난의 주요인이기도 했다. 그가 하나님께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는 이유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어떤 큰 잘못(죄)을 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핍박을 당했다.
시 119:21–23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여기 21절은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엘리가 그 아들들을 꾸짖었던 것처럼 “내 아들들아 그리 하지 말라”는 식으로 부탁하듯하는 꾸짖음이 아니다(삼상 2:24). 하나님의 꾸짖으심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다. 하나님은 그 권위로 잘못을 책망하시고 돌이키지 않는 자를 심판하신다. 더 이상 그렇게 행하지 못하게 멈춰 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자들은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이다. 행위가 온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으니, 정확히 그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는 저주(화)를 받는 자다. 이들의 특징으로서 시편 기자는 “교만”을 언급한다.
지혜 문학(시편, 잠언 등)에서는 악인에 대해서 ‘교만’을 그 주요 특징으로 자주 언급한다. 그래서 ‘교만한 자’라는 표현 자체가 악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 사용된 단어의 기본 의미는 ‘끓어오르다. 부글거리다’다. 개역개정에서는 “야곱이 죽을 쑤었다”라고 번역했는데, 거기 사용된 ‘쑤었다(끓였다)’가 교만을 의미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이다. 액체가 끓으면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교만한 자는 선을 넘는다는 것을 이 단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의 형이 골리앗과 싸우려는 다윗에게 “교만”하다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삼상 17:28). 주제 넘는 짓을 다윗이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악인이 교만한 자인 이유도 그렇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볼 때 누구보다 겸손해 보일 수 있다. 남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으면서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제 넘는 일이고 그것이 곧 교만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책망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렇지 않다. 그는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라고 말한다(22절). 그는 주제 넘게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교훈들을 지켰다. 그것이 그가 걸어온 길이었고 삶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런 그에게 따라오는 것이 칭찬과 명예가 아니라 “비방과 멸시”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며 사는 것이 옳고,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배웠고, 또한 자신도 그렇게 믿기에 그렇게 살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비방과 멸시”였다는 말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놀림거리, 비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믿으면 저렇게 바보같이 사는구나라며 오히려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것이다.
그저 몇몇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23절을 보면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라고 말한다. “고관들”은 실제적인 권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위정자들, 학교의 선생님들, 혹은 부모님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직접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나를 비방한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나를 비웃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게 맞는걸까? 성경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질까?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까? 왜 여기 시편기자와 같이 하나님의 교훈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보다 거기서 떠나는 교만한 자들이 더 많은 것일까? 왜 하나님의 백성은 당당한 승리자로서가 아니라 부끄러운 패배자처럼 사는걸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편 기자는 이 고난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해야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나그네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 적대적인 환경에 던져진 이방인이었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길을 걸으려 할수록 사람들의 비방과 멸시는 더욱 커질 것도 알았다. 그는 이 땅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그의 고난에 대한 반응은 이러한 고난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다.
반응으로 넘어가기 전에 고난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대해 우리 입장에서 조금 생각해 보자. 우리도 나그네로서 이 땅을 살고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가? 그렇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요 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벧전 2:19–21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이 말씀은 만약 세상으로부터 오는 핍박이 없다면 세상은 지금 나를 자기 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전쟁에서는 이렇게 위장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큰 승리를 가져오겠지만 영적 전쟁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성도가 어둠의 자식으로 자신을 가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적인 승리는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핍박이 없다면 그 말의 의미는 내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주민으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잘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잘 못 살고 있다는 의미다. 세상의 가치관이 나에게 불편해야 한다. 세상의 음악이나 영화나 소설 등이 전하는 메시지가 불편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들이 불편해야 한다. 그들과의 대화가 불편해야 한다. 당연히 모든 면에서 그렇지는 않다. 함께 즐길 수 있는 것도 있다. 다만 하늘에 속한 것에 반대되는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해 내가 불편함이 없고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다면, 나는 이 땅의 나그네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 정체성을 내가 최우선의 자리에 두고 있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산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할 때, 나의 죄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혹은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이 땅의 나그네라는 사실이다. 나그네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도 내가 이 땅의 나그네라는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고난에 대한 올바른 반응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고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은 고통을 표현하는 것과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몸이 아프면 사람은 먼저 아픔을 표현한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한다. 무언가를 부서질 듯 꽉 잡기도 한다. 그런다고 실제로 덜아픈 것도 아닐텐데 그렇게 고통을 표현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최대한 몸이 아프지 않은 자세를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몸부림을 친다.
삶에서 경험하는 고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우리는 같은 반응을 보인다. 아픔을 표현하고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시편 기자도 17절에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22절에서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기 시편 119편의 저자의 주된 반응은 아니다. ‘사람들의 비방과 멸시 때문에 너무 괴롭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하나님 지금 왜 돕지 않으십니까!’와 같은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반응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다른 시편을 보면 그런 탄식에 대한 말씀도 많다. 다만 그것은 일차적인 반응이고 일시적인 반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기서 빠져나오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그런 고난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보여준다.
확신
첫째는 확신이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참된 위로가 되고 바른 길을 보여준다는 확신이다.
시 119: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비방과 멸시”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고통을 통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결과를 마주하게 되면 그 일을 하는데 주저함이 생긴다.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것도 아는데,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고통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남들이 다 거짓을 말해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옳다라는 것을 알아도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남들에게 비방과 멸시를 당해보면,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게 정말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차라리 저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더 나아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도 비방과 멸시를 받으면서 같은 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정말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지, 그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갔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땅을 살고 있는 나그네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땅의 기준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고 성경이 삶에 있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성경을 읽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얼마든지 있다. 단순히 ‘책’만 생각해 봐도 성경보다 재밌는 책은 넘쳐난다.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빠져들게 하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에 비하면 성경은 너무 읽기 어려운 책이다. 그러면서 두껍기까지 하다. 사실 즐거움하고는 거리가 멀다.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사람은 하나의 사실을 사실의 전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잘 살기 위해 성경은 어떤 지혜를 줄 수 있지만 성경대로만 사는 것은 결코 지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손해보고 힘든 일을 자초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의 기준에서 잘 살고 싶은 사람은 성경에 대해서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또 다른 혹은 더 나은 즐거움과 충고자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을 사는 나그네이기 때문에 이렇게 확신하며 말하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23절에도 보인다.
시 119:23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고관들의 비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그에 대한 비방과 멸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말씀에서 떠나라는 것이었겠지만, 시편 기자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하면서 그 마음에 새겼던 것이다. 특히 고관들은 그에게 더욱 직접적인 해를 가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겠지만, 시편 기자는 그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말씀 묵상에 전념했던 것이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그가 정말 땅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어떤 낯선 곳에 던져졌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내가 살던 나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면서 그들처럼 살았다.
그런 삶이 익숙해진 어느날, 어떤 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에는 내가 어떻게 이 나라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어떻게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있게 될 것인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나에 대해서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고, 그 사람은 자신이 왕이며 나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어쩌다 이 낯선 곳에 나를 혼자 두었는지까지는 다 설명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그 책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아버지가 다시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는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책의 내용을 모두 부정하고 그냥 불태워버리고 살던대로 살던지, 아니면 이 책을 소중히 여기고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살던지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선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다. 나를 보니까 왕의 아들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면 그냥 전자를 택하면 된다. 내가 이 땅에 온건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것 뿐이고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냥 살던대로 남들처럼 살면 된다. 그 안에서 즐길 것이 있으면 즐기고 하고 싶은대로 살면 된다.
반대로 나를 보니까 왕의 아들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긴 하는데,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지금 삶을 너무 잘 설명하고 있고, 따라서 내가 정말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왕의 아들이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라고 생각한다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대로 사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왕의 아들이며 나그네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주변 사람들은 내가 달라졌을 때 다시 적대적으로 변할 것이다. 나를 비방하고 멸시할 것이다. 이것 역시 당연한 얘기다. 그럼 그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 땅에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랬겠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이 발견한 책을 꺼내 더 열심히 읽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 확인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 책에서 제시하는 삶에 대해서 더 분명히 알고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할 것이다. 그렇게 그 책이 나의 즐거움과 충고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성경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확신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그네였고 그런 그에게 위로가 되고 안내가 되는 것은 나그네에게 주신 하나님의 책, 성경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구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시 119:18–19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9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하나님, 저에게 다른 책도 좀 주십시오’라고 구하지 않는다. 그에게 성경으로 충분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을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눈을 열어 달라고 구하고 주의 계명들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구한다. 문제는 말씀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내가 성경을 읽지 않고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놀라운 것”은 정말로 우리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위대한 일들도 포함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지금 다른 것들은 상관 없고 놀라운 것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맥락에서는 자신의 상황에 적절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나 충고의 말씀이 “놀라운 것”에 해당될 것이다. 내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하게 만날 때 우리는 놀라게 된다. 그렇게 지금 필요한 말씀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다. 그리고 이런 기도는 고난 중에 더욱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 고난이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골딩게이는 “압박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지 않은 것에 압도되어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의 중요성을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후대하여 살게하고 계시지 않은 것 같은 때에, 성경을 열고 내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확신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
절실
다음으로 시편 기자가 고난에 대해서 보이는 올바른 반응은 ‘절실함’이다. 이는 앞서 말한 확신에서 이어지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절실하게 구하는 것이다.
이 절실함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은 20절이다.
시 119:20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 그 마음이 상하기까지 했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상한다”는 말은 “산산히 부서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간절함이 크고 강했던 것이다.
찰스 브리지스, <시편 119 말씀 사모하여 헐떡이는 사람>, 94-95. “세상 일에 사로잡히다 보면 영적인 행사들에 전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주님의 한 마디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잠시 여가를 내려고 애를 씁니까? 잠깐 동안이라도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자 합니까? 우리가 그저 겉으로나 간헐적인 자세로 의무를 감당하는 차가운 습관에 길들여졌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마음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지 않습니까?”
내가 나그네라는 것을 알면 유일한 지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아는 길을 다닐 때는 내비게이션은 있으나 마다다. 때로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서 꺼놓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길을 갈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듣고 있던 음악도 끄고 내비게이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교차로 미터 표시를 계속해서 체크한다. 하나라도 놓치면 잘못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 ‘상황이 이런데 말씀이 눈에 들어와요?’라고 묻는 것은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바쁜 중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며 휴가를 낸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말씀에 대한 절실함이 없는 것이고, 내가 지금 나그네로서 이 땅을 살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더욱 절실하게 말씀에 매달려야 한다.
순종
무엇보다 중요한 반응은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순종하고 따르기 위해 구하고 있다.
시 119: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시 119:22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주실 때, 나는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실 이미 그 전부터 순종하고 있어야 한다.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순종하는 것이 먼저다. 하나님께서 나를 충분히 설득하시면 내가 순종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유를 몰라도 내비를 믿고 좌회전을 하고 우회전을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한다.
도전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그네로 표현한다. 이 땅에 속한 백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하늘의 본향을 또 다른 거주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나그네가 아닌 것처럼 산다. 여기서 살다가 천국으로 이사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본향을 향해 가고 있는 나그네로서 이 땅에 있을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는 대충 살다 가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본향이 있고 이 땅에 그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이 땅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우리는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다. 그 나라를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야할지가 우리 왕이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