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대만 살렸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동아일보 2023-06-23 22:27
[4회] 대만의 운명을 가른 순간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
‘1950년 4월 16일 밤, 중국 제4집단군 린뱌오(林彪) 휘하 40군과 43군은 4백 척 소형 선박과 동력선을 타고 대륙에서 15마일 거리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향했다. 해상 및 공중 화력지원을 받는 상륙작전이 아닌 게릴라 침투처럼 접근했다.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대의 저항에 중공군 1만 명가량이 희생됐지만 5월 1일 하이난섬 전역을 점령했다.’(손튼, 151쪽).
중공군이 이용한 선박은 노획한 자동차 엔진을 떼어내 목선에 설치한 ‘돛이 달린 기선’으로 포 2문을 장착해 ‘토포정(土砲艇)’이라 불렀다. 크기가 작아 은폐하기가 좋고 제작 비용이 싼 것도 장점이다. 하이난섬 전투를 현장 지휘한 한센추는 6·25 전쟁 발발 후에는 펑더화이(彭德懷) 휘하 3명의 부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신중국의 성립을 선포한 순간에도 서남부와 일부 섬 등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 70여만명이 대만으로 철수하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다. 특히 하이난섬과 덩부섬(登步島)은 눈엣가시였다. 대륙을 장악한 마오로서는 혁명 완수를 위해서 대만섬을 평정하는 것은 절대적인 과제였다.
하이난섬 점령은 대만섬 평정의 분수령이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에도 공산군이 차지하지 못했던 저우산(周山)군도의 덩부섬 등을 하이난섬 이후 비교적 손쉽게 점령하는 등 국민당군이 점거 중이던 다른 군소 도서를 차례로 접수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에서 신중국 성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주석. 이 당시 대만섬 외에 국민당군이 차지하고 있던 섬이 많아 마오는 대만섬 평정이 과제였다.
● 대만 점령 목전에 두었던 중국
중공군이 하이난섬을 점령한 것은 6·25 전쟁 불과 2개월여 전이다. 장제스가 대륙에서 밀려나고 주변 섬들마저 하나씩 뺏겨 대만섬으로 조여오는 형국이었다. 대만섬도 중공의 점령 위기에 몰렸다. 이처럼 국면이 전환된 데는 국민당 군대의 부패 등 내전 패배가 요인이지만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도 한 요인이다.
미국은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극동 방어선’ 연설에서 대만을 제외했다. 2월 중소 동맹조약으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국민당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는 미국의 군사 지원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어 대만섬으로 가는 길목의 진먼도(金門島)와 마주(馬祖)열도 등을 제외한 곳에서 군사력을 철수했다. 그야말로 중국의 대만 점령은 턱밑까지 갔다. 장제스는 진먼도 등에 ‘물망재거(勿忘在莒)’라는 제나라의 고사를 돌에 새겨 대륙 수복 의지를 다졌다. 이게 6·25 전쟁 발발 불과 한 달을 앞둔 상황이다.
스트롱 대만 주재 대리대사는 5월 17일 “대만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며 “6월 15일에서 7월 말 사이 공산당이 대만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6월 15일 이전까지 대만에서 철수할 미국 공공기관의 명단도 확정할 것”이라고 했다.
장제스가 본토수복 의지를 새기며 진먼도 등에 새겨놓은 ‘물망재거’. 제나라의 고사로 ‘어려울 때를 잊지 말라’는 뜻. 출처: 중문 위키피디아
앞서 마오는 대만 침공을 전담할 지휘관으로 리위(粟裕) 대장을 임명했다. 리위는 1950년 1월 ‘대만 해방과 군사력 건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만 정복의 마스터 플랜이다. 마오는 2월 이 보고서 등을 토대로 대만 침공을 위한 공수부대도 창설했다. 중국은 대만 주변의 병력도 4만 명에서 15만 6000명으로 증강해 침공 준비를 마쳤다.(김계동 23쪽)
● 미국, 대만 장제스 4번 버리다
1948년 하반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 국민당군의 패배가 뚜렷해지자 미국과 영국은 대륙을 실질적으로 장악해가는 공산당과의 관계 재설정에 들어갔다. 1949년 10월 신중국이 선포되기 이전에 이미 장제스 국민당 정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의사를 여러차례 밝혔다. 1950년 1월 트루먼의 기자회견과 12일 애치슨의 강연에서 대만을 포기하고 공산당 정부와의 관계 정상화를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표> 미국의 ‘대만 포기’ 일지
1949년
| 3월
| 도쿄 연설, “대만과 한반도는 미국의 방위선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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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 미 정부, “국민당은 부패 무능한 반동 정당” 백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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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 NSC-48/2,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은 군사행동을 할 정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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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1월 5일
| 트루먼, “군대를 사용해 분쟁에 개입할 의도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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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 애치슨, “한반도와 대만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대만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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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 애치슨, “대만의 조기 공산화는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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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 대만 주재 미국 영사, 3개월 이내 공산군 침략 예상하고 모든 미국인 대만 떠나야 한다는 권고를 본국 정부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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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치슨 강연은 ‘대만 포기’ 시그널
“대만을 놓고 벌이는 중국 공산당과의 전쟁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애치슨 강연 중 ‘극동방위선’에 관한 언급은 한국보다는 ‘대만 포기’ 의사를 마오쩌둥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밀담을 나누고 있는 마오에게 ‘대만도 포기할 테니 소련과 멀어지고 미국과 관계를 맺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미국에 협조하면 중국의 대만 정복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손튼, 80쪽). 키신저도 애치슨 연설에 담긴 강조점은 중국에게 유고의 티토가 택했던 옵션을 노골적으로 제안한 것이라고 했다.(키신저, 157쪽)
“국민당 장제스 정부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에 직면해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어떤 통치자보다 더 큰 군사력을 가졌었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4년 후 무슨 일이 생겼나. 그의 군대가 녹아 없어졌다. 그에 대한 지지도 녹아내렸다. 그는 남은 군대와 함께 해안에서 떨어진 작은 섬에서 난민이 되었다.”(애치슨 연설문 일부)
애치슨 미 국무장관
대만 정복 전투를 총지휘하던 리위는 “미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분임을 인정했다.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고 애치슨 선언을 이해했다. (선즈화, 262쪽).
애치슨 라인 선언 때문에 전쟁이 터진다면 대만이 상황에 더 맞았다. 중국이 대만 점령을 준비하고 공언한 데다 무력행사에 미국까지 불개입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은 대만을 향하던 총부리를 급히 한반도로 가져와야 했다. 마오는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김일성의 계획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시기상 중국이 대만 문제를 해결한 이후 돕고자 했다. 북한의 남침은 남한에도 ‘기습’이었지만 마오에게도 대만 침공을 목적에 둔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마오는 6·25 전쟁 발생을 외신 뉴스를 보고 알았다.
북한이 38선 부근으로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던 6월 12일 마오는 리위 장군과 군에 보낸 전문에서 “대만을 신속히 점령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한반도와 대만 해협에서 경쟁적으로 전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북한에 선수를 뺏겨 대만 침공의 타이밍을 놓친 중국은 6·25 정전 7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대만에 대한 무력 공격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이 대만 주변에서 미사일 발사 훈련 등 무력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 한국 전쟁이 바꾼 대만 운명
6·25 직전까지 중국은 대만 주변 섬을 대부분 점령했고 대만섬 공격 날짜까지도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대만에 대한 정책은 180도 선회한다. 필리핀 해역의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이동해 중공이 대만에 군사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항모 이동은 장제스가 본토를 침공하는 것을 막는 것도 포함됐다. 트루먼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1월 5일 선언했던 중국 내전에 대한 미국의 불개입정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대만 정책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도 대만을 공격할 여유가 없어졌다. 6·25가 대만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이 혁명의 완성으로 대만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대만 문제가 해결된 뒤 북한을 돕겠다고 한 것이 오히려 김일성에게는 남침을 서두르게 했다고 했다. 키신저는 북한에 ‘(남침의) 인센티브’를 준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두 차례나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군사적 정복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을 거라고 김일성은 확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기 전에 남한에 대한 행동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키신저, 161쪽). 미국은 6·25 전쟁이 터지자 대만해협으로 미 7함대 파견을 결정했다.
6·25 전쟁을 외신 뉴스로 안 마오쩌둥은 전쟁 발발 불과 10여일 전에도 대만 침공을 지시했다.
● 대만 학자의 ‘빈약한’ 반론
대만학자 장수야(張淑雅)는 ‘한국전쟁이 대만을 구했다’는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대만을 구했다는 인식은 미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토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고 했다. 중국 본토 학자들도 한국전쟁이 장제스가 회생할 기회를 주었다고 본다고 소개했다.(장수야, 24쪽). 한국전쟁으로 ‘장제스의 운수가 대통하게 되었다’고 보는 미국 학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미 7함대 파견만으로 중공군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고, 중공은 6·25 전쟁 전에 대만에 대한 공격 준비를 늦추었기 때문에 한국 전쟁 때문에 대만이 침공 위기를 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대만 국민당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국 대륙에 접수되지 않도록 한층 노력한 것이 대만의 생존에 주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명의(미국)와 환자(대만)의 비유를 들었다. 명의가 훌륭한 약을 주어도 병을 극복하는 것은 환자 스스로 나으려는 의지와 노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공의 대만 점령이 목전에까지 와있던 상황에서 한국전쟁 때문에 중공이 말머리를 돌린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대만의 생존에서 내부적인 노력이 중요하지만 6·25 전쟁 이후 동북아에서 본격화한 냉전 질서가 각 진영 안보의 울타리가 된 것이 대만의 안보에도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대만을 보호하는 미국의 안보 울타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이었다. 국공 내전의 패장인 장제스의 집권 여부도 따지지 않았다.
● 소련의 늑장 지원, 해공군 지원 거부
중국의 대만 침공 결행이 늦어진 데는 소련이 큰 변수였다. 중국은 1949년 10월 진먼다오(金門島)와 덩부다오(登步島)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대만섬이 본토에서 149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데다 대만은 400대 이상의 항공기, 70척 이상의 함정을 보유해 중공에는 거의 없었던 해·공군력이 만만치 않았다. 중국은 소련에 해공군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거절되거나 약속을 하고도 인도를 지연하거나 해서 예상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1949년 7월 5일 마오는 스탈린에 보낸 전보에서 “대만 공격은 공군부대가 조직된 후에나 가능하다”며 공군 지원을 호소했다. 마오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6개월에서 1년 안에, 모스크바에서 1천명의 비행사와 300명의 공항 근무 요원들을 훈련시켜 줄 것, 100~200대의 전투기와 40~70대의 폭격기를 중국에 판매할 것 등이었다. 마오는 해군함대 창설도 요청하면서 1950년 하반기 대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대만상륙작전을 지원하면 미국과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며 즉각 거절했다.(선즈화, 260쪽)
1949년 12월 마오가 모스크바에 갈 때는 공군력 지원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대만 공격이나 연해 도서 해방을 위한 군사행동에 필요한 비행기와 군함 및 주요 설비와 기재는 전혀 중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전투기 119대를 받은 것은 6·25 전쟁 이후인 1950년 10월이 처음이었다.
스탈린이 중국에 대한 해공군력 지원을 거절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중국이 대만을 수복하지 못하고 중국이 유엔에도 가입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마오가 미국의 위협 속에서 자신에게 계속 의존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미중 군사 충돌도 이런 목적에서 잘 수행됐다. 중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1971년보다 훨씬 일찍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대만 문제도 일찍 해결될 수 있었다.(쑤이, 344쪽). 스탈린이 6·25 전쟁에서 미중 대결을 유도함으로써 신생 중국과 마오를 견제하려 했다는 ‘스탈린 음모론’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과 장제스의 반공(反共) 동맹 |
장제스(蔣介石)는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 홍군에 밀려 대만으로 물러난 뒤에도 본토 수복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장제스는 자신의 구상 실현을 위해 한국과 군사동맹 체결을 희망했다. 한국의 군사기지를 이용해 만주 및 화북 지역의 공업지역을 폭격하고 중국 서해안 봉쇄에도 활용하려고 했다.
6·25 발발 3일 후 장제스는 군대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다. 한국지원병사령관도 내정하고 3개 사단 3만 3000명과 1개 기갑여단, 20대의 수송기를 투입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당시 대만은 육해공 68만 명(육군 48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맥아더와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국군의 개입을 불러오고 대만 방어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대했다.(이상호, 169〜170쪽)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장제스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호의적이었으나 자신은 반대했다고 했다. 한국보다는 대만을 방위하는데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애치슨, 537쪽). 애치슨이 반대한 데는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장제스가 원하는 것(중국 공산주의자를 끌어들이는 확전)과 미국이 원하는 것(중국을 개입시키지 않는 제한 전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애치슨은 장제스의 군대가 중국 본토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낱낱이 알고 있어 장제스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핼버스탬, 141쪽). 기본적으로 국민당 정권이 부패하고, 장제스의 군대는 무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애치슨에게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확전을 불러온 빌미를 장제스에게 줄 리가 없었다.
● 이승만과 맥아더의 대만 군대 참전 환영 전환
이승만 대통령도 주한 대만 대사가 2만〜2만5천명의 자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왔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반공국가인데 왜 거절하느냐는 프란체스카의 질문에 “중공군을 내 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라고 했다. 중국 참전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프란체스카 1950년 7월 11일의 일기)
이승만은 막상 중공군이 개입해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는 대만 군대도 받아들이는 데 찬성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병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애로사항을 털어놓자 ‘맥아더 장군에게 장제스 총통이 지원해 줄 5만 또는 그 이상의 군대를 보내주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무초 대사를 통해 보냈다.(프란체스카의 일기, 1951년 1월 5일).
맥아더도 1951년 11월 28일 합참에 장제스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그 후 맥아더는 장제스 군대의 대륙 공격 및 한국전쟁 개입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이견과 갈등을 빚어 전격 해임되는 주요 이유가 됐다.
맥아더는 해임 후 의회 청문회에서도 대만군 활용에 대한 소신을 유지했다. 대만을 위협하던 중국군 제3, 제4 야전군이 한반도로 전환됐기 때문에 대만군을 한국전쟁에 이용하거나 중국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한다면 한반도에서 중국의 압력을 충분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이상호, 332쪽)
● 이승만과 장제스의 셔틀 방문 외교
1949년 8월 6〜8일 장제스가 김해를 방문했다. ‘대한민국 제1호 정상외교’로 불리는 이장(李蔣) 회담이 7일 열렸다. 장제스가 부인의 이름을 딴 전용기 ‘미령호’ 타고 도착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진해 비행장에서 영접했다.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영빈관에 투숙했다. 둘은 회담 후 “국제공산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을 확인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1949년 8월 8일, 9일 보도).
전쟁이 끝난 뒤 1953년 11월 27∼29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만을 답방해 ‘반공통일전선 결성‘을 발표했고 이는 1954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발족으로 이어졌다. |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