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덕(光德)과 엄장(嚴莊) -1편
내용이 너무 길어 올라가지 않아
부득이 2편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남의 아내를 범하려다 서방정토에 가다.
신라인의 사랑 이야기 중에는 불교적 내용을 소재로 하여 환상적인 에피소드를 자아낸 것이 많다. 그 중 『삼국유사』 감동편에 소개된 광덕(光德)과 엄장(嚴莊) 이야기는 특이하게도 한 여인을 두 친구가 아내로 삼각 관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을 끈다.
●둘도 없는 친구, 광덕과 엄장
신라 문무왕대(661~680)에 광덕과 엄장이 살고 있었다. 지금의 경주시 구황동에 자리한 분황사 서쪽 마을에 살던 광덕은 신 삼는 것을 업으로 삼았고, 경주 남산에 살던 엄장은 작은 규모나마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은 재가승으로서 서방정토에 함께 가기를 염원했다. 엄장은 남산에 암자를 짓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광덕은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그 역시 가족을 부양하는 것보다 수행을 더 중시했다. 광덕의 부인은 집에서 가까운 분황사에서 종살이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덕분에 광덕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다.
●분황사 석탑
분황사는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그 서쪽 동네에 광덕 부부가 살았다(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리 소재, 국보 제30호).
신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 이를 받아들인 건 주로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이었다. 6세기에 들어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커지면서 불교는 점차 서민들에게까지 퍼지기 시작했는데, 서민들은 미래에 출현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나 본래 국가 불교의 성격을 띤 미륵신앙은 중생의 구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일반 서민들이 수행에 몰두하는 것은 더욱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광덕과 엄장은 서민 신분으로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일까.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아미타신앙이 신라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676년 삼국통일을 완성한 뒤, 신라 정부는 오랜 기간 전쟁으로 고통 받아온 민심 사로잡기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문무왕의 유언에는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 집집이 넉넉하고 백성들이 풍요하여 곳간에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라고 되어 있지만, 모든 백성이 이를 공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 정부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수단을 찾아야 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부각된 것이 바로 아미타신앙이었다. 아미타신앙의 대표 경전인 『무량수경』에 따르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는 것만으로 누구나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백성들은 어느 사상보다 아미타신앙에 쉽게 다가갔고, 통일 이후 찾아온 국가적 안정은 백성들에게 아미타신앙을 추구할 만한 여유를 제공해 주었다.
●광덕과 엄장의 수행
광덕과 엄장은 각자 수행을 하면서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 서방정토에 함께 가자고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만일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서방정토에 갈 경우에는 이를 반드시 상대방에게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암자에 혼자 살던 엄장에 비해 처자가 있는 광덕에게 수행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엄장과 맹세할 때 광덕은 가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이러한 원칙은 맹세를 실천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광덕과 엄장의 맹세가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초월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광덕이 우정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완전히 무시한 것도 아니었다. 아내에 대한 광덕의 사랑은 통속의 수준을 넘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광덕, 죽음과 함께 극락왕생하다
엄장은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암자에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 일이 끝난 밤에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채찍질하곤 했다. 광덕 역시 아내와 함께 십여 년을 살면서 수행에 매진했다. 낮에는 하루 종일 수십 개의 신을 삼는 고달픈 생활을 하면서도 밤이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아미타불을 불렀다. 광덕은 아미타불, 즉 무량수불에게 자신의 소원을 빌며 이렇게 노래했다.
달아, 이제 서방을 거쳐 가시리잇고
무량수불 앞에 이 말씀 알려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존전에 우러러 두 손 모두고 꽃 드리고
원왕생 원왕생 그리는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을 예토에 남겨 두고
마흔여덟 가지 큰 서원을 이루시리이까
이 노래가 바로 「원왕생가(願往生歌)」이다.
여기서 달은 동쪽에서 떠올라 광덕이 바라본 하늘을 지나 서쪽으로 져서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앞까지 가는 존재이다.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고 아미타불을 계속 읊조리는 광덕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달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원왕생'을 외치며 서방정토에 가기를 열망하는 것은 당시 서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수행 방식이기도 했다.
원래 법장보살이었던 아미타불은 10겁(劫) 전에 마흔여덟 가지 큰 서원을 이루고 성불했다고 한다. 그 서원은 중생을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구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 광덕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이승의 예토(穢土)에 버려둔다면 이 마흔여덟 가지 큰 서원 자체가 무효라고 아미타불에게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억지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광덕의 항변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광덕은 마음을 통일하여 미혹을 살폈고, 서방정토의 진리를 관찰하는 방법인 열여섯 가지 관(觀)을 지어서 관이 무르익어 밝은 달빛이 지게문에 들이비치면 때때로 그 빛을 타고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곤 했다. 피나는 수행이 영험을 발휘해 광덕은 일개 재가승에서 성불의 단계로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덕은 마침내 성불을 이루었고, 그의 영혼은 육체를 이탈해 서방정토로 출발했다. 그러나 광덕은 엄장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석양이 붉은빛을 끌며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저물어 갈 무렵, 엄장은 창 밖에서 들려오는 광덕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지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돌아보니 구름 밖으로 천악(天樂)이 울리고 광명이 땅에 드리워져 있었다.
한참동안 이를 주시하던 엄장은 과연 자신도 광덕을 따라갈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남편의 수행을 도왔던 광덕의 아내도 극락왕생의 순간에는 함께 하지 않았다. 이 대목은 광덕의 아내에게는 남편을 향한 아내로서의 사랑을 초월하는 또 다른 역할이 남아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광덕의 아내와 엄장의 결합, 그리고 사랑 방정식
절친한 친구의 도리라면 엄장은 즉시 분황사 서쪽에 있는 광덕의 집에 가서 그 육신을 살폈어야 했으나, 『삼국유사』 광덕엄장조에는 이 순간 엄장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나와 있지 않다. 해질 무렵이라면 엄장이 살던 남산에서 분황사 서쪽까지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엄장은 그날 밤을 자신의 암자에서 보냈다.
당시 엄장은 극락왕생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자신도 빨리 광덕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에 홀로 남은 광덕의 부인에 대한 고민이 슬슬 고개를 들었고, 급기야 절친했던 친구의 아내를 홀로 두느니 자신이 거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암자까지 짓고 수행하는 재가승으로서 남의 아내를 거둔다는 것도 선뜻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엄장은 이런저런 생각에 밤새 뒤척였다.
《신라사학회 글》
일향전념一向專念 일심불란一心不亂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 극락정토 아미타불~
-묘봉사 현각대일 합장-
#불교자료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