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투쟁(反帝國主義鬪爭)의 선도자(先導者)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 1북두칠성(北斗七星)의 정기(正氣) (3)
○ 7개의 흑점 있어 아명 응칠이라 지어
안중근(安重根)은 1879년 9월 2일 (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趙) 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이 감응한다 하여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지었다. 안중근이 태어난 곳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가 있는 수양산 자락이었다.
안중근은 뒷날 여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나의 성(姓)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重根), 어릴 적의 이름은 응칠(應七)이다. 나의 타고난 성질이 가볍고 급한 듯하여 이름을 중근이라 짓고,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어릴 적의 이름을 응칠이라 하였다 한다”라고 썼다.
안중근이 태어나기 전부터 조선은 풍운이 짙어가고 있었다. 출생 3년 전에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되어 개항장에서 일본 거류민의 거주 지역이 설정되고, 일본 화폐가 유통되었다. 쌀을 비롯한 양곡이 무제한 일본으로 유출되면서 조선 백성들은 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얼마 뒤 전국에 방곡령이 내려졌지만 여러 곳의 항구에서 공공연하게 일본으로 쌀이 유출되고 있었다.
전국 여러 지역에서 명화적(明火賊)이 나타나 어지러운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들은 탐관오리들의 착취로 생활이 어렵게 되자 땅을 버리고 몇 십명씩 모여 산속으로 들어가 밤이면 횃불을 들고 관청을 습격했다. 명화적에 이어 영학당(英學黨)이란 무리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남은 세력과 을미의병항쟁(乙未義兵抗爭)의 잔여세력이 결합하여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군수를 내쫓는 등 한 때 큰 세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민란도 일어났다.
안중근이 태어난 해에는 일본에서 전파된 콜레라가 전국에 만연했고, 이듬해에는 동학을 창도한 최시형(崔時亨)의「동경대전(東經大典)」이 간행되었다. 안중근이 세 살 때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납치되어 천진(天津)으로 호송되었다. 이 해에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침략과 압박이 점점 가중되었다.
안중근은 이렇게 내외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폭풍전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 명예현감을 지냈으며, 가문은 지방 무반 호족으로, 대대로 해주에서 세력과 명망을 지닌 집안이었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고려 때의 유명한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 자손으로, 아버지는 성균진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백천(白川) 배씨(裵氏)이다.
○ 큰 인물, 그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안중근 가문의 유족한 경제력은 안인수(安仁壽) 대(代)에 확보되었다. 안중근의 선조들은 순흥(順興) 안씨(安氏) 참판공파의 일파로서 순흥에서 해주로 이주하여 12~13대를 거치는 동안 처음에는 향리로서 나중에는 무과에 진출한 향반으로 살아왔다. 특히 안중근 가문은 5대조 안기옥(安技玉) 대부터 조부(祖父) 안인수 대까지 무과 급제자만 7명을 배출할 정도로 명망있는 무반(武班)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미곡상 경영을 통하여 막대한 재화를 축적한 안인수가 해주·봉산·연안 일대에 대토지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안중근 가문은 황해도에서 두세번째를 다투는 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대폭 높아진 가문의 위상을 배경으로 안인수는 아들들에게 과거공부를 시켜 둘째 아들 안태현을 초시에, 셋째 아들 안태훈을 진사에 합격시켰다. 따라서 안인수가 진해 현감직을 명예직으로 제수받는 것도 그가 해주 일대에서 지닌 경제·사회적 영향력에 힘입은 결과였을 것이다.
안인수가 황해도에서 두세번째의 재산가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하지만 안인수 대에 와서 집안이 크게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안인수는 성품이 어질고 무거웠으며, 살림이 넉넉했을 뿐 아니라 자선가로서도 도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슬하에는 6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태진, 차남은 태현, 3남은 태훈, 4남은 태건, 5남은 태민, 6남은 태순이었다.
안인수의 여섯 아들은 모두 글을 잘하고, 살림살이도 넉넉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8~9세에 이미「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했고 13~14세 때에 과거(科擧) 공부와「통감절요(通鑑節要)」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주변으로부터 ‘선동(仙童)’이라고 불렸다.
안태훈에 관해서는 몇 가지 증언이 남아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두번째 대통령을 지낸 역사학자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의《겸곡전서(謙谷全書)》에 따르면 “17세 때인 1875년에 사서삼경과 제자서(諸子書)를 섭렵하고 개연히 분발하여 말하기를 이 외에 어찌 경세지학(經世之學)이 없으리요? 하고 고향을 떠나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씨의 부친 안태훈(安泰勳)과 더불어 교유하여 문장이 대성하니 도내 양(兩) 신동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志士)가 안태훈과 그 형제들을 만나고 뒷날《백범일지(白凡逸志)》에 쓴 내용이다.
‘안(安) 진사(進士) 여섯 형제는 모두 문사(文士)의 풍모가 있었으나 유약해 보이는 점이 하나도 없었고, 특히 안 진사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당시 조정 대관들 중에 글로써 항쟁하던 자들도 처음에는 안 진사를 악평하였지만, 얼굴만 마주대하고 나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관찰로는 그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에게도 교만한 빛 하나 없이 친절하고 정중하여 위아래 모두 함께 하기를 좋아하였다…. 안진사는 또한 황석공(黃石公)의 소서(素書) 구절을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여두고 술기운이 있을 때마다 낭독하였다.’
안태훈이 술기운이 있을 때마다 낭독하였다는 황석공의 소서에 대해 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전략가 장랑이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할 때 크게 이용되었다고 하는 병법서이다. 그런데 안태훈이 취흥이 일어날 때마다 소서의 구절을 읊조렸다는 것은 그가 진사시를 통과한 문사임에도 불구하고, 무술가나 병략가의 생애를 매우 흠모하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안태훈은 전통적인 무반가문에서 과거를 응시해 급제하고 성균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조씨(趙氏)를 아내로 맞아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이 중근, 차남이 정근(定根), 3남이 공근(恭根)이다. 안태훈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개화파 박영효(朴泳孝) 등이 준걸한 젊은이 70여명을 선발하여 일본에 파견하려 할 때 유학생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안태훈은 서울을 드나들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만나 시국을 논하고, 일본유학생으로까지 선발된 것이다.
이는 안태훈이 개화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개화성향을 지닌 젊은이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1881년 이후 고종의 개화정책과「조선책략(朝鮮策略)」, 「이언(易言)」등에 실린 현실개혁론의 영향으로 조선사상계에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크게 유행했다. 이 시기에 해서 지방의 대표적 도회지 해주에 살고 있던 젊은 인재 안태훈은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화세력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사
안태훈 일가가 세거지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밑의 청계동으로 이사한 것은 안중근이 6세 때인 1884년이다. 청계동은 3면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천연 요새지였다. 옛날 정래수(鄭來秀) 의적의 은둔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집안살림을 모두 팔아 재산을 정리한 다음, 마차를 준비하여 칠팔십 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비록 지형은 험준하나 기름진 논밭이 있고 산수 경치가 아름다워 그야말로 별천지라고 할 만하였다. 그때 나이는 예닐곱 살이었다.’
안인수가 대대로 살아오던 해주를 떠나 청계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개화성향의 셋째아들 안태훈이 급진개화파의 거두 박영효(朴泳孝)와의 관련혐의 때문에 피난처를 물색할 때 쯤에 일단 가산을 정리했던 것 같다. 즉 그는 재산을 친척들에게 분배하고 300석을 추수할 토지만 남겨둔 채 70~80명의 가솔을 이끌고 산수가 수려하고 피난지로 적합한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는 분석이 있다.
박영효 사건이 터진 후 안태훈은 아버지 안인수에게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니 부귀공명은 바랄 것이 못됩니다”라고 은거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뒤에 다시, “일치감치 깊은 산에 들어가 구름을 일구고 달이나 낚으면서 세상을 마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청하여 청계동으로 이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안중근이 태어난 수양산 자락의 옛 집터는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뒤에 일본의 한 승려가 동본원사(東本願寺)라는 사찰로 모용(冒用)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 지사는 안태훈의 초청으로 청계동을 찾아갔을 때의 정황을《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려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내에는 띄엄띄엄 사오십 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라는 안 진사의 자필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는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드리고 얼마 있노라니 한 병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 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는 데 이것은 안 진사 육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한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義旅所) 석자를 횡액으로 써서 붙였다.’
안태훈 일족의 청계동 이주와 관련해서는 또 다른 견해도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국고재정이 바닥나자 백성들에게 원납금을 징수했는데, 특히 서북 3도 백성들에게 이를 강요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씨 일가도 그 시점에 이향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안씨 일가에 대하여 7천냥이라는 방대한 원납금이 황해 감영으로부터 부과되어왔다. 이 금액은 가공할 만한 거액인데, 그 금액이 모두 국고로 완납되어 궁전건축공사비에 충당되는 것이 아니라 군수·감사의 손을 거쳐 중앙에 바치게 되는 것이므로 중간 수탈을 제하면 최종원납금은 십분의 일도 못되는 것이었다.
인수 옹은 아들 6형제를 모아놓고 중대한 가족회의를 열어 원납금 상납여부에 대한 가부와 선후책을 물었다. 이때에 소년 안중근의 아버지 되는 태훈과 삼촌되는 태건은 난폭무쌍한 수탈을 단연히 일축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장남 태진 외 3인의 형제가 은인자중하자고 하여, 결국 대농장 등 가산을 팔아서 원치 않는 원납금을 상납키로 하고, 대대로 살아오던 선영의 땅을 버리고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이강훈(李康勳)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어긋나는 것 같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지시한 것은 1865년 4월이고, 막대한 자금과 백성들의 노력을 기울여 중건된 것은 1872년이었다. 그리고 안인수 일가가 청계동으로 이주한 것은 1884년이다. 따라서 이 주장보다는 나라가 점점 어려워지고 시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안인수가 가족을 건사할 목적에서 산수가 수려하고 피난지로 적합한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를 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안인수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들이 수난을 겪게 되면서 가장 영특한 셋째 아들 안태훈을 보호하고자 피난처를 몰색하고, 천연의 요새지 청계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들 안태훈은 동학군에 대항하여 싸우고 손자들은 독립운동의 꿈을 키우게 되었으니, 인간사의 변화무쌍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