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0월말, 제 3 보병군단의 긴급전개 및 일주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단동의 일본제국 제 40, 제 41 해병사단은 전멸했다. 만주국의 항복으로 황하 이남에서 만주국 국경을 넘어 진군하던 관동군은 순식간에 보급선이 붕괴하고 말았으며, 만주국 영내에 이미 들어와 있던 7개 보병사단 및 2개 해병사단은 그대로 고립되고 말았다.
이렇게 형세가 나아진 북부중국 전선과는 달리, 대련-잉커우 선에 투입된 제 1 보병군단 및 제 2 보병군단은 와팡디안전투에서 산동반도로부터 긴급 해상전개된 일본제국 9개 보병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한발자국도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주국 항복소식을 받아든 도쿄 대본영은 만주국내 전개된 관동군 사단을 최대한 빨리 베이징-텐진선으로 후퇴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관동군의 후퇴를 방해하는 것은 베이징과 만주사이에서 기동하고 있던 대한제국 제 1 기갑군단. 대본영은 관동군의 후퇴와 동시에 관동군 만주방면군 후위에서 준동하는 제 1 기갑군단의 역포위 섬멸작전을 계획하고 만주방면군 사령관 이시카와중장에게 이의 실행을 명한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삼군부는 제 1 기갑군단에게 만주파견군 후위를 어지럽히게 하는 동시에 제 2, 제 3, 제 4 기갑군단, 제 3, 제 4 보병군단을 총 동원, 만주국 깊숙히 잔류하고 있던 관동군 잔당소탕에 나선다. 그러나 11월에 들어 삼군부에 날벼락같은 소식이 떨어진다. "제 1 기갑군단 포위당함!! 긴급구원요청!!"

만주파견군의 후위를 어지럽히던 제 1 기갑군단이 증원부대를 저지하려 베이징 북쪽에서 전투에 돌입한 사이에, 만주파견군이 제 1 기갑군단을 역포위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동력을 살려 좌충우돌하면서 두달여간 계속된 전투로 피해가 컸던 제 1 기갑군단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2주일치의 연료와 보급품이 제 1 기갑군단에 남아있다는 것. 여기서 대한제국 기갑전력의 25%을 잃을 수는 없다. 삼군부는 전군에 제 1 기갑군단의 구원을 명했다.
제 1 기갑군단은 용전분투했다. 끊임없이 후위를 위협하는 만주파견군을 격퇴하며 대한제국의 영토로 돌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지원여단인 공병여단을 제외한 전투여단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아직 군단기동은 가능했다. 우종경소장은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며 가장 가까운 대한제국 영토를 향해 계속 서진했다. 만주파견군은 악에 받쳐 이들을 공격해왔다. 매일밤낮으로 벌어지는 반자이돌격과 눈보라, 혹한기의 빙판위를 미끄러지며 기동하는 전차를 공병여단이 구조하는 악전고투속에 제 1 기갑군단은 끊임없이 살기위한 서진을 계속했다.

예상외로 강력한 저항과 대한제국군의 쾌진에 당황한 만주방면군은 차오양에 4개 보병사단을 집결시켜 대한제국군의 진격을 돈좌시키고자 하였다. 원래 제 1 기갑군단에 후속하여 진군키로 했기에 가장 앞서있던 제 2 기갑군단이 이들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제 2 기갑군단은 이 전투를 회피하고, 차오양의 일본군을 우회하여 베이징으로 향했고, 하얼빈에서부터 긴급전개된 제 4 기갑군단이 이들을 잡아놓는 사이 다른 군단들이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이제 제 4 기갑군단은 천천히 그들의 먹이감을 말려죽이기만 하면 되었다.
마침내 제 1 기갑군단과 제 2, 제 3 기갑군단이 합류했다. 3주야를 살기위한 악전고투를 치뤄왔던 제 1 기갑군단은 이제 살았다며 환호했고, 제국 기갑전력의 25%를 잃을뻔했던 삼군부도 큰 시름을 덜었다. 비록 2개 보병군단으로도 패색이 짙던 잉커우 방어전에서 1개 보병군단을 빼 제 1 기갑군단을 살리려 한 무리한 병력운용으로 잉커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추가로 2개 보병군단을 투입하여 겨우 일본제국군을 잉커우에 고착시키는 등의 패착이 있었지만, 제국 기갑전력의 25%를 살린 전과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제국 만주방면군 9개 사단의 거의 절반을 포위할 수 있었으니 대한제국군으로서는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1938년의 마지막 한달은 승전보의 연속이었다. 12월초, 제 4 기갑군단에 맞서 차오양에서 항전하던 일본군 4개 사단은 옥쇄하였다. 12월중순, 외몽골에서 제 3, 제 5 보병군단은 "사막의폭풍" 작전을 통해 일본군 3개 군단/12개 사단을 포위섬멸하는 대승을 올렸고, 잉커우를 재 탈환한 제 1, 제 2, 제 4 보병군단은 대련까지 파죽지세로 점령, 최후까지 항전하던 일본군 9개 사단을 와해시켰다. 12월말, 베이징 서쪽 창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제 1, 제 2, 제 3 기갑군단이 일본군 5개 보병사단을 포위섬멸하였다.
하지만 해군의 상황은 달랐다. 전쟁초기 2~3일이 멀다하고 일본제국의 수송선단을 격침시키며 승전보를 울리던 해군 잠수함전대는 개전 3개월만에 6척 모두 침몰하고 말았다. 부산에 주둔한 경순양함대와 수송함대는 매일 일본군의 폭격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를 요격하는 요격기 편대의 피해도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국을 병합하고, 해하이북의 관동군을 섬멸하며, 해하이남으로 일본제국을 밀어낸 대한제국 군민의 사기는 드높았으며, 중화동맹또한 하북지방에서 최초로 일본제국에 대한 반격을 성공시킨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중국공산당군과 서북군벌군이 북진하여 제3, 제 5 보병군단과 함께 외몽골의 일본군을 포위섬멸하는데 협조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하이북지방에서는 서쪽의 위협을 없애게 된 대한제국군은 해하까지 진출하여, 해하를 마주하고 관동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1938년은 지나갔다.
----------------------------------------------------------------
베하의 전투력 -40% 패널티때문에 많이 고생했습니다. 보급을 끊어서 보급중단 -40%패널티를 적군에 먹여야 겨우 노말에서 싸웠던 것처럼 싸울 수 있네요. 소규모 정예 육군으로 끊임없이 기동하고, 소규모 포위섬멸을 계속하면서 정신없이 싸웠더니 어느새 해하까지 진군하였네요. 전쟁이 벌어진지 이제 4개월이 지났습니다.-0-
첫댓글 마..마이너스 40 ㅡㅡ;
그외에도 여러가지 패널티가 있지요..-0-
렛츠 차단 보급!
고고고!!!!
흥미진진하네요~~
감사..(__)
음 ㄷㄷ; 진짜업긴어려운가봐 ㄷㄷㄷ
많이 어렵진 않아요..-0- 다만 컴퓨터가 힘들어할 뿐..-0-
음.. 근데 대한제국인데 ROK 아머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