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혜수의 예상은 적중했다. 성공적인 태규의 헤어쇼 작품을 직접 본 영국의 미용회사 인사는 그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100% 후원을 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 교육을 수려한 후 테스트를 거쳐 합격하면 새로 설립되어질 한국지사에 특별한 대
우를 해주겠다고 했다.
혜수의 얘기가 끝나자 태규는 테이블위에 놓인 물 잔에 담겨진 물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단번에 거절할 수 없는 욕심나는 제안이었다.
성공 하고 싶었다. 자신을 떠나려는 사랑하는 여자에게조차 끝까지 매달리지도 못할 만큼 초라했던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더욱 더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었다. 어쩌면 자신이 여기까지 오기까지에는 비참하리만큼 자신의 현실을 깨우쳐주며 상처를 준 한다가 있
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혜수는 이 모든 조건이 자신과 함께였을 때에 적용된다는 전제조건을 명시했다. 빈 유리컵을 테이블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맞
은편에 앉은 혜수는 도도한 모습으로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규는 혜수에게 호감조차 없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을 매번 거절하는 자신에게 아랑곳 않고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혜수가 부담스러
웠다. 헤어쇼 일 땜에 어쩔 수 없이 마주 할 수 밖에 없어서 그동안 불편한 만남들을 참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헤어쇼 일도 마쳤고 더
이상 이 여자를 마주 대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민혜수는 자신에게 커다란 제안을 하며 그녀와 함께 영국에 함께
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태규는 당당한 그녀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칼에 결론을 내렸다.
“신경 써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네요. 거절하겠습니다.”
태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혜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연히 그의 입에서 Yes!라는 답이 나올 것이라 여겼었다. 미용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혹! 할 만한
기회였다.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제안한 영국의 그 미용회사 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려고 직접 유
학을 감행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교육을 수려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업적에 도움이 되었고 그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손꼽
히는 유명한 미용회사의 기술을 직접 배우고 경험한 것 자체로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고 있는 현실이었다. 하
물며 회사의 후원을 받아 교육을 받고 나아가 이 회사의 한국지사에서까지 합당한 대우를 해주겠다는데 그걸 단번에 거절하다니 혜수
는 태규의 한 치의 미련도 없는 단호한 모습에 놀랐다.
다시 한 번 자신을 거절한 그에게 수치심이 들어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예상외네요. 이건 당신에게 최고의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어쩌면 다시는 이런 엄청난 기회가 당신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존심이 상했으나 혜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이 이 남자에게 자신이 걸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 이었다. 이 조차
그가 거절한다면 그녀는 그만 그를 향한 자신의 일방적인 욕심을 버릴 생각 이었다. 갖고 싶은 남자였으나 이토록 자신을 거부한다
면 더 이상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태규의 답은 변함이 없었다. 혜수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베어 나왔다. 조 태규 이 남자는 자신이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바위
같은 남자다.
“생각할 기회를 드릴께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조태규씨가 좀 더 현명한 답을 내리길 바라겠어요. 태규씨가 어떤 결론을 내리
든 난 몇 달 후 영국으로 갈꺼에요.”
혜수는 마지막 자존심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76]
수영은 서울로 돌아오는 뻥 뚫린 외곽 도로를 시원스럽게 질주 하고 있었다. 모처럼 만에 가진 한다와의 데이트는 너무나도 좋았다.
간단한 늦은 점심식사가 전부였지만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한다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보았는데도 그
녀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따라주었다.
수영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한다를 기분 좋은 눈빛으로 힐끗 거리며 음악이라도 들어볼 심정
으로 라디오를 켰다. 청량음료 같이 상쾌한 여자 DJ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밝게 전달되었다.
“요즘은 그룹이 해체를 하고 나서도 각자 분야에 왕성한 활동을 보여 좋은 것 같아요. 한때 젝스키스로 아이돌 그룹의 인기를 한 몸
에 받았던 장수원씨와 김재덕씨도 그룹 해체이후 제이워크라는 그룹으로 다시 우리들에게 찾아왔는데요. 전 이들의 첫 번째 앨범
의 이 노래를 듣고 장수원씨가 이렇게 노래를 감미롭게 잘 하시는 줄 처음 알았어요. 여러분도 한번 감미로운 음색에 빠져 보세요.
오랜만에 들어볼까요? 제이워크의 Suddenly입니다.”
무심결에 라디오를 듣고 있던 한다의 귀가 크게 열렸다. 이 노래...... . 태규와 함께 있을 때 즐겨 듣던 노래였다. 처음 듣고 너무 좋
아서 귀에 딱지가 들 때 까지 늘 듣던 노래였다. 급기야 노래에 자신 없어하는 태규를 노래방에 끌고 가서 불러달라며 떼를 쓰며 애
교를 피웠었다. 마지못해 마이크를 전해 들은 태규는 빠른 멜로디를 따라 가지 못하고 화면의 가사를 읽어내느라 진땀을 흘리며 노
래를 불러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태규였지만 자신을 위해 뭐든 다 들어주려는 그의 마음이 너무 예
뻐서 그 모습이 근사해보였다.
음악이 귀를 통해 가슴속을 적셔왔다.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늘 함께 듣던 이 노래를 통해 온 몸에 퍼져왔다. 또 가슴이 아프다.
어떻게든 잊으려고 지우려고 했지만
더욱더 커져가는 마음속에 상처뿐
후회도 내 체념도 더욱 파고드는 그리움뿐
하늘도 이런 나를 미워하고 있는지
내몸을 아프게도 적시고만 있는걸
까맣게 다 타버린 나의 마음만 남아있는걸
멜로디가 좋아서 즐겨듣던 이 노래의 가사가 이랬던가? 어쩜 이렇게 가사가 아플까? 태규에게 축축하게 적셔져버린 그녀의 심장이
그녀의 눈시울을 적셔왔다.
수영은 자신의 앞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서행하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짝 쫓다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제 뜻대로 안돼요! 엉엉]
뒷 유리창에 손 글씨로 크게 붙여진 초보운전자의 애교 섞인 양보를 구하는 문구였다. 후후! 저렇게 나오면 정말 이맛살을 찌푸릴 수
가 없다. 수영은 초보운전자의 차를 살짝 추월해서 옆 차선으로 달렸다. 대체 귀여운 문구를 붙이고 운전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
일까 하는 호기심에 고개를 살짝 돌려 운전자를 확인하자 매부리코에 입이 툭 튀어나온 한 여성이 핸들에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정
면을 빳빳하게 쳐다보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훗! 얼굴도 제 뜻대로 안되나보군!”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을 주며 뜻대로 안 돼는 차를 지나쳐 앞으로 내 달렸다. 한다는 아직도 창밖에 고개를 돌린 채 였다.
“여기 내 뜻대로 안되는 사람 또 있는데?”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당신 듣고 있는 거야? ”
한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다의 슬픈 눈에 가득한 눈물이 볼을 타고 한 줄기 흘러 내렸다. 수영은 깜짝 놀라며 앞을 향했
던 시선을 다시 황급히 한다에게 돌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수영은 당황하며 길을 살펴 조금 넓어진 갓길에 차를 세웠다. 다시 그녀를 확인하자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수영씨. 우리 그만 만나요.”
수영은 온 몸에 힘이 한순간 모조리 빠져 나가는 걸 느꼈다.
“나 이 말 하려고 오늘 나왔어. 앞으로 나 수영씨 안 만나. 이유 없이 전화해서 안부 묻고 그러지도 마. 전화 안 받을 꺼야.”
“난 우리가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 이었나 보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
“나 그 아이 좋아해. 이제야 내 맘을 알았어.”
“그럼 골키퍼 몰아내고 공을 차기로 한 건가?”
“아니, 공은 차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 쪽을 보진 않을 꺼야. 그러니깐 나한테 쏟은 감정 정리하고 좋은 여자 만나.”
“당신 차갑네.”
“나 원래 이런 여자야. 내 감정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 감정 따윈 생각도 안 해. 이기적이야 나...... ”
“당신도 지금 누굴 좋아하니깐 내 기분 알꺼 아냐. 쉽지 않아. 나도 이기적이야. 당신 말만 듣고 내 감정 쉽게 놓을 수 없어.”
“전화 하지 말아요. 안 받을 꺼야. 연락 없이 불쑥 집 앞에 찾아오고 그런 짓도 앞으론 하지 말아요. 신고 할 지도 몰라.”
“꼭 이렇게까지 해야 겠어? 이미 그 남자 다른 여자가 있다며? 어차피 당신하고 다시 잘 될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얘기 끝났어요. 미안해요.”
한다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핸들을 부여잡고 있던 수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동안 수영의 차는 갓길에 그대로 선 채 움
직이지 않았다.
[77]
말쑥하게 차려입은 수영은 S 미용실을 찾았다. 아시는 선생님이 있냐는 카운터 여직원의 질문에 조태규 라는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한다는 그날 이후 정말 수영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걸던 전화횟수도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
남자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다. 조태규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이 헤어디자이너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
다. 그가 일하는 미용실을 찾는 것은 아주 쉬웠다.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게된 그의 작품이 선보였다는 헤어쇼에 관한 기사들은 관심
을 갖고 찾아보자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이 헤어쇼가 S미용실을 운영하는 서유자 원장의 이름을 건 헤어쇼 였으며 그의 본원 직원
들의 작품이 나란히 올려 졌다는 것 또한 알아낼 수 있었다.
수영은 자신이 여자 때문에 이렇게 비겁한 행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자
신이 겪어본 한다라면 수영이 어떤 방법으로 매달려도 한번 정해진 마음을 바꾸진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매달리는 건 오
히려 자신에게 치를 떨게 해 다시는 돌이킬 수없는 상황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수영은 한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 조 태규 이 남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자신의 비겁한 행동이 혐오스러웠지만 수
영은 한다를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 수 없다면 이 남자가 한다를 바라보는 일도 만들어서는 안되었다. 그러
나 이 남자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이 곳을 찾았다.
태규는 1층으로 내려와 손님 대기석으로 갔다. 방금 자신에게 머리를 하겠다고 찾아온 남자손님 얘기를 전해들은 태규는 예약손님
이 많으니 오래 기다리게 할 것 같아 직접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순서를 기다리며 쇼파에 앉아 있는 손님들 한쪽으로 수영을 발
견한 태규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태규를 본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그에게로 다가왔다. 태규도 수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둘이 마주서게 되자 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헤어디자이너인줄은 미처 몰랐네요.”
“어떻게 찾아 오신 겁니까?”
“미용실에 왜 왔겠습니까? 머리 좀 하려고요.”
“저 한테 말입니까?”
“네.”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자신에게 대답하는 수영을 태규는 굳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절 믿으십니까?”
“당신의 매너를 믿습니다.”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수영에게 “그럼, 기다리시죠.” 라는 말을 한 후 태규는 돌아섰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수영은 다시 태규 앞에 앉았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나보군요.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헤어쇼 기사를 봤는데 실력도 좋으신가 봐요?”
태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수영의 머리에 가위질을 시작할 뿐이었다. 보란 듯이 자신 앞에 나타난 수영의 의중을 태규
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과 한다의 관계를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만나고 있는 여자에게 보이는
자신의 행동을 좋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머리를 다듬는 태규의 입맛이 쓰다.
이 남자의 머리를 볼품없이 엉망으로 잘라버리고 싶은 오기가 들기도 했지만 태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스타일이 거의 완성해갈 때 거울 앞에 놓인 수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태규는 가위질을 잠시 멈췄고 수영이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집
어 들었다. 순간 태규는 수영의 휴대폰에서 반짝거리며 매달려 있는 크리스탈 메달을 보았다. 수영이 귀에 휴대폰을 갖다 대고 통화
를 하는 동안 태규의 시선은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흔들리는 크리스탈 메달을 담담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했던 기색도 어느
순간 잦아들고 있었다. 태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통화를 마친 수영은 내친김에 한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그녀가 전화를 받아 준다면 자신의 존재가 이 남자에게 더 확고하게 각
인되겠지만 역시나 한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영은 알지 못했다. 그가 우연히 손에 얻게 되어 자신의 휴대폰에 걸어놓은 메달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 그것을 본 태
규의 마음이 어떠 했는지...... .
굳이 한다가 전화를 받지 않아도 이미 태규가 그녀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를...... .
왁스를 발라 마지막 스타일링까지 완벽하게 마친 태규가 거울속의 수영을 보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에서 본 것처럼 실력이 좋으시네요. 저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거울 속의 모습을 살피며 의자에서 일어서는 수영에게 태규가 다시 말을 꺼냈다.
“다음부터는 오지 마십시오. 당신이 왜 절 찾아왔는지 뜻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그쪽을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수영은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S미용실 문을 나서며 수영은 다시 몸을 돌려 2층 창가를 쳐다보았다. 태규는 또다시
다른 여자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그는 매력 있는 멋진 사내였다. 이 사내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
다는 사실이 고맙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혼자였다면 수영 자신은 이 사내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한다. 당신이란 여자가 날 이렇게 치사한 놈으로 만든거야. 그러니 제발 다시 내게 연락을 해줘. 지금 나의 비겁한 짓을 내가 정당
화할 수 있게끔 제발...... .‘
[78]
서늘한 가을비가 하루 종일 추적추적 내렸다. 이 비가 지나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더위는 완전히 물러날 것이다. 한다는 오돌
오돌 떨리는 몸을 웅크리며 W오피스텔 1층에 있는 편의점 문을 열었다. 온장고 문을 열고 따뜻하게 저장된 캔커피 하나를 손에 들
었다. 캔커피를 살짝 볼에 가져가 따뜻한 온기를 느낀 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데 계산
대위로 또 다른 캔커피가 올려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옆을 쳐다봤다. 브라운색 비니를 푹 널러 쓴 태규가 헐렁한 바지에 양손
을 찔러 넣은 채 자신 옆에 서있었다.
한다는 태규의 캔 커피까지 같이 계산을 하고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둘은 편의점 밖에 있는 파라솔이 씌워진 둥근 간이 테이블에 앉
았다. 태규는 캔커피 입구 고리를 따서 한 개를 한다에게 건네주었다. 태규에게 전해 받은 캔커피를 한다는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
뜻한 온기가 양손에 전해졌다. 방금 전 태규의 큰 손에 쥐어졌던 캔커피에서 그리운 그의 온기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태규는 아무 말
없이 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비 오는 도로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다도 그의 시선을 따라 비가 오는 것을
쳐다보았다.
“제법 춥네. 이젠 정말 가을 인가봐.”
“그러네.”
태규의 짧은 대답 이후로 한동안 그들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차가운 빗물이 앉아있는
한다의 몸을 적셨다. 추위를 많이 타는 한다가 빗물에 몸을 더 움츠리자 태규가 의자를 끌어 한다 옆으로 바짝 다가와 빗물을 막아
준다. 한다는 태규의 세심한 배려에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참 따뜻한 사람...... . 내가 이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
한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나 얘기 들었어.”
태규가 놀란 눈으로 한다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 태
규는 묻지 않았다. 한다는 슬퍼 보이는 태규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몰랐어. 누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 많이 힘들었겠다.”
“그렇지 뭐...... . 이미 오래전 일인걸.”
태규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의 누나...... . 한다가 기억하는 태규의 누나는 모처럼만에 시간을 내어 여행을 가려고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막 진입하려는 찰라
태규에게 걸려온 한 통화의 기분을 깨는 전화였다. 갑자기 쓰러진 누나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긴급한 어머니의 통화였다. 태규는 투
석하면 곧 좋아질꺼야 라며 한다에게 안심을 시켰지만 그 여행은 태규가 누나가 입원한 병원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시작도 못하고
무산되어 버렸었다. 한다는 그때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아픈 누나를 원망했었다. 왜 하필이면 오늘...... .
그때 자신이 철없이 원망만 했던 것이 태규 어머니의 안타까운 말들과 지금 보이는 태규의 슬픈 눈을 보면서 미안함에 하염없이 후
회가 되었다.
“저기...... . ”
태규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말에 한다가 생각을 멈췄다. 태규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보고 싶었어.”
한다는 태규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한마디에 심장이 쿵! 멎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이어 이어지는 태규의 말은 전혀 반
갑지 않았다.
“이젠 됐어. 괜찮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태규의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한다는 우리 사이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참 후에 그
런 생각을 해보았다.
태규는 짧은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봐야 될 것 같아.”
“난 좀 더 있을게.”
“그래, 그럼...... .”
태규는 조금 전 그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보고 싶었다고 자신에게 말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한다는 자신을 혼자 남겨둔 채 가버리
는 태규를 불러 세워 그의 등에 되고 투정부리듯 물었다.
“왜 날 그렇게 불러? 그러고 보니 너! 다시 만나게 된 후로 날 제대로 불러 준적이 없는 것 같애. 보고 싶었다면서 내 이름이라도 까
먹은 거야?”
잠시 걸음을 멈췄던 태규는 대답 없이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그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전했다.
‘왜 날 그렇게 불러? 내 이름이라도 까먹은 거야?’
그녀의 짜증 섞인 울림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까먹은 건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태규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드리워졌다.
강인은 태규와 통화를 마치고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에 봤던 태규와 한다가 같이 있는 장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웃이니 둘이 마주앉아 캔 커피를 마시는 것 정도가 이상할리는 없었다. 그러나 뭔가 알 수 없는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태규오빠 내려온데? ”
다운의 발랄한 목소리에 강인은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에 대한 생각을 그만뒀다. 짜증이 밀려온다. 비가 이렇게 오는 날 극장에 가자
니...... . 다행히 태규와 셋이서 가자고 말해 와서 참을 수 있었지만 다시 자신에게 달라 붙기 시작한 다운이 귀찮기는 마찬가지였
다. 뒷좌석에는 그새 꽤 자란 말티즈 강아지가 폴짝 폴짝 뛰고 있었다. 영화 보는 동안 저 혈기 넘치는 강아지를 자신의 차에 놔둬도
될지 심히 걱정이 밀려왔다.
[다음편에 계속이어집니다.]
첫댓글 너무 기다려 답니다......태규가 혜련이 조건을 거절하니 너무 시원해 지는것 같은거 있죠....그리고 한다는수영이한대 그만 만나자고하는데....수영이는 태규 샾에가는데 하필이면 그 폰줄을....아직 한다는 모르고있는거지....마지막엔 한다 태규한데 가까이가려고하는데...태규는 담담하게 그냥 가는데..이제 잘될것은데....다시 태규가 한다한데 찾아가겠죠....다음편도
헉.........이런 발목 잡혀네요....ㅎㅎㅎ
시간이 많이 없어서 한번에 다 쓰지 못해서 자꾸 글이 올라오는 시간이 길어지네요 죄송해요. 그래도 열심히 쓰고 있답니다. 태규가 다시 한다를 찾아가게 될지 기다려주세요~!! ^^ 근데 아시죠??? 전 그렇게 착한 글쟁이가 아니랍니다 ㅋㅋㅋㅋ
제 마음이 정말 답답하네요.... 태규가 한다에게 마음을 정리하기위해 혜수 조건을 승낙하고 같이 영국으로 가는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네요... 참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거 같아요 좋게도 변화시키고 나쁘게도 변화시키고... 태규가 정말 실망이 컸나봐요... 정말 맘이 아픕니다... 작가님 다음편 빨리 돌아와 주세요~~ 작가님 많이 많이 기다리고 있어요^^ 한다랑 태규도 얼른 오해가 풀리길 기도해 봅니다... 그럼 좋은 하루되세요~~
좋은 하루 보내셨어요??? 빨리 빨리 쓰고 싶은데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ㅎㅎㅎㅎㅎ 태규가 영국으로 가게 될지 그건 지켜봐주세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전 심혈을 기울여 다음글을....아 어찌 잘 쓸수 있을지 ........아쟈아쟈 화이팅!!
redhan님 오랜만이죠^^ 꾸준히 글 쓰시는 모습 참 보기가 좋습니다. 시간도 없어 글고 컴도 고장이 나서 오늘 pc방 들른 김에 이렇게 카페에 들어왔네요.. 어제 폰도 잃어버리고 ㅠㅠ 50만원 가까이 주고 산 폰.. 몇 달 전에 할부가 끝났는데 넘 슬퍼요.. 상황이 그닥 좋지 않은 요즘이네요. 저도 빨리 '내 여친은 골드미스' 끝내야 되는데.. 참, 혼트님은 보이지 않으시네요.. 잘 지내고 계시겠죠^^ 아무튼 완결 꼭 지으시구요.. 시간내서 꼭 읽어보도록 할게요.. 파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님 정말 오래만에 오셨어요..............내여친 언제 볼수있어요....ㅜㅜ
우와~! 이게 얼마만이에요??? 너무 반가워요!! 내 여친은 골드미스가 중단되어서 넘 아쉬웠어요!! 아주 흥미로왔거든요. 아~ 그리고 핸펀 어째요?? 넘 속상하시겠다 ㅠㅠ 뭐..그런 미물도 다 인연이 있는건가봐요? 님하고 뭐가 잘 안맞았나보네요. 이왕 잊어버린거 확!! 털어내시고 최신휴대폰을 장만해보심은...요즘 욕심나는 폰이 무지 많더라구요. 님 글도 하루빨리 다시 볼수 있기를 바래요~!!!!
재밌어염~~ 이번편 잘보고가요, 언제쯤 둘사이에 오해가 풀리고 다시 이루어질지..... 얼른 담편을 보고싶네요, 담편 기다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