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Diaspora)" 는 흩어진 사람들을 가르키는 말인데 이는 팔래스타인을 떠나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 과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유대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이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고달프고 힘든 삶 속에서 애환을 글 속에 담아내어 쓴 글들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고 그 후손들까지 수 많은 작품을 쓰면서 그들의 문학작품들을
"디아스포라 문학" 이라고 부른다고한다.
태생지를 버린 인간그룹의 분산인셈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중국,일본, 그리고 하와이를 시작으로
미국이민이 늘어났고 그들 역시 몸은 외국에 살지만 한국인의 습관을 버릴 수는 없었고
삶 속에서 격는 희노애락을 글로 남겼는데 그들 과 그 후손들의 작품들이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이다.
이국 땅에서의 삶이 녹녹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고국을 그리는 향수는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 그리움으로 인해 하와이 이주민들의 뜻에 의해 탄생한 대학이 "인하대학교"이고 지금은 "한진그룹"이
학교의 재단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6.25가 발발한 1950년 1월 나의 조부님 등, 가족들은 소달구지에 살림살이, 그리고 우리 형제들을
태우고 꽁꽁 얼어붙은 임진강을 노심초사 건너서 남쪽으로 내려오셨는데,
아버님은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몸에 담고 살으셨으며 돌아가실 때 까지 고향이야기를 자주하셨었고
나는 전해들은 아버님 말씀에 의한 상상 속의 고향이 몸에 배여있는 "실향민" 즉 "디아스포라"인 셈인데,
피난을 내려와 정착하신 곶이 인천이였고 나는 인천에서 고등학교까지 학교를 다니고 진학은 서울로
했었기에 인천이 나의 고향인 셈이다.
아버님은 공무원을 퇴직 후에는 피난민들이 많았었던 인천 이였었던지라 학식이 부족했던
사람들이 많았었던 그 시절
공문서 작성을 대행해주는 사법서사를 하시다가 "부동산중개업"까지 하시며 가계를 일으키셨다.
아버님의 수고와 보살핌 덕분에 우리형제들은 그 어려운 시절에 잘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디아스포라" 그 흩어진 사람들의 후손인 나이기에 "한국문예협회"는 나와 같은 "디아스포라" 들에게는
부족한 "디아스포라 문학"을 품어주고 이끌어주는 감사한 맨토이자 인도자라는 생각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