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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6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르코 1,7-11)
“One mightier than I is coming after me.
I am not worthy to stoop
and loosen the thongs of his sandals.
I have baptized you with water;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말씀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세례를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수난의 피를 흘리셨다. 참인간이요 참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피의 잔에도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제1독서).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재는 척도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차이이다. 요한은 회개의 표시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사명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사명을 맡으셨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 새겨질 인호이시며,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일 년 중에 가장 춥다는 소한입니다. 지금 저는 작은 시골 본당에서 8년째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꽃을 통해 지역 주민들을 만나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고자 해마다 국화를 키워 가을이면 국화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가을 축제 때에는 이 지역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국화를 구경하러 저희 성당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올 가을에 피어날 국화들이 온실 하우스에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겨울에는 국화가 얼어 죽지 않도록 온실에 연탄을 때서 보온을 합니다. 추울 때는 행여 국화가 얼어 죽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소중하게 돌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요한 23세 교황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닫힌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가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숨통을 트여 놓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박물관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삶이 충만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물러나 세상을 초탈해서 사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갔다가 다시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주변의 많은 사람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큰 희망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뿐 아니라 교회의 꽃밭을 가꾸는 일꾼들입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교회의 꽃밭을 가꾸어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 모여 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봉성체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우리 성당 내의 거동이 힘든 환자들에게 봉성체를 했지요. 사실 2000년에 봉성체를 해 본 뒤,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된 봉성체였습니다. 솔직히 힘들더군요. 그런데 봉성체를 하면서 예전에 만났던 어떤 형제님이 생각나더군요.
환자방문을 하러 병원에 갔다가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교리를 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방문교리를 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이 형제님께서는 방문교리를 그때부터 하시게 되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형제님께서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얼마 살 수 없다는 진단을 이미 받았답니다. 말기 암 환자였거든요. 그런데 세례를 받은 뒤, 이 형제님이 이상해진 것입니다. 병원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신 분께서, 갑자기 상태가 좋아지신 것입니다.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누워계셨던 분이 이제는 돌아다니시기까지 합니다. 형제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신부님, 저는 정말로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 완전히 낫게 된다면 이제는 교리 선생님이 되어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혹시 기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병원에서 다시 진단해 본 결과, 암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위중한 상황이었고,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인데 저렇게 열정적으로 움직이시니 정말로 이상하다는 말만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 미워했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가족들. 그러나 이제는 용서해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자기가 이렇게 살아 있도록 한 것은 화해의 시간을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 같다는 말씀도 하시더군요. 그리고 가족들과 모두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기쁘게 주님의 곁으로 가셨지요.
용서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하지만 용서하지 않고 미움을 간직하면 간직할수록 결국 나의 상처는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오히려 손해인데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낮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보다는 위에 서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할 정도의 겸손함을 보여주시지요. 이렇게 자신을 낮추기에 하느님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의 겸손함을 생각하여 봅니다. 얼마나 겸손하였는지……. 여전히 이기심과 욕심으로 한 없이 높아지려는 내 자신의 한심함을 떠올리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내 마음 안에 품어보겠다는 욕심을 감히 해 봅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세요. 주님께서도 도와주신답니다.
빠다킹신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구요비 신부-
작년 가을, 아주 어린 시절에 우리 가족에게 교리교육을 해주신 인보성체수도회 오 수산나 수녀님이 사진 한 장을 보내주셨다. 이 사진은 단기 4291년(1958년) 4월 6일에 찍은 흑백사진으로, 어머님이 청평본당에서 윤을수 신부님(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께 세례를 받고 찍은 가족사진이다.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었는데, 중간에 잦은 이사로 분실하여 늘 마음으로 아쉬워했었다. 가족들이 아버지·어머니 주위에 서 있는데 묘하게도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아버님의 친구이셨던 고 김홍섭(바오로) 판사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다. 그렇다! 「무상(無常)을 넘어서」의 저자, 지금까지도 법조인의 귀감으로 존경받는 사도 법관 김 판사님이 주말이면 우리집 사랑방에 머물며 전도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선하고 마냥 온유하고 인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서재에 모시니 방안이 따스하게 안정을 찾은 듯하다.
전통적 유교문화에서 살아온 한 가정이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한 것은 그 가정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로 전환된 것을 뜻하며 각 사람한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도 요한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 5,4)라고 선언하신다. 세례는 예수님의 영이 우리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움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모님의 태중에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듯이 같은 성령께서 우리 인간 각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룩하심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됨을 말함이니,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ㄴ).
새로 신설된 능주 공소에서 지낸 지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이 공소는 실제로는 이번에 처음으로 신설된 곳이 아니라
이미 40년 전에 세워졌다 1996년에 폐쇄되었던 아픈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공소문을 새로 연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할머님이 신자들과 함께
작은 돌기둥 하나를 수레에 싣고 들어왔습니다.
언듯 보기에도 금방 세탁비누로 박박 문지러 가지고 가져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작은 돌기둥은 공소가 처음 생겼을때부터 있던 성수 받침대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얻어 온 것이기에 이미 40년을 훌쩍 넘은 것이었는데,
16년 전 공소가 폐쇄되면서 이리 저리 굴러다니던 것을
그 할머님께서 집에다 보관해 오고 있다가 공소가 다시 문을 열자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성수 받침대는 신설된 능주 공소의 입구에 놓여 있습니다.
역시나 볼품없고 빛바랜 모습이긴 하지만 공소문을 드나들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듭니다.
진정 세상을 이긴 것은 누구일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아니라 너 볼품없는 작은 돌기둥인가 보다.’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 작은 돌기둥은 40여년을 훌쩍 넘어서,
그리고 16년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천덕구러기가 되었다가 이제 자기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폐쇄된 공소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볼품없는 작은 돌기둥을
성수 받침대라고 해서 지켜온 할머님의 마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었기에
자녀들이 집안 한 귀퉁이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돌기둥을 갖다 버리자 해도
내가 죽거든 갖다 버리라며 완고하게 지켜온 마음이
세상의 가치를 이기는 힘이겠죠.
그리고 그러한 마음과 믿음이 가진 사람들이
오늘 요한 사도가 말하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고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도 성수 받침대는 공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거룩한 물을 제공하며 우리들을 하느님의 성전에 초대합니다.
“주님,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을 기억해주소서. 아멘.”
주님 공현 전 토요일
- 권우영 신부 -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오늘 주님의 세례 장면을 복음으로 듣게 됩니다. 복음을 묵상하면 다음 두 가지가 의문으로 다가옵니다. 첫 번째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죄 사함의 방법인 세례를 받으셨을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공현 축일과 예수님의 세례는 과연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주님의 공현 축일과 세례와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 제자들의 믿음과 추종 등을 통해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세례자 요한에게서 받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르1,10)
이어서 예수님을 직접 증언하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1)
이렇듯이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며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아드님이시며, 성령이 함께 하시는 메시아이심이 확인됩니다. 사실 세례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요한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1,33-34)
요한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되고 더욱 힘차게 증언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낸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30년간의 사생활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하지요. 이렇게 세례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세례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첫 번째 질문인 왜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방법인 세례를 받으셨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요한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을 찾으셨을 때 황송하고 두려운 나머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3,14)하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3,15)하시면서 당신께서 세례를 받아야 함을 설득하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죄도 없으신 상태에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세례 성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1,8)고 증언하며, 세례를 통한 성령의 은사를 확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의 세례를 이후에도 여러 번 증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
또 승천하시는 그 중요한 순간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28,19-20)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세례가 이처럼 중요한 성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몸소 세례에 참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그대로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죽고 영원한 생명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가 있으셔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세례의 중요성과 그 은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또 한 번 증언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증언합니다. 자신보다 더 큰 스승이 나타나자 제자들을 향해 그분을 따라가라고 지시하는 요한의 강직한 모습에서 우리는 진리를 읽습니다. 드러나셔야 하실 분은 오직 한 분, 주님뿐이십니다.
다가오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잘 준비하는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내적 체험
-이수철신부-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씀의 체험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흰 눈도 평범하면서도 깊은 내적 체험입니다.
예전에 오늘처럼 함박 눈 고요히 내리는 날 써 놓은
“임의 편지” 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계속 쏟아지는/흰 눈발들/임 보내시는/천상편지
하얀 그리움/가득 담겨있는/임의 편지
글씨 보이지 않아도/다 알아 보겠네!”
오늘새벽 독서의 기도 시편의 여운이
지금 까지 그윽한 맛으로 남아있습니다.
“홀로 당신만이 큰 위업을 이루셨나니,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135장 절 마다 후반부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의 계속된 반복이었습니다.
이런 시편도 내 기도로 하여 마음을 가득 담아 고백할 때
이 또한 내적 체험이요 평범한 일상을 기쁨으로 빛나게 합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일상의
크고 작은 내적 체험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일상의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크고 작은
내적 체험을 통해 진선미 하느님을 체험하며
풍요로운 내적 삶입니다. 진정 부요한 자들,
이런 풍부한 내적 체험의 소유자들입니다.
사막이 빛나는 것은 사막 어디엔가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어린왕자 책에서 언뜻 본 글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회색빛 허무한 일상의 광야도 기쁨으로 빛나게 하는 것,
이런 내적 체험의 보물이 있어서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내적 체험을 통한 추억 보물의 비축,
품위 있게 ‘살기 위하여’ 절대적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 세례 시,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의 내적 체험
아마도 예수님 평생 활력의 샘이 됐을 것입니다.
이 말씀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의
확실한 신원의식이 온갖 유혹과 시련을 통과해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게 했을 것입니다.
한 마디의 긍정적인 격려의 말이나 칭찬이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체험 없이는 진정한 겸손도 없습니다.
하느님 체험의 열매는 겸손으로 드러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이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 겸손을 배웁니다.
언젠가 사라질 보이는 외적 소유의 부는
결코 우리에게 기쁨과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내적 체험의 보고가 기쁨과 생명의 원천입니다.
이런 내적 체험이 바로 하느님 체험이자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은 당신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 있다고
사도 요한은 고백합니다.
이 복된 미사시간,
아드님의 성체와 말씀을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는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이어 하늘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아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양승국신부-
<순명 빼고 나면>
오늘 요르단 강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의문을 가지시는 분이 꽤 많으실 것입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회개와 새 생활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셨습니다. 무죄한 어린양이셨습니다. 따라서 세歌?필요 없는 분이셨습니다.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겠습니까?
어떤 학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오신 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세례를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명하신 아들 예수님이셨기에, 세례를 받고 물에서 밖으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이런 흡족해하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가장 흐뭇하고 가장 마음이 흡족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아이들의 자신의 뜻(어둠의 길을 버리지 못하는 것, 악습을 떨치지 못하는 것, 우선 돈 좀 손에 쥐어 보는 일, 그래서 한번 멋지게 놀아보는 일 등등)을 드디어 거두고 우리들의 뜻(우선 괴로워도 멀리 내다보는 일, 어디든 꾸준히 붙어있는 일, ‘욱’하는 성격 버리고 인내하는 일 등등)을 따를 때입니다.
가뭄에 콩 나듯 드믄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순종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 가장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보시고 엄청 기뻐하십니다. 흡족해서 어쩔 줄 모르시는 분위기입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이렇게 외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왜 이런 표현을 쓰셨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한 평생에서 아버지께 대한 순명 빼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순명하셨습니다.
오랜 나자렛에서의 생활 중에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완벽히 순종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든 부모를 떠나십니다.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출가를 감행하십니다.
세례의 순간이 되자 어김없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 요르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정말 피하고 싶은 잔이었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죽음과도 같은 쓴잔을 드셨습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드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자 정녕 올라가기 싫은 곳이었지만 자진해서 죽음의 갈바리아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한 평생은 자기 의지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유혹 가운데 아마 가장 큰 유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뭔가 한번 해보고 싶은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오면 예수님은 언제나 열렬한 기도로서 유혹을 극복해나가셨습니다. 한 평생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했던 완벽한 순종의 삶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
- 이찬홍 신부-
작년 4월부터 시작된 연수가 방학을 마치고 1월 9일 주님 세례 축일부터 시작되어 다음 달 중순경에 끝나기에 한달 정도 서울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이에 오늘은, 주님 세례의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복음에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세례에 대해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에 의한 세례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으로 베풀어진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오시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의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는 똑같이 요한에게 받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세례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에게 놀랍고도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성령을 자신 안에 받아 모시는 거룩한 세례요, 동시에 당신의 신원에 대해 알게 되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공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우치는 사건이요, 동시에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모습, 삶과는 다른 모습,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주님의 몸을 모실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변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을 모시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게 되기에, 우리에게도 세례는 여전히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체험입니다.
세례가 이러하기에 우리는 세례를 받기 전에 적어도 6개월 이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한 준비하는 동안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워하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가 교회에 입문하기 위한 단순한 행위, 그저 통과 의례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친히,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통해 성령의 궁전, 성전이 되는 사람들에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실재로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요, 교회의 믿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세례 때의 마음, 감동, 기쁨으로 살아가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신원에 대해, 정체성을 깨우쳐 주시고 그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갈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요, 위대함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의 특권이요, 특별함 입니다.
세상에서 비 신앙인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고,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분명 특별한 사람입니다.
우리보다 비 신앙인이 더 특별하고 위대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이는 세상의 시각, 시선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재매요, 그 주님의 몸을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위대하고 특별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의 자녀라 하더라도... 아무리 권력이 높은 사람의 자녀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품위보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존귀함 보다 더 위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특별함은 자기 스스로 포기해 버리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는 특별함이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함이요,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특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필요로 합니다.
보물 같은 하느님의 특별함을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거저 담고 살아가기에는 우리는 너무 미약하고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때문에, 늘 하느님께 받은 특별함을 손상하거나, 잃어버리는 일 없이 조심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진정 이보다 더 큰 품위와 위대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잠시 성가를 들으며 세례 받을 그때를.. 세례 때의 감동과 기쁨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이런 큰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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