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카페에서는 특정 사안과 관련해 제법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제대로 된 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건전한 논쟁은 우리 카페의 격을 높이고 사안에 올바른 식견을 가져다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특정 집단의 근거없는 쓰레기들을 퍼와서 막무가내식으로 주입하고자 하는 일부 벌레집단 출신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이러다 우리 카페도 옆집처럼 벌레들의 소굴이 되지나 않을지 심히 우려가 되곤 하더군요.
오늘만 하더라도 수많은 회원님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우악스럽게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밤이슬 모질군으로 인해 불필요한 소모전을 겪으면서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요.
이글은 부디 역사의 객관적 사실을 바로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토론하고 비판하는 우리 카페의 게시판을 기대하며 오늘 쟁점이 되었던 우리 역사의 한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니 너무 큰 의미는 두지 마시고 역사의 단편적 지식 함양이라는 차원에서만 받아들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제주의 슬픈 역사》
1. 1271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에서 패퇴한 삼별초군은 탐라로 근거지를 옮겨 2년간 원에 저항하다가 1273년 여몽연합군에 완전히 진압되고 이후 원은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접 지배.
2. 1898. 2. 7(방성칠의 난) ; 동학농민전쟁 때 제주도로 피신하여 화전민으로 살던 방성칠과 남학교(南學敎)도 들이 과도한 세금에 항의하다가 일으킨 사건으로 민란 초기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30일 만에 실패.
3. 1901. 5. 6(이재수의 난) ;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이에 따른 폐단, 정부의 조세수탈에 대한 불만 등에 의해 촉발된 사건으로써 1900년을 전후하여 특권세력화한 천주교는 조선의 고유한 가치체계나 토착종교 등을 교리에 위배된다고 전면 부정하는데, 제주에서 천주교 입교자 대부분이 1898년 농민항쟁 당시 농민군을 토벌하던 토착양반 세력이나 제주도에 귀양 온 사람들이라는 게 갈등의 주요 요인.
프랑스제국을 등에 업은 신부는 성전을 선포하고 싸움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프랑스 전함 2척이 현지로 출동하는 시태에 이름.
지도부 40여 명이 서울로 압송되고, 3명이 서대문 밖에서 교수형이 처해진 사건으로 반외세, 반봉건 민중항쟁이었다.
4. 1926년 중국침략을 준비하던 일제는 서해안에 알뜨르 비행장 등 군사시설을 건설하였다.
난징 폭격 때 폭격기가 바로 이곳에서 발진.
5. 1943년 이후 ;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제주도를 본토 방어기지로 삼아 해안선 및 오름에 대규모 땅굴 100여 곳을 판다.
이때 제주도민은 무차별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데 가마오름 진지 동굴 같은 곳은 길이가 2000M, 출입구 33곳, 견고한 3층 구조에 달함.
《4.3사건의 전개》
■1945. 9. 6 ; 건국준비(위)는 서울에서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1945. 9. 10 ; 제주 건국준비(위)를 발족하고, 22일 인민위원회로 개명.
도인민원회 간부는 항일독립운동가와 신망 있는 사람이 많음.
■1945. 11. 10 ; 제주도 도청건물에 미군정청 설립.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와 경찰을 다시 그 자리에 앉혀 민중을 크게 실망시킴.
■1947. 3.1 ; 3.1절 기념행사식장 관덕정에서 총격사고 발생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음.
※기마경관인 탄 말에 어린 아이가 채었는데 경관이 그냥 지나가자 옆에 있던 군중이 기마경관에 돌을 던짐으로 촉발. 그리고 경찰의 조준사격으로 사상자 발생.
미군정은 제주도에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내리고, 3.1절 기념대회준비위원을 검거.
이에 맞서 도민은 민간 총파업으로 맞섬.
이에 따라 미군정과 도인민위원회가 갈등.
※이들은 기념식장에서 “3.1정신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라고 역설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육지에서 응원경찰이 증파되고 이승만 대통령은 ‘서북청년단’을 보냄.
경찰이 체포한 사람들이 고문으로 잇따라 죽음에 이르자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일부는 산으로 들어가 무장항쟁을 준비함.
■1948. 4. 3 ; 무장대가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
이들의 구호는 “탄압하면 일어선다”
또한 요구사항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구속된 애국지사 석방’ ‘주둔미군정청 철수’였음.
■1948. 4. 28 ; 김익렬 9연대장은 현장조사결과 현 사태는 경찰지원을 받은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체들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라고 판단하고 평화협상을 주도하였으나 미군정이 김익렬은 해임하고 후임에 연대장 송요찬, 부연대장 서종철을 임명하고 무장단체를 강경진압함.
■1948. 10.19 ; 여수-순천사건 발발.
제주도에 투입되기 위해 여수에서 대기하던 14연대가 반란.
이들은 후에 지리산 빨지산의 주력이 됨.
※제주도에 투입된 군경은 초토화 작전을 펼침. 이는 일본군이 중국과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면서 쓴 작전으로 악명이 높은데 만일 유격대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묵인하거나 그들을 숨겨주고 몰래 지원하면 남녀노소 기릴 것 없이 주민을 모두 죽이고 집을 불태워 말 그대로 마을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다.
이 작전은 근대전에서 국제법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이런 명령을 한 지휘관은 비전투원을 학살했다는 죄목으로 전범으로 처벌받게 되어있다.
■1948. 5.10 ; 남한 단독 선거를 제주도민은 거부(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안을 내놓아 UN총회에서 통과시킴)
■1950. 6.25 ; 전쟁이 터지자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입산자 가족과 보도연맹에 들어간 마을 주민들을 집단 학살함(총살 또는 정방폭포 같은 바다에 수장)
■1960. 4. 19 이후 ; 4.19혁명 후에 정권이 바뀌자 살아남은 후손들이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를 마을 마다 세움.
이는 ‘여러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 묻힌 무덤’이라는 뜻으로 어느 것이 자기 조상의 무덤인지 모르므로 후손들은 마땅히 이 모두를 자기 조상의 묘처럼 받들라‘는 뜻이 담겨있음.
■1961. 5. 16 이후 ; 군사정부는 ‘백조일손지묘’를 없애고 비석을 파괴해 버림.
나아가 공동묘역 해체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로 역사를 가리려 함.
■2000. 1월 ; 김대중 정부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공포.
■2002. 4월 이후 ; 주민들이 백조일손지묘를 다시 세워 현재 132개소에 이름.
한 비문의 예 “132 뼈가 엉켜 한 자손이 됩니다”
■2003. 10 ; 정부는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
■2006. 4. 3 ; 노무현 대통령이 위령제에 직접 참석하고 재차 사과함.
■2012. 12. 11 ;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제주도를 방문해 “4.3은 제주도민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가슴 아파하는 사건이므로 그동안 정부의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부족했다.
국가 추모 기념일 제정을 비롯해 제주도민들의 아픔이 가실 때까지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약속.
[참고사항]
■피살자 수 제주도민의 1/10인 약 30,000명으로 추산.
현재 파악된 자료에 의하면 이들 중 10세 이하 어린이와 부녀자가 각각 약 6~7%.
■마을 주민들이 집단 학살을 피해 살던 동굴들.
다랑쉬굴; 육군 9연대 2대대가 피신해 있던 마을 주민들의 인적을 발견하고 야생 오소리나 너구리를 잡을 때 쓰는 방법으로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로 모두 질식사 시킨 현장임.
노태우 정권은 다랑쉬굴에서 수습한 유골을 유족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화장한 후 바다에 뿌리고 나아가 당랑쉬굴 입구를 중장비로 밀어버려 흔적을 없애버림.
이는 다랑쉬굴이 역사의 흔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풀이됨.
■ 당시 9연대장 송요찬(후에 국무총리), 9연대 부연대장 서종철(후에 국방장관)을 비롯해 경찰간부와 서북청년단 요원의 공통점은 일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거나 친일한 경력의 소유자이고 후에 정권에 의해 출세한 자들임.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영조는 2010년 미국에서 발표한 ‘한국 과거사 정리 성과와 의의’라는 영어논문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a popular revolt'(민중반란)으로 표기하고, ‘제주 4.3항쟁’을 ‘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으로 표기하므로 기존 과거사를 부정함.
첫댓글 이승만이를 능지처참 했어야합니다
이글을 쓴 분에게 한가지 묻고싶은게 있는데
이글 어디서 가져온겁니까 ?
없는 내용을 만들어 낸 찌라시가 아닌 역사이기에 근처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으니, 직접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가서, 발품을 팔아가며 공부하세요. 그래야 의심없는 님의 지식으로 남을 것입니다.
@대리도 인생 이글을 쓴 분에게 묻고싶다고 했는데
대리인 인가요 ?
@짜릿 네, 대리입니다. 대리 필요하세요?
제주 4.3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큰 비극입니다. 아둔덤벙님께서 연대기로 잘 적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 사족으로 덧붙이면 남에서도 철저히 외면받은 4.3이 북의 김일성에게도 비판받고 역사에서
무시당했습니다. 간단치 않은 그배경을 요약하면, 당시 급진적인 남로당 모험주의에 대한 북로당의 비판입니다.
결국 혼란스런 해방정국의 정파싸움의 희생양이었던 거죠. 제주는....
미,소 손아귀에서 돌림빵 당한
민족의 비극
백범 김구 선생님을 두고 이승만이 됐을때...우리 민족의 미래는...일본에게 빌붙던 매국노들이 득세하고...엄밀히 예기하면 아직 이어지고 있다는...
탄량골 사건도 좀 올려 주세요 ^^
서북청년단이니 1.4후퇴때 온 피난민 대부분도 겉으로는 공산주의가 싫어 내려왔다고 하지만, 실은 이북에 있던 친일파들이 김일성의 숙청을 피해 내려온게 맞죠. 탈북민 대부분도 같은 맥락이라 봅니다.
속지말자 소련놈
믿지말자 미국놈
잊지말자 일본놈
.....
남로당 남조선총책이었던 박정희가..붙잡혀서 죽게 되자..남로당 조직원 명단 다넘기고...싹싹빌어 살아남은..역사도 있지요.
박정희는 남로당 영남지구 유격대장으로 알고있습니다
@어리 남한 남로당 명단 전체를 가진 자는...총책밖에 없습니다...그 당시에...박정희가 그 명단을 넘겼기에..살아남았다는 것이..신빙성 있는 이론이고요.
제가 아는 자료 올립니다. http://kookminnews.bstorm.co.kr/m/view.jsp?ncd=5611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755805&
제주에 치안을 담당했던 구한말의순사들
경무총감 조병옥이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지시
미국의항공찰영조작 방화사건
영락교회의 전신인 서북청년당
여순반란사건에 남로당출신에 박정희와
지리산속으로 들어간 이현상과빨치산
제주를 탈출하에 다시일본으로 돌아간
조선제일동포들에 슬픈민단에역사
제주4.3사건은 알면알수록 너무도
처절한 우리에역사를 봅니다
그러나 뒤에는 누구는 국부라 칭하자했던
기회주의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있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