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덕(光德)과 엄장(嚴莊) -2편
1편 먼저 보세요! 1편에 이어서
날이 밝기 무섭게 엄장은 광덕이 살던 곳으로 찾아갔다. 이승을 떠난 광덕은 과연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고 장사를 지냈다. 장례를 마친 엄장은 밤새 자신을 괴롭힌 문제를 광덕의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마음 추스를 여유도 없었으나 광덕의 아내는 뜻밖에도 엄장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남편 친구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부종사의 윤리가 절대적이지 않았다. 고구려에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와 함께 산다는 소위 형사취수제가 존재했다. 이는 윤리관의 부재라기보다는 생존 전략의 하나로 생겨난 풍습이었다. 고대에 남의 아내를 빼앗는 사례가 종종 발견되는 것을 보면, 남편을 잃은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선택이었다. 광덕의 아내는 종으로 어렵게 사느니 차라리 엄장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곧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제 자신의 아내가 된 광덕의 아내와 정을 통하려 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대신 "스님께서 서방정토에 가려는 것은 마치 물고기를 구하러 나무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충고를 보냈다. 놀란 엄장은 "광덕은 이미 당신과 정을 통했으면서도 극락왕생을 이루었는데, 어찌 그것이 극랑왕생에 방해가 되겠소?"하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은 나와 십여 년을 함께 살면서 단 하루저녁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몸을 더럽혔겠습니까?"라며 광덕과 단 한 번도 통정한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대신 광덕은 밤마다 가부좌를 하고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며 16관을 지었고, 이처럼 정성을 다했기에 점차 성불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라고 덧붙였다. 또한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 걸음으로 알 수 있으니, 만일 엄장이 지금처럼 관을 닦는다면 서방정토는커녕 동방으로 가기 십상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엄장은 모든 소망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통정을 거부당해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광덕과 그 아내의 사랑이 자신의 생각과 너무 달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극락왕생을 이룬 광덕의 수행이 자신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고, 자신이 밤새 고민해서 내린 결단이 오히려 극락왕생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끝내 엄장은 얼굴을 붉히며 광덕의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방황하는 엄장, 원효를 만나다
광덕의 집을 나온 엄장은 그 길로 원효대사의 처소로 향했다. 원효는 신라 화엄종을 발전시킨 의상과 함께 7세기 후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엄장이 살았던 문무왕대에 원효의 나이는 대략 44세에서 64세 사이였다. 661년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도중에 머문 고분 속에서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그는 662년에는 고구려를 공략하던 김유신이 당군과의 연합작전에서 받은 비표(秘標)를 해독해주었고, 왕실의 지원으로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는 등 국가나 왕실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 무렵 원효는 무열왕의 요석궁 과부 공주와 관계를 가져 유명한 설총을 낳았다. 그 후 파계를 선언하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부르며 세속의 복장을 한 채 대중 교화에 나섰는데, 기괴한 모양의 박을 지니고 다니며 「무애가(無碍歌)」를 부르고 춤추며 천촌만락을 누볐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원효가 가장 중시한 사상이 바로 정토신앙이었다. 원효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할 수 없는 중생도 아미타불에 의지해 의심과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바로 광덕이 열중했던 수행법과 일치했다.
●원효대사는 방황하던 엄장을 참된 수행의 길로 인도했다.
원효를 만난 엄장은 자신이 처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물었고, 이런 엄장을 위해 원효는 생각을 물들지 않게 하고 깨끗한 몸으로 번뇌의 유혹을 끊는 쟁관법(錚觀法)을 만들어 주었다. 쟁관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효사본전(曉師本傳)』과 『해동승전(海東僧傳)』에 실렸다고 하지만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기에 아미타불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수행법과 마음속에서 번뇌를 끊는 방법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방황하는 엄장에게 원효의 가르침은 마음의 어둠을 꿰뚫는 한줄기 빛을 이루었다.
●엄장의 극락왕생, 그리고 광덕의 아내
남산의 암자로 돌아온 엄장은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마음을 다잡았다. 엄장은 몸을 정결히 하고서 원효대사가 지어준 관을 닦기에 힘썼다. 엄장은 이제 혼자 수행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섰다. 그도 광덕처럼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날마다 '원왕생'을 반복해 외쳤을 것이다.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어느 날 엄장도 서방정토에 오를 수 있었다.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7세기 후반의 신라인들에게 관음보살은 극락왕생을 도와주는 존재로 인식되었다(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소재).
엄장과 광덕이 서방정토로 가는 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광덕의 아내였다. 『삼국유사』 광덕엄장조에 따르면 그녀는 세속적으로는 분황사의 종이었지만, 실제로는 관음보살의 33응신(應身) 중 하나였다.
관음보살은 고통에 빠진 중생이 부르면 즉시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이다. 이를 위해 관음보살은 부처에서부터 부녀, 동남동녀에 이르기까지 33가지로 그 모습을 바꾸는데, 이를 응신이라고 한다. 그 중 광덕의 부인은 거사부녀(居士婦女)의 모습이었다.
광덕과 엄장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서부터 세속을 초월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엄장이 생각했던 것은 인간적인 부부애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정을 통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무너지는 순간 광덕의 부인을 향한 엄장의 사랑은 산산조각이 났다. 반면 광덕은 아내와 성적 접촉이 전혀 없는 부부생활을 했으니, 그의 아내는 서방정토를 염원했던 광덕의 훌륭한 조력자였다. 광덕으로서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을 거느린 재가승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사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시각이 어떠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장처럼 현실적인 사랑을 추구했다. 사랑을 통해 정서적 위안과 생활의 안정을 추구했고, 성적인 쾌락을 누리려 했고, 때로는 사랑을 통해 세속적 권력을 얻고 싶어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세속을 초월한 지고지순하면서도 환상적인 사랑을 꿈꾸었다. 『삼국유사』 광덕엄장조는 이처럼 사랑의 다양한 국면에 당시 서민들이 지녔던 극락왕생에 대한 열망을 담아 전하고 있다.
《신라사학회 글》
일향전념一向專念 일심불란一心不亂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 극락정토 아미타불~
-묘봉사 현각대일 합장-
#불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