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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경 노사님께서 고 희천 김주후 교수님의 입적(선종) 매주 일요일 글을 한 편 보내주십니다.
선스승으로서 제자인 고 희천 김주후 교수님을 추모하는 방편이겠지요.
희천 교수님은 천주교 신자로서 선수행을 하신 신부님과 비슷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희천 교수냄의 사후, 선도회와 도전돌밭공동체는 유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희천 요한보스코 교수님의 아름다운 유산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1. 희천希天(요한 보스코) 김주후 거사님의 입적 1주일을 맞이해
희천 거사(아주대 교수)께서 2015년 제 연구실을 방문하면서 선도회에 입문한 후, 지난 수개월간 집중적으로 ‘수식관數息觀’ 수행하신 다음, 수행 관찰 과정을 상세히 정리한 기록을 이메일로 저에게 보내주셨었습니다.
함께 하고 싶었던 멋진 일들을 할 수 없어 아쉬움은 적지 않지만, 희천 거사님의 입적入寂 1주일을 맞이해 저와 주고받은 핵심 이메일 내용이 제가 기고했던 <불교닷컴>에 생생하기 기록되어 있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희천 거사님의 치열했던 간화선看話禪 수행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리라 확신하며 소개를 드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거동할 수 없는 투병 중에도 마음공부를 치열하게 이어가셨던 희천 거사님을 잘 엿볼 수 있는, 장례식장에 게시된 성찰글 ‘병상에서1’과 ‘병상에서2’ 및 주고받은 첫 이메일 자료를 함께 소개드립니다.
참고로 ‘希天’이란 거사호居士號는 ‘희유한 천주교인’이란 뜻입니다.
군더더기: 우리 모두 그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치열하게 향상여정向上旅程을 끝까지 이어가셨던 희천 거사님의 태도를 10분의 1이라도 본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2026년 5월 17일 어려움이 없는 곳[無難軒]에서 거사 법경法境 합장
https://blog.naver.com/seondopk/224287900983
2. 희천 김주후 거사님의 입적 2주일을 맞이해
- 마침내 서강대 연구실에서 대면하다 -
신학(神學)에도 조예가 깊은 독실한 천주교인 희천希天 김주후 거사(아주대 교수)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 선도회 입문을 위해 마침내 대면 하는 과정에서 제가 느낀 점은 희천 거사님은 마치 물살이 센 개울을 건널 때 돌다리들이 안전한지 하나씩 철저히 두드려보고 건너는 매우 신중한 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고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대면 장면을 보기로 들면, 희천 거사께서 어느날 문득 불교의 ‘공(空)’이 너무 궁금해 이를 체험하기 위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도 수료했는데도, ‘공(空)’에 대한 이론은 배웠지만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채고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어 그 즉시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후 예수회 서명원 신부님(선도회 천달天達 법사)의 강의를 청강하다가 ‘선도회’를 알게 되어 저와 대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제가 ‘공(空)’은 배워서 익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온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며 간화선은 ‘공(空)’ 체득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라고 말씀드리면서, 마침내 선도회와 인연을 맺게 되신 것입니다.
2026년 5월 24일 어려움이 없는 곳[無難軒]에서 거사 법경法境 합장
https://blog.naver.com/seondopk/224294844403
3. 희천希天(요한 보스코) 김주후 거사님의 입적 3주일을 맞이해
대학생 아들인 김이수 군이 부친인 희천 거사님께서 선도회 입문 후 저와 나눈 이야기가 담긴 ‘입적 2주일을 맞이해’를 접하고, 최근 카톡으로 소회所懷와 함께 투병 중인 아빠의 생일 선물로 2026년 3월 7일 쓴, ‘내 마음이 편안한 순간들’이란 성찰글을 보내왔기에 입적入寂 3주일째를 맞이해 선도회 길벗님들과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아울러 희천 거사님의 큰딸과 둘째 아들에 대한 격의隔意 없는 사랑을 잘 엿볼 수 있는, 장례식장에 게시된 성찰글 ‘어 소녀’와 ‘울다가 웃으면’ 및 이수 군과 주고받은 카톡 문자를 함께 소개드립니다.
2026년 5월 31일 어려움이 없는 곳[無難軒]에서 거사 법경法境 합장
내 마음이 편안한 순간들
김이수 (대학생)
들어가는 이야기
작년 6월 말에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온 후, 한동안은 아무런 정해진 해야 할 일 같은 것 없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았다. 군대를 나오니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3년 동안처럼 다시 하루의 흐름을 통째로 내가 정하게 되었다.
초반의 몇 달은 그냥 되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런 생각도 목표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런 날들 속에서도 가만히 지켜보니 내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있었고 마음이 불편한 상태가 있었다. 난 언제, 왜 내 마음이 편한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작년 말부터는 내 일상, 매일매일의 하루를 관찰하는 시간들을 가졌다.
이 관찰의 결과 난 이 마음의 편안함과 불편함이 내 안에 내재된 흐름과의 상호작용 결과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음이 편안할 땐 내 흐름에 맞는 일은 하고 있을 때이고, 마음이 불편할 땐 내 흐름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 때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들로 하루를 더 많이 채우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들은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으로 하루를 채운다는 것이 무언가 조금이라도 힘들게 느껴지거나 귀찮게 느껴지면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걸 할 때 뭔가 나인 느낌, 살아있는 느낌, 선명한 느낌, 깊숙한 곳의 내가 바라는 일을 하는 느낌으로 하루를 채운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난 내 마음이 언제 가장 편해지는지 관찰해 보았더니 내가 가장 편안할 때의 모습에는 아빠와 함께한 시간들, 아빠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내게 아빠와 함께한 시간이, 아빠의 모습이 정말 많이 깃들어 있구나라는 생각을 유독 최근에 많이 했다.
그래서 한 번 내 요즘 일상을 보며 난 언제 마음이 편안한지 보고 그 편안함의 근원도 살펴보고자 한다.
명상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정리를 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 항상 30분 정도 명상을 한다. 명상을 하면 호흡이 안정되고 정신이 안정되어서 하루의 시작이 안정적이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숨을 쉬면서 숫자를 센다. 이때 내 마음이 편안하다.
예전에 잘 시간이 다가오는 저녁이면 아빠가 항상 날 불렀다. 그러면 둘이 같이 서재 안쪽 침실에 나란히 앉아서 10분, 20분 정도 명상을 했다. 솔직히 가끔은 귀찮기도 했고 눈을 감고 앉아서 숫자를 세는 일이 지루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처음엔 지루하다가도 막상 자리를 잡고 5분 정도 천천히 숨을 쉬다 보면 그런 생각들도 잠잠해지고 집중하게 되었고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명상이 서서히 내게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도 이 명상은 계속되고 있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청소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간단하게 집안 정리를 한다. 하루 사이 널브러진 옷들이나 잡동사니를 제자리에 두고,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식탁 위도 깔끔히 한다. 그러고 나면 이제 청소기를 돌릴 준비가 끝난다. 청소기를 켜고 하루 사이 어디서 생겨난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김없이 다시 생긴 먼지들을 빨아들인다. 이때, 집도 정돈되고 내 마음도 정돈된다. 청소를 할 땐 마음이 편안하다.
예전에는 아빠가 하던 일이었다. 예전엔 왜 매번 청소를 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또 금세 널브러질 텐데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아빠처럼 행동을 하고 있다. 식탁 위를 깔끔히 유지하려고 하던 아빠처럼 이젠 내가 매일 식탁 위를 매번 치우고 있다. 이제는 왜 식탁 위를 깔끔히 유지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우리 집의 청소도 계속되고 있다.
성서 읽기
청소까지 마치고 나면 이젠 오늘의 성경 구절을 읽는다. 작년 가을쯤부터 시작한 일인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성경 읽기의 시작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성당을 어릴 적부터 그냥 다니고는 있지만 왜 성당에 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빠는 도대체 왜 성당에 이렇게 꼬박꼬박 나가는 걸까가 가장 궁금했다.
이러던 와중에 예전에 미사가 너무 지루하다는 내 말에 아빠가 미사를 가기 전에 오늘의 성경 구절을 미리 읽고 가 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항상 오전에 서재에서 오래된 성경책을 펼쳐 놓고 읽던 아빠의 뒷모습도 떠올랐다.
그래서 아빠를 따라 해 보면 무언가 조금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여전히 내게 왜 성당에 가야 하나? 라고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오며 내게 새겨진 성경 이야기들을 유적 발굴하듯 탐사하는 느낌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빠와 나눈 여러 이야기들도 발굴되고 아빠가 농담처럼 던지던 말들도 발굴된다. 성경으로 또 아빠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는 일이고 이것도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빨래와 설거지
빨래와 설거지도 자주 한다. 빨래와 설거지는 하기 전에는 귀찮은 느낌이 있지만, 막상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이다. 예전 집에 살 때는 빨래와 설거지는 거의 아빠 담당이었다. 내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보면 아빠가 나를 불렀다. 그러면 나는 그것이 빨래를 널고 개자는 것임을 알았다. 때때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일 때 빨래를 널고 개자고 하면 참으로 귀찮은 마음이 올라왔었다.
그래도 그냥 해야지 하며 같이 빨래를 널고 개었는데 신기한 것은 시작하기전에 귀찮아 죽겠고 심지어 때로는 약간은 짜증까지도 났던 마음이 빨래를 널고 개면서 차분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빨래를 널면서 아빠와 나누는 이야기들도 참 재미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땐 빨래를 널자고 하면 조금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 널어야지 하고 가게 되었던 것 같다.
요즘도 하루를 보내다가 몇 번씩 정신이 복잡해지거나, 뭔가 붕뜬 느낌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 빨래를 개게 된다. 빨래를 개다 보면 복잡하게 꼬인 머리가 단순해지고 붕뜬 느낌이 차분해진다. 빨래를 너는 것이 좋다는 아빠의 말에 이제는 공감하게 된다. 빨래를 개는 일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빨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산책
산책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요즘도 점심을 먹고 나면 자주 산으로 산책을 간다. 산에 가면 나무들이 있고 새들이 있고 풀들도 있다.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인 듯하면서, 또 매번 변하는 산이다. 그것들을 그냥 보고 듣는 게 좋다. 산이 나를 품어 주는 것만 같아서 안락하다.
예전에도 주로 아침이나 점심을 먹고 나면 아빠랑 같이 산에 산책을 갔다. 산책을 가면 그냥 아무 말 없이 걷기도 하고 여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산에서 그냥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걱정이나 불안들을 내려놓게 되고 편안해졌다.
이 시간들도 내게 서서히 스며들어서 왠지 모르게 불안하거나 정신이 복잡할 땐 산으로 발을 옮기게 된다. 산으로의 산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내 마음이 편안한 순간들
내 마음이 편안한 순간들은 결국 내게 서서히 스며든, 깃든 그 흐름에 타서 서핑할 때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보니 많은 부분에 있어 아빠의 흐름과 아빠와 함께한 시간들이 내 안에서 흐름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내 흐름 속에서 아빠와 함께한 시간들, 그리고 아빠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 귀찮았던 일들을 이제는 내가 하나둘 따라 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빠를 닮아가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흐름으로서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기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도 내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마치 흐르는 물이 하나로 이어져 계속 움직이듯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시공간을 넘어 계속 아빠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의 편안한 시간들 속에는 아빠가 있다.
https://blog.naver.com/seondopk/224301404776
4. 희천希天(요한 보스코) 김주후 거사님의 입적 4주일을 맞이해
입적入寂 4주일째에는 지난번 ‘입적 2주일을 맞이해’에서 소개드린 희천 거사님과 주고받은 이메일에 이어, 그 직후인 2015년 10월 19일에 주고받은 ‘좌선 관찰’이란 성찰글이 첨부된 희천 거사님의 이메일과 저의 답신을 소개하며 선도회 길벗님들과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아울러 장례식장에 게시되었던 성찰글들 가운데, ‘소리 좋고 기분 좋고’와 ‘당신이 내 생애 최고의 고객이오!’를 함께 소개드립니다.
2026년 6월 7일 어려움이 없는 곳[無難軒]에서 거사 법경法境 합장
https://blog.naver.com/seondopk/224308241344
5. 희천希天(요한 보스코) 김주후 거사님의 입적 5주일을 맞이해
입적入寂 5주일째에는 지난번 ‘입적 4주일을 맞이해’에서 소개드린 희천 거사님과 주고받은 이메일에 이어, 이번에는 2015년 10월 24일 ‘선도회 첫 모임 참석’을 전후해, 2015년 10월 20일부터 10월 30까지 받은 희천 거사님의 이메일과 저의 답신을 소개하며 선도회(禪道會) 길벗님들과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아울러 장례식장에 게시되었던 성찰글들 가운데, ‘’와 ‘’를 함께 소개드립니다.
2026년 6월 14일 어려움이 없는 곳[無難軒]에서 거사 법경法境 합장
주고받은 이메일들
‘Re: 좌선을 하며’ 답신
보낸사람: 김주후 <juhu@ajou.ac.kr>
받는사람: 박영재
2015년 10월 20일 (화) 오전 8:41
법경 법사님,
예, 고맙습니다. 앞으로 초심(初心)을 잊지 않고 선 수행을 해 보겠습니다. 그럼 이번 주 토요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김 주후 합장
‘Re: 좌선을 하며’ 재답신
보낸사람: 박영재 <seondopk@naver.com>
받는사람: 김주후
2015년 10월 20일 (화) 오전 11:19
김선생님!
토요일에 뵙지요. 법경 합장
https://blog.naver.com/seondopk/224315253511
6. 희천希天 거사님의 입적 6주일을 맞이해:
집중력 향상을 위한 응용 수식관에 대해 묻고 답하다
메일 제목: 수식관
보낸사람: 김주후 <juhu@ajou.ac.kr>
받는사람: 박영재
2015년 11월 5일 (목) 오전 7:35
법경 법사님,
이제 11월에 접어들어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올해 10월 초부터 시작한 좌선(坐禪)도 벌써 한 달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직, 좌선이라고 말할 수준도 아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매일 꾸준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자리에 앉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을 보니 한편 신기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침 좌선 때, 하나, 둘 수를 헤아려 가는 것에다 제가 입으로 부르기 좋아하는 단어인 불이(不二)를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이-하나, 불이-둘, 불이-셋 이런 식으로 약간 변형시켜 본 것입니다. 그 결과, 그냥 하나-, 둘-, 셋-, 넷-, 하고 수를 헤아리던 것에 비해 더 집중이 잘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앞의 ‘불이’가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뒤의 하나, 둘, 셋이 제 생각이 다른 데로 흩어지지 못하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변형된 수식관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직 제가 화두를 들기에는 준비가 덜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매일 똑같은 수 세기만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살짝 변화를 꾀해보는 것도 좌선의 재미(?)를 더해가는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렇게 간단한 단어를 부르면서 묵상에 잠기는 것을 ‘거룩한 이름(Holy Name)’ 부르기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구절 명상(passage meditation)’입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영성 연구 모임에서 여러 해에 걸쳐 개발하고 실시해 보기도 했는데, 현대인의 스트레스 완화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몇 개 연구 결과를 보내 드리니 시간 나실 때 읽어 보시면 좌선의 효과를 새롭게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주후 합장
첨부 2개:
Effects of a Spirituality Training Program on the Spiritual and Psychosocial Well-Being of Hospital Middle Manager Nurses in Korea
Jinsun Yong, SOLPH, RN, PhD, Juhu Kim, PhD, Junyang Park, STD, Imsun Seo, PhC, and John Swinton, BD, PhD
https://www.researchgate.net/profile/John-Swinton/publication/49687448
영성 증진 프로그램이 임상 간호사의 영적 및 심리사회적 상태에
미치는 효과, 서임선, 용진선, 박준양, 김주후
7. 희천 거사님의 입적 7주일을 맞이해: 좌선 공부가 준 귀한 선물 (2015.11.05.)
https://blog.naver.com/seondopk/224329364692
희천 거사님의 입적 7주일을 맞이해:
좌선坐禪 공부 5개월이 가져다준 귀한 선물
보낸사람: 김주후 <juhu@ajou.ac.kr>
받는사람: 박영재
2016년 3월 27일 (일) 오후 11:09
첨부 파일: 나의 오랜 화두 - 부활한 예수.hwp
법경 법사님,
오늘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것을 축하하는 부활절인데, 드디어 우리 가족들 중 맨 마지막으로 장인어른께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셨습니다. 아무도 성당에 나오라고 강권(?)한 적이 없는데, 스스로 성당을 찾고 교리공부를 한 다음 오늘 신자가 되셔서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세례식을 겸한 부활절 미사에 참석하면서, 성당 한가운데 매달린 예수님 상을 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그렇구나! 부활한 예수는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하나의 화두였구나!!
부활한 예수가 저의 오랜 화두였다는 깨달음(?)이 오자마자, 그동안 공부하고 고민해 오던 여러 내용들이 하나의 실로 꿰어지는 듯한 느낌이 밀려왔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오늘 깨달은 내용을 적었습니다. 아마도 정통 신학자가 보면 반박하고 싶은 내용이 많겠지만, 실로 오랜 기간동안 하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달려왔던 그간의 노력이 정리되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리스도교 교리, 불교 교학, 타종교인들과의 대화, 제 개인적인 묵상과 좌선, 그리고 논리적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귀한 인연들이 가져다 준 하나의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법사님께 이 글을 보내 드립니다만, 아마도 이 글의 핵심 메시지는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제 오늘 처음으로 주신 화두인 ‘외짝손소리[隻手聲]’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엉뚱하게 ‘부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고백글을 보내 드리게 되었습니다. 좌선 공부 5개월이 가져다준 귀한 선물에 감사하고, 법사님과의 귀한 인연에도 감사드립니다.
부활절에 김 주후 합장
<나의 오랜 화두:>
부활한 예수
‘부활한 예수’는 일생 일대의 화두였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온갖 논설과 추론으로 해결될 수 없고, 그 뜻을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마치 잡으려 하면 더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불가지론이나 그 어떤 신비의 대상만도 아니다. 바로 우리 인식과 사고의 틀을 넘어 현존의 역설을 통찰해 가야하는 화두로 다가온다.
부활은 썩어가던 육신이 그 부패 과정을 멈추고 줄기세포가 다시 성장한 사건도 아니고, 소위 영혼이라 부르는 그 무엇이 육신에서 분리되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성한 곳으로 옮겨간 사건도 아니다. 부활은 그런 식의 살고 죽은 패러다임, 영혼과 육신의 관계,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는 식의 설명으로 이해되는 사건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런 인간들의 설명 틀에서 벗어나 있기에, 머리로 하는 분석과 분별을 넘어서 있다.
그러니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다시 사셨다는 말에 떨어지지 말자. 육신과 아무 상관없이 신령스런 존재로 다시 사셨다는 식의 추론으로도 가지 말자. 더구나 우리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였다는 결론으로 도달하지도 말자. 모두 부활 사건 앞에서 사탄이 유혹하는 말에 당하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더 이상 살고 죽는 세계에 있지 않다. 도대체 누가 죽고 산다는 말인가? 그 분한테 그런 식의 삶과 죽음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 그 무덤은 텅 비어있었다.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옮겼느니 혹은 그 시신 스스로 어디론가 사라졌느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비어있음(空)으로 다가올 뿐이다. 비어 있기에 충만하고, 비어 있기에 삶과 죽음/오고 감/내려오고 올라감을 떠나있고, 비어 있기에 그 자체로 무(無)이고 영원하다. 억겁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인이시다.
이제 나는 오늘 이 순간, 부활 사건을 경험하고 생사와 오고 감의 틀에서 벗어난다. 그냥 그렇게 벗어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무슨 결심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분의 현존 가운데 설 때, 이미 그런 식의 분별이 무의미함을 발견한다. 그 분의 자비한 빛 아래 설 때,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붙던 악업의 사슬은 사라지고 원래부터 있지도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도 그 분처럼 무(無)이고 또 영원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는 곧 내가 되어 부활해 있다. 이제 나 또한 그분처럼 대자대비한 삶의 기쁨을 맛보며 영원히 살 것이다.
나무예수대보살
수식관 관찰 과정과 화두의 유래
보낸사람: 박영재 <seondopk@naver.com>
받는사람: 김주후
2016년 4월 12일 (화) 오전 7:55
김선생님!
수식관 관찰과정에 대한 글을 화두의 필요성에 대해서 연관 지어 정리한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김선생님의 ‘수식관 관찰과정’에 대한 글은 수식관 수행하시는 분들께 널리 요긴하게 활용될 것입니다.
좋은 기여에 감사를 드립니다.
법경 합장
수식관 관찰 과정과 화두의 유래 (<불교닷컴>, 2016.04.11.)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1803
성찰배경: 앞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초심자 분들이 수식관 수행을 철저히 하게 되면, 자연스레 화두話頭 참구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먼저 지난 수개월간 수식관을 집중적으로 수행하신 초심자 분이 최근 그 수식관 수행 관찰 과정을 상세히 정리한 기록을 이메일로 저에게 보내주셨기에 주고받은 이메일의 핵심 내용을 소개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화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화두의 유래에 대해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생략)
저의 답신: 수식관 수행을 하시면서 체험한 바를 매우 상세하게 정리하셨군요. 마지막으로 다음을 추가하면 좋겠습니다.
9. 다른 느낌은 다 사라지고 오직 자신과 호흡과 수세기가 온전히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러다가 좌선 법회에서 마치는 죽비 소리가 들릴 때 (또는 혼자 하는 경우 알람을 맞추어 놓고 앉아 알람이 울릴 때) (아! 벌써 마칠 시간이 되었구나! 하면서) 선정에서 깨어난다.
사실 수식관의 마지막 단계는 수식관의 장점인 동시에 한계이기도 합니다. 장점은 수식관을 하는 동안 잡념 없이 몰입할 수 있게 되어 마치게 되면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상쾌해졌음을 느낍니다.
한편 한계는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좁은 안목으로 현안 문제들과 씨름하며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한가운데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곤 합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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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7주일 차의 사진>
아래는 과거(입적 1주차)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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