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30 서울고 8회졸업동기생편운제 탐방/
조병화 10주기 추모의글 /
문학과 미술의 진로를 밝혀준 편운(片雲)

-조병화은사님을 몾잊는 이유
글/ 장윤우(시인, 성신여대 명예교수)
어린 시절, 내 꿈은 작가가 되는거였다 욕심을 말하자면 누대(累代)에 남는 "위대한 문호"였다
6.25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疲斃)하고 밀려난 부산 피난지 바닷가 바락크 가(假)건물 서울고교정에서 꿈을 펴기는커녕 빈궁한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힘들었었다, 우리가 원치 않는 휴전을 반대하는 데모가 부산의 광복동과 시내 거리를 매일 누빌 때도 어린 나이에 함께 휩쓸려다녀야했다.
그런속에서 10대소년의 낭만과 뜻은 꺾기어가고 결국 원하지 않는 휴전이 성립되여 황폐해진 서울 모교로 복귀하였다, 참전(參戰) 영국군이 사용하여 강당,도서관등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 배워야했다,
서대문과 신문로 등하교길을 매일 오가는 길에 드나들던 헌책방은 내가 어른이 되면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실컨 책을 읽고자 했던 꿈이며 옛 졸시에 올려 남아있다
신문로 경희궁 교정에서 뵙는 젊고 활달한 성품의 은사님이 어쩌면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은인이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고민 끝에 용기를 내서 교직원실로 찾아뵌 선생님- 그분이 우리에게 수학(기하(幾何)를 가르치는 조병화시인이셨다
서울고등학교 3년생으로서 대학진학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커가고, 문학에의 열망으로 교무실로 찾고 여러모로 청한 지도와 안내를 귀찮다 않으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열악한 사회현장에서도 <학원>,<소년>,<새벗>잡지와 소년지,신문에 닥치는대로 응모하였다 이무렵, 경복고등하교 동급생인 송명호등 4인이 마음을 합해서 학생시집을 펴내기로 작정하고 선생님께 원고를 들고 찾았더니 친절하게 지도하여 제목을 <4인부락>으로 정해주시고 머릿글까지 얹어주셨다. 아마 그해로보면 최초의 학생시집이 될런지 모른다, 발문은 돌아가신 김규동시인이 친절히 얹어주셨다.
-새로운 시의 벌판 <四人部落>을 위하여-.
.... 전략(前略)....... 이 사인의 시의 벌판엔 아즉 봄이 일른 계절입니다, 벌판에 뿌려진 무수한 시의 씨앗이 이제돌아올 봄을 위하여 제각기몸차림을 하고 하고 있으며 그 몸갖음들이 어덴가 굳세게 뻗어나갈 힘과 기다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뿌려진 이 시의 벌판,한계(限界)도 없고,인적(人跡)도 없고 그대로 자유인의 시세계를 향하여 청춘의 창공(蒼空)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 4인 개척인들은 혼탁의 도시에서빠져나와 이제 개척지(開拓地)에서 미래의 희망에 꽉차 서있는 첫모습을 이 도인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 4인의 벌판곁에서 이제 다가올 봄날의 꽃송이들과 가을의 열매들을 위하여 ...... 후략(後略)
1955년 1월 1일에 평문사 간행으로 첫상재된 학생시집 이후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14권이상의 시집과 산문서적들이 내앞에 있다. 물론 재학당시에 황동규,마종기,갈천문이 문예반에 있었으며 후에 김광규, 최인호 후배들로 엮여진다,
에피소드를 하나 말한다면 조병화선생님도 학창시절에 유명한 럭비선수였기에 고교 럭비부를 신설하시고 공부에만 시달려서 약체(弱體) 선수들을 단련하여 서울시 대항전에 출전하여 우승기를 거머쥐고 오셨다 전체학생들을 뫃은 전달식장에서 당시 김원규교장님께서 치사(致辭)도중에 난데없이"그래도 우리는 운동보다는 영어와 수학을 잘해야한다"고 역설하여 우리제자들의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서울 중.고교를 <서울영,수학관>이라고 비아냥하는 터였다.
그래서인지 진학성적이 매우 뛰여나서 나와 동급반에서 훗날 저명한 인사가 많이 배출되였다, 이수성총리,경상현,박유철 3장관과 김용준 인수위원장(헌법재판소장), 대학총장과 장군들이 허다하였다, 자제 조진형관장도 서울고교 후배이다.
나는 결국 1963년 1월1일 서울신문에 신춘문예 시당선의 영광으로 뜻을 이루어갔으며 대학강단에서 미술전공교수의 신분으로 문단 활동도 50년여가 흘러갔다. 배워주신 수학보다도 문학예술과 인생 낭만, 도정(道程)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나역시 어언 77세를 접어들어선다.
조선생님도 8회유화개인전과 4회 시화(詩畵)전시와 유화전3회. 그 외에도 숱하게 그림을 그려주시거나 저서로 발표를 왕성하게 갖으셨다. 언필칭 시중화 화중시의 시화(詩畵)일체(一體)임을 실현하신거다.
나의 멘토 조병화 은사님에 향한 열정으로 편운(片雲)선생님의 회갑(回甲)기념 문집에 제자로서 <이마를 가로 긋는 주름살 그 깊은 곳>을 올려드렸다, -1981,5,25. 회갑기념문집,
-1986,8,20. 정년퇴임기념평론집 조병화의 문학세계에도 써드린 "여백의 사상과
공허(空虛)의 미(美)" 일지사 발행 p238~p245 수록을 참고 바란다
이로서 서울고 8회 제자로서 자랑스런 장윤우는 조금이나마 보답하였다고 여긴다.
이후 문단 활동과 대학강의 일환으로 자주 찾아갔던 안성(安城) 난실리 문학기행, 매년 정기 행사참여를 통해서 소홀했던 제자로서의 후회를 씻고 파이프에 퍼지는 체온(體溫)을 느낀다
이분의 인생과 작품에대한 비판과 논의도 있긴하나 날이 가고 해가 흐를수록 편운선생님에 대한 그리움, 내 직장이 돈암동에 위치하여서 1970년부터 거의 매일 지나야했던 혜화동 로타리에서 만나게 되면 예외없는 파이프를 흔들며~
"여어~ 장윤우, 자넨 러시아백작이야, 콧수염이 멋있네"하시며 너털웃움을 띄우시던 대학로시절도 절절하다, 속으로 "저를 키워준 당신은 제정(帝政)러시아 황제이십니다" 삼킨다.
이분을 기리는 <꿈>,기념문집과 백일장등이 지속되면서 갈수록 옛모습과 발자취가 눈에 어리고 있다. 이시대의 로맨티스트-, 이제 가신지 10주년 추모제를 마지하여 머얼리 한조각 뜬 구름으로 떠다니며 지켜보실 우리들의 고교시절 은사와 세계의 문학계를 뒤지던 풍류(風流), 문단과 교단, 미술의 길을 뒤따라 걷는 편운을 나름대로 되새기며 가슴속으로 뜨겁게 흘러오는 정회(情懷)에 겨운다.
2탄!!편운(片雲)조병화의 그림세계
끝없이 투명한 심성(心性)과 경계(境界)를 초월한 시간여행-,
장윤우
개인적으로 1954~56년도에 서울고교에서 배운 은사이시다,
전쟁의 와중(渦中)에 문학과 미술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할 무렵 찾아 뵙고 상의하였다
미술을 전공으로 선택하고도 평생 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을까에서였다,
미술대 진학으로 방향을 잡은 계기를 마련하여 오늘의 내가 존재하게 잡아주신 분이시도 하다,
예술의 본질은 하나로서 미술과 문학도 표현에 차이뿐이며 다만 "문자"로 표현하면 문학이 되며 "색채등 매체"를 의존하면 회화나 조형등으로 구분된다 두 길을 가면서 성공한 작가들을 말해주셨다고 본다. 음률로 음악, 혼합(混合)재, 섬유, 전자, 온갖 매체(媒體)등에 다양한 예술분야가 성립된다........
이분의 미술작품들을 대하면 감성과 서정이 섞인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각 작품들에는 오늘을 가는 현대인들 특히 각박한 도회지의 지성인의 심상(心象)을 다듬어주는 향수(鄕愁) 즉 노스탈쟈가 서려 있다- 티없이 투명한 푸르시안 불루와 나른한 황토색조(調), 자신만의 무연한 산하를 대하면 나도 모르게 환상(Fanasic)과 몽환(夢幻)속에 취하게 된다. 뜬구름과 같은 "꿈"이 서려 있다,
여러회에 걸친 개인전과 시화전 그리고 화집을 통하여 화백 조병화의 개성과 기법등 진면목(眞面目)을 누구든 거부감없이 살필 수가 있다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 역시 난해(難解)하지 않는 시(詩)가 편편히 녹아 흐른다,
19세기말(末) 유럽을 풍미(風靡)한 다다(Dadaim)는 당시 전쟁속에서 "내일"을 잃은 사회에문인,화가 지성인들이 장르를 뛰어넘어 교감(交感)하며 어울리던 몸부림이자 구원(救援)을 찾는 운동이였다고 본다,
어찌보면 모든 예술들이 서로를 경계하거나 각(角)을 세우지 않고 껴안고 북돋아왔기에 오늘의 부흥(復興)을 이룩하지 않았을까 한다, 허나 아직도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분야간에 벽(壁)을 쌓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상존(常存)한다 이런 측면에서 편운(片雲)선생이야말로 장르를 초월하는 선구자이며 경계(境界)를 아우르는 완숙의 경지로 길이 후세들에게 귀감(龜鑑)이 된 대가(大家)라고 믿는다,
오늘도 난실리 하늘을 떠나지 못하고 머무는 뜬구름, 편운의 그림 한조각 캔바스,
시화(詩畵)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속에 편운(片雲)의 시가 내재한다. 차라리 화가이시다,
혜화동 로타리 자택 인근에 미술대 은사이신 장욱진화백의 화풍을 연상한다. 이병도박사의 따님이신 부인이 동양서점을 운영하셨다
리얼리즘(Realism)경향의 마른 색감, 격식이 없는 보헤미안,
한 때 종로에 유명한 맥주홀 <낭만>을 자주 찾고 이름까지 지여 주었다고 들었다 낭만주의(Romantism) 로맨티스트로 여인을 두고 파이프를 물고 자연(紫煙)을 음미하는 혜화동백작을 그려본다.
여한(餘恨)없는 예술가의 삶을 누리고 떠나간 편운(片雲),
국내외적으로도 문학과 미술의 두길을 걸어간 작가들이 적지 않은데 이분만큼 풍성하고 여운(餘韻)이 감도는 화가는 없다 세월을 넘어 남기신 작품들은 영원히 신선하다.
안성 편운제행사 주제발표, (서울고 8회 제자 성신여대 미술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