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김삿갓 시 다시 읽기
조선후기 한시의 파격성을 논의할 경우 김삿갓 곧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을 문학적 화두로 떠올릴 수 있다. 더구나 한시의 정통적인 길이 아닌 풍자의 길을 걸었던 시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의 한시는 이미 발굴과 수집, 채록과 정리에 이르기까지 구비문학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름하여 그의 풍자적인 한시가 이야기 판의 현장에서 전승되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방곡곡을 다닌 방랑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삿갓을 다시 생각하면, 글 가르치는 훈장, 육담을 시로 전파한 이야기꾼, 다시 떠나는 자로서의 자유인 그런 것과 연상하여 시 한 수 지어주고 밥과 잠자리를 얻었던 걸인시인 등으로 각인된다. 인간의 냄새가 묻어나는 난장에 있음직한 시인으로 불러내어 그의 구비육담시(口碑肉談詩)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 시대상을 축소판처럼 보인 그의 인생역정은 오늘날 되새겨 보아도 절망하게 하는 시적 아픔이 있다. 그는 또한 19세기 중반 이후 시대 밖에서 시대 복판을 활보한 시객(詩客)으로서 다중성(多衆性) 또는 복수성의 얼굴이기도 하다. 봉건 말기 지식인의 분화된 모습인데 그가 보았던 이 땅의 면면은 그의 시 솜씨로 되살아났다. 그래서 문학영웅의 모습이 보인다. 그를 따라 가다보면 시 속에 인간의 총체적인 얼굴이 있음을 느낀다. 그의 시의 매력은 시대를 관통하여 느낀 인간의 일그러진 또는 아름다운 모습을 날카로운 언어로 형상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의 논의는 그의 시 중 사회적으로 통렬한 비판과 맞물려 있는 육담한시(肉談漢詩) 등을 중심으로 구비문학적인 입장에서 재인식하는 데 있다.
Ⅱ. 김삿갓의 삶과 19세기 구비문학 전통
영월 땅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김삿갓이 살아나고 있다. 김삿갓은 구비문학의 현장에서 여전히 구비시인(口碑詩人)처럼 대접받고 있다. 김삿갓 당대에도 그랬듯이 떠들면서 다시 살려내는 구비시의 유통자인 동시에 창조자였다. 조선후기의 방외인(方外人)처럼 시대 밖에서 살았던 김삿갓이다. 김삿갓은 떠돌이 시인의 전형처럼 불리지만 실존 인물 김삿갓은 영월지역에서 무덤과 함께 설화를 가지고 있는 추모대상이다. 그는 문학의 힘과 낭만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안동 김씨이며 호는 난고(蘭皐)이다. 또한 생몰연대가 확인되는 유일한 삿갓시인이다. 이는 그가 생전에는 물론 생후에도 다중의 문화현상을 나오게 할만큼 전승적 기반 속에서 시화(詩話)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지식인들 앞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통수 길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통상적인 사서삼경을 배우고 과거시험 답안에 익숙하여 급제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해야 하였다. 일단 급제하면 출세의 길이 어느 정도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현상이 18·19세기 때 붕괴되는 조짐이 있었다. 이는 조선후기 인구 증가와 아울러 신분제도의 변동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어렵게 획득한 신분을 유지하고자 과거에 집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식적인 과시체(科詩體)를 익히고 시험이 있을 때마다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매번 서울로 몰려들지만 이들의 급제는 제한적이었다. 흔히 책을 읽으면 사(士)요, 벼슬길에 오르면 대부(大夫)라는 말이 있다. 사서삼경을 읽어 벼슬길에 오르는 길, 이것이 봉건시대 사대부의 이상적인 대응방식이다. 그런데 출세지향의 지식인에게 관인으로 진출하는 정상적인 출로가 막히면 대체로 경제적 곤궁함이 당연하였다. 정치에 참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여건에서 가난까지 겹칠 때, 그들은 막다른 길에 몰려 자신들이 지닌 유일한 지식을 팔 수밖에 없다. 봉건 해체기의 떠돌이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밑천인 지식의 시품을 팔았다. 그것도 상업자본이 움직이던 도시가 아니라 그때까지도 자신들에 대해 외경심을 가지고 있던 농촌의 신흥 부자와 양반들에게 팔았다. 그들은 지식을 팔 수 있는 것으로 떳떳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다. 김삿갓에 대한 인식은 지식을 팔았다는 부끄러움에서 나온 시대의 폐단에 있다. 김삿갓류의 지식인에게는 몸과 아울러 정신까지도 황폐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김삿갓의 사회적 비꼬기는 이런 사회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육체적 방랑은 정신적 방황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삿갓에 대한 재인식은 조선후기 지식인의 분화 과정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온 계층, 걸인과 다름없는 떠돌이 지식인의 전형이라는 데서부터 논의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김삿갓의 개인사를 보면, 그가 지체 있는 집안 출신임에도 전생애에 걸쳐 방방곡곡을 떠돌다가 객사하게 된 것은 순조 11년(1811)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난과 관련이 있다.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홍경래난 당시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다가 농민군에게 투항하고 그들이 주는 벼슬까지 받았다고 알려졌다. 그 후 농민군이 토벌되자 조부는 그 죄로 참형을 당하였다. 김삿갓의 나이 6살 때의 일이다.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자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치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죄인의 후손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으며, 벼슬길로 나갈 자격이 박탈된 상태였다. 폐허가 된 집안의 후손인 삿갓은 그 모멸감과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22세 때부터 떠돌이 삶을 살았다. 그러나 김삿갓의 가출동기에 대한 개인사적 현상은 매우 극적인 면이 있다. 그는 영월 백일장에서 자신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을 찌를 만큼 높다는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다. 그 후 어머니의 얼굴을 통하여 김익순이 바로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 된 김삿갓은 통곡하고 집을 떠났다. 조부를 매도한 손자로 하늘조차 보기 부끄러워 삿갓으로 가린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구비성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 김삿갓이 과장에서 지었다는 시는 다른 사람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승력이 발휘된 데는 19세기 이후 민중계층에서 동시대 김삿갓류에 대한 통속적인 흥미와 함께 김병연이라는 불우한 지식인의 처지를 동정했기 때문일 터이다.
가뿐한 내 삿갓은 빈 배와 같으니, 浮浮我笠等虛舟 한 번 쓴 지 사십여 년이 되었네 一着平生四十秋 송아지를 따라가는 목동 아이도 쓰고, 牧竪輕裝隨野犢 갈매기를 벗 삼는 어부도 쓴다네. 漁翁本色件白鳩 술이 취해 건들대면 꽃가지에 걸어 놓고, 醉來脫掛看花樹 달을 보러 나설 때는 옆에 끼고 가는구나. 興到携登翫月樓 세상사람 의관이란 겉을 꾸미기 위한 것, 俗子衣冠皆外飾 비바람이 몰아쳐도 삿갓 있어 근심 없네. 滿天風雨獨無愁. - <삿갓을 읊으며 ( 笠)> -
김삿갓의 유랑에 대해 물질적인 가난은 정신적 깊이를 보태는 데 역설적으로 작용한 탓이라고 변호하자는 것이다. 비극적인 삶은 가난한 데서 비롯된다. 가출한 김삿갓은 갓 대신 삿갓을 쓰고, 가죽 신발 대신 짚신을 신고, 하인배가 모는 말 대신 죽장을 짚음으로써 그가 사대부 층의 모든 규범을 거부하며, 조선 초 방외인과 같이 사대부 문화의 바깥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지식인층이었던 사대부는 체통과 이념을 중시한다. 이들은 일생 동안 삼강오륜을 비롯한 유교이념을 충실히 지키고자 한다. 엄숙한 이념을 지키자면 몸가짐, 옷차림도 근엄해야 하기 때문이다. 느리고 무게가 실린 말투, 대자 걸음에 넓은 갓, 긴 도포, 우아한 가죽신발 등 이러한 것들이 봉건시대에 사대부임을 상투화해 보여 주는 권위적인 발상이다. 그 역시 상층에서 몰락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낡은 도포와 갓은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자유인의 시적 품격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완전한 일탈은 하지 못하였다.
하늘은 높지만 머리 둘 곳 없고, 九萬長天擧頭難 땅은 넓지만 다리 펼 곳 없네. 三千地闊未足宣 한밤 누각에 오른 것은 달을 즐기기 위함 아니요, 五更登樓非翫月 사흘이나 굶은 것은 신선을 구해서가 아니라네. 三朝 穀不求仙. - <스스로 탄식하며(自嘆)> -
김삿갓의 가출행위와 유랑벽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과 절망에서 비롯된 점에서 시대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일단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자 그는 문전박대를 당하여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의 집에 왔는데 사람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각박한 세태를 한탄하며 분노한다. 넒은 천지 하늘 아래 지친 몸 하나를 뉠 곳이 없이 김삿갓, 누각에 올라 노숙을 하는 그에게 달은 더 이상 완상의 대상이 아니다. 벽곡( 穀)은 원래 신선을 꿈꾸는 자들이 하는 생식을 말한다. "여러 산천 방랑하여 보낸 세월 허다하게 겪은 일도 많고 많아 웬만한 건 예사롭다"라 했지만 사흘 굶주림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굶주림을 벽곡이란 단어로 표현하여 그 비참함을 애써 감소시키고자 한다. 가난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은 구걸을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정신적 모멸감과 좌절감을 안겼다. 그는 옥구에서 김진사라는 사람에게 푼돈을 얻고는 그 수모와 학대를 참을 수 없어 무진히도 탄식한 바 있었다. 그는 학식이 없음에도 관을 쓰고 장죽 들고 행세하는 시골 양반, 좌수, 훈장, 지관 등을 꼬집는다. 역설적인 것은 그가 어느 곳에 가든 먼저 이들을 찾아가 하룻밤 묵을 자리와 한끼 밥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곤궁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몸의 존재가 무거운 짐이 되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창자에서 꾸룩꾸룩 천둥소리가 나고 아침 요기로 찬바람을 마셔야 했던 그에게 김병연의 정체성은 소멸되었고 또 다른 '김삿갓'이 드러났다. 그는 이쯤에서 독자적인 구비시인의 가면을 쓴다. 김삿갓은 삿갓 가면을 쓴 채 왕권에서 본 이단적인 후손이라는 모멸감에서 벗어나 주위에 인간의 진면목을 본다. 그는 길에서 죽은 거지의 시신을 보며 "앞마을에 사람들아, 한 삼태기 흙을 날라 풍상이나 가려주라(寄語前村諸子輩, 携來一 掩風霜)"고 부탁한다. 한 자 남짓 지팡이와 구걸한 두어 됫박 쌀을 남기고 타향에서 죽어간 걸인에서 김삿갓은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점차 현실을 보고 이 땅의 사람을 발견한다. 걸인, 노파, 남편 잃은 젊은 여인 등 궁핍한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중세 왕조의 군상들이다. 김삿갓은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떠도는 자신도 이들과 같은 처지임을 동일시하게 된다. 민중 취향의 한시들은 비록 구전적이고 즉흥적일지라도 이러한 고난의 여정에서 가혹한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친 지식인의 초상이다. 어두운 국면은 김삿갓 자화상을 후대에 구비적으로 재생해낸 것이다. 김삿갓 시는 구비적 한시라고 말한다. 다중의 화자가 그것인데 김삿갓이라는 탈을 쓰고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동일제목의 시도 부분적으로 시구가 다른 것이 많다. 이는 물론 김병연이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의도로 작품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서 이기도 하지만 당대에 광범위한 공감층이 형성되면서 김삿갓의 이름으로 위작, 가탁 및 변개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김병연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익명성 구비시인의 이름이 되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작품을 김삿갓의 것으로 만들기도 한 것이다. 행적뿐 아니라 남겨진 작품을 통해서도 김삿갓은 19세기의 불우했던 한 지식인이자 수많은 구비시인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봉건질서의 흔들림 속에서 민중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김삿갓의 시정신은 바뀌어 갔다. 자조하는 절망에서 비분강개하는 지식인으로 변한 것이다. 농민전쟁이나 사회적 봉기로 쑥대밭이 된 집안의 후손에서 민중의 고통을 공유하는 지식인으로의 변모는 양면적 얼굴로 서게 한다. 개인적인 불운을 유랑하면서 가혹한 현실의 절망 속에서 그의 의식을 동시대적인 공유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김삿갓의 시는 이면적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조소하는 태도로 여정에서 마주친 속물들의 모습을 시화하였다. 김삿갓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향촌에서 지식을 팔면서 시골 양반의 비위를 맞추는 서당 훈장들을 조롱하였다. 김삿갓은 그들의 허위에 찬 모습을 외면 않고 공격한다. 그들은 겨우《사략(史略)》정도의 수준으로 모르는 글자를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 대고, 술자리가 벌어지면 나이를 빙자하여 술잔을 먼저 받는다. 얕은 지식과 얼마 간의 땅덩이를 갖고 향촌에서 거들먹거리고 사는 시골 양반들의 추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삿갓은 이들을 비웃고 희롱한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딴전피우기로 가지고 놀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사당까지 갖추고 조상 자랑을 하며 사는 허세의 양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그네에게는 야박한다. 기득권의 사회에서 벗어난 곳에 기득권의 문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다음의 시에서 유풍을 거론한 것은 나그네에게 자비심을 베풀었던 선조들의 덕을 각박하기만 한 후손들의 지금 모습과 대비시키기 위해서 멋을 부린다.
사당동에서 사당이 있는 집을 물으니, 祠堂洞裏問祠堂 보국대광 벼슬 지낸 강씨라고 하네. 輔國大匡姓氏姜 선조의 유풍은 불교인데, 先祖遺風依北佛 자손들은 어리석게도 오랑캐를 배웠구나. 子孫愚流學西羌 주인은 처마 밑 끼웃끼웃 걸객이 갔나 살피고, 主窺詹下低冠角 나그네는 문 앞에서 지는 해를 탄식하네. 客立門前嘆夕陽 좌수, 별감 그나마도 분수에 넘치니, 座首別監分外事 졸병 노릇이나 해야 어울리지 않을까. 騎兵步卒可當當. - <강좌수가 나그네를 쫓아내며(姜座首逐客詩)> -
문전박대를 하고 돌아갔나 숨어서 살피는 모습에서 시골 양반의 속물근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그들에게는 좌수, 별감 같은 하찮은 칭호도 분수에 넘친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권문세가를 찾아다니며 하루종일 굽실대면서 천만금을 써가면서 청탁을 한다. 이는 현실이고 이를 멀리하는 것은 이상이다. 그의 현실적 비꼬기는 정신적 높이를 강조하자는 것이다. 그의 움직임 자체가 구비적 시화를 만들어냈다. 떠도는 길 위의 가난한 시골집에서 죽 한 그릇을 얻어먹으면서도 시가 나온다. 하늘이 보이는 멀건 죽을 먹으며 자신을 생각한다. 김삿갓은 단양 장회에서 미안해하는 주인을 위로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사실 고단한 긴 방랑생활에서 김삿갓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시골 부자들의 후대가 아니라 이런 농민들의 호의였다. 그는 비를 피해 묵은 촌집의 주인에게도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비록 시골집이 석가래가 굽어 있고, 처마는 땅에 닿아 있는 좁은 곳이라 다리 하나 펼 수 없이 잠을 잤음에도 그는 참된 인간을 생각하였다.
개다리 소반에 멀건 죽 한 그릇, 四脚松盤粥一器 하늘 빛에 구름 그림자가 떠도는구나. 天光雲影共徘徊 주인은 면목없다 하지 마오, 主人莫道無顔色 물에 비친 청산 풍경을 내 아끼네. 吾愛靑山倒水來. - <무제(無題)> -
김삿갓이 방랑하면서 목격한 것은 지식이나 사람됨이 아니라 돈이 행세하는 세상이다. 그는 돈의 위력과 권능을 목격한 것이다. 19세기 변화하는 시대에 움직이는 것이 돈의 흐름이다. 그는 "지상의 신선 있으니 부자가 신선이요, 사람에게 죄 없으니 가난이 죄(地上有仙仙見富, 人間無罪罪有貧)"라고 말하였다. 권위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은 당대 농촌현실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19세기의 농촌은 오랜 삼정의 수탈과 수령의 탐학에 피폐해졌다. 농촌까지 침투해온 고리대금, 상업자본은 소농, 빈농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반면 관과 결탁한 일부 양반, 평민부자들은 토지까지 확보하여 대규모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런 현실 앞에서 김삿갓은 목소리가 비장하다. 당시 문단에서도 정통 사장파들은 그의 시를 파운농시(破韻弄詩)라 하여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신분에 따라 부귀가 결정되던 낡은 시대가 가고, 어제의 가난뱅이가 부자되고, 어제의 부자가 몰락하여 가난뱅이가 되기도 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직시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봉건왕조의 붕괴 조짐이고 근대적 여명이다. 사회적 기반이 농촌의 지주와 농민과의 관계, 관리와 농민의 위상 등 신분 모순으로 무너져 갈 때, 봉건왕조도 그 기반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삶은 시를 통해 비극적 당대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풍자적인 은유를 담았다. 제한된 현실에 김삿갓의 시작업은 더욱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봉건사회의 말기에 삶의 현장에 서 있었던 구비시인(口碑詩人)이다. 그의 삶은 개인적 모순에서 사회적 모순으로 전이된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19세기 민속극, 판소리, 잡가 등 구비적 양식의 변화가 심했던 현상과 관계가 있다. 김삿갓 현상은 조선후기 구비문학의 활성화와 맞물려 익명의 시, 희작의 시를 통해 당대의 모순과 정면대결을 할 수 있었다. 이야기판 또는 놀이판에서 비판적인 성향의 시는 변개의 장난시로 시대를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데 있다.
Ⅲ. 김삿갓 시의 언어유희성과 구비성
조선후기 구비적인 전통은 한시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의 시는 그런 흐름 위에 우뚝 섰다. 김삿갓의 시는 내용도 파격적이지만 표현 기교의 측면에서 한시의 정형성을 별 다르게 파괴시켰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이런 면이 그가 한시의 형식을 취했음에도 민요와 잡가, 사설시조 등 구비시가처럼 민중들에게 널리 사랑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에 한시는 사대부의 고상한 감회를 어려운 전고를 써서 우아하게 드러내는 데 쓰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삿갓 시의 독특함에는 파격적 희작성과 해학성 및 외설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파자는 물론,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고 비속할 만큼 희작화한 방식을 통해 진솔한 민중의 생활을 절실히 드러내게 된다. 여론의 참요적 발상은 말놀이의 웃음으로 형상화하였다. 한자의 절묘한 상징성과 한글의 소리 발상, 구상의 재치성을 최대한으로 살려 시의 재미를 느끼게 하였다.
유월 더위 새는 앉아 졸고 六月炎天鳥坐睡 구월 찬바람 파리는 다 죽었네 九月凉風蠅盡死 달이 동산에 뜨니 모기 처마에 이르고 月出東嶺蚊 至 해가 서산에 지자 까마귀 둥지를 찾네. 日落西山烏向巢. - <장난시(弄詩)> -
언문풍월(諺文風月)은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오언, 칠언의 한시체에 끼워 맞춘 것을 말한다. 예컨대 "菊秀寒 發"은 뜻으로 파악하면 "국화는 빼어난 찬 그릇에 핀다"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음으로 읽으면 "국수 한 사발"이다. 김삿갓의 널리 알려진 <대로시(竹詩)>도 이런 수법이 쓰였다.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은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로 해석된다. '竹' 자를 그 뜻인 '대'에 '로'를 '대로'로 파악할 때만 시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자 자체(字體)를 쪼개어 쓰거나 동음이의어를 이용하는 것은 김삿갓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수법은 아니다. 조선후기에 민간에 널리 퍼졌던 《정감록》류의 도참서와 농민전쟁과 관련된 참요에 이러한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참요의 언어유희성은 조선후기 구비문학 전반에 나타난다. 김삿갓의 희작시는 민간에서의 한자 사용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점잖은 사대부의 감춰진 독설을 시격(詩格)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한시가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는 이러한 정서적 놀이성도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엄숙한 사대부들에게 비판받는 대신 궁벽한 촌구석의 농민이나 서당 아이들의 사랑을 받은 데는 세태를 꼬집는 풍자적 내용과 함께 한자를 파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욕은 억압의 해소에도 좋지만 정서적 교감에 작용하는 전달매체다.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二十樹下三十客 망할놈의 집에서 쉰 밥을 먹는구나, 四十家中五十食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人間豈有七十事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으리. 不如歸家三十食. - <이 씨팔놈아(二十樹下)> -
이 제목을 조정하여 읽으면 '이 씨팔놈아'이다. 얼마나 당찬 소리인가. 김삿갓이 아니면 천박하다. 그는 속어, 욕설, 육담, 음담패설 등을 통해 비유적으로 세상을 질타하였다. 널리 알려진 이 시는 김삿갓이 행했던 한자어를 가지고 순수한 우리말을 표기하는 파격적 실험을 잘 보여준다. 시에서 二十은 스무이고, 三十은 서러운 또는 설은이고, 四十은 망할을 뜻한다. 五十은 쉰, 七十은 일흔이 되는 말의 변환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시는 작가의 체험이 밑받침되지 않았을 때 심심풀이를 위한 장난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이 점은 말놀이 차원에서 달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書堂乃早知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房中皆尊物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 生徒諸未十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先生來不謁. - <서당욕설시(辱說某書堂)> -
두자 운에는 본래 춘자가 없으니 頭字韻中本無春 운을 불러 주는 선생이 좆대가리 같네 呼韻先生似腎頭 주린 날은 항상 많고 배부른 날은 적으니 飢日常多飽日或 문 앞에 이르러서 지팡이를 '콩'세우네 客到門前立 太. - <파운시(破韻詩)> -
사실 김삿갓의 시라고 전해지는 작품 가운데 희작적 성격을 가진 것들의 많은 편수가 비속한 욕설이나 조롱으로 되어 있다. 앞의 원시에서 뒤의 세 글자씩 읽으면 내조지, 개좃물, 제미씹, 내불알이고, 뒤의 시에서 '좃대가리'가 육담의 속어처럼 나온다. 육담의 욕지거리는 야한 것이 아니라 뒤틀린 세상 그 너머에 메시지를 보내는 데 있다. 육두문자, 속어, 욕찌거리 등은 시의 분위기를 파국으로 몰고 가되, 이면에 감춰진 전언은 속시원한 통쾌함이 자리하고 있다. 반드시 김삿갓의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세태를 변혁의 시선이 아니라 야유와 조소의 눈길로 훑을 때 작품 질의 퇴보는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어유희에는 문학성 이외에 현실성과 참요성이 담겨 있다.
중의 둥글둥글한 대머리는 땀흘리는 말부랄 같고, 僧首圓圓汗馬 선비의 뾰족뾰족한 관은 쪼구리고 앉은 개좆이네. 儒頭尖尖坐狗腎 목소리는 마치 구리방울을 굴리듯 우렁차지만 聲令銅鈴零銅鼎 눈은 흰 죽 그릇에 빠뜨린 후추알과 똑같네. 目若黑椒落白粥. - <조승유(嘲僧儒)> -
금강산 유점사에서 주지승과 선비가 장기 두기에만 정신이 팔렸을 뿐, 김삿갓의 요구에는 못 들은 척하는 데서 오는 분노 탓에 지은 시이다. 땀과 땟국에 절어 꾀죄죄하고 냄새가 고약한 이 사람을 그 누가 반겨서 재워 주겠는가하는 자기연민의 욕설일 수도 있다. 문사 자체가 욕으로 뒤덮여 있는 형국이다. 시화(詩話)판이나 사랑방에서 욕이 시가 된다. 시가 정신작용의 응축된 배설물이라면 응당 김삿갓의 육담시는 구비현상에서 압권으로 작용하였다. 육담적 상상력은 파격성과 미학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야기판에서 김삿갓 덮어쓰기를 활용한 이야기꾼의 너스레를 종종 발견한다. 김삿갓 탈을 이용하기에 욕이 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김삿갓의 음성적인 유통도 이런 측면이 힘이 되었다.
거미에게 그물짜기 귀뚜라미에게 베짜기 배워 網學蜘蛛織學 작은 것은 바늘구멍 큰 것은 돗바늘 구멍 같네 小如針孔大如 잠시 잠깐 첫 줄기 머리털을 다 묶고 나면 須臾捲盡千莖髮 갓이나 만들어 모두 따라오겠네. 烏帽接 摠附庸. - <망건(網巾)> -
김삿갓 시의 소재 확대와 아울러 그 미의식의 변모다. 망건, 담뱃대, 콩, 닭, 이, 벼룩, 장기, 요강과 같이 정통한시의 영역에서는 대상 밖이었던 일상생활의 물건들과 일상어가 희화적 수법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사설시조가 전대의 평시조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던 일상적 생활의 도구를 대폭 시조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과 같다. 판소리와 민속극 대본에서 질펀한 일상어가 살아 나오는 것과 같다. 비속한 소재의 선택은 그 미의식도 필연적으로 변화시킨다. 김삿갓의 한시에는 전대 사대부들이 즐겨 읊었던 자연과의 합일이나, 지은이와 읽는 이의 정신을 청정하게 하는 가면적인 상승감이 없다. 그 대신 누추하고 고달픈 인생살이의 어두움이 자리잡고 있지만 구비적 친근함이 있다. 시 속에서 놀이적 자아가 이를 증명한다. 김삿갓의 한시는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구비문학의 현장에도 살아 있다. 명문 집안 출신이었음에도 죄인의 후손으로 가출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삶과 더불어 수많은 일화도 전한다. 이는 그의 작품 속에 깔려 있는 웃음 속의 비판, 비꼬기 속의 웃음 등이 대중의 정서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의 웃음 성향에는 구비적 공동작의 면모가 있다. 시골 서당의 어른, 아이들이 그에 얽힌 일화를 많이 이야기하고 그의 시를 외우며 모범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구전 자료에서 그의 민중적 인기와 아울러 그의 시를 즐긴 계층의 광포성을 알 수 있다. 김삿갓은 조선후기 지식인 계층의 문화 확대과정에서 출현한 자연문인의 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김삿갓은 다중의 시적 화자처럼 조선후기 몰락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 생각해야 한다. 전통적 한시 형식의 파괴와 새로운 시도는 사대부 계층의 문화적 존재 기반을 반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상이 문학지도를 바꾼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 지식인의 분화는 그 상층과 하층에서 폭넓게 일어난다. 홍대용,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노론 벌열층과 맥이 닿아 있던 사대부 귀족 출신이다. 정약용, 이옥 등의 민요풍 한시도 이런 성향과 맞물려 있다. 그럼에도 그들조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벼슬길에서 소외되어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새로운 지식을 통해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상층 부분에서 일어났던 상층 지배계급의 재편을 의미한다. 중앙정계와 어떤 줄도 닿아 잇지 못한 채 몰락의 길을 걷던 일군의 지식인들은 농사지을 토지도 갖지 못하여 자신의 지식을 이용, 유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들은 잠깐씩 머무를 때는 과객이며, 오래 머무를 때는 훈장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지배계급 상층에서 분화되어 나온 계층이다. 농민적 지식인, 시골 훈장, 자유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어 현실 개혁을 기도하기도 한다. 이들의 사회적 발언은 비판적이되 시 속에서는 익명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김삿갓의 시에는 퍼스나인 탈이 이중적(二重的)이다. 표면적으로는 말놀이의 흥미성을 드러내지만 이면적으로는 당대인의 현실적 목소리의 풍자성을 담았다. 이는 김삿갓 시에만 국한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후기 봉건적인 체제의 해체 조짐에서 부분적인 근대의 발아가 아닐까 한다. 일찍이 이응수가 그를 풍자시인, 파격시인이라고 부르면서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라는 유행가로 대중성을 얻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한시의 정형성을 무너뜨리고 근대이행기의 언문풍월을 유행시킨 점도 다른 구비문학처럼 구비적 한시의 놀이성이 한몫을 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논리가 아니다. 한자와 한글의 놀이적 대비를 통해 언어의 개혁 조짐을 보여주었다. 곧 문어체가 구어체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비유적 공격방식의 자유로운 혁신을 꾀하였다. 이는 김삿갓 시의 값진 성과일 뿐더러 이런 시각에서 그의 문학사상과 구비문학적 양상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육담 소재의 시도 놀이학(學)의 원리에서 가치 부여해야 한다.
Ⅳ. 김삿갓 시의 구비적 계승화 양상
김삿갓 시는 새롭게 읽히고 계속 즐기고 있다. 이는 앞의 논의 연장선상에서 말하면 구비적 놀이 성향과 관련이 깊다. 그의 시 속에서 수수께끼적 호기심, 원초적 장난기, 패러디의 익명성, 탈의 역동성 등이 살아 있다. 이러한 전승적인 매력은 시화 현장에서 지적 욕구와 대리 만족감 등 심리적 충동 또는 문학적 감동과도 맞물려 있다.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天長去無執 꽃은 시들어 오지 않네. 花老蝶不來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菊樹寒沙發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枝影年從池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江亭貧士過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大醉伏松下 달이 기우니 산그림자 바뀌고 月移山影改 시장을 통해 이익을 챙겨 오네. 通市求利來. - <파격시(破格詩)> -
이 시는 겉으로 보면 친자연적 자아가 삼라만상을 누비다가 술에 취해 있는 듯이 보이나, 이면에는 끝 행에서 암시하듯이 돈이 없어 세상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가난'의 참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제목대로 파격성의 새로움이다. 실제로 원시의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으면 이런 이치가 저절로 드러난다. 교묘한 시대상의 '검은 은유'를 퍼즐처럼 찾아가도록 한다. 이 점을 기왕의 독자들은 김삿갓의 시에 대한 매력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천장에 거미집 / 화로에 겻불 내 / 국수 한 사발 / 지렁 반 종지 / 강정 빈 사과 / 대추 복숭아 / 월리 사냥개 / 통시 구린내"가 그것이다. 김삿갓 시는 '놀이'의 언어화를 보여주고 있다. 놀이는 시의 또 다른 본질이다. 놀이의 묘미는 언어유희를 통해 시의 재미와 매력, 친근함을 보태주고 있다. 김삿갓 시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놀이의 절정이다. 백일장이나 시회(詩會)도 놀이의 언어축제를 말한다. 김삿갓 시는 한시와 한글시의 중간쯤에 존재하지만, 더 이상 한시의 전통은 오늘날 일상시로 전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김삿갓 시의 문학행사는 놀이 측면의 축제성을 부각시켜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한다. 김삿갓 시의 고전성은 놀이의 원리에 바탕을 둔 유희성과 파격성에서 찾아야 한다. 유희성은 시대의 규범에 관계없이 개방적인 재미와 흥미다. 그의 시는 재미와 통쾌함이 있다는 점 때문에 누구나 가까이 한다. 파격성은 사회적 기능에서 중요시하여 다루어야 하는 측면이다. 그의 시는 기발한 착상을 통해 당대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김삿갓 시의 정체성(正體性)은 이러한 성격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문제를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 필자는 김삿갓 시의 현대화 작업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유산 중 김삿갓 유적은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김삿갓의 유형문화재인 묘소, 주거터 등은 주제테마 관광의 명소가 되었고, 그의 시와 설화 등은 무형문화재로 문학의 고향처럼 인식되었다. 김삿갓 축제는 이러한 유·무형의 유산을 바탕으로 지역의 고부가 가치로 떠오르는 행사다. 김삿갓의 문학유산은 지역의 문화마인드로 시를 통한 정보화 시대에 적절한 취향문화(趣向文化)로 부합하고 있다. 여기에 김삿갓 인프라의 여건을 새로운 지역문화와 지역의 군상(郡像)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런 인식은 다름 아닌 김삿갓 시를 축제의 장으로 이행 곧 현대적 확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김삿갓 시란 전통사회에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며 사랑을 받았고 민족문화에서 고유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새로운 문화의 생성과 창조의 근원으로 용처를 찾아 정신문화의 지식산업으로 연계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김삿갓의 활용은 지역문화의 창조적 작업에 있어서 독자성과 대표성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김삿갓은 전국 어디에서든 부활할 수 있으나 양주나 영월, 금강산 길목에서 부활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김삿갓을 통한 지역문화의 활성화 모색은 인문학적 상상력의 화두로 이행함으로써 보다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과 관광객 등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공감성을 획득할 수 있다. 김삿갓 인프라는 우선 박물관 또 테마공간 확보에 있다. 김삿갓박물관은 문학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고 그것에는 떠도는 자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볼거리와 느낄거리가 있어야 한다. 전시관에는 김삿갓 시집들을 수집하여 보여주어야 하고, 김삿갓 관련 자료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김삿갓연구소와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체험관에는 김삿갓을 화두로 창작한 노래, 춤, 그림, 시화 등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영상시대에 걸맞게 사이버 공간의 김삿갓을 창출해야 한다. 김삿갓 인프라의 두 번째로 거리조성과 생가복원, 주변의 친자연적 생태문화촌을 건립해야 한다. 노루목일대는 한국 화전문화의 상징처 만큼이나 오지였고 십승지 또는 가거지(可居地)였다. 가난의 자연환경과 시대적 한계가 김삿갓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 점도 살리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전에 집집마다 김삿갓 시집이나 소설책은 있었다. 심지어 시장에서 책보부상의 목록에도 김삿갓은 빠지지 않았다. 지금도 《소설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등이 팔린다. 김삿갓 시를 넣은 시 그림, 각종 시 인형, 시가 새겨진 의류 등은 현대감각에 맞게 재창되어야 한다. 김삿갓 관련 행사는 웃음과 신명이 있어야 한다. 문학은 즐거움에 있다. 시는 읽는 즐거움에 보태어 깨달음이 있으면 더욱 좋다. 김삿갓 시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놀이의 즐거움이 있고 안으로 숨겨진 놀이의 공격성이 있다. 김삿갓 시의 정체성을 살려야 여느 문학축제와 문학박물관과 차별화할 수 있다. 김삿갓 시의 계승은 영월다운 또는 삿갓 고유의 전승인자를 살리는 이벤트로 기획되고 실천하였을 때 생명력을 얻는다. 이러한 일련의 문화행사는 지역민을 중심으로 주도되어야 한다. 문학인과 지역민은 우선 김삿갓을 이해하고 그의 시를 즐겨야 한다. 정작 이벤트는 있고 이를 잘 소개하는 주체가 없다면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 지역문화의 활성화는 특정주제를 차별화하는 데 있다. 김삿갓을 통한 레저관광 산업화를 하고, 인물 선양화를 하려면 지역민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김삿갓은 인문학적 정서로 인물화의 현대화에 가능성이 높다. 장성이나 강릉의 '홍길동' 캐릭터 작업이 암시하는 바가 크다. 김삿갓의 구비문학적 인식은 문학인과 지역민에게 현대적 구비문학의 계승 차원에서 김삿갓 시를 즐기고 그의 시를 통해 삶의 국면을 새롭게 느껴야 한다. 김삿갓 시 낭송회와 시화전, 문자나 소재로 한 백일장 개최 등을 통해 문학의 생활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개방적인 한시와 한글시 백일장도 김삿갓 축제에 어울리는 것이다.
작년에는 구월달에 구월산을 넘었는데 昨年九月過九月 금년에는 구월달에 구월산을 넘는구나 今年九月過九月 해마다 구월달에 구월산을 넘으니 年年九月過九月 구월산 경치는 언제나 구월이로다. 九月山光長九月. - <구월산> -
이 작품은 누구나 좋아하는 김삿갓 시다. <이 씹할놈아>처럼 많은 독자가 애송해 왔다. 한시가 골동품화된 시대에 여전히 그의 시는 구비시가(口碑詩歌)처럼 문학의 언저리에 살아 있다. 민요 아리랑처럼 구비적 위력을 가지고 있다. 영월 땅 노루목에는 그의 시가 금강시에서 보이듯 "소나무 바위 서리서리, 잣나무 바위 서리서리, 물구비 돌아돌아, 산자락 구비구비, 승경마다 빼어나고 경개마다 기이터라(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처럼 그의 시혼이 배어 있다. 이 곳에 왔다가 가는 사람들 가슴마다 자유로운 공명과 친자연적 공감이 새겨질 수 있도록 그의 시를 다시 살려놓아야 한다. 김삿갓은 다양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다중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점에서 '문학영웅' 또는 '시영웅'이 되었다. 그의 시에 대한 진위 논란이 있었지만 그 자체가 시적이고 극적이라는 점에서 문학다운 면모를 보였다. 조선후기에 살았던 김삿갓이지만 오늘날 문학 감각에서 접근해도 정서의 자유로움과 상상의 즐거움은 되살아난다. 이런 정도의 시각에서도 김삿갓과의 만남은 '문학여행'의 대명사가 될 만하다. 따라서 문학이 정보화 시대에 문화공학과 만나 문학의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현장은 다름 아닌 김삿갓의 문학유산이 있는 곳이다. 김삿갓 시는 살아 있다. 김삿갓의 육담시는 난장의 예술화와 축제화에 좋은 화두로 작용한 것이다.
Ⅴ. 맺음말 : 구비적 상상력과 시의 파격성
김삿갓은 고전문학 인물 중에서 다시 살아서 문학의 문화화에 길을 열어준 시인이다. 그의 시의 독특함은 끊임없이 '무엇'을 느끼게 한다. 그의 시는 당대인의 구체적인 삶과 이를 이끌었던 군상(群像)의 고뇌를 형상화하였지만, 시의 공감대는 당대를 초월하여 인간 누구에게나 재미있게 느끼고 즐기는 데까지 확장되었다고 보았다. 필자는 김삿갓을 방랑시인보다 자유시인 또는 구비시인으로 인식해야 된다는 것이다. 김삿갓 시 속의 시적 화자는 사회적 탈로서 시대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방식을 택한 김삿갓다운 자아다. 이 다중의 자아로서 김삿갓은 조선후기 근대적 조짐의 선상에서 시로서 거꾸로 된 시대의 장벽을 베었다고 볼 수 있다. 김삿갓의 대중적 현상은 파격적 희작시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그 기반에는 구비적 공유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지속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는 희작시와 언문풍월로 당대인의 공격 욕구를 신명나게 해주었고 문학사에서 그의 다중적 자취가 근대적 일깨움에까지 이르렀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는 조선후기 민중계층의 시대적 한을 시의 말놀이 차원에서 풍자와 신명의 '굿놀이'로 승화시키면서 얼굴을 삿갓으로 가린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의 육담 취향의 구비시는 겉으로 드러난 욕설의 소리놀이와 감추어진 풍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시의 구비성에 대한 매력은 욕의 품격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육담과 음담패설의 시화는 천재적 상상력을 통해 시의 파격성과 예술성으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서 김삿갓 시를 다시 짚어야 한다. 김삿갓 시는 19세기 봉건사회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에 대한 인본적인 구비전승물이다. 그는 천재적 기질을 발휘하였는데 시의 놀이성을 최대한 살려 정통 한시와 언문풍월이 교차하던 시대에 언어의 변혁을 꿈꾸었다. 거기에는 자연친화적인 너무나 무소유적인 풍자관이 살아 숨쉬고 있다. 동시대인에게 잠시 빌렸다가 떠나는 지상의 물욕관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시의 칼날로 보여주었다. 그의 시맛이 특정 국면에 제한되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익명의 다중 화자가 요구되는 시대에 또 다른 언어의 삿갓을 쓰고 정보화시대의 문학에 걸맞게 새롭게 태어날 삿갓시의 문학적 화두는 고전적 가치 이상으로 '지금 여기'에 문학상품으로 미래의 독자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김삿갓 시학의 정립을 위해 '김삿갓 관련 자료' 목록을 제시한다. 김삿갓학(學)의 모색을 기대한다.
註=정을 통한 처녀의 풍만함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던져 본 농담에
처녀가 앙칼지게 대꾸한 재미있는 두 사람의 사랑의 詩이다.
金笠 毛深內闊 ~모심내활
(삿갓)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必過他人 ~필과타인
반드시 딴 사람이 먼저 지나갔으리.
處女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처녀)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後園黃栗不蜂坼 ~후원황률불봉탁
뒷마당의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잘도 벌어지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