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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의 노래 '18번'은 무엇인가
이 유 식
'18번'은 국어사전에도 있는 단어로서 그 뜻은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일본의 전통극 가부키에 있다.1832년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7대 이치가와 단주로(市川團十郞)가 수백 종류의 가부키의 레퍼토리 중에서 자신이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레퍼토리 18종을 선정한데서 비롯된 말이다.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그만 애창곡이란 대용어가 되었다.
대개 여러 사람들이 모여 노는 흥겨운 자리라면 끝판엔 결국 노래를 부르기 마련이다., 이때 지명을 받거나 아니면 자기 차례가 되면 누구나 이 '18번'을 한 곡쯤은 뽑기 마련이다.
먼저 우리 문인들의 '18번'은 뒤에 곧 소개해 보기로 하고, 양념 삼아 누구나 알만한 사회 저명 인사들의 그것부터 소개해 본다. 흥미도 있으리라 본다.전,현직 대통령부터 알아본다.박정희의 그것은 '황성 옛터'이고, 김영삼은 음치이긴 하지만 '선구자' '메기의 추억'이며, 김대중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전두환은 명국환의 '방랑 시인 김삿갓'이고, 현직 박근혜는 보컬 솔리드의 90년대의 노래 '천생연분'과 거북이의 '빙고'이다. '천생연분'이 연분이 있다면 안 만날려 해도 결국은 만날 수 밖에 없다는 운명성을 담고 있다면,'빙고'는 자기 실현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고 조병옥 박사의 그것은 '메기의 추억'이었으며,왕년의 정객 고흥문은 정몽주의 '단심가'란 시조창과 민요 '양산도 타령'이었으며,역시 왕년의 정객 정해영의 그것은 충무공의 '한산섬 달 밝은 밤'이란 시조창이었다. 문인 정객이었던 한솔 이효상은 오기택의 '고향무정'과 동요 '푸를 하늘 은하수'로 시작되는 '반달'을 즐겨 불렀다. 재벌 실업가 정주영은 송대관의 '해 뜰 날'이 18번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 문인들의 경우를 작고 문인 부터 알아본다. 조지훈의 그것은 ‘기차는 떠난다’이었고, 미당 서정주는 김세레나의 ‘쑥대머리’였으며, 최정희 소설가는 나이도 나이였던만큼 일본 노래 ‘가레스스키’이고,조병화는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이다 박재삼 시인은 고운봉의 '선창’과 김영춘의 ‘홍도야 울지 마라’이다.작가 홍성유가 <장군의 아들>을 집필하던 때 김두환과 기생들이 명월관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장면에 ‘홍도야 울지 마라’를 꼭 넣어야 하는데 정확한 가사가 생각 나지 않아 생각해 보다 보니 그 노래를 18번으로 불렀던 박재삼이 떠올라 한밤중이지만 병중에 자고 있는 그에게 다짜고짜로 전화를 걸어 그 가사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갑작스럽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환자 입에서 더듬더듬 부르는 노랫 소리가 흘러나와 행여 정신 이상이 온 것이 아닌가 싶어 온 가족이 놀라 잠을 깼다는 해프닝이 전해지고도 있다. 그리고 ‘선창’을 부르곤 했던 그의 모습도 떠오른다. 64~5년도 였다.내가 월간 ‘세대’사에 근무할 때인데 마침 그나 내가 금호동 로타리에서 아니 먼 곳에 살았기에 퇴근 귀가 시간이면 그 로타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도 나도 젊은 시절이고 또 서로 출신 고향이 서부 경남이라 동향의 친근감에서 온 객기로 술집 행차를 하곤 했다. 술 기운이 거나하면 평소의 버릇대로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아 약간은 들뜬 고음으로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은 백일홍~’으로 시작하는 그 ‘선창’을 부르곤 했다. 그게 어언 50여년 전 일이다. 평론가 최일수는 ‘목포의 눈물’이다.49세의 나이로 일찍 간 이른바 민중 시인이라 불려졌던 김남주는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불렀다 한다.수배자 또는 보호 감호 대상자로 언제나 쫓겨 다니다시피 숨어 살아야 했던 그는 자기 신세의 한을 이 노래에 가탁하여 풀어내곤 했다. 지리산 계곡으로 베낭을 메고 산행을 갔다가 뱀사골 계곡에서 발을 헛디뎌 44세에 비명 횡사한 여성시인 고정희는 양희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좋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뿌리침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이 노래에 실어 그 한을 풀었다.
이제는 살아 있는 문인들의 순서다. 소설가 이호철은 고향이 이북이기에 월북 시인 정지용이 작사한 ‘고향’을 즐겨 부르곤 하는데, 그 이유는 고향의 모습을 잠시나마 떠올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권용태는 '울고 넘는 박달재'요, 평론가 이명재는 '토요일은 밤이 좋아'가 아니면 '연상의 여인'이다. 이 두 사람은 나와 같이 강남문인협회의 역대 회장이요 주요 임원이라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른 회원들과도 같이 어울려 노래방 출입을 더러 하는 데서 자주 들었던 18번이다.평론가 조병무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다. 소설가 현기영은 '한라산', 정소성은 '고향의 노래', 황석영은 '부용산', 조정래는 '눈물젖은 두만강'.박범신은 '봄날은 간다', 추리 소설가 김성종은 '눈물의 웨딩 드레스', 소설가요 방송 작가인 부산 출신의 양인자는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로 시작되는 '얼굴'이 각각 18번이다. 시인 마광수는 박인희의 노래 '세월이 가면'이고 , 평론가 홍문표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며, 나 이유식은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으로 시작되는 장세정의 '고향초' 아니면 분위기에 따라 태진아의 '옥경이'이나 정원의 '허무한 마음'이다.특히 내가 '고향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나름으로 내 목소리에 맞는 것 같고 또 남쪽 서부 경남을 떠나 와 어느 새 서울 객지 생활에 오랜 세월이 흘렀다 싶어 순간 유소년 시절의 고향 생각이 나면 불러보곤 하는 노래이다.수필가 고동주는 윤수일의 '찻잔의 이별'이고, 정목일은 처음 안정애가 부르고 뒤에 조용필이 리바이벌 시킨 ‘대전 블루스’이다.
보다시피 대체로 우리 문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성적이고 정감적 이라 ‘감성형’ 노래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자기의 출생지나 성장지와 연관 있는 내용 가령 사람에 따라 ‘망향형’이나 고향 ‘회억형’도 선호할 수 있다. 부산 출신이라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울산 출신이라면 김상희의 ‘울산 큰 애기’를, 충청도 출신이라면 허민의 ‘백마강’이나 아니면 ‘백마강 달밤’을 각각 좋아 할 개연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래서 목포 출신 최일수는 ‘목포의 눈물’을, 삼천포 출신 박재삼은 그곳의 부둣가가 연상되는 ‘선창’을, 제주도 출신 현기영은 ‘한라산’이 18번인 것이다.그 다음 혈육의 정이 그리운 ‘인륜형’라면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이나 아니면 ‘칠갑산’을 즐겨 부를 수도 있다.그리고 자기 인생의 과거나 현재를 투영해 볼 수 있는 ‘자기 관조형’이나 ‘자기 성취형’이라면, 마치 정주영의 18번 '해뜰 날’이나 '빙글 빙글 도는 의자'로 시작되는 김용만의 '회전 의자' 그리고 김상국의 '쥐 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등속의 노래도 18번으로 삼을 수도 있다.마지막으로 지난 시절 운동권 출신의 ‘신념형’이라면 ‘아침 이슬’, '님을 위한 행진곡’, ‘타는 목마름으로’, ‘그날이 오면’, '푸르른 솔아’ 등을 18번으로 할 확률은 거의 100%다.
특히 유행가란 자기 삶이나 처지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요, 맺혀 있는 한이나 회포를 풀어내 볼 수 있는 필터요 용광로이며,자기 확신을 다시 가다듬어 볼 수 있는 촉매제요 기폭제이기도 해 사람에 따라 자기에게 꼭 맞구나 싶은 노래가 있기 마련이라 그것이 곧 18번이 되고 있다.
나는 엉뚱하게도 왜 박정희 대통령의 18번이 '황성 옛터'인지 또 김영삼 대통령의 그것이 왜 '선구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두 노래 다 두 분이 대통령에 오르기 이전부터 일찍 18번이 된 노래다. 박정희는 사나이 대장부로서 큰 웅지를 품었으나 어느 기간은 모든 것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보니 속으로는 참 답답도 했으리라 본다.그래서 약간은 비감에 젖으며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 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에 실어 맺혀 있는 한이나 회포를 풀었으리라 본다. 김영삼도 역시 웅지를 품었으니 박정희와는 좀 달리 '선구자'란 노래를 통해 늘 미래의 자기 모습이나 정체성을 확인해 보았다 해석할 수 있다.
문협 이사장 선거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
이 유 식
문단 권력은 아편이다. 문단의 단체장도 이런 핵심 권력의 하나다.그래서 단체장의 선거는 치열하다.오랜 문학적 동지도 갈라서 맞붙기도 하고,선후배간은 물론 신구 세대간에도 또 같은 세대의 동료간에도 접전이 벌어진다. 이런 선거전의 양상을 우리 문단의 대표적 단체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를 통해 알아본다.
오랜 문학적 동지가 갈라서 맞붙은 경우라면 73년도 1월에 있었던 제 11대 이사장 선거다. 40년 가까이 사귀어온 동지 김동리와 조연현의 대결이다.김동리는 월탄 박종화에 이어 70년도부터 이사장을 맡아 왔으니 재출마이고, 조연현은 첫 출마였다.결과는 김동리의 패배이고 조연현의 승리였다.이 때는 직선제였는데 회원 수 총 971명 중 630명이 참석해 조연현 334표, 김동리 284표로 조연현이 61표가 앞섰다.그 당시 두 사람의 득표 가능 조건을 보면 정말 자웅을 구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김동리는 서라벌 예대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문단에 내보냈고, 조연현 역시 동국대 교수로서 마찬가지였다.단 한 가지 김동리의 취약점은 조연현이 <현대문학>이란 막강한 발표 지면을 갖고 있는데 반해 김동리에겐 그런 게 없었다. 언제나 선거에선 문학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 후원군이나 응원군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래서 김동리 측은 패배의 주 원인이 문학지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73년 11월에 <한국문학>을 창간하게 된 자초지종이 있다.그러나 경영난으로 76년에 시인 이근배에게 또 그 다음은 소설가 조정래에게 넘어가는 우여곡절이 있다.
선후배간의 대결은 70년도제 9대 선거였는데 임기 1년의 간선제였다. 그 동안 오랜 기간 이사장을 맡아 왔던 박종화를 누르고 김동리가 당선되었다.
같은 세대의 친구지간의 대결은 71년도 제10대 2년 임기의 선거였다. 간선제였는데 김동리가 서정주를 누루고 당선됐는데 개표 결과는 263 대 182표였다.
신구 세대간의 대결이라면 75년도 1월에 있었던 제 12대 선거였다. 조연현과 이호철의 대결이었다. 바로 앞 선거에서 분패한 김동리가 예상과는 달리 불출마로 가닥이 잡히자 40대의 이호철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등에 엎고 출마했다.같은 40대의 고은이 선거 사무장을 맡고 30대의 이문구,박태순, 황석영이 실무를, 20대의 신인 송기원과 이시영이 행동대원으로 나섰다. 이 선거야말로 기성세대와 신 세대의 대결이요 또 프로와 아마의 대결이었다. 총 회원 1,180명중 800여명이 참석해 이 후보가 266표, 조 후보가 528표를 얻어 재선되었다. 의욕이나 젊음의 혈기만으로 기존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정말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라는 것을 절감했으리라 본다. 득표 결과가 반쪽 게임이니 말이다.
또 신구 세대 대결이 있다. 77년도 1월의 13대 선거였다.개정된 정관에 따른 간접 선거로 서정주와 문덕수의 대결이었는데 모두 첫 출마였다. 회원 1,300여명 중에서 뽑힌 대의원제 간접 투표이었는데 서정주가 92표, 문덕수가 64표였다.역시 기반이 약한 신세대의 한계가 입증된 결과였다.
또 두 건의 선후배간의 대결은 81년도 제 15대 선거 때의 조연현 대 이원섭 그리고 83년도 16대 때의 김동리 대 이원섭의 대결이었다. 먼저 조연현과 이원섭은 매우 가까운 사이다. 지난 날 조연현이 주간을 맡고 있을 때 <문예>를 통해 이원섭은 시로 데뷔했기에 어느 의미에서는 조연현이 그의 문단 활동의 멘토와 다름없다.그리고 바로 앞 14대 선거에서 조연현이 당선되고 부회장 다섯 명 중 정관 규정에 따라 세 사람은 선거에 의해 뽑히고 두 사람은 당선된 이사장의 구두 천거에 의해 총회의 인준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이원섭은 당선자 조연현의 배려로 공짜와 다름없이 부이사장 자리를 하나 얻었다. 문단에서 아무런 감투도 쓴 적이 없는 그로서는 첫 감투였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끈끈한 관계가 있음에도 이원섭은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조연현은 심한 배신감을 느겼음은 당연하다.결과는 예상 했던 데로 참패였다.그리고 또 다음 16대 선거에 재도전했다. 상대는 당시 예술원 회장으로 있던 김동리였다. 이원섭은 81년도에 문협 주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새 단체 한국문학협회를 등에 입고 출마했다. 이사장은 설창수였고, 그는 5명의 부이사장 중의 한 사람이었다. 대의원 간선제로 218명 대의원 중 214명이 참가 하여 투표한 결과 125 대 85표로 그가 패했다.
95년도 제 20대 선거는 선후배간의 대결이었다. 조경희와 황명의 대결이었다. 직선제로 바뀌었는데 이 때 나도 부이사장에 출마해 보았다.황명이 당선 되었다. 역시 회원이 많은 시에서 당선되었는데 선거에선 장르 이기주의가 불을 보듯 나타나기 마련이라 아닌 게 아니라 세 부족인 수필 부문으로서는 중과부적이란 것이 그대로 나타났다.참고로 지금의 문협 부이사장 선거 방식은 러닝 메이트 제이지만, 그 때는 개별 단독 출마의 직접 선거였다.그 해 따라 부이사장에 12명이 출마하여 가장 심한 경쟁을 벌였는데, 결과는 시에서 3명, 수필에서 1명, 평론에서 내가 당선 되었다. 역시 회원이 많은 시 부문의 막강한 힘이 그대로 입증 되었고, 그나마 표로 보면 내가 가장 적은 군소 장르 평론에서 양념으로 끼이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비슷한 나이의 같은 세대 동료간의 대결은 98년도의 제 21대 선거다. 성춘복 ,이근배,이유식이 맞붙었는데 결과는 역시 시 쪽이고, 그나마 내가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표 없는 평론에서 2등은 했구나 싶어 서러운 자위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현재를 기준 해 보면 문협 이사장은 25대 째다. 그리고 연임이나 또 중임을 거치다 보니 새로운 얼굴은 11명 째다. 장르로 보면 시가 6명이고, 소설이 4명, 평론이 1명이다.<현대문학>이란 막강한 또 다른 문단 권력을 쥐고 있었던 평론의 조연현을 제외하면 역시 시와 소설에서 독차지 한 격이다. 회원 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는 것은 불을 보는 듯 하다.현 정종명 이사장은 소설 쪽인데 그 동안 조병화(3년)를 시작해서 황명(6년),성춘복(3년),신세훈(6년),김년균(4년)에 이어지면서 장장 22년을 시에서 맡아왔으니 이젠 장르를 한번 바꾸어 보자는 변화의 심리가 크게 주효 했다 볼 수 있다. 미상불 이 선거 체제가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시쪽이 아니라면 이사장 자리는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임은 명약관화 하다.
그리고 그 동안 이사장 임기도 1년에서 2년으로, 2년에서 3년으로, 또 3년에서 4년 단임제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거 방식도 추대제, 대의원 간선제, 직선제, 다시 대의원 간선제, 다시 직선제, 또 직선제 러닝 메이트제 등으로 그때 그때 변화가 있었다. 어떤 제도의 도입이건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라 황금률 같은 선거 방식은 없지 않나 싶다.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이 방식도 저 방식도 도입해 보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사장 자리란 문단 권력의 아편임에는 틀림 없다.그 자리 앞에선 오랜 친구도, 땔래야 땔 수 없는 끈끈한 선후배간의 관계도, 신구 세대간 세대 차이의 예의도 없다.어차피 인간 사회는 경쟁 이구나를 다시 한번 절감해 본다.원천적으로 우리 인간은 난자를 두고 3억 마리 이상 정자의 경쟁에서 이겨 태어났으니,경쟁은 어쩌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배운 태생적 삶의 생리요 또 산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경쟁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첫댓글 이런 맛깔스런 글로 책을 내면 동그라미는 완전히 보장되겼습니다.
김거사,고맙소.큰 동그라미가 생기면 한턱 쏘겠소 할레루야~~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계절문학 "80년 풍속사"를 여기서 또 만납니다 그려. 이 선연하고 감동적인 明徵의 실감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방금 지나간 듯한 꿈틀대는 발자국 소리, 한국문단의 거목 이유식 교수 만이 묘사할 수 있는 문단역사의 찬연한 기록물에 소생은
뿌리까지 흔들렸습니다. 감히 절찬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선배님.더욱 좋은 자료와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