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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 목 차 ] 1. 쓰시마 해전의
발발 일본을 서양제국을 몰아내는 큰 일꾼으로 세우심 * 겨울에 상제님께서 (육군장교)김병욱에게 물으시기를 “일본과 러시아가 국가의 허약함을 타서 서로 세력을 다투는데 조정에서는 당파가 나뉘어 혹은 일본과 친선하려 하며 혹은 러시아와 결탁하려 하니 너는 어떤 주의를 옳게 여기느냐?” 하시니 병욱이 대답하기를 “인종의 차별과 동서양의 구별이 있으니 일본과 친선하고 러시아를 멀리함이 옳겠습니다.” 하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말이 옳으니라. 이제 만일 서양사람의 세력을 물리치지 않으면 동양은 영원히 서양에 짓밟히게 되리라. 그러므로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이제 일본사람을 천지의 큰 일꾼으로 내세우리라.” 하시니라. [도전 5:27] * 자료출처: 아래의 글들은 '진호의 홈피' 글을 옮긴 것입니다. 물론 중간중간 새로운 사진과 상제님의 성구와 그외의 야사들을 참고로 삽입하였습니다. 내용이 워낙 좋고 자세하여 세운공사의 자료로서 매우 좋습니다. 특히 풍부한 사진과 다이나믹한 사건 전개는 당시대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줍니다. 동아시아의 서양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해 먼저 조선을 거의 잡아먹을 뻔한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일본을 내세우신 상제님의 고충과 애기판 세운공사에 대해 강의를 준비하시는 도생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정보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나시는 분들은 참고삼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쓰시마 해전(혹은 대한해협 해전)은 러일전쟁의 대세를 결정짓고 종전의 계기를 마련한 20세기 최초의 대해전이었더랍니다. 이 해전은 역사적으로는 강철제 전함 상호간 최초 실시된 대규모 함대 전투였으며, 함선과 함포. 어뢰-등 해상무기의 성능면에 있어서도 기술적인 혁신을 촉진시키는(드레드노트 급 전함의 건조..라던가..-.-) 전환점이 된 근대 해전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해전입니다. 또한 빛나는 해전의 화려한 전과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긴 합니다만, 근대 전쟁에서 최초로 무선 통신이 실전에 가담하는 최초의 전쟁이기도 하더랍니다....(호오....*.*) 어쨋던...쓰시마 해전에서 대승함으로써 일본은 아시아의 일개 국가에서, 당당히 서구 열강들과 겨룰 수 있는 국제적인 지위와 더불어 해군 강국으로써의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더랍니다......하엿튼-_-; 해전사의 중요성이랄까- 진주만 기습 이전, 해전사의 가장 큰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해상전투인데 비해서 상.당.히 일본군을 감정적으로 내켜하지 않아하시는 분들이 많더라..싶은 이유에서인지 의외로 쓰시마 해전에 대한 자료는 크게 보이지 않아서, 틈새시장을 공략한단-_-생각에 한번 다뤄본 소재들이니 관심있으신 분덜 읽어주시기 바랍-_-니다. 러일전쟁(1904)의 개전 일본은 1904년 2월8일, 제정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군항으로 사용하던 중국의 뤼순(요동반도의 여순)항에 정박하여 있던 러시아 함선들에 대해 기습적인 어뢰 공격을 감행함과 동시에 조선의 제물포(인천)에 정박하여 있던 러시아 순양함에 대해서도 포격을 가해 침몰시켜 버립니다...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러일전쟁은 시작합니다......그리하야......이 러일전쟁의 발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라면 제정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_-수 세기 동안이나 남하하는 과정에서 청일전쟁 승리 이후로 본격적인 대륙진출을 서두르고 있던 일본 제국과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더란가......합니다. 러일전쟁 개전과 일련의 해상전투들~ 1904년 2월 8일, 연합함대의 제정러시아 극동함대에 대한 기습 공격은 다음날인 2월 9일에도 계속되었지만. 실제 정식의 선전포고는 2월 10일에야 있었더랍니다. 개전 후 제정 러시아의 극동 함대는, 함대의 주력이 뤼순항에 봉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극동 함대의 주력부대는 별다른 해상활동을 할 수 없었으나, 일단 함대의 피해는 아직까지는 경미했습니다. 일본 해군은 여순항 깊숙이 숨은 러시아 함선을 궤멸시키고 싶었지만 외해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3월 8일 여순항 근처에서 간접 포격으로 러시아 함선을 격침시킬 생각에서 2척의 장갑 순양함 카쓰가와 닛신을 출동시켰습니다. 동시에 해안에 바짝 접근할 수 있는 소형 구축함을 앞세워 러시아 함선의 정박위치는 물론 탄착점을 관측하여 2척의 순양함에 무선으로 보고하여 포격을 유도하도록 계획하였지요.
하지만 일찍이 러시아는 전투에서 무선통신을 일본보다 먼저 이용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제물포와 뤼순(여순)항의 러시아 함정을 수시로 공격하였지만. 그 때 까지만 하여도 일본 해군은 통신보안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지 무선 교신을 남발하였더랬죠... 일본 함정이 시야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러시아 기지에서는 시끄러울 정도로 잦은 일본해군의 교신을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은 마치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중세의 사무라이들을 연상시켰다-_-지요..... 어찌되었건...일본함정 사이에서 빈번히 오가는 무선 신호를 먼저 잡은 뤼순의 러시아 기지에서는, 러시아 군함에 대한 공격이 정박하였음을 직감하였고. 통신병은 자신이 없었지만 적함 사이의 무선통신이 방해받기를 바라면서 본능적으로 불꽃송신기의 키를 눌렀습니다. 다행히 전파 방해에 성공한 러시아 함대는 일단 포격을 모면하였고, 교신 불능상태에 빠진 일본 해군은 공격작전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일본해군은 어뢰정을 이용한 야간의 기습돌격 작전으로 뤼순항의 러시아 함선들에 대한 공격방법을 바꾸게 되고 이 작전으로 꽤나 톡톡한 전과를 올립니다~ 한편,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동해의 원산에 있던 일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하였습니다만. 원산에 접근하면서 러시아 함대에서는 점점 강력하여지는 일본 해군의 무선통신 신호를 들을 수 있었고. 이는 수많은 함정이 원산을 에워싸고 있다는 증거였지요, 실제로 러시아의 공격을 미리 알아챈 일본은 함정들을 불러모아 러시아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고, 작전이 드러난 것을 안 러시아 함대는 전투를 포기하고 기지로 되돌아갔습-_-니다. 이처럼 러시아 해군은 무선장비를 통신 이외의 목적(정보획득의 수단으로써..)에도 적극적으로 사용할 줄 알고 있었더랬지요. 그리하야..한밤중에 일본군 기습으로 시작된 러-일 전쟁은, 중국과 러시아의 조차지인 여순 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가 공격당하고 요동반도와 조선에 일본군이 상륙합니다. 뤼순은 러시아의 심장부로부터 9000Km나 떨어져 있어 러시아는 즉각 손을 쓸 수 없었고, 그 해 내내 뤼순의 러시아 군은 일본의 봉쇄를 뚫어보려 노력하였지만 결과는 비참하게 끝나고 맙니다. 러시아의 해군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전투함대가 출항하였으나 봉쇄를 밀어내지는 못하였고, 잦은 일본 해군과의 교전에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대부분의 전함을 잃고 맙니다... 블라디보스톡에 잔류했던 함대만은 동해와 태평양에 출몰하며 나름대로 일본 수송선에 대한 공격....이라던가...등에 대해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있기는 했습니다. 이 블라디보스톡 부대는 뤼순항에 고립된 러시아 극동함대의 구출을 위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중,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에 의해 울산 근해에서 포착되어 해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 울산 앞바다의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고 패퇴하게 됩니다-_-. 육상에서의 전황 개전에 임하는 일본의 기본적인 작전계획은 러시아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 극동군(육해군 포함)을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로 섬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제정 러시아의 총병력은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지만, 극동주둔군의 모두 13만 5000명에 불과하였고 그것마저도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더랬-_-답니다.. 또한 러시아의 극동 주둔군은 무려9000Km나 떨어진 곳에서 아직 완성되지도 못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하여 보급물자와 증원군을 보충해야 했는데 그러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총병력 85만 이상의 잘 훈련된(명치유신 이후의 국민개병제에 의한 상비군이었더랬죠)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15만명은 즉각 동원이 가능한 부대였습니다. 이후 2월 10일의 개전 이후 다음날인 11일 대본영을 설치한 일본은 13개 사단의 주력군을 기반으로 최우선 작전목표로 요동반도와 요양, 그리고 봉천을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육군의 제 1군은 조선국경을 넘어 안동, 봉성(鳳城)으로 진격하고 제 2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대련과 요양방면으로 진격하고 제 3군은 장가둔(張家屯)에 상륙하여 뤼순을 목표로 공략하는 것이었더랍니다. 제 1군의 공략목표인 요양은 9월4일에 점령하고, 제 2군의 대련은 5월27에 함락시켰으나 제 3군의 공략지인 뤼순은 러시아군의 조직적인 방어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처음에는 기습을 받아 다소 고전하였으나 역시 대 육군국으로써 대규모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차츰 전열을 가다듬은 러시아는 1904년 8월(메이지37년) 크로포킨이 거느리는 25만의 대군이 요양을 공략해 옵니다. 여기서 일본 육군의 만주파견군은 제1군, 2군, 4군의 합동작전으로 어렵게 승리를 하고, 노기 마레스케 장군 휘하의 제 3군이 뤼순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5년 1월까지 무려 8개월간의 소모전 끝에 어렵사리 뤼순을 함락시킵니다. 세차례에 걸친 유명한 돌격전 끝에 뤼순항을 내려다보는 203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일본군도 집중포격과 보병돌격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제 3군의 총병력 6만7000명의 장병 중 1만7000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어렵게 이 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고지의 점령으로 뤼순의 요새로써의 가치가 소멸된 이후 1905년 1월 1일 러시아 극동군 사령관인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토셀..(...헥헥..-_-)장군은 "위대하신 황제폐하, 용서하십시오" 란..서문의 전문을 날리고 일본군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일본은 예상을 뒤엎고 대 육군국인 제정 러시아의 육군을 상대로(좋은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지만..) 놀라운 분투를 보여줍니다. 이후 육상전투에서 러일전쟁의 승패의 분수령이 된 만주 봉천대회전에서도 오오야마 만주파견군 사령관 휘하의 일본군은 러시아군 30만과 일본육군 25만명이 보름간의 사투 끝에 7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긴 했으나, 러시아군의 주력을 섬멸시키는 대타격을 입히고 이후 전황은 급격히 일본군에 기울 게 됩니다만...
러시아 함대의 출동
드디어 출동하는 발틱함대.. 사진은 전함 보로디노의 리바우 항에서의 잘나가던-_- 한 때 제정 러시아 해군의 규모는 당시 일본함대의 3배의 규모에 달하였으나, 발트 함대와 극동 함대 그리고 그 유명한 흑해함대의 3군데로 분산배치되어 있었으며, 발트 함대는 이미 대타격을 입은 극동(태평양)함대보다 규모가 더 컸으나 지구의 반 바퀴나 더 돈 저~머얼리...-_-있었으며, 유명한 흑해 함대는 베를린 협정에 의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 할 수 없었더랍니다. 뤼순 요새가 아직 봉쇄중인 1904년 10월, 러시아의 수뇌부는 " 아직, 봉쇄당하고는 있지만 뤼순 요새가 건재-_-하니 이를 기반으로 새로 해상에서 새로운 타개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_-..." .하는 낙관적인 생각에서 제정 러시아 함대의 실질적인 주력부대인 발틱 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여 일본 연합 함대를 격파한 다음 태평양의 재해권을 확보한 후, 만주에 대한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한 후 육군의 주력을 투입하여 만주의 일본군을 쓸어 버린다는 매우 야심찬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하여...(계속)
조선을 잠시 일본에 넘겨주어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일본에게 잠시 천하통일의 기운과 일월대명(日月大明)의 기운을 붙여 주어 천하의 역사(役事)를 시키려 하노라.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어질 인(仁)’자라. 7 만일 어질 인자까지 붙여 주면 천하는 다 저희들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어질 인자는 너희들에게 붙여 주리니 오직 어질 인자를 잘 지키라.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요 저희들은 곧 너희들의 일꾼이니, 모든 일을 분명하게 잘 하여 주고 갈 때에는 품삯도 못 받고 빈손으로 돌 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하게 하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122장)
러시아의 극동침략으로 위태로운 중국과 한반도 1881년 제정 러시아에서는 해군건설 21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해군의 함정보유량은 급격히 상승하여 1880년대에는 세계 제3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류성능을 가진 전함을 주력으로 하여 함대결전에 의하여 대양의 재해권에 도전하려는 기류가 감지되는데. 그리하여 19세기 말에는 함대 배치의 중심이 된 것은 (이제는) 흑해도 발트해도 아닌, 새로운 러시아의 활동무대가 된 태평양 방면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우) 러시아인의 동방진출은 17세기 이래 진행되어왔는 바,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청조의 쇠퇴를 틈타서 흑룡강 연안에 식민을 추진하고, 1858년의 愛琿조약에 의하여 먼저 흑룡강 이북의 땅을 점령, 2년 후인 1860년에는 북경조약에 의하여 우수리강 동안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임을 청조에게 인정받게 되지요. 그리하여 이 해에 블라디보스톡을 건설하여 태평양에의 진출기지로 정비를 했던 것입니다. 제정 러시아가 광대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는 철도의 건설에 착수한 것은 1891년이었고, 1896년 러시아는 청국과 밀약을 체결하여 만주지방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는 동청철도의 건설권과, 요동반도의 항만에 러시아 함대가 동절기에 기항할 수 있도록 청국에게 압력을 가하였더랍니다. 게다가 190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 받았을 때,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협력하여 소위 말하는 삼국간섭을 들고 나왔고, 1898년에는 오히려 청국을 위협하여 요동반도 첨단부의 뤼순(여순), 대련지구의 조차와, 동청철도로부터 분기되는 뤼순, 대련에 이르는 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에 의하여 러시아는 오랜 숙원이던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부동항을 손에 넣게 되고, 동시에 만주지방의 경영과 한반도 진출을 준비하게 됩니다. 또한 , 흑룡강연안을 우회하는 시베리아철도는 1898년에, 동청철도는 1901년에 각각 분기되었고, 여순, 대련으로 가는 철도도 다음해인 1902년에 각각 개통하였고, 이에 의하여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은 직접 육로로 본국과 연결되게 되어 군대와 군수품의 신속한 극동에의 전개가 가능해졌지요... 이에 앞선 1900년의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하여 러시아는 건설 중인 철도와 여기서 일하는 러시아인 다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육군을 만주지방에 주둔시켜 중국에 대한 노골적인 직접 침략을 밀고 나갔습니다. 러시아는 여순을 군항, 대련을 상항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러시아 함대는 일찍이 1898년 3월에 여순에 입항하였습니다. 이후 극동에 위치하는 태평양 함대는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을 기지로 하여 5월부터 9월에 이르는 기간에는 그 주력이 조선수리시설이 뛰어난 블라디보스톡에 머물고, 동계에는 여순을 기지로 하는 것이 관례화 되게 됩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네바강에 정박해있는 순양함 오로라, 러일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몇 안되는 함선 그리고 신조함은 대부분이 태평양으로 배치되어 태평양함대는 러시아함대 중 최강의 함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 20세기 초의 러시아함대의 주력은 발트해, 흑해, 태평양의 3방면으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이들 함대는 단지 공간적으로만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후나 국제조약에 의하여 많은 장애를 부담하고 있었더랬지요. 극동에는 블라디보스톡과 뤼순 항 두 개의 해군기지가 있었고, 후자는 부동항으로서 러시아의 극동진출정책상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항 모두 아직은 대규모의 조선시설은 없고, 간단한 수리, 검사가 가능한 단계에 머물렀던 정도였지요. 서양으로 넘어가는 동양의 운명을 뒤집으심 또 하루는 구릿골 정자나무 아래에 누워 계시다 벌떡 일어나시어 두 손으로 허공을 잡아당기시더니 말씀하시기를 “빨리 당겨라. 동양이 서양으로 떠밀려 가느니라.” 하시며 “이렇게 당겨 놓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5:5] 발틱 함대의 출동과 도거 뱅크 (DOGGER BANK) 사건 함대 출동 뤼순 항에 포위되어 있던, 러시아 태평양(극동) 함대의 사령관 마카로프 제독과 더불어 제정 러시아의 가장 뛰어난 해군제독의 한 사람인,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헥헥..-_- 이름이 왜이리 긴-_-것인지) 해군 중장은 당시 막 취역한 4척의 신조전함과 4척의 순양함을 근간으로 하는 총규모 30척의 발틱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수바로프와 동급의 자매함, 전함 보로디노입니다 , 후방의 깃발은 러시아 해군기. 1904년 10월 14일 발틱 함대의 모항인 발트해의 리바우 항에서,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직접 환송해주는 가운데, 로제스트벤스키(Rodjestvensky)해군중장과 총병력 1천 2백 78명을 실은 발틱 함대의 극동 원정부대 제 1진은, 기함 수바로프(Suvarov)를 선두로 출항하였으며 뒤이어 11월 16일, 제 2진이 출항 그리고 해가 바뀐 1905년 2월16일까지 세 번의 부대가 출항하게 됩니다. 발틱함대의 편성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휘하의 발틱 함대는 3개의 전대와 보조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외에 특이할 만한 사항이라면 원거리 항해를 위한 장거리 통신 확보가 필수적이었던 러시아 함대는 독일의 슬라비-아르코사에서 설계 생산한 무선장비를 잘 갖추고있었고. 특수 보조함 “우랄”은 함대에서 가장 큰 군함이었고(전함을 제외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전투에 참전한 무선 통신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일본 해군의 무선 장비는 마르코니사의 설비를 불법 복제한 것으로 소문나 있었는데 이를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마르코니사도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어쨌든 러시아의 설비에는 따라가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죠. 도거 뱅크(DOGGER BANK) 사건 발틱 함대의 제 1진이 출항한지 4일뒤, 북해의 도거 뱅크 해역을 순항하던 발틱함대는 북해 특유의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 다수의 정체불병의 함선들을 발견합니다. 이들을 일본군의 수뢰정-_-이라고 판단한 발틱 함대는 곧이어 포격전을 개시하고 발틱함대의 맹 포격으로 한척을 격침시키고 수척을 대파시킵니다만, 이들은 영국의 어로선단임이 곧 밝혀-_-지고 침몰된 어선의 어부들이 혹한의 북해의 해상을 표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발틱 함대는 이들을 구조하지 않고 사라지는 비신사적인 사건이 발생-_-합니다. 더욱 사건을 악화시킨 것은 이 선단이 "영국 선단"이었다는 것과, 불과 20분동안에 무려 300발 이상-_-의 포탄을 소모하는 비정상적인 함포사격, 어부를 구조하지 않은 영국민의 인명피해등등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에 격분하여 제정 러시아에 대해 (당시로써) 거액인 6만5천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합니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강력히 저지하며 영-일동맹(1차 1902, 2차 1905년)을 맺었던 영국으로선 일본에 전쟁자금과 군수물자를 강력히 지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발틱함대는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이 통과를 거부함에 따라 아프리카 남단으로 돌아서가야 하는 대장정의 수고로움으로 도그뱅크 사건의 대가를 고스란히 돌려 받게 되었죠. 그리하여 일본 근해에 도달할 때까지 무려 3만 7000km 해상을 9개월에 걸쳐 항해하여 최악의 상태로서, 최상의 상태로 대기하던 일본의 연합함대와 동해상에서 해전을 벌인 결과 겨우 2척만이 온전했게 되었습니다.
어쨋든지 결과적으로 이 도거 뱅크 사건은 발틱 함대의 승무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미친개 함대"-_-라는 불명예스러운 명칭까지 얻게 하고, 유럽과 러시아 본국에서조차 함대의 파견을 중지하라는 않좋은 여론까지 일게 하는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나요. [러-일전쟁 -3] 발틱함대의 3가지 기로와 일본의 준비 조선이 서양에 넘어가면 다시 올 날 없느니라 김공선(金公先)이 아뢰기를 “운세(運勢)가 부득이하면 일본에 의탁하는 것이 좋은 방편일 듯하옵니다.” 하니라. 상제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지역별로 동양에 붙여 두면 다시 올 날이 있으리라.” 하시며 “만약 서양으로 가면 다시 올 날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道典 5:119] 상제님께서는 지기(地氣)가 강렬하여 침략열이 강한 일본을 내세워서 서양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동양을 구원하려 하셨다. 사실 상제님께서 일본을 내세운 것은 서양제국주의 세력을 동양에서 몰아내어 구원해 주고자 어쩔 수 없이 취했던 긴급한 조치였던 것이다. 즉 일본을 일꾼으로 내세운 것은 필요악으로 그들의 기운을 끌어다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제님은 누구보다도 일본민족의 악독함을 잘 알고 있었다. 즉 그들이 저지른 각종 만행을 본다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클릭: 일본을 내세우신 이유와 교훈 * 클릭: 간략히 알아보는 러-일 전쟁. 뤼순(여순항, 포트 아서)요새의 함락 어찌되었거나 다사다난한 초반의 실책을 딛고 1904년 11월4일, 발틱함대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경계인 지브롤터 해협에서 함대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은 전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7척을 포커삼(Falkersam) 해군소장에게 맡겨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뒤 아프리카 대륙의 남동쪽끝에 위치한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섬의 생 마리 항에서 자신의 부대와 합류하도록 지시합니다. 한편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주력본대는 해안선을 따라 아프리카대륙을 남하하여 12월19일에 생 마리 항에 도착 합니다. 생 마리 항에서 출항한 발틱함대는 마다가스카르 서쪽의 작은 섬인 노시베 섬으로 기항지를 옮기게 되는데 이곳에서 기항하는 동안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은 뤼순이 함락-_-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며, 설상가상으로 발틱 함대는 그 후 2개월이나 더 노시베 섬에 기항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 함대가 항해중 소요되는 석탄은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석탄선과의 전세 계약에 의하여 공급받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발틱함대가 노시베섬에 기항하고 있을 때 그 계약이 만료되었더랍니다, 러시아 해군성에서는 계약의 연장을 원했지만 독일측이 계약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그후 2개월이나 더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되었건..... 더위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 게다가 풍토병으로 인한 고통을 입고 있던 발틱함대의 장병들에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으며, 한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포커삼 소장이 지병인 심장병-_-으로 와병상태에 이르자 함대의 지휘권에 중대한 결함이 발생합니다.. 이후 발틱 함대가 노시베 항을 출항하여 인도양을 횡단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3월 16일 이었으며 그로부터 약 한달 뒤, 함대는 무사히 말라카 해협에 도착합니다(4월 8일). 5,300마일이라는 기나긴 인도양 횡단 항로를 따라 동남아시아 해역으로 들어서서는 말라카 해협의 싱가폴을 통과한 후 북상을 계속하여 4월 14일, 인도차이나 반도의 캄란 항에 기항하게 됩니다. 당시, 과연 발틱 함대가 무사히 아시아까지의 기나긴 항해를 해낼 수 있느냐는, 각국의 해군성 뿐만 아니라 일반에게도 큰 관심이었고 따라서 30척에 가까운 대함대를 무사히 동양으로 이끌어 온 로제스트빈스키 사령관의 항해술에 대해(도거뱅크 사건이후 개함대라고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언론에서는 평가가 좋았더랍니다. 한편 캄란 항에서 다시한번 석탄을 보급받은 발틱함대는 5월 9일, 제 3진과 합류하게 됨으로써 총 38척의 대함대의 위용을 갗추게 되었고 장병들의 사기도 다시 높아진 가운데 캄란항에서 60마일 북쪽에 위치한 반퐁 항으로 이동합니다. 3가지 기로 일단 목적지였던 포트아서(뤼순요새)가 함락된 이후, 동아시아에서 대 함대의 기항과 보급이 가능한 러시아 군항은 사실상 태평양전대의 원래 모항-_-이었던 블라디보스톡 이외에는 없었으며, 잇단 육상전투에서의 패배에서도 끝까지 버티-_-고 있는 제정 러시아의 육군과는 달리, 함대의 지휘관인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이미 현 상황에서의 함대결전으로 함대에 더 이상의 전력 손실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우선 함대를 안전하게 블라디보스톡으로 기항시키는쪽으로 목표를 설정합니다. 함대의 참모들과 상의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크게 3가지의 기로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 3가지는 첫 번째로 홋까이도(北海島)와 사할린 사이의 소오야 해협, 두 번째는 일본의 혼슈와 홋까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세 번째의 마지막 항로는 쓰시마 해협(Tsushima Strait - 우리나라에선 대한해협으로 부르지요) 이었더랍니다. 반퐁 항을 출항하기 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주요 참모진과 함장들 이하의 사관들을 기함 수바로프로 소집하였고, 여기에서 함대의 항로에 대하여 토론을 시작합니다. 함대의 항로에 대해서는 태평양쪽으로 항진하여 소오야 해협으로 들어서자는 의견과, 태평양 방면으로 더 나아가서 일본의 규슈, 시고쿠 그리고 혼슈 연안을 포격하면서 본토 공격에 대한 위화감 및 사회불안 조성용-_- 함대시위를 펼치며 쓰가루 해협을 강행돌파 하자는 의견 등등이 나왔습니다만, 결론은 무엇이 두려워 일본 해군을 피해서 태평양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반론과 더불어 일거에 쓰시마 해협을 통과해 블라디보스톡으로 항진하는게 가장 빠른 최선책이라는 의견 쪽으로 기울어 갔더랍니다. 여기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발틱 함대는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항진한다"는 말로 항로에 대한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결과적으로는 치명적-_-인) 쓰시마 해협을 택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그는 일본 함대의 주력이 타이완 근해에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었고, 따라서 쓰시마 근해에는 소뢰정 약간을 배치한데 불과하다.... 그리고 그 방어력도 취약할 것이라 추측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제독의 판단은 치명적인 오산이었더랬습니-_-다. 쓰시마의 방비는 분명 미약하였으나 그 가까이인 조선의 진해만에 연합함대의 주력함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발틱 함대의 반퐁 항 출항 후, 일본의 정보진은 그들의 함대가 어디에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었고 일본 해군 내에서도 대체적인 의견은 쓰시마 해협 - 소오야 해협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내부 의견이 대강 정리되어가는 분위기였고, 결국 적 함대의 주력을 요격하는 위치가 어디가 될 것인가? 어디를 함대결전의 전장으로 선택할 것인지는 해군의 수뇌부와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생각해야 할 풀기 어려운 문제였지요. 당시 조선의 진해만에서 함대 주력함들과 함께 기함 미카사(三笠)에 사령기를 걸고 있던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 八平郞)해군대장은 반드시 쓰시마 해협으로 적함대의 주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대부분의 연합함대 참모진들은 소오야 해협 방면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2차 황해해전 당시 포탄에 얻어맞고 포트 아서(뤼순) 항구에 계류중인 러시아 전함 "쩨자레비치".... 발틱 함대의 4척의 주력함인 "보로디노"(bolodino)급이 바로 이 급의 확대 개량판 이었더랬지요...심심해서 그냥ㅡ,.ㅡ; 5월 25일(쓰시마해전 발발 이틀전) 발틱 함대는 속력을 늦추고 무선을 봉쇄한 채 북상을 계속하고 있었고, 밤이 되자 함대에 동행하고 있던 특수 보조함 "우랄"(Ural)(아마도 해전사상 최초로 전투에 참가한 무선 통신함*_*;일 듯...)의 안테나에 일본 초계함의 전파가 잡혔는데 그것은 평문 전보로 아직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 보였더랍니다.... 드디어 5월 26일 일본 함대의 전파교신이 평문에서 암호교신으로 바뀌었는데 그때까지는 일본 함대가 발틱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던 러시아 함대였습니다만... 발틱 함대는 기함 수바로프를 선두로 하고 주력 전함들이 하나의 종대를 이루고 이와 나란히 왼쪽에 구형 전함들이 또 하나의 종대를 이루고 있는 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장갑순양함들을 똑같이 종대를 이루어서 따르게 하였고.(함대 결전의 주력-_-이랄까요) 그 뒤에는 구식 순양함과 지원함들을 포진시키고 함대의 좌.우측에 초계함을 배치하는 형태였습니다. 일본해군은 발틱 함대의 반퐁 항 출항 이후부터 남지나해에 대한 초계를 한층 강화시킨 상태였고 아직 정확한 적함대의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진해만에 대기중이던 도고제독의 머릿속엔 이미 발틱 함대를 어떻게 격파할 것인가에 대한 작전계획이 구상되어 있었더랍니다..그리하야........
일본의 7단계 전법과 연합함대의 편성 7단계 전법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함대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 - 꿈으로 발틱함대의 기동과 포진을 계시 받은 유명한 사람) 작전참모에게 지시를 내려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해군의 유명한 "7단계 전법" 이란, 메이지 37년 8월 10일의 제 2차 황해해전 당시, 뤼순에서 출격한 러시아 함대를 작전 이후 위험하게 놓칠 것 같게 되거나, 또 적 함대기동의 추적으로 고전한 경험으로부터, 우연의 시요소를 배재한 "결사적인 주야 공격-_-"으로 간단히 정의될 듯 싶습니다. 이 전법의 주요 골자는 간단히 얘기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 공격-_-한다는 것으로써 시야가 확보된 낮에는 함대 결전으로써 함대의 전 화력을 집중하여 적함을 타격하고, 밤에는 구축함대와 수뢰정대로 접근전을 감행함으로써 발틱 함대에 인터벌을 주지 않고 계속적인 타격을 입혀 적 함대의 주력(또는 전부)을 격멸시킨다는 것이었지요. 졸라 희귀한 사진(*_*;) 러일전쟁시 미카사 함상의 연합함대의 사령부 수뇌진. 중앙에 수염이 멋있게 난 사람이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 아랫열 도고 제독의 좌측 옆이 참모장 가토 도모사부로 소장 , 그리고 우측 끝이 선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좌. 이 두 사람은 도고제독의 양 팔과 같은 존재였더랬죠~*_*; 구체적으로 발틱 함대를 발견하는 시간은 대체로 새벽이 될 것인즉 고지마(五島) 열도 앞바다에서 1단계로 전 구축함과 수뢰정을 집중시켜 적 함대를 기습 뇌격, 2단계로 동이 틀 무렵부터 주간까지 연합 함대의 전력을 다해 함대 결전을 감행, 3단계 야간 습격으로 일몰뒤의 구축함과 수뢰정을 재정비하여 다시 접근 뇌격전을 감행, 4단계 울릉도 근해까지의 (적 잔존)함대 추격전, 5단계로 울릉도 방면에서의 함대전과 뒤이어 야간의 뇌격-_-; , 6단계는 블라디보스톡까지의 함대 추격/소탕전을 벌이며, 마지막으로 그래도 적 함대가 잔존했을 시 7단계로 적 함대를 블라디보스톡 항내에 밀어넣고 포위한 후, 항구 전체에 기뢰/수뢰를 부설하여 촉뢰를 노리며 적 함대의 제해권을 무력화 시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겠더이다-_-;.. 한편 도고 사령관은 이미 4월 17일 이미 이후의 전투 수행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첫째. 적 함대와 대적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적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즉 도고 제독의 신념은, "싸우고 나서 승리를 구한다"라기 보단 " 항상 이기게 해 놓고서 나서 싸운다"는 이순신 병법 철학이 있는 듯-_-합니다. 연합함대의 (비교적)신형 장갑순양함 "아즈마"(吾妻) , 대 러시아전을 상정한 6.6함대 계획함이죠~ 연합함대의 편성 지구를 반 바퀴 돌아-_-; 이윽고 쓰시마 해협으로 진입한 발틱 함대의 전력은 총 38척으로써, 그중 구축함 이상의 전투함은 29척이었으며 나머지는 수리/공작이나 보급, 통신등등의 특수 업무를 담당하는 보조선 7척과 병원선 2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에 대적하는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장관 도고 대장은 함대의 주력인 신형 전함 4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둘로 나누어, 제 1 전투전대의 전함 4척과 장갑순양함 2척은 도고 제독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으며, 장갑순양함 6척으로 구성되는 제2 전투전대는 가미무라(上村)중장에게 지휘권을 맡기게 됩니다. 여러번 언급된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 - 쓰시마 해전의 히로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_- 첫 포문을 열게 될 연합함대의 제 1전대에는 연합함대의 기함인 전함 "미카사"(三笠) (배수량 15,362톤, 18노트, 12인치 주포 4문, 6인치 14문)를 비롯하여 시키시마급 전함 3척과 전함 후지의 무장은 12인치포 4문+6인치 14문으로, 분명 13,500톤급의 러시아의 신형 수바로프급 전함을 염두에 둔 포진으로써, 최초 포전이 개시된다면 전혀 러시아 함대에 뒤질 것이 없었더랬지요. 그리고 가미무라 중장이 지휘하는 제 2전대는 장갑순양함 6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미 청일전쟁 이후, 대 러시아전을 염두에 두고 구성한 6.6 함대 계획의 성과로써 이들 모두가 9000톤급의 대형 순양함으로써 최대속도가 20노트를 상회하였고 주포로써 8인치포 4문, 부포로써 6인치포를 12~14문 장비하는 화력이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양 함대의 세력 구성은 전력면에서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전함 8척 장갑순양함 3척을 주력으로 하는 러시아 함대에 비해 전함 4척 장갑순양함 8척을 주력으로 하는 연함함대가 약간의 열세인 듯......싶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함대의 전함중 연합함대의 신형 전함에 필적할 만한 전함은 신형 전함은 보로디노급 5척이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고 봅니다마는.....
발틱 함대 발견!!! 발틱함대를 발견했어~!! -_-; 이윽고 운명의 5월 27일 아침, 발틱 함대는 고지마(五島)열도 북서쪽 약 30마일 해상까지 접근중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연합함대가 203지점이라 부르고 있던 초계 구역으로써, 당시 연합함대는 동해에서부터 남해, 황해에 이르는 구간의 해면을 모두-_-;경도와 위도로 나누어 각각의 번호를 붙여 초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더랍니다. 이 지역의 초계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연합함대 제 3함대는 고지마 열도와 제주도 사이를 주로 순양함을 이용하여 초계하고 있었습니다. 27일 오전(새벽) 2시 45분경, 일본 연합함대의 위장 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는 초계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돌연 서쪽에서 불빚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세히 확인하고자 하는 이 구축함의 함장은 흰 등과 붉은 등을 단 병원선임을 확인하였고 때마치 달이 시나노마루호의 동쪽에 떠 있었기 때문에, 육안 판별이 어렵다고 판단. 그래서 함선 뒤쪽으로 돌아 접근해본 결과 마스트가 3개이고 연돌이 2개인 러시아의 순양함으로 판단하고 점점 접근하여 임검을 하려는 찰나 좌현 방향으로 여러 줄의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것은 막 동이 트려는 순간에 이미, 시나노마루호는 발틱 함대의 한가운데-_-;; 돌입해 있는 것이었더랍니다-_-;;;; 시나노마루의 함장은 이것이 곧 발틱 함대라는 것을 알고는 급히 현 위치를 이탈하면서 북방 60마일 해역에 있던 연합함대에 대하여.... "발틱함대를 발견했어~!!"라고 제 1신을 타전합니다. 가장 먼저 전장에 도착한 장갑순양함 "이즈모"(出雲) , 역시 6/6함대 계획함중 하나였더랬지요.. "적 함대 , 203지역에서 발견!! 적 함대의 주력은 쓰시마 동부로 항진하는 것으로 추정됨" - (원래 타전 내용이랍니다) 이 전파를 받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장갑순양함 "이즈모"였습니다. 장갑순양함 이즈모는 27일 오전 3시30분경 고지마에 있는 기지를 출항하여 초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오쿠시마 서방 약 40마일 기점에 이르렀을 때 시나노마루의 전보를 수신한 것이었고 그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발틱 함대에 접근을 시도하였습니다. 06:45분 드디어 발틱함대와 조우한 장갑순양함 이즈모는 적함의 포격 위험을 무릎쓰고 거의 6000미터까지 근접하여 38척의 이르는 대함대의 진형과 기타 사항을 연합함대 사령부에 타전합니다.(다행히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지요~ -.-;) 일기는 청명하나 파도는 높다 순양함 시나노마루의 보고를 받고, 조선의 진해만에 정박중인 연합함대의 주력은 곧 출동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당일 연합함대의 함선 대부분은 진해항 항만 밖의 가덕(加德)수로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는 지난 5월 23일 발틱함대 발견이라는 오보에 의해 전함대가 한번 출항하였기 때문에 다시 진해로 복귀한 27일에는 기함 미카사를 제외한 전 함정이 가덕 수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보고를 받은 즉시 출동이 가능하였으나 연합 함대의 각 함정에는 발틱 함대가 쓰가루 해협으로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는 상황을 상정하여 다량의 석탄을 함정의 상갑판 위에까지 적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상황시에 피탄하게 된다면 화재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함대 출동에 앞서 도고제독은 "전 함대 전투태세를 취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출동에 앞서 이들 상갑판에 실려 있었던 석탄 전부를 바다에 쏟아-_- 버리라는 작업을 지시합니다. 이윽고 "전원 대청소 시작", "대포 손질 시작", "소총 손질 시작", "출항 준비!" 등등의 서둘러대는 여러 가지 구령이 되풀이 된 후 도고 제독의 명령으로 "이 일전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부상당했을 때 상처가 감염되지 않도록 모두 새로 세탁한 군복을 갈아 입으라"는 통보를 전 장병에게 알립니다. 이윽고 오전 7시경 연합함대는 북상하는 발틱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항 하였습니다. 이때 기함 미카사에 승선하고 있던 연합함대 사령부 참모는 "적 함대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접하여 연합함대는 즉시 출동, 이를 격멸하고자 함" 이라고 타전하려 하였는데 이 전문의 초안을 본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참모는 훗날 유명하게 되는 다음의 글을 전문 앞에 추가해 넣었다고 합니다. "금일, 일기는 청명하나 파도는 높다" 즉, 일기가 청명하니 적 함대를 놓칠 위험은 없는 것이고 파도가 높으니 사격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발틱 함대가 불리할 것이라는 의미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이날은 옅은 안개가 드리우고 있었더랍니-_-;다. 당시 진해만에서 발틱 함대의 요격을 위해 대기하던 연합함대는 제정 러시아의 발틱 함대에 비해 몇가지 점에서 우월한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영일동맹 채결 후(1902) 일본 해군은 그 편제와 훈련법 등에서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해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으며, 쓰시마 해전시 작전에 투입된 연합함대의 (주력)신형 전함들은 모두 영국에서 발주된 것들이었고 이런 대규모 함대/함선의 운용에 있어서도 영국해군의 군사고문단에 의한, 해상전투 운용에 대한 노하우를 상당수 전수받았기 때문에 당시의 연합함대의 사관 및 승무원(수병)들의 숙련도는 당시 세계최강의 영국해군에 필적할만큼 우수했다는 평갑니다.-_-; 연기를 풀풀 내며 전투해역으로 항진하는 전함 미카사의 모습~~ 사진 각도 때문인지 꽤나 날렵해 보인다-_-는. 또한 훗날의 결정적인 차이로 불리우는 (당시로써는)획기적인 사격 통제 방식을 연합함대가 채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함대간 포격은 포전 개시후 발사명령이 나면 함정들이 각자 사격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동시에 사격된 수십발의 포탄이 일으키는 물기둥으로 인하여 자함이 쏜 주포탄의 탄착지점을 정확히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연합함대는 구경별로 다른 색의 화염을 일으키는 포탄을 먼저 쏘아 일종의 영점사격-_-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격 조차도 포대의 포수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포술장(포술사관)의 지휘아래 일사분란하게 이루지도록 하였더랍니다. 이러한 방식의 사격통제는 이후의 근대 해전이나 1차 세계대전 때가 되면 일반화 되지만,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당시 연합함대는 대구경 함포의 절대수가 러시아 함대보다 적었지만, 신형 속사포의 보유에서는 발틱 함대를 상회하였고 이는 이후의 접전에서 분당 발사탄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신형 화약의 장비였는데 당시 일본함대는 프랑스가 개발한 새로운 제조법에 따른 강력한 시모즈 화약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화약은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폭팔하면서 불꽃을 뿜었는데 이때 견딜 수 없는 열과 유독성 연기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효과를 포전 이후에 나타내게 됩니다... 그리하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 제국주의 일본의 역할 또 말씀하시기를 “일본은 천하의 일꾼이니 일본사람이 내 일을 하여 주리라. 일본사람은 나한테 품삯도 못 받는 일꾼이니라. 그러나 일꾼이 주인의 집을 빼앗으려 하므로 마침내는 크게 패망할 것이니라.” 하시니라. [道典 3:21] * 클릭: 서구열강을 몰아내는 애기판 씨름이란 무엇인가? * 클릭: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광복 1. Z기 게양
옆에 있었던 참모장 가토 도모사부로 소장과 선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중좌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발틱함대가 쓰가루 해협으로 침로를 잡지 않은 것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지요. 오후 13시 55분 , 드디어 멀리 남쪽으로 수마일 밖에 어렴풋이나마 커다란 전투 깃발을 매단 군함들이 일직선으로 북동쪽으로 항진하는 것이 관측 되었고. 이때 네가지로 채색된 기(旗)가 연합 함대 기함인 미카사의 마스트위에 계양되었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Z기"였습니다. 이 신호기의 계양과 더불어 도고 사령장관은 전 함정에 장차 일본제국의 운명을 건 이 일전에 대한 짤막한 훈시를 발송합니다.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걸려있다 전 장병 분투노력 하라" 연합 함대의 전 함정에서는 순간 긴장감이 최고조로 이르럿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러시아 발틱 함대에 대하여 어떠한 전투행동을 개시할 것인가에 대해 사령장관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간 발틱 함대의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중장도 이미 일전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어쩐지 불길한 징조가 보였습니다. 그동안 지병을 앓아 왔던 그의 오른팔이자 제 2 전함전대의 지휘관인 포커삼 소장이 이틀전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2. 대반전
기함 "미카사"의 전투 함교에 있는 도고제독의 그림-_- 당시(1905)까지만 해도 모든 전투지휘를 실내함교에서 할 순 없었다고 합니다...실제 전투시에는 개방된 함교에서 전투지휘-_-;를 발틱 함대의 38척의 함선은 2열 단종진으로 유유히 쓰시마 해협을 항진중이었습니다. 도고 제독은 오래 전부터 참모들에게 말하길. "포전 개시, 즉 사격을 7000미터 이내에 들어오기 전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고 휘하 사관들에게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기함 미카사(三笠) 함교의 광학 거리 측정기는 발틱 함대와의 거리가 8,500미터까지 접근했음을 표시하였고, 담당 사관은 도고 제독에게 이를 보고하였습니다. 8,500미터는 연합 함대의 주력인 "시키시마"급 전함 3척과, 전함 "후지"에 장비된 40구경 12인치 주포의 유효 사정거리 이내였더랬지요. 도고 제독의 오른손이 왼쪽으로 크게 반원을 그렸고, 가토 참모장은 도고 사령관의 얼굴을 보면서 " 좌현으로 90도 반전." 이라고 짧게 외쳤습니다. 즉 연합함대의 함선들 전부를 급속히 좌현으로 반전시키라는 명령이었지요. " 네에? 좌회전입니까?! " 라고 한 참모진이 반문하였는데, 사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렇게 반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언제든지 포격전을 개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뱃머리를 적 함대 속으로 들이박고 들어간다-_-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미카사의 함장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명령을 잘못-_-; 들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가토 참모장은 마지막으로 지시를 내립니다. " 그래, 확실히 좌회전 90도- " 이 말과 동시에 육중한 선체의 기함 미카사는 급히 좌현 반전하여 곧바로 동쪽으로 함수를 돌려 발틱 함대 선두를 향하였습니다. 적 함대에 대하여 T(정丁- 이것이 이순신의 학익진 병법에 대한 변형이다)자 모양의 진형이 되어 접근하여 선두에 있는 적함을 공격하는 전술은 사실, 도고 제독의 이 유명한 함대기동 이전에도 해전사에서 하나의 정설로 굳어져 있었지만 근대 해전의 시대에 있어서, 또한 당시 발틱 함대와 연합함대간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에, 현 상황에서 이 전술기동을 감행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리하야.....
3. 전투 개시-! 오후 14:08분, 드디어 거리가 7천 미터까지 접근하게 되자 발틱 함대 쪽에서 먼저 포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부터 2분이 지난 14:10분 연합 함대의 함선들도 기함 미카사의 초탄 발사와 더불어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아마도 주포의 발사개시를 숨죽이며 기다린 이 2분간은 연합 함대의 전 장병들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겠지요.. 이윽고 포격전이 절정으로 치닺고, 기함 미카사 주위에도 높다란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으며 뒤이어 몇 발인가의 명중탄을 얻어 맞았습니다. 그러나 도고 제독은 연합함대의 화력을 발틱함대의 제 1 전함전대의 선두인 전함 수바로프와 오슬라비아에게 집중시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도고 사령관은 15노트의 빠른 항진속도로 11노트로 항진중인 러시아 발틱 함대의 전방을 가로지르기 위해 계속적인 함대 기동을 지시하였습니다. 바로 T(정丁)자의 머리 부분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함대 기동 전술로써 포탄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빠져나가려는 발틱함대와 그 앞을 가로막는 일본 연합함대 사이의 필사적인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최초의 포격전이 개시된지 10여분이 지난 14:20분, 연합함대도 계속되는 변침 기동과 포격전으로 인하여 손상이 증가되고 있었고 시종 함대의 최선두에 위치하여 포전을 벌이던 미카사도, 적함 발견으로부터 15분간의 적전 대반전시 수바로프에게 얻어맞은 16발의 명중탄으로 상갑판에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편 , 최초의 포격 이후 근 20여분간 집중 포격을 당한 발틱 함대의 기함 수바로프는 결국 항행 불능 상태가 되어 전열에서 이탈하였고 연돌부의 함몰과 더불어 피탄시의 화재로 인해 마스트 부분이 거의 다 날아가 버려서 그 형상은 참혹하기-_-이를데 없었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발틱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중상을 입고 (기함이 이만큼 당했으니-_-말이죠..)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의식을 잃고 구축함 부이니로 옯겨진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의 뒤를 이어 지휘권을 승계한 니콜라스 네보카토프 제독이 함대의 임시 사령관이 된 것을 알 게 된 것이, 이후 여러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_-;.. 한마디로, 이 시점 이후 러시아 발틱 함대는 지휘관에 의한 조직적인 전투행동을 못하게 되었단 얘기죠.. 발틱함대에서 첫빵으로 침몰-_-;한 (주력)전함 오슬라비아(Osliabia) 15:35분. 이때쯤이면 이미 러시아 함대는 전열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고, 선두에 위치한 4척의 전함 중 1척 침몰(오슬라비아)등 이윽고 쓰시마 해상의 해전은 일본의 연합 함대 쪽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었고. 기함 수바로프의 전열 이탈과 오슬라비아의 침몰로 전함 알렉산더 3세가 새로이 선도함이 되어 발틱 함대의 북진은 더욱 빨라졌습니다. 해역 일대는 두 시간여에 걸친 양 함대의 포격으로 인한 포연-_-과 연돌에서 배출된 연기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시야가 상당히 가려지게 됩니다.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러시아 함대로써는 천우의 기회였던 바, T(정丁)자 전법을 계속해서 펼치기 위해 함대기동을 펼치고 있던 도고제독은 이 시점에서 한동안 발틱 함대를 놓치고 맙니다. 당시 연합함대의 주력은 일시적으로 발틱 함대의 항진 코스에서 북서쪽으로 상당히 벗어나 있던 상태였으나, 도고 사령관은 즉시 침로를 변침하여 발틱 함대를 찾아낼 수 있었고 이때 발틱함대의 잔존 함정들은 동쪽으로 침로를 잡고 있었더랍니다. 이들은 연합함대가 이들의 진로를 가로막으려고 기동함에 따라 수시로 뱃머리를 돌려 남쪽 . 북쪽으로 잇단 침로 변침을 시도하면서 끊임없이 항진을 계속하고는 있었습니다마는.....도고 사령관은 타격을 입고 허덕이는-_-; 발틱 함대 함정들을 찾아 어뢰 공격을 가하도록 명령하고 그 자신도 예하 전대를 이끌고 16:45분 북쪽으로 다시한번 변침 기동을 지시합니다. 4. 네 자매의 최후-_-;;(전함 보로디노, 수바로프, 알렉산더 3세, 오슬라비아) 발틱 함대의 주력 전함 수바로프는 이미 포전개시 30분여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이미 전열에서 이탈한 상태였습니다. 전열에서 이탈한 채 부포 1문만을 의지하고 그저 막연-_-하게 난사를 계속하고 있던 수바로프를 침몰시키기 위해 연합함대의 구축함들의 어뢰 뇌격이 시작되었고 이때 발사된 어뢰 중 2발의 명중탄으로 발틱 함대의 기함 수바로프-는 엄청난 폭팔을 일으키며 전복-_-침몰....하였다 합니다. (일단)놓쳐버린 발틱 함대의 나머지 주력 전함들을 찾아 북쪽 침로를 잡고 급히 달려간 도고 제독은 17:55분 역시 북서 침로를 잡고 필사적-_-으로 도주하고 있던 발틱 함대 전함군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간격을 좁혀 가며 거의 평행되는 침로를 잡고 북서쪽으로 항진하면서 도고 제독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양 함대 모두가 최대 속력으로 진행하고 있었으나. 석탄을 주 원료로 한 당시의 보일러는 여덟 시간마다 태우고 남은 석탄재를 치워야 했는데, 치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아침부터 속력을 높여 온종일 기동하였으므로 양 함대는 점점 항해속도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하는-_-; 러시아 전함들의 윤곽이 뚜렸해진 오후 18:25분경 연합 함대의 주포는 또다시 일제 사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때 가장 많은 명중탄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어쨌-건-_-;, 발틱 함대의 선도위치를 잡고 있던 전함 "알렉산더 3세"는 함수 쪽의 명중탄 집중으로 침수가 심해졌고 , 이후 18:40분경 결국 계속되는 포격으로 전복침몰 했습니다. 한편 도고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제 1전함전대의 공격은 새로이 선두에 나타난 신형 전함 보로디노에 집중되었고 전함 "후지" 에서 발사된 12인치 포탄이 탄약고를 직격하였고 순간 대폭팔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전함은 선체가 엎어집니다. 19:20분, 보로디노 역시 억세게 운좋은 사관 한 사람이 다음날 지나가는 어선에 구조된 것 이외에는 승조원 전원이 희생되었습니다. 이후 발틱 함대의 전열은 지리멸렬의 상태로 빠지고 말았지만 어둠이 짖어갈수록 네보카토프 제독은 "나를 따르라~-_-;" 는 신호를 계속 보내며 살아남은 잔존 함대를 이끌고 힘겹게 북쪽으로 항진을 계속합니다. 그들을 뒤쫓는 연합함대의 주력 전투부대는 작전 계획에 따라 북쪽으로 항진을 계속하고 있었고, 이 계획에 따른다면 예하의 두 개의 전함전대는 발틱 함대를 찾아 섬멸 전투를 벌이되, 이틑날 아침 울릉도 근해에서 만나기로 사전에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5. 야간의 혼전 어둠이 깔리자 발틱 함대의 함정들은 함선들의 개별적인 필사-_-의 탈주와 더불어 연합함대의 구축함, 어뢰정 전대들간의 추격과 공격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온종일 주력 전함전대의 전투를 지켜보며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구축함과 어뢰정 전대에 대하여 "야간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공격하라-"는 도고 제독의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이 명령을 받자 이들 , 구축함과 어뢰정 전대는 굶주린 개때-_-;;;처럼 뛰쳐나왔는데 총 21척의 구축함과 37척의 어뢰정들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발틱 함대의 잔존 함선들을 찾아 내 공격을 개시한 시간은 20:15분 이었습니다. 다구리당하고 둥둥-_-떠있는 전함 "오렐" (Orel)의 모습 , 그래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발틱함대 2척의 전함 중 하나--; 오후 내내 계속된 전투로 인해 발틱 함대의 장병들은 밤이 될수록 심신이 지쳐 탈진하는 상태에까지 이른 수병들이 많았는데, 결국 이때 한 수병이 일을 저지르고야 맙니다. 한척의 군함이 어둠 속에서(당연 등화 관제중이겠지요....도망가는 주제에--;) 탐조등을 비추었는데 야간에 이 불빛은 자신과 더불어 함대의 위치를 노출-_-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즉시 집중 공격을 자초하는 결과로 이어졌더랍니다. 후방에 위치한 전함 나바린 또다른 전함 씨쏘이, 벨리키 그리고 장갑순양함 나키모프도 집중적으로 어뢰를 맞아 역시 침몰합니다. 이 야간전투가 얼마나 혼전이었냐-_-하면, 적 주력함의 뇌격 이외에도 연합 함대 소속 구축함들과 어뢰정들도 서로 여섯 번이나 충돌하여 자신들 끼리의 비전투 손실로만 어뢰정 3척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지요-_-;. 6. 발틱 함대의 최후... 밤이 지나 이윽고 5월 28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연합함대의 주력은 전날 격전을 치룬 해역에서부터 140마일 북쪽으로 침로를 잡고 이동하여, 여전히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발틱함대의 잔존 함선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05:20분 경 드디어 북상하고 있는 발틱 함대를 발견하였다는 보고가 미카사에 있는 도고 제독에게 수신되었습니다. 이윽고 09:30분, 도고 사령관은 네보카토프 소장이 지휘하는 발틱 함대의 마지막 잔존병력 5척과 - 전함 2척 (니콜라이1세, 오렐)과 순양함 3척 - 조우하게 됩니다. 얼마 후 이 발틱 함대 최후의 전력인 5척의 전함과 순양함은 연합함대에 완전히 포위되었고, 유효 사정거리 이내에 들어오자 장갑 순양함 카스카- 까지 포문을 열 준비를 하였더랍니다. 그런데, 의외로 발틱 함대는 전혀 응전할 태세를 보이지 않았고 쌍안경을 통해 러시아 함선들을 주시하고 있던 선임 작전참모 아키야마 중좌는 발틱 함대의 잔존 함선이 항복의 신호기를 마스트에 계양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도고 제독에게 이를 보고합니다... 다구리당한 오렐의 근접사진. 역시 해전에서는 리베르타의 법칙이 여지없이 적용되나 봅니다..-_-; 사진은 전투 직후 일본측이 촬영~ 러시아 함대의 항복 신호를 접수한 후,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로부터 한척의 어뢰정이 출발하였습니다. 바로 선임참모 아키야마 중좌가 항복 교섭을 위해 러시아 전함 "니콜라이1세"-에 올라 네보카토프 소장과 대면하였고, 결국 네보카토프 소장은 항복의 증표로 그가 가지고 있던 장검을 도고 사령관에게 건네주기 위해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로 옯겨 탔습니다. 이 때가 1905년 5월 28일 오전 10시 34분이었습니다..그리고..여담-_-이지만 네보카토프 소장은 이때의 항복으로 ,이후 러시아로 돌아간 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대해전의 결과 러일전쟁의 대미를 장식-_-한 연합함대와 발틱 함대간의 30시간의 대격전, 쓰시마 해협에서부터 울릉도에 이르는 해상에서 벌어진 해전은 많은 희생을 치루고 막을 내렸습니다. 쓰시마 해협으로 진입한 러시아 함대의 총 함선수는 38척이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블라디보스토크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 뿐이었지요. 결국 연합함대가 격침시킨 총 함정 수는 19척이었으며 그 가운데 주력전함 6척과 3척의 장갑순양함이 포함되었더랬지요. 사상자의 숫자는 쓰시마 해전이 벌어진 동안 러시아측이 5천여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6,106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일본 해군의 손실은 어뢰정 3척과 사망 117명을 포함하여 사상자가 700여명 선이었다고 합니다. 결국...쓰시마 해전은 일본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게다가 세계 해전사상 아마 아직까지도 이토록 일방적인 완승으로 끝난 경우는 없는 듯 하네요. 일본은 이 쓰시마 해전을 기념하여 5월 27일을 해군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대 승전의 소식이 동경에 전해지자 환희작약하는 군중들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날 밤 히비야 거리에서는 깃발이 휘날리고 눈부신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은 가운데 승리의 노래와 춤의 축제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05년 1월에 일어난 공산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내부적으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던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불만에 찬 대중들에게 이 치욕스러운 패배는, 차르체제의 부패와 어리석음과 비능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예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전쟁에서 귀환한 불만에 찬 제대군인들의 반란은 실패로 끝난 1905년의 혁명을 점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12년 후 벌어진, 또 하나의 고통스러운 전쟁(1차 세계대전)은 두 번째의 혁명을 촉진시켜 결국 로마노프왕조의 몰락을 가져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두에도 언급한 바 있는 이야기지만, 쓰시마 해전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주도적 세력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된 하나의 시발점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이 해전의 파급효과는 매우 커서 세계적으로 일본의 지위를 격상시켰고,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태평양 지역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세력균형까지도 흔들어 놓았던 것이었지요.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꿈이 좌절된 러시아는 팽창의 방향을 서쪽으로 , 즉 오스만 투르크와 발칸 반도 쪽으로 돌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동경에서는 포츠머스 협정 <Treaty of Portsmouth> 의 내용에 대한 쓰라린 실망감 같은 것이 존재했지만(러시아의 자국영토를 침해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따른 전쟁보상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러-일전쟁이 일방적인 승리라고 보도했던 일본정부의 기만에 대하여 일본국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쨋든지간에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군사력 배양이 국익에 이롭다" 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이후 제공해 주게 됩니다. 아마도 이후 일본의 외교정책이 국수주의적이고 호전적-_-;인 성격을 띄게 된 것은 이 운명적인 승리의 직접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終)
☞출처 : http://jsdworld.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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