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권의 풀어쓰는 風水 ( 경남일보 2006. 1.25. 수 )
<97>成三問 一肢體墓 답사기
서울 홍성 논산 등 3곳에 흩어져
성삼문선생(成三問 : 1418~1456)의 묘는 전국 세 곳에 흩어져있다.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成三問, 朴彭年, 李塏, 兪應孚, 河緯地, 柳誠源)를 비롯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리고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등 세 곳. 양촌리의 경우 일지체(一肢體)묘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양촌리 묘를 지난 2004년 1월 대구한의대 대학원생들과 답사했다. 선생의 묘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거열형으로 찢긴 선생의 일지체를 지게에 지고 고개를 넘던 사람이 우연히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이 묘는 1984년 5월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제81호)로 지정됐다. 이 부근의 구리개라는 고개를 일지체가 넘던 고개라고 해서 성삼문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매죽헌 성삼문선생은 옛 홍주인 충남 홍성군 홍복면 노은리 외가댁 박철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곳에는 성삼문선생유허비가 있다. 38세로 유명을 달리 한 시신은 전국으로 흩어지고 제사 지낼 자손도 없어 부인 김씨가 밤나무를 깎아 신주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선생 처족들이 신주를 넘겨받아 단을 쌓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이 성삼문 묘가 노은리에 있는 까닭이다. 성삼문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고 묻는 소리가 세 번 들려 이름을 三問이라고 지었다 한다. 문과에 장원급제, 집현전 학사와 수찬 등을 거쳤고 한글창제에 참여하여 요동에 유배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다녀오는 등 공로가 크다. 처형 된지 200년쯤 후 19대 숙종이 신원을 복원, 대제학에 추증하여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지방 수령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유림들은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10월 그믐 이곳 논산 묘에서 묘제를 거행하고 있다. 여섯 신하만을 사육신이라 부르는 것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이들 여섯 신하의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선생의 유일한 후손은 젖먹이 손녀(맹첨의 딸)가 유모에 의해 극적으로 살았음을 문화류씨 좌상공파(文化柳氏 左相公派)족보에서 찾을 수 있다. 류씨족보에 따르면 극적으로 구출된 손녀는 문종 때 사헌부감찰 류자미(柳自湄 : 號 西山)에게 은밀히 맡겨져 성장된 후 그의 자부(7남 輯)가 되어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친손은 절손돼도 외손은 대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선생의 일지체 묘를 풍수적 잣대로 논하는 것은 충절을 지킨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략한다. /경상대 금오공대 대구한의대 풍수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