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아트'와 만나 '아지트'가 되다
- ▲ 터키 주말르크즉 마을. / 황희연
항구에는 수많은 유람선이 떠있다.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의 경계선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1시간 남짓 돌아보는 유람선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누군가가 마이크를 쥐고 "오른쪽은 아시아, 왼쪽은 유럽"이라는 설명을 친절하게 들려준다. 감격적인 순간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이라니.
주말르크즉은 에미노뉘에서 유람선을 타고 감동적으로 관통했던 보스포로스 해협과 같은 위도상에 위치한 터키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몸은 유럽과 가깝지만, 소속은 분명 아시아 대륙이다.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마르마라해를 경계로 유럽 대륙과 몸이 아깝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서 페리와 버스를 타고 울루 자미로 유명한 부르사에 도착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남짓 달려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숨어 있는 마을'. 지도상으로는 그다지 멀지 않지만, 막상 찾아가 보면 '산 넘고 물 건넌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막상 어렵게 찾아가도 사실 이 마을에는 구경할 만한 관광지가 아무것도 없다. 낡은 가옥과 좁은 골목 사이로 울루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주말르크즉 마을에서 볼 만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오스만투르크 시대에 지어진 낡은 가옥과 울루산 경사면을 타고 흐르는 맑은 시냇물. 간간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낡은 가옥 담벼락에 칠해져 있는 예쁜 원색의 페인트다. 이렇게 예쁜 페인트를 흙 담 위에 꼼꼼히 발라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증이 일어 장작불에 터키식 파전 요리 '괴즐레메'를 굽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동네 사람이 아무렇게나 칠해 놓은 것이니 별 대수로운 게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색감이 너무 아름다워 낡은 산골 마을에 뜻밖에 생기를 드리운다. 동화의 한 페이지를 들춘 것처럼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슬람 사원에 장식된 희고 영롱한 타일 색보다 훨씬 예쁘고 화려하다. 도화지나 타일 위에 그린 그림은 "예술적인지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보게 되지만, 산골마을 담벼락에 칠해진 그림은 웬만하면 반가운 마음으로 보게 된다.
◆벽화로 생기를 되찾은 개미마을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 1만5000평 남짓 되는 마을에 넓게 퍼져있는 벽화를 바라보는 기분도 바로 그런 심정이다. 홍제3동 9-81번지. 일명 개미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성균관대, 건국대, 상명대, 추계예대, 한성대 총 5개 대학교 미술 전공 학생들이 담벼락에 51개의 예쁜 그림을 그려 넣으면서 터키 주말르크즉 마을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서울의 달동네로 거듭났다.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가 본격화된 후 마을의 판잣집들은 절반 이상 쓸려나갔지만, 남은 사람들은 개미마을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평생 정 붙이고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기엔 가진 것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나 기초생활수급자, 독거노인이었다. 210여 가구, 420여 명의 사람들이 마을에 남았다. 인왕산 자락에 모여 있어 전망은 시원하게 트여 있지만, 워낙 고지대라 오고 가기 불편했고, 담벼락도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상태였다.
- ▲ 홍제동 개미마을의 벽화는 젊은 미술학도들의 결실. 골목길 담벼락의 돼지와 젖소를 보며 판잣집 할머니는 피식 웃는다. 그렇다고 팍팍한 삶이 쉽게 바뀔리야 없겠지만, 한 번 더 힘을 낸다. / 사진=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1983년 개미마을이라는 정식이름을 부여받은 후 처음으로 개미마을 사람들은 세상의 긍정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마을에는 카메라를 들고 놀러 오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지만 어울려 있다 보니 그 자체로 화사한 그림이 되는 주말르크즉 마을처럼, 개미마을도 어울리고 섞이다 보니 서울에서 제일 예쁜 마을로 거듭났다.
담벼락에 칠해진 페인트는 비를 맞고 햇살을 견디며 희끗희끗 빛이 바래기 시작했지만, 바로 그것이 산골마을에 있는 길거리 벽화만의 매력이다. 갤러리에 걸어둔 그림에는 '시간의 향기'가 빠져 있지만, 개미마을 벽화에는 '시간의 향기'와 더불어 칙칙한 마을을 환하게 바꾸고자 했던 젊은 미술학도들의 아름다운 마음까지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하차한 후 2번 출구로 나와 롯데리아 앞에서 7번 마을버스를 타고 개미마을 종점으로 향한다. 버스로 약 15분 거리.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젝트' 그림은 금강 빌라 앞부터 개미마을 종점까지 넓게 퍼져 있으니 종점까지 가지 말고 인왕 중학교 앞에서 하차해 개미마을 전역을 슬슬 산책하는 것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