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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오래된 정원>부터 <백야>까지
2007년도 비워져야할 듯한 12월이 어느새 되었다. 오늘(12월 18일)은 365일 중 353일째 의 날이다. 벌써 350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구나. 12일이 지나면, 다시 뭔가를 새롭게 채우기 위해 준비된 듯한 1월이 오겠지. 그 1년 사이 봤던 영화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한다. 2007년 들어 처음 본 영화가 <오래된 정원>이다. 그렇게 오래된 정원에서 시작한 2007년, 많은 영화를 본 것 같은데, 생각만큼은 시간과 여건이 안됐던가 보다. 영화에 대해 몇 줄의 글이나마 남긴 건 몇 작품이 안 된다. 그 중 대부분은 카페에 올린 것 같다. 대개는 영화의 고원에, 때론 화요논평으로, 때론 (폭주기관차) 책장에. 몇몇 올려지지 않는 작품은 어쩌다보니 때를 놓쳐, 올리기 뭐해, 혹은 뭐 올릴 것까지 있겠어, 하면서 지나친 글이다.
나열되어 있는 제목을 보면서, 오랫동안 같이 온 카페 사람들은 그래 제목은 본 것 같다,하면서 고개 끄덕거릴 것이다. < >안이 제목, ( )은 감독명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굳이 필요하지 않는 몇 자 코멘트다. 대부분 입에 오르고 귀에 들린 영화들이다. 간혹은 개인적으로 맘에 든 작품 몇몇이다. 여기 올려진 영화들은 2007년에 만들어진 영화만은 아니다. 대부분은 2007년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지만,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볼 시간을 놓쳐 나중 dvd로 보게 된 영화, 다시 보고 싶어 또다시 본 영화이기도 하다.
<오래된 정원>(임상수) - 임상수 영화의 최고봉, 물론 다음 작품은 또 다른 최고봉이 되길 바란다.
<열정>(장 뤽 고다르)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 영화. 영화는 도대체 무엇으로 되는가를 묻게 되는 영화. 왜 인생에서 굳이 영화인가를 묻는 장 뤽 고다르의 열정을 통해, 열정으로 만들어진 영화을 통해, 열정적으로 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를 묻게 되는 영화.
<스틸 라이프>(지아장커)- 말이 필요없는 영화
<묵공>(장지량) - 국민배우라는 이름으로만 연기가 되는 건 아닐 터, 언어의 장벽은 넘어야하지 않을까? 합작이라는 건 여럿이 섞여 하나가 된다는 것. 이도저도가 되어서야...
<오징어와 고래>(노아 바움백)- 어쨌든 지나가야하는 소년의 가족사가 조금은 수다스럽다, 물론 사이를 잘 파고든 영화다.
<도브>(이안 소프틀리) - 사랑은 질투로 이어받지 못한다, 그 보다는 부재가?...
<내 남자친구의 유통기한>(도리스 되리) - 사랑이란 지금 당장의 이 떨림이 중요해(?)
<수면의 과학>(미셸 공드리) -치유가 됐건 아니건 이 영화와 같은 꿈/현실이 정말 있을 것 같아...
<그남자 작곡, 그여자 작사>(마크 로렌스) -느끼한 휴 그랜트, 느끼해도 웃음이 나오는 이윤 뭘까?...
<그놈 목소리>(박진표) - 영화라해도, 실제 사건에서 가져온 소명감/윤리/책임감에, 괴로운 영화
<우아한 세계>(한재림) -어떤 세계도 우아할 수 없다는 건 다 안다, 그러지 아니한가?
<좋지 아니한가>(정윤철)- 그런 것 같아.
[Stranger than fiction](마크 포스터) -버지니아 울프는 어디에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는가, 라고 말하는 걸까
<스쿠프>(우디 앨런> - 셰익스피어 희극 한 판 본/읽은 느낌
<데자뷰>(토니 스콧) - 새롭게 다른 시간을 사는 존재의 가능성, 글쎄...
<타인의 삶>(플로리안 헨켈 본 도너스마르크) - 영화(예술)가 존재하는 이유
<바벨>(곤잘레스 이냐리투) -소통불가로 만든 게 바벨탑이라고 하나의 핑계를 만드는 건 아닐지...
<우리학교>(김명준) - 말하는 자의 필요에 의해 누구라도 통과시키는 ‘우리’가 공동체 ‘우리’로 들려 감동하게 되는 영화
<댈러웨이 부인><마를린 호리스) -소설과의 괴리감이 컸지만, 시간의 흐름을 쫓아 하루가 잘 연출된 영화라는 데 이견없음.
<안토니아스 라인>(마를린 호리스) - 여성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영화
<숨>(김기덕) - 아주 짧은 제작기간에서 나온 저예산영화라는 데 놀랍기는 하지만...
<미스 리틀 선샤인>(조나단 페이톤, 발레이 페이스) - 가족은 어찌해도 하나가 될 때 가족이다.
<밀양>(이창동) -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며, 내 주위 비추고 있는 빛의 존재에 새삼스럽게 눈을 돌려보게 한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페르난도 메이렐레스) - 거대자본에 짓밟힌 한 톨 밀알 아프리카의 붉은 땅에 뿌려졌다. 끝없는 문제들이 산재한 세상의 문제가 언뜻 보인 문제작, 상영시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들이 보여지는 문제작.
<쓰리 타임즈>(허우 샤우시엔) -세 개의 꿈 중, 첫 번째 꿈에서는 그 정적과 빨강이 아름다웠고, 감독의 과거가 꿈이 된 두 번째 꿈은 과거로 걸어 들어간 시간같아 인상적이다.
<검은집>(신태라) -생각만해도 여전히 오싹.
<화려한 휴가>(김지훈) - 기억할 수도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모르고서(야) 사는 인간. 왜? ...
<디워>(심형래) - 논쟁이 아니었으면 보지 않았을 영화로 초등학생과 중학생과 함께 봤다. 한국영화의 CG 기술에 놀라고 내용에 웃음이 나온 영화.
<상성>(유위강, 맥조휘)- 감독도 배우도, 후광은 후광일 뿐
<여름궁전>(로우 예) -데일 줄 알면서도 불을 훔치는 인간, 꿈인줄 알면서도 꿈꾸는 인간.
<즐거운 인생>(이준익) -때론!
<행복>(허진호) - 한 사람의 관조는 다른 사람에게도 일정 거리를 만든다...
<괜찮아, 울지마>(민병훈) - 마지막 한 장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조디악>(데이비드 핀처) - 미궁/집요함에 대한 충분히 미국적인 접근
<로맨틱 홀리데이>(낸시 마이어스) - 모르겠다. 그 휴가가 로맨틱한지는.
[M](이명세) - 영화를 통해 어디로 걸어갈지 다시 궁금해진 감독, 이명세
<나 없는 내 인생>(이사벨 코이셋)- 한 인간이 모르는 다른 한 인간에게 댓가없이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가능성많은 삶이 눈에
띄는 영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의 인생
<포 미니츠>(크리스 크라우스) - 일면 자위/토로의 예술이라면, 일면 자유/위안를 주는 예술
<원스>(존 카니) - 배려, 여기 없는(있기 어려운) 마음의 정체.
<색,계>(이안) - 그 상황에 처한 배우들을 봐야하는 게 참으로 불편한 영화
<오다기리죠 도쿄타워>(졸리 마츠오카) -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과거가 없는 남자>(아키 카우리스마키) - 망각은 새로운 출발이다
<무단침입>(안소니 밍겔라) - 집으로 무단침입, 마음속으로 무단침입. 다의어로서 작용하는 무단침입.
<백야>(루치노 비스콘티) - 도스토예프스키의 우수어린 몽상은 비스콘티에게로 와서 순수한 눈의 몽상이 되어버린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로베르 브레송) -어찌해도 할 바를 한, 최후의 웃는 자를 생각하게 되는 영화
<저항>(로베르 브레송) - 결국 상황속에서 (저항)하는 인간이기도 하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키예슬롭스키의 <블루>, <레드>, <화이트> 삼색 시리즈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그리고 <십계>시리즈가 있었다. 키예슬롭스키에 대해서 짧게 말한다는 게 어려워, 일단은 생략.
영화와 소설 그 사이, 의미와 오락 그 사이
비평고원 출입이 오래되었기에, 그 사이 내가 쓴 글을 통해 아는 이들은 나의 취향과 판단근거를 알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들은 이런 면에서 괜찮더라는 관점에서 몇 가지를 얘기해볼까 한다. 누구라도 인정하는 수작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나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키예슬롭스키의 작품들을 제외하고서 누구라도 2007년 본 영화 중 이 영화만큼은 꼭 보면 좋겠다는 생각하는 좋은 작품으로는 <스틸 라이프>와 <타인의 삶>이 있다.
<스틸 라이프>는 지아장커감독의 작품으로 그는 이미 이름을 얻어 그의 작품들이 따로 상영되기도 했었다. 물론 나는 <스틸 라이프> 외 작품을 아직은 보지 못했다.
<타인의 삶>은 감독의 다른 작품, 그 이후의 작품들도 중요할 수 있지만, 만약 이 한 작품만이라해도 좋을 작품으로 생각된다.
물론 여기 올린 많은 작품들을 다 보면 좋지만, 올해의 작품으로 나는 <스틸 라이프>와 <타인의 삶>을 꼽고 싶다.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카페에 간단하게 감상글을 올렸다, <스틸 라이프>는 영화의 고원 418으로, <타인의 삶>은 화요논평 49으로 올려져있다.
내게 생각거리를 제공하기론 <여름궁전>과 <색,계>가 단연 으뜸이다. 그러나 그건 영화(론/학)의 행보를 벗어나 독자인 나의 관심에서이지, 영화 자체의 미래나 영화 자체의 매력은 아니라 생각된다.
영화를 둘러보다보니, 아쉬운 게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개인적으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아쉽다. 잘 찍었지만 우화에 머무르는 듯한 <괜찮아, 울지마>도 아쉽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쉬운 건 <밀양>이다. <밀양>을 통해 보여주는 게, 이창동감독의 영화관/작가관일 수 있다고 인정해도, 뭔가 보여주는 영화, 뭔가 시도하는 영화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건 아닌가 싶다. 어떤 영화라해도, 볼거리로서의 영화가 아닌가 싶다. 영화와 소설 그 간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창동의 <밀양>은 다들 알고 있듯이 이청준의 <벌레>라는 소설에서 나온 작품이다. 물론 영화제작과정에서 골격만을 남기고 수정했지만.
이안의 <색,계>도 장아이링의 소설에서 영화화된 작품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소설에서 영화가 된 영화이면서도 확연히 다르다. 이창동은 영화의 매력인 볼거리/눈요기거리를 너무 제거해버렸다. 물론 이창동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찰나적으로 변해가는 인간의 심리묘사가 압권인 장아이링의 소설을 가능할 것 같은 시공간을 만들어 오직 영화로만 가능한 언어로 이안은 영화 <색, 계>를 만들었다. 소설 <색, 계>를 그대로 "재연”(re-enacted)한 것" 이라 말하면서 말이다. 하여 이안의 작품 <색, 계>와 장아이링의 작품 <색, 계>는 같으면서 확연히 다른, 영화와 소설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좋은 작품이 된다. 물론 그럼에도 내가 이안의 <색,계>에 대해서 기립박수를 보내지 않는 건, 너무 먼 거리에서 바라본 이 안감독의 무감함을 지향/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을 통해 전해지는 그 간격과 거리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편이면서도, 영화에서는 아직도 그걸 잘 모르겠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을 통해 그 거리가 확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게 바로 영화적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눈에 보이고 몸이 실제로 경험하는 듯한 꿈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느껴지듯, 영화는 꿈보다도, 아니 꿈만큼이나 실제로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창동의 <밀양>은 어떤가? 관객을 향해 가하는 폭력의 세기가 너무 약해있다. 오직 신의 사랑으로 선택된 한 배우가 영화 속 신애가 되어 고통받고 있다. 가학적인/폭력적인 성향이 어떻게 예술이 될까를 의문하는 자도 있을까? 무감한 예술, 얼마나 밋밋한가. 따사로운 예술이고 싶었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아름다움에 취하게 하여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작품이 있는 반면, 주체 혹은 실체를 관통하는 예술 작품이 있다. 주체를 관통하는 작품을 보는 이유란 아마도, 고통스런 내용이지만, 보기 싫고 생각하기 싫고 눈에 거슬리지만, 세상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생각해서, 인간은 올바르지만 않다고 생각해서, 인간이 지금 사는 존재만이 아니라 생각해서, 카오스적인 속성의 세상을 보게 하는 작품을 보게 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굳이 봐야한다고 판단하면서 말이다. 보게 한 후,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하게 할 때, 그 작품은 주체를 관통하게 되었다 말할 수 있다. 고통스럽게, 아프게.
<밀양>은 몸을 통과해버리기도 하는 예술이라기보다는 빛으로서 예술을 생각하는 듯하다. 그저 빛이 되어 옆에서 바라봐주는 예술. 그저 빛을 통해 비쳐주는 예술.
빛이 되기만 해도 되는 예술과 자극소가 되는 예술, 나는 또 그 사이도 걸어가야 하나보다. 하여 이창동은 굳이 보기도 힘든 그 고통스런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하느냐고 묻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죽은 아이가 발견되는 더없이 고통스러운 장면을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보여준 건지도. 한 여자의 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은 주인공을 내세워 그걸 보여주면서, 그녀가 겪은 고통을 멀리서 에둘러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이유일지도.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렇게 보여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보다. 보이지 않아도 상상 가능하면 안되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밀양>이 아쉬웠던 거고 말이다. 읽어야 알고, 봐야 알고, 들어야 아는 제 3자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험하고서야 겨우 아는 존재다. 관객은 2자가 아니라 제 3자다. 그러나 3자가 2자도 될 수 있어, 영화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고 해서, 넋이 나간다고 해서 제 3자가 알 수 있다는 착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를 감독에게 묻게 되는 것이다. 배우와 감독이 불편을 선택했으면 좀 더 불편을 드러낸 뒤 치유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 방향을 상실했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이창동 감독이 지향하는 “밀양”의 세계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걸 긍정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향하도록 하는 세상 어디에나 무심히 존재하는 따사로운 “비밀의 볕”에 대해 나 역시도 동조한다. 그럼에도 그런 의식과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은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란 보다 감각적인 시각ㆍ청각을 통해 시간을 재구성하는/넘나드는 공감각 예술이 아닐까?
예술/지식로서의 영화란 생각을 떠나 개인적으로 많이 웃었던 작품은 <수면의 과학>과 <그남자 작곡, 그여자 작사>였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오락으로서의 영화, 무시할 수 없다. 영화와 소설 그 사이를 왔다하는 나는 올해도 역시나 영화와 소설 그 가깝고도 먼 사이를 오며가며 했던 것 같다, 의미와 오락 그 가까운 사이를 무심하게 통과하여.
첫댓글 '폭주기관차' 아이디에서 열정을 느끼며 한해 동안 열정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가 거의 같은 영화를 보면서 한 해를 보냈군요^^ 저도 올 최고의 영화로 '타인의 삶'을 꼽고 싶군요 . 그리고 이안 감독의 '블로크백 마운틴'....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안토니아스 라인'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있지요.
흐르는 강 님 감사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저기 저곳에 존재가 있음을 알면 좋을테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서로서로 강이 되어 만나더라는 걸 알게 될 때, 강물에 던진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마음은 순간 무늬를 만들며 멀리멀리 퍼져가는 것 같더군요...<안토니아스 라인>, 저도 언제봤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참으로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콕 찍혀진 영화였지요.<댈러웨이 부인>을 보다가, 다시금 찾아보게 된 작품입니다. 아직도 좋더군요.
아침부터 수다 한판 벌리면, <브로크백 마운틴>은 제게 영화와 함께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잭과 에니스의 포개진 셔츠를 바라보며, 가슴뭉클한 맹세(사랑)가 보여진 뒤 영화가 끝나잖아요. 영화 자막이 올라가고, 말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아니 그 전부터 불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화 속에 한껏 취해있어 의식하지 못했는데, 자막과 함께 올라가는 음악을 따라부르는 50대 가까운 남자에게 눈이 가더라고요. 물론 얼굴을 보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형체를 지닌 사람이 보였을 따름입니다.
"He was a friend of mine"을 허밍처럼 전해지는 가사와 함께, 이미 알고 있는 곡었겠죠, 제게도 익숙했으니까요, 그렇게 가사를 따라 부르는 남자분은 아내로 보이는 여자분과 함께 왔더군요. 영화로인해 뭉클 눈물이 날(난) 것 같은 몸은, 그 남자분의 허밍을 들으며, 순간,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듯 환해지더군요...제겐 그 기억이 작품 <브로크백 마운틴>과 함께 따라다닙니다. 같은 영화들을 보았다, 여러 생각들이 흘러나올 작품들을 얘기하시니,제가 수다 한판을 벌리는군요. 지난 한해, 간혹 가다 꼬리말로만 얘기나둔 흐르는 강님, 또 뵈요~
한 편 한 편 영화제목들을 보면서 저의 경험(영화보기)들을 떠올렸습니다. 저도 [타인의 삶]에 한 표! 폭주기관차 님의 한마디 설명에도 공감합니다...^^ 더불어 미처 챙겨보지 못한 영화목록들.. 다시 한 번 뇌리에 새기며.. 감사합니다..
아, 미귀님 오랜만이네요. ^^며칠전, 미귀님 생각을 잠깐 했는데, 이렇게 인사를 하는군요. 여전히 잘 지내시겠죠?...영화들을 생각하다가,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영화를 봐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한 미귀님 생각이 났어요.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을 생각하였거든요. 어떤 장소에 누구랑 처음 갔었지를 생각하다가, 아, 그래 거기에서 (유일한) 영화번개를 했지, 하는 기억을 떠올렸거든요. 후훗. 비평고원에 있으니, 이렇게 서로 흔적으로서 얘기는 듣네요. 감사는요...남들 다 아는 영화들 얘기인걸요...미귀님, 잘 지내요~종종 미귀님 소식 들음 더 좋겠고요.^^
예전에 폭주님이 '타인의 삶'에 대해 쓰신 글을 읽고 이 영화를 봤던 게 생각이 나네요. 어찌나 인상에 남던지..누군가 책을 출판할 때 'Dear.지현' 이라고 써줬으면..좋겠다.^^ 라고 생각하곤 해요. 괴기소설만 아니면요..ㅋㅋ 괴기소설을 저에게 바친다는 건 좀..-_ㅠ..^^;
그러셨어요? ^^나중 지현님이 그러한 길을 걷게 되길 저도 바래봅니다. 그리 되자면 어찌살아야할까요?... 지인 혹은 타인의 삶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되겠네요. ^^
전 스틸라이프와 타인의삶, 밀양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전 지아장커의 영화는 스틸라이프 외에 세계를 봤는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시선은 그의 특유의 태도인듯... 지아장커는 정말 실천적인 지식인인 것 같아요. 제가 며칠전 대학 면접을 볼 때 문제에서 중국의 경제성장과 불평등도의 심화/완화에 관해 논하라는 내용이 나왔는데 바로 지아장커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를만치 그의 영화는 인상적입니다. 특히나 스틸라이프는....이런 영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아 그리고 스틸라이프와 타인의 삶, 밀양은 모두 라스트신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스틸 라이프는 방향을 잃은 노동자와 저 멀리 건물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외줄을 타는 사람이 한 컷에 담기며 중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타인의 삶의 멋진 라스트신은.. 정말 감동적. 밀양의 내리쬐는 햇빛의 무게감은 영화관에서 나오는 저의 발길을 더 무겁게 만들더군요 ㅎㅎ 폭주기관차님은 이 세편의 라스트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