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정읍 태인학원 고광주 이사장
아낌없는 교육시설 투자로 매년 명문대생 배출
작성 : 2008-10-15 오후 7:12:03 / 수정 : 2008-10-15 오후 7:49:55
손승원(skynow1@jjan.kr)
지난 2000년에 정읍 태인중·고를 인수한 고광주 이사장은 "태인중·고를 명문학교로 육성하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
정읍 태인중과 태인고가 최근들어 준 농촌명문학교로 급부상하고 있다. 10여년 전까지만해도 이 학교는 전북대에 한명도 입학시키지 못할만큼 문제학교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이 학교는 이제 매년 서울대와 연·고대 입학생을 배출, 주민과 학부모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사법시험과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하는 졸업생까지 다수 탄생하면서 동문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하고 있다.
태인중고의 이같은 변신은 지난 2000년 태인학원을 인수한 춘광 고광주(高光柱) 이사장(65)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해 배움에 한이 맺혔던 고이사장은 학교인수 이후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시설투자는 물론 장학금 지급을 아끼지 않았다.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부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인성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사와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발을 씻어주는 사부자한마음대회를 개최하고 국내 유명인사를 초청, 연중 특강도 실시했다.
태인학원이 생긴이래 50여년만에 최대 중흥기를 가져온 이같은 고이사장을 주민과 지인들은 주저없이 '작은거인'이라고 부른다. 키는 오척단구에 불과하지만 맨주먹으로 부를 일궈 마침내는 육영사업과 인재양성이라는 평생의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오늘의 꿈을 이루기까지에는 각고의 세월이 있었다. 아버지 고수근씨와 어머니 이상례씨 사이에서 3남5녀중 4번째로 태어난 그는 동초등학교(42회) 6학년때 군청에 다니던 아버지가 졸지에 세상을 떠나면서 험난한 고생길에 들어섰다. 어머니의 헌신 덕분에 8남매중 유일하게 중학교(정읍중 7회)를 겨우 마쳤으나 찢어지는 가난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어머니가 눈물로 보따리 행상을 해 8남매를 먹여살리
던 어려운 때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가 물건을 떼어다 팔던 정읍 구시장내 비단집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5년 동안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월급다운 월급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비단집에서 물건을 외상으로 떼어다
팔은 돈으로 8남매의 생계를 꾸려가는 통에 주인이 자신의 월급에서 외상값을 제외해 버렸기 때문.
어릴적부터 앓아왔던 담낭염까지 힘들고 어린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약값이 없어 치료도 못한채 병을 몸에 달고 살아야
했다. 이때부터 그는 한의학을 배워 내병도 고치고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그는 비단집을 그만두고
18살에 동양한의대 전신인 2년짜리 동양통신한의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등록금은 고사하고 책살 돈마저 없어 1년만에 중도하차
해야 했다. 자신이 꿈꾸던 한의사 검정고시 제도마저 없어져 설상가상 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꺽지 않았다. 자신의 담낭염 한약을 지어주며 어려운 처지를 헤아렸던 무허가 한약방 원장이
보증을 서주고 그를 구시장내 정일당 한약방 한약조제사로 추천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8백원(현재 8만여원)이라는 적은
월급을 받았지만 한약조제기술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비록 중퇴는 했지만 1년간 배운 동양통신한의대의 교육은 그가
한의학을 깨우치는데 큰힘이 됐다. 이곳에서 2년간 한약조제기술을 배운 그는 독립해 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격증
도 없는데다 약장을 구입하고 약건재상을 할만한 돈마저 없어 눈물을 삼켜야 했다.
고심하던 그는 돈이 안드는 침구학원을 다니기로 결정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짚차를 세차해주고 받은 2백원으로
지게꾼합숙소에서 눈을 붙이며 꿀꿀이죽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끝에 1년만에 침구학원을 수료했다. 졸업후 그는 당시 칠보면 행단
마을에 살던 매부 김한두씨의 집에 기거하면서 아픈 주민들을 대상으로 침을 놓기 시작했다. 신경통과 관절염 환자들이 침을 맞고
효험을 봤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의 유명세는 서서히 시작됐다. 그는 돈이 조금 모이자 당시 교통의 요충지인 태인면 소재지로
자리를 옮겨 태창리 42-5번지에 40여년 역사의 그 유명한 '광주당한약방'의 문을 열었다. 67년에 한약업사 자격증을 획득했음은
물론이다.
그가 이곳에 둥지를 튼이후 용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한약방에는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간장질환과 좌골신경계통
를 잘본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에서까지 환자들이 넘쳐 났다. 정읍여중에 다니던, 심장판
막증으로 사경을 헤매던 여학생을 무료로 고쳐줘 방송과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는 40여년동안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적지않은 부를 축적했다. 부인 송삼자씨(65)에게는 두부 한모를 두세번 나눠 먹으라
고 할만큼 구두쇠 소리를 들어가며 지독하게 돈을 모았다. 좋아하는 막걸리 한잔도 제대로 먹지 않을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다. 덕
분에 많을때는 통장이 80개에 달했다.
"자식들에게 가난을 되물려주지 말자는 각오 아래 은행에 들어간 돈은 절대 한푼도 손을 대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서 어릴적 고생
에 대한 지독한 아품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는 이처럼 자린고비로 많은 돈을 모았지만 남을 돕는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좌우명 아
래 남모르게 37년간 1백여명의 학생들에게 수억대가 넘는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그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
는 더욱 중요하다"며 부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했다.
" 태인중고를 명문학교로 육성하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는 그는 " 학생기숙사를 건립해 학생들이 마음놓고 공부할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소년소녀가장과 홀로사는 노인들이 편안하게 살수 있도록 원룸 형태의 복지관도 조만간 짓겠다고 약
속했다.
부인 송씨의 내조와 헌신봉사가 없었다면 자신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40여년을 동거동락한 부인에 대한 진한
사랑이 엿보인다. 아버지의 근검절약과 끈기, 성실함을 이어받은 큰딸 은경씨(42)는 정읍시청 공무원, 큰아들 성호씨(41)는 태인
고 행정실장, 작은아들 성진씨(33)는 전주병원에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