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데살로니가 전서는 주후 52년경에 기록된 것이고, 후서는 53년 중반에 기록된 것으로 성경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약 일년 반 후에 후서가 기록된 것입니다. 일년 반만에 다시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바울 사도가 편지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첫째로, 성도들의 믿음이 자랐다는 것. 둘째로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여 졌다는 것. 그리고 핍박가운데서도 인내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교회에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우선 인사말은 전서와 동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라고 인사합니다. 은혜와 평강 이것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로부터 받아 누리는 가장 큰 선물이요 복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사말에 그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배고플때는 식사여부를 묻는 것이고, 요즈음은 다이어트가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인사말이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사말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그 첫째가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것입니다. 일년반만에 믿음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살전 3:10절에서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란 선물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하는 의문이 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셔 모퉁이돌 선교회 이삭 목사님의 서신을 일부 인용합니다.
"영어에서 사용하는 '믿는다(believe)'와 '의지한다(trust)'를 우리는 자주 혼동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면, 우리는 예수를 의지하는 삶의 시작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은 말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믿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믿어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쉽게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분이 주인 노릇을 하시도록 모두 맡긴다는 말입니다. 나라 정치나 경제도, 사회의 타락과 이웃의 죄악도. 교회의 허물도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운영자이신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냥 버려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고, 이루어 주신줄로 믿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그 분의 존재를 믿으며, 그 분의 임재를 확신하고, 그 분이 주인이심을 양도해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나아갈 만큼 회개하고 의롭고 거룩한 자리에 있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짜증 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예'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짜증스럽다는 말은 제가 아직도 하나님의 뜻보다 옳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예'와 '아멘'으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연습은 우리 앞에 계신 영적 권위자들 즉 어머니 아버지 혹은 형님 누나 등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론 그 대상이 저보다 어린 사람일 수도 있고, 지식이 없는 할머니 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분이 성경적으로 옳은 말을 하게되면 '예'로 답하여야 합니다. 그 분이 영적 권위자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분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하는 훈련을 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먼저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예'할줄 모르면서 하나님께 '예'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믿는 다는 것, 즉 의지한다는 것은 그 분의 하는 일을 모두 믿어 드리는 것입니다. 때로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아니 대부분이 제 생각과는 달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제 생각처럼 되도록 하려면 제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그릇으로 바뀌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꼭 같은 수준에 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은 제 뜻대로 맞추지 않습니다. 제 뜻대로 하면 '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제 성질대로 화내는 것으로, 주먹질이나 화염병으로 붉은 머리띠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불끈 쥔 주먹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나라나 회사가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는 듯 보이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 중략(북한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과 소망의 사람들 이야기..........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앞에 엎드리십니까? 얼마나 자주 입을 열어 하나님께 아뢰고 계십니까? 친구들과 남편과 자녀들과 떠드는 시간만큼이라도 하나님과 대화하고 계십니까? 이제부터라고 시작하십시오. 거룩한 부담을 가지십시오. 예수쟁이는 예수쟁이다운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삶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아무른 부담감이 없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바가 무엇입니까? 버려라! 벼려야 합니다. 끊어라! 끊어야 합니다. 떠나라! 떠나야 합니다. 죽여라! 멸절시켜라! 멸절 시켜야합니다."
믿어서 구원얻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자라나는지를 보고자 길게 인용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우리의 범사에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믿음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 자신의 현재와 장래를 주님께 의지하고 있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앞에 세우심을 입은 것은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온 열방가운데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려야 할것들을 넘어뜨리고 새롭게 건설하며 심게하는 일을 위하여 예레미야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복음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종교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이 빠져 나갔습니까? 어느 정도는 종교적인 두려움이나 부담감이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도 하시고 행동도 하는 것을 보아서 종교성은 어느정도 무너 졌다고 봅니다. 물론 계속하여 또 다시 일어나지만 그러나 종교적인 부담감에서 자유하게 된 부분을 여러분 자신도 아실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종교성이 무너진 곳에 무엇이 들어 섰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믿음의 역사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들어서 있습니까? 무너뜨림은 다시 세우기 위함인데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음 가득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교성이 무너진 자리에 이기적인 자기 욕심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종이 가득하게 들어 있습니까? 전에는 종교적인 두려움과 부담감으로라도 함부로 못하던 일들을 이제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는데 그 귀신이 쉴곳을 얻지 못하여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와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기에 나가서 저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종교적인 내용들이 빠져 나간 자리에 복음으로 가득채워지고 복음으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소망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할텐데 오히려 자기 이기적인 욕심이 더 들어차게 되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일 있으면 추수감사절입니다. 성경적인 절기지킴은 아니고 우리나라가 미국의 선교를 받아서 미국적 추수 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구제헌금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전에 추수감사헌금을 하는것과 복음을 듣고 나서 하는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감사함으로 형제를 위하여 내어 놓는 것이 전에 하는 것보다 더 많습니까? 자기를 위하여여는 부요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오히려 인색하여지지 않았습니까? 너희 형제가운데 지극히 적은자 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살을 뺀다고 돈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살빼는 방법 간단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새벽기도 나오십시오. 잠을 덜자고 일찍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그렇게 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일부러 멀리서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옮니다. 그러면 살빼는 비용만으로도 얼마든지 구제헌금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담이 되십니까? 부담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 방종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가 복음을 듣고서 약 일년반만에 믿음이 더욱 자랐다고 하는 그 감사와 자랑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3절을 봅니다.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것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까?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더욱 자라난 증거가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여 지는 것입니다. 김춘자 집사님의 두 딸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습니다. 병원비에 보태라고 어떤 분이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금액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관심이 아닙니까? 형제 사랑이 더욱 풍성하여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나의 식구, 나의 친한 사람만 챙기고 있습니까? 몇사람 되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제각각입니까? 정말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가야할 길과 행할 일에 대하여 서로 나누며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제대로 잡아 가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3:11-13절을 봅니다.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사도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서신에서 보냈습니다. 전서에서도 이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서에는 더욱 그러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의 역사가 풍성하여 지고, 소망의 인내가 굳건하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소망의 인내를 말하고 있습니다. 소망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인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 전세에서도 말한바 소망의 인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음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믿음에 세계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 손에 잡힌 것, 눈에 보인는 것 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을 결국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 화요 성경공부하면서 이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지 못할까? 하나님께서 일하실 기회를 우리가 드리지 않는 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맛볼수 있겠는가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용할 양식만 있더라도 감사하면서 기다려 보면 하나님의 손길를 알수가 있을텐데 양식을 주시든지 굶게 하셔셔라고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실텐데, 일용할 양식으로는 불안해서 한달치 일년치 백년치 자기 자식대에 이르기까지 준비하여 두고 있으면서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공중의 새와 들에피는 들풀하나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이 모든 것이 불타버릴 것을 믿겠습니까?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것들로 나의 안전지대를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야 핍박가운데서도 인내하게 됩니다. 핍박과 환난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있었지만 그러나 믿음의 역사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희미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분명하여 지고 선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자람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다면 더욱 믿음을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를 위하여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하기를 기도하였더니 더욱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풍성하여 졌습니다. 이러한 열매들이 더욱 풍성하여 지도록 더욱 믿음이 자라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