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영웅 에드먼드 힐러리 ■
양봉업자, 세계적 산악인 되다
1953년 텐징 노르게이와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1956~58년 남극탐험 … 트랙터 개조해 남극점 도달
네팔에 학교·병원 세워 교육과 건강발전에도 헌신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에드먼드 힐러리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9차 원정대에 참가한 13명의 대원 가운데 키 큰 사나이가 한명 있었다.
바로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사진)였다. 당시 힐러리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유명한 산악인이었지만, 제1차 정상 공격조에는 선발되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등반실력을 갖췄지만 영국인이 아닌 뉴질랜드인이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공격하는 대원으로 뽑히는 영광을 안지 못했다.
에드먼드 힐러리에게는 운명의 시간이었던 1953년 5월26일. 제1차 정상 공격조 토머스 보딜런(28)과 로버트 에반스(34)가 사우스콜 제8캠프를 떠나는 모습을 에드먼드 힐러리는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보딜런과 에반스는 새롭게 제작한 산소기구를 이용해 정상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신은 힐러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상으로 나아가던 두 대원은 8760m의 에베레스트 남봉에 멈춰섰다.
밑에서 망원경 등으로 지켜보던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모두 함성을 질렀다.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고.
하지만 정상 공격조들은 그곳이 정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남봉을 지나 주봉이 저 멀리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바로 훗날 힐러리 스텝으로 명명되는 절벽이었다.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또 있었다. 바로 산소기구였다. 정상 등정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폐쇄식 회로 산소장비가 강추위에 고장이 나면서 그들의 전진을 멈추게 했다.
◆뉴질랜드에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에드먼드 힐러리는 1919년 7월2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질랜드 남알프스에서 산을 타기 시작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입대, 항해사로 근무했다. 제대 후 그는 아버지의 양봉업을 도와주며 틈틈이 등반기술을 쌓았다.
그는 로우(J. Lowe)에게 빙벽과 암벽을 배웠으며 1947년 유명한 뉴질랜드 등산가 해리 아미레스를 만나면서 등반실력이 급격하게 향상됐다.
이들과의 만남은 1953년 에베레스트 등정에서 가장 어려운 힐러리 스텝을 돌파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힐러리는 1950년 등반의 고장 유럽 알프스를 찾아 융프라우, 몬테로자 등을 등반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마침내 힐러리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등반을 했다. 1951년 힐러리는 조지 로우, 에드 코터, 에어리 리드포드와 함께 인도 가르왈히말라야의 무쿠트 파르바트(7243m)를 세계 초등했다. 뉴질랜드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에서 힐러리는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며 로우와 함께 정상에 오르며 자신의 존재를 세계 산악계에 알렸다.
◆영국의 초대
영국의 에릭 십턴은 1951년 에베레스트 정찰대를 파견하면서 에드먼드 힐러리와 조지 로우를 대원으로 초청했다. 당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하던 영국으로서는 등반력을 갖춘 에드먼드 힐러리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정찰등반은 에드먼드 힐러리가 2년 후 정상에 오르는데 자신감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힐러리는 조지 말로리와 에릭 십턴이 “도저히 등반할 수 없다”라는 웨스턴 쿰을 유심히 살폈다. 힐러리는 당시 산악계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웨스턴 쿰을 돌파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돌아왔다.
1952년 힐러리는 세계 6위봉 초오유(8201m) 원정에 참가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듬해 영국이 제9차 원정대를 구성하면서 에드먼드 힐러리는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원정대원으로 참가했다. 에드먼드 힐러리는 셰르파족 사다인 텐징 노르게이와 완벽한 조화를 만들며 정상 등정 가능성을 높였다.
텐징과 힐러리는 순수한 영국인이 아닌 불리한 조건으로 2차 정상 공격조로 밀려났지만 한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1953년 5월29일 오전 11시30분 마침내 세계의 지붕 8850m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힐러리가 정상에서 찍은 텐징 노르게이의 힘찬 사진은 전 세계로 타전됐으며, 오늘날 산악계에서 가장 완벽한 정상 사진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세계적 스타로 부상한 에드먼드 힐러리
에베레스트 등정 후 에드먼드 힐러리는 지위가 완전히 달라졌다. 뉴질랜드에서 벌을 치던 양봉업자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대목이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뉴질랜드 5달러짜리 지폐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다.
힐러리는 2005년 6월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뉴질랜드인 500명 이상을 대상으로 `뉴질랜드 유명인사 50명'을 온라인 신뢰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뉴질랜드에서 가장 신뢰를 받는 인물인 것으로 조사됐다. 그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뉴질랜드에서의 그의 인기는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3년 영광을 뒤로한 채 에드먼드 힐러리는 수많은 탐험에 나섰다. 1954년 바룬체(7220m)를 등정했으며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남극탐험에 참가해 농사용 트랙터를 개조, 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1960년 마칼루(8463m) 등반, 1963년 캉테카(6690m) 원정을, 1963년 탐세르쿠(6520m)원정대를 조직, 성공했다. 1977년에는 인도에서 가장 길고 성스러운 갠지스강을 제트 보트를 타고 여행하는 등 그의 도전과 모험은 끝없이 이어졌다.
에드먼드 힐러리의 가장 위대한 부분은 네팔 교육에 헌신했다는 것이다. 힐러리는 각종 기금을 모금해 네팔지역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 보건소 등을 만들어 네팔인들의 교육과 건강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어머니가 에드먼드 힐러리경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딸의 이름을 힐러리로 지었을 정도였다.
(경남산악연맹 이사·경남도교육청 교육홍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