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2002년 5월/360쪽/9,800원
▣ 저 자 테리 라이언
이 책의 주인공인 이블린 라이언의 여섯 번째 자녀로 오하이오 주의 볼링 그린 주립대학교에서 영어와 신문학을 전공한 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작가 겸 만화가로 일하고 있다.
▣ 역 자 이은선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을 졸업했고, 출판 편집자를 거쳐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그 동안 옮긴 책으로는 『승려와 수수께끼』『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아버지라는 이름의 큰 나무』『딜버트의 법칙』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든 것이 궁핍하던 시절 미국 오하이오 주 디파이언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술에 찌든 남편을 대신해 콘테스트 응모만으로 10남매를 키워낸 이블린 라이언이라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2001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 이 책은 미국 전역을 감동시키며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가족애의 열풍으로 몰아넣었다. 자신을 위해서만 돈을 쓰는 이기적인 남편에다 12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꾸려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가난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밝은 미소와 여유로 남편과 아이들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다이얼 비누부터 크리넥스 티슈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응모 편지를 받아보지 않은 회사가 없었고, 라이언 집안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가 부친 응모작들은 기적의 편지로 되돌아와 가족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나, 학비가 부족할 때, 심지어 집이 넘어가게 된 상황에서도 이블린은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던 이블린의 삶의 자세는 소망의 씨앗이 되어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하게 자라났다.
자식들은 이블린의 바람대로 모두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하나둘씩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녀는 그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당선되어 받은 상품들과 상금은 자식들을 위해 모두 사라졌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큰 선물들을 자신의 삶에 가득 채웠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바쳐 얻은 소중한 자식들로.
▣ 차 례
1. 우리 엄마는 콘테스트 여왕!/중중고품 침대/슈퍼마켓 싹쓸이 대작전
2. 엄마는 타고난 발명가/‘올해의 아버지’ 상/징글맞게 행복하다는 게 문제야!/아빠의 입원/아빠랑 울렁울렁 언덕 타러 갈 사람?
3. 엄마표 종교/다섯 개의 여행가방/텅 빈, 엄마의 보물창고
4. 라벨리어 클럽 아줌마들/비둘기 통신/글짓기 기계, 우리 엄마
5. “엔진이 과열됐어요”/에치 할머니/운명이라는 것
6. 절망의 늪에 빠지다/내 생애 최고의 순간
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2002년 5월/360쪽/9,800원
프롤로그
우리 엄마 이블린 라이언은 열 남매의 어머니이고,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의 아내였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1950년대와 1960년대였기에 여성들은 가난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엄마 같은 상황에 처했던 주부라면 누구라도 아이들을 키우기가 암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엄마는 우리들에게 인생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 가혹한 시련과 가난 속에서도 충만함과 너그러움과 담대함을 가르쳐 주었다. 엄마가 '향신료'라고 주장했던 벌레가 둥둥 뜬 수프로 끼니를 연명하면서도 우리들은 전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대공황 이후 경제가 차츰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각종 신문이나 방송에 여러 개의 콘테스트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엄마는 지방신문에 글을 투고하고 받은 원고료 1달러씩을 모아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콘테스트에 입상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했다. 영혼이 풍요로우면 가장 막막한 곳에서도 살 수 있는 법이다. 특유의 낙관주의로 온 집안을 감쌌던 우리 엄마 이블린 라이언처럼 말이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오른쪽 귀에 연필을 꽂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다리미판 앞에 서 있는 엄마를 보며 자랐다. 엄마는 다림질을 할 때 아이디어가 가장 잘 떠오른다고 하셨다. 해마다 공책을 새로 사서 1등 상을 받을지 아니면 허탕을 칠지 모를 문구들을 열심히도 적었다. 엄마의 글솜씨 덕분에 우리 대가족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생활필수품을 사용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엄마는 큰상을 받을 때마다 주최측에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가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창문 앞을 서성이며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리곤 했다.
우리 엄마는 콘테스트 여왕!
1953년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부터 엄마는 콘테스트 가뭄에 시달렸다. 하지만 6년 동안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에 비하면 콘테스트 가뭄은 걱정 축에도 못 끼었다. 욕실도 없이 방만 달랑 두 개인 그 집은 우리 식구들이 살기에 너무 작았다. 게다가 방이 두 개라고는 하지만 엄마, 아빠가 한 방을 차지하고 나면 우리 아홉 남매가 나머지 한 방을 써야 했다. 하지만 이 생활도 막을 내려야 했다. 집주인이 몇 달 뒤엔 집을 비워달라고 한 것이다. 아빠는 이 말을 듣고도 어디선가 해결책이 생기겠지 하며 천하태평이었다. 어디로 이사해야 할지, 필요한 돈은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엄마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즈음 큰오빠 딕이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한 쪽 팔만 부러지는 가벼운 사고였지만 자전거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새 자전거를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딕 오빠는 신문배달을 다른 아이에게 넘겨줘야 했다. 그러고서 며칠 뒤 엄마는 철물점에 들렀다가 웨스턴 오토에서 주관하는 자전거 콘테스트 광고를 보셨다. <어린이 여러분! 이 문장을 25개 이하의 단어로 마무리지어 보세요. "내가 X-53 슈퍼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다."> 엄마는 응모권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목표는 우수상 100편에게 주어지는 자전거를 타서 딕 오빠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내가 X-53 슈퍼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안정성과 서비스, 디자인이 더 한층 새로워져
웨스턴 플라이어 특유의 기능과 어우러지면서
어디에 세워놓아도 X-53 슈퍼 플라이어가 단연 돋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웨스턴 플라이어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집을 비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엄마 얼굴에 초조한 빛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이었다. 번드르르 윤이 나는 새까만 폰티악이 커브를 돌아 우리 집 앞에 서더니 짙은 곤색 줄무늬 양복 차림의 남자 셋이 차에서 내려 우리 집 쪽으로 걸어왔다. 엄마는 길을 잃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엄마의 검은색 눈동자가 키 큰 남자의 파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라이언 부인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딕이라는 아드님이 댁에 있습니까?" "네." 엄마는 뒤에 서 있던 딕 오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이 아이가 딕인데, 무슨 일이신가요?" 세 남자가 갑자기 한 목소리로 외쳤다. "축하한다, 딕! 5,000달러를 상금으로 받게 되었단다!"
6만 5,0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딕 오빠가 상금 5,000달러(지금으로 환산하면 3만 5,000달러)와 세탁-건조기 세트, 그리고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를 받게 된 것이었다. 엄마가 자기 이름으로 콘테스트에 응모한 줄 전혀 몰랐던 딕 오빠는 눈만 끔뻑일 따름이었다. 엄마는 그 돈이면 집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눈물을 흘렸고, 그 모습을 보자 우리 형제들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한눈에 우리 집 형편을 짐작했을 세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대상이 돌아갔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감동하는 눈치였다.
부모님은 상금을 가지고 워싱턴 애비뉴 기찻길 근처에 있는 60년 된 방 네 개짜리 이층집을 계약했다. 상품으로 받은 X-53 슈퍼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 덕분에 오빠는 신문배달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엄마가 그렇게도 의지하는 하나님과 우리 집이 직통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슈퍼마켓 싹쓸이 대작전
새 집은 우리가 이사하고 난 뒤에도 빈집처럼 보였다. 우리에게는 가전제품은커녕 가구를 살 여유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턴 오토 콘테스트 이후 몇 달 동안 엄마의 당첨행진이 이어지면서 이곳도 집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웨스팅하우스 냉장고와 냉동고, 커피메이커, 담요 세 장, 부엌용품 한 세트, 모토롤라 라디오, 벽시계…. 그 중 1등 상으로 받은 대형 냉장고와 냉동고는 군대나 식당에 어울릴 만한 것이었는데 아이스크림 한 통만 달랑 넣어두니 더욱 휑해 보였다. 루시 고모가 가끔 와서 엄마를 억지로 슈퍼로 끌고 가 생필품을 사주고 가시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엄마가 누군가!
시브룩 팜스 콘테스트에서 엄마는 시를 지어서 슈퍼마켓 상품권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고작 슈퍼마켓 상품권에 실망했겠지만 우리 엄마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상품권을 사용할 수 있는 날이 가까워오자 엄마는 온 식구를 모아놓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생각을 크게 해야지. 공짜로 카트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겨우 세일하는 닭고기나 생선튀김으로 시간과 공간을 낭비해서야 되겠니? 이번 기회에 너희들도 뉴욕 비프스테이크, 바닷가재, 캐비어, 연어스테이크 같은 것도 먹어봐야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쇼핑 카트가 너무 작고, 단 10분내에 쇼핑을 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시작 신호와 함께 동네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싹쓸이 대작전을 마친 엄마는 진열대로 오는 길에 프랑스식 초콜릿 소스와 고급 아이스크림, 브로콜리, 송이버섯을 곁들인 라쟈냐를 위로 얹더니 마지막 몇 초를 남겨놓고 신선한 파인애플과 지팡이 모양의 사탕까지 끼워 넣었다. 산더미 같은 카트를 아슬아슬하게 끌며 코너를 돌아 나오는 엄마를 보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엄마가 싹쓸이한 식료품은 전부 합쳐서 411달러 44센트 어치였다.
우리는 깡통들이 수북히 쌓인 식탁 주위로 모여 앉았다. “엄마, 그런데 캐비어가 뭐예요?” 바브가 물었다. “물고기 알이야.” 엄마가 대답했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물고기 알이라는 설명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우리 형제들 중에서 캐비어에 손을 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 육군 연구결과에 따르면 낯선 음식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똑똑하대.” 엄마가 말했다. 그러나 바닷가재 역시 우리 형제들에게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징글맞게 행복하다는 게 문제야!
우리 엄마는 시끄러운 야구광이었다. 몇 년 동안 아들의 경기를 관전하며 어찌나 소리를 질렀던지 나중에는 목소리가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직직대는 소리처럼 바뀔 정도였다. 엄마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연습이 필요한 아들이 있으면 한두 이닝 정도 연습 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함께 노는 야구'에 대한 시 쓰기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덴버 포스트’에서 상금 5달러를 받기도 하셨다.
‘야수 선택’
요리를 잘하는 엄마도 있고,
바느질 잘하는 엄마도 있고,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달려오는 엄마도 있지요.
하지만 난 말괄량이처럼
1초만에 슬라이딩할 수 있는
그런 엄마가 좋아요.
야구는 우리 가족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딕 오빠가 열 살짜리 리틀리그 선수였을 때 오빠가 투수로 대성할 자질이 있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엄마였다. 오빠는 불독스 팀의 선발투수 역할을 맡았다. 딕 오빠가 불독스 팀에서 데뷔전을 치르던 날이었다. 엄마가 그렇게도 보고싶어 했던 데뷔전이었는데 막내가 볼거리에 걸려 보러가지 못하게 되자 엄마는 대문까지 나가 딕 오빠를 배웅하면서 그 날 오후에 주운 네잎클로버를 선물했다. 딕 오빠가 그때까지 받은 네잎클로버를 다 합치면 평생 쓰고도 남을 것이다. 네잎클로버 찾기 선수였던 엄마는 모아두었다가 행운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선물했다.
딕 오빠는 네잎클로버를 뒷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엄마. 오늘은 그게 부적이라도 동원하고 싶은 날이에요."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아, 행운을 빈다는 뜻에서 선물한 게 아니란다. 승리 투수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으면 네잎클로버도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싶어서 그런 거지."
엄마는 늘 이처럼 삶의 희열이 빛나는 분이었다. 아빠가 알코올중독증 때문에 집안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갈 때도 그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들을 얼마나 행복하고 밝게 키우느냐는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들의 미래에 희망을 심어 주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느 날 밤인가 위스키와 분노로 잔뜩 취해서 들어온 아빠는 거실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뭐가 문제인지 알아? 징글맞게 행복하다는 게 문제야!" 이 말에 엄마와 우리 형제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중에는 아빠까지 웃음보가 터졌다.
아빠의 입원
아빠가 딕 오빠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졸도하여 병원에 입원하시는 일이 벌어졌다. 나흘이 지났지만 의사들은 신경쇠약증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했다. 엄마는 날마다 병원까지 걸어서 왔다갔다해야 했다. 아빠가 입원한 상황이니 우리 가족의 생존과 평화는 전적으로 엄마의 두 어깨에 달려 있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라도 아빠가 빨리 퇴원하셔야 했다. 아빠는 2주 동안 입원한 뒤 퇴원 날짜를 받았다. 엄마와 루시 고모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오는 아빠의 모습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했다. 야구 경기를 보러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몸집이 좋으셨는데 2주 새에 야위고 구부정했으며 듬성듬성 흰머리가 보였다. 좀 누워야겠다던 아빠는 며칠이 지나도 일어날 줄 몰랐다. 술도 마시지 못했다.
아빠랑 울렁울렁 언덕 타러 갈 사람?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이틀이 지나자 예전 모습을 찾은 것 같았다. 다시 출근을 시작한 첫 날, 일찍 퇴근한 아빠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빠랑 울렁울렁 언덕 타러 갈 사람?” 아빠가 벳시, 바브, 데이브를 보며 물었다. ‘울렁울렁 언덕’은 아빠판 디즈니랜드였다. 길을 달리다 불룩 솟은 곳이 있을 때 아빠가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으면 자동차 바퀴가 1~2초 동안 허공에 붕 뜨고, 잠시 하늘을 나는 듯한 행복한 착각에 빠지는 놀이였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빠는 다정다감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고, 재미있고, 사랑스럽고, 정이 많은 분이었다. 아빠는 우리를 태우고 시골길을 따라 오랫동안 드라이브를 했고, 사과와 토마토를 잔뜩 사다주시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음식을 만들어 주실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빠는 너무 허약하고 힘이 없어 보여서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었다. 아빠는 인생의 곡선이 바닥까지 다다랐음을 분명 느꼈을 것이다.
다섯 개의 여행 가방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일생일대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였고, 그 전해 겨울에 이미 딕 오빠는 마이너리그 선수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구단에 스카우트되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버브 오빠도 160명의 후보 가운데 최종 선발자 3명안에 뽑혀 그 해 여름 타이거타운으로 떠났다. 두 오빠의 승전보는 우리 가족 모두가 노력한 결과였다.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보스턴의 어느 여행가방 회사가 연 콘테스트에서 다섯 개짜리 여행가방 세트를 탄 덕분에 두 오빠의 짐을 꾸릴 수가 있었다. 엄마는 당분간 쓸 일이 없길 바라며 남은 여행가방 두 개를 침실 벽장 속에 넣었다. 한 사람씩 떠날수록 우리의 공간이 넉넉해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언니, 오빠와 헤어지는 게 싫었다. 앞으로 영영 못 만나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작품들이 저마다 성과를 올린 덕분에 1960년 여름부터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어마어마한 상품도 있었다. 엄마는 싱글벙글하며 상품들을 뜯지도 않고 침실 보물 벽장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오하이오 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에서 엄마 이름이 보일 때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는 상금이 순식간에 없어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한 턱 낼 줄도 아시는 분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훨씬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보물창고
나는 딕, 버브, 로그 오빠도 보고 싶었지만 리 앤 언니가 가장 보고 싶었다. 언니는 키가 크고 재주가 많았는데 나와 정반대였던 리 앤 언니는 빨래, 다림질, 청소 등 시간 나는 대로 엄마를 도왔다. 그러나 언니가 열여덟 살에 간호학교에 입학하자 그 때까지 언니가 하던 일은 아홉 살인 내게 넘어왔다.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아침 청소를 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런데 청소할 때 우리가 손대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엄마의 보물창고’인 침실 벽장이었다. 그 벽장은 서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높았는데 만약 우리 집이 우주라면 그 곳은 블랙홀이었다. 그 곳은 엄마가 받은 상품들을 모두 모아놓은 곳이었다. 가전제품이 고장나면 엄마는 컴컴한 벽장 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뒤져서 마침내 새 것을 들고 나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벽장 앞에 반원 모양으로 서서 엄마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번째 시험에서 전과목 A를 받아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던 어느 날 엄마는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를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높이 15cm에 길이 1m도 넘는 초대형 샌드위치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엄마가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짤막한 노래 멜로디에 맞게 샌드위치의 이름을 지어보라는 콘테스트 광고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 주가 끝나갈 무렵 엄마는 샌드위치 이름을 어찌나 많이 만들었는지 응모 때 동원할 수 있는 가명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고기 치즈 샐러드 넣어/날름 먹고 입 싹 씻는/샌드위치” 엄마의 말에 우리들은 모두 배꼽을 잡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 재미있어요, 엄마.” 브루스 오빠가 말했다. “좋았어, 그럼 이 작품도 보내마. 우표값도 4센트밖에 안 되니까. 4센트로 이만큼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니?”
10월이 되자 나는 고등학교의 새로운 수업에 적응했고, 길 건너편의 조그만 빵집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 저녁 일하고 3달러를 받을 때면 뿌듯했지만 덕분에 내 손과 머리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떠날 날이 없었고, 나는 한동안 쿠키를 멀리했다. 그 즈음에는 콘테스트에 당첨되더라도 돈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언니와 오빠들이 떠났는데도 우리 집 경제사정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신 아빠는 월급에서 용돈으로 챙기는 금액이 날로 늘어갔다. 엄마는 무책임한 아빠를 보며 빚 문제로 다그칠 때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엄마는 더욱 조바심을 냈다.
12월 중순의 어느 날 밤, 나는 몇 달 동안 빵집에서 받은 돈을 세어보았다. 모두 합쳐서 36달러였다. 엄청난 부자가 된 것이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리다가 엄마하고 이 돈을 나누어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빚진 돈이 많아서 아무리 우리 엄마라고 해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12달러는 다시 주머니에 넣은 다음 24달러만 들고 거실로 갔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서 무릎 위에 콘테스트 공책을 올려놓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냉장고를 샅샅이 뒤져/있는 대로 쓸어 넣은/샌드위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잠이 깬 엄마에게 24달러를 드리는 순간 나는 갑자기 천사로 돌변했다. “잠깐만요, 엄마. 더 있어요.” 나는 남겨놓았던 12달러마저 가지고 와서 엄마에게 드렸다. 하지만 고작 36달러로 우리 식구들 선물을 어떻게 다 해결할지 나는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날 아침, 우리 모두 눈을 비비며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더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정말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많은 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도 엄마가 상품 받은 것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일부 충당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풍성한 자리를 마련한 적은 없었다. 그 날 오후, 엄마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사이에 나는 몰래 부모님 침실로 들어가서 비밀 벽장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여행가방 두 개만 달랑 남아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엄마는 몇 년 동안 모은 상품으로 우리 가족 여덟 명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콘테스트 신의 노여움을 샀는지 그 뒤로 엄마는 어떤 콘테스트에도 당첨되지 못했고, 짤막한 이야기나 시를 써서 몇 달러씩 받던 원고료마저 뚝 끊겼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어느 때보다도 심한 말다툼을 했다. “내가 끼적거린 덕분에 그나마 우리가 빚쟁이 신세를 면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요?” 이 말에 아빠는 손으로 엄마를 홱 밀쳤다. 아빠는 힘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해 있었다. 부엌 문턱에 발이 걸리며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데 의식을 잃고 바닥에 드러누운 엄마의 한 쪽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브루스 오빠가 재빨리 구급차를 불렀고, 아빠는 트레이닝복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차를 몰고 구급차의 뒤를 따라갔다.
나와 브루스 오빠, 마이크, 데이브가 자동차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며 거실에 앉아 있는데 부모님 침실 쪽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 침실로 들어가 보았다. “은총이 풍성한 주님, 우리 엄마를 지켜 주세요.” 그것은 놀랍게도 벽장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오랫동안 접근이 금지되었던 곳인 만큼 나는 조심스럽게 벽장문을 열었다. 벳시와 바브가 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불빛이 들어오자 눈을 찌푸렸다. “여기서 뭐하는 거니?” “엄마를 살려달라고 기도드리고 있었어.” 나는 두 동생이 나보다 훨씬 낫구나 싶었다. 그리고 ‘예배당’을 제대로 골랐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 뒤에 돌아온 엄마는 지친 얼굴이었다. 아빠는 엄마의 뒤를 따라 침실로 걸어가는 내내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당신이 콘테스트에 당첨될 때마다 회사 동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라이언 집안의 진짜 가장이 누군지 우린 알지’하면서 약을 올린다구.” “그럼 내가 당첨될 때마다 그렇게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가 다 그것 때문이었군요?” 아빠는 눈물을 글썽이며 뒷주머니에서 낡은 지갑을 꺼내더니 마지막 남은 10달러를 엄마에게 건넸다. 우리는 엄마가 쓰러진 광경을 직접 목격한 뒤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크리스마스 대방출 축제 이후 벽장은 한참 동안 텅 비어 있었다. 엄마는 몸을 완전히 추스르고 난 뒤에도 다시는 콘테스트에 응모하지 않기로 다짐한 것 같았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집으로 갔더니 엄마는 식탁에 앉아서 응급실 비용을 제때 갚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엄마는 또 외상값 갚아달라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한숨을 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은 브루스 오빠를 바꿔달라는 게 아닌가! 엄마는 무슨 일일까 눈썹을 쫑긋 세우며 브루스 오빠에게 수화기를 건네 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듣기만 하던 오빠가 수화기를 엄마에게 다시 넘기며 어찌나 활짝 웃는지 이빨이 전부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1등상, 1961년형 트라이엄프 스포츠카, 시버그 주크박스, 머브 그리핀이 진행하는 <새터데이 프롬> 쇼에 출연할 수 있는 뉴욕행 티켓.” 우리 여섯 명은 환호성을 질렀다. 수많은 샌드위치 가사 중 엄마가 브루스 오빠의 이름으로 보낸 것이 1등을 차지한 것이었다!
엄마는 은행에서 일하는 루시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트라이엄프 TR3의 가격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전화기 너머로 고모가 자동차 가격이 빼곡하게 적힌 안내책자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블린! 무려 2,700달러야!” 고모의 직장동료들이 “와아!”하며 축하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크리스마스 때 36달러를 받고 좋아하던 엄마는 2,700달러라는 소리에 무릎을 휘청거렸다. 우리는 마당과 동네 어귀를 돌며 몇 시간이나 춤을 추었다. “우리가 1등이에요! 우리가 1등이에요! 우리가 1등이 됐어요!”
그 주 금요일 아침, 엄마는 백화점으로 가 브루스 오빠에게 정장과 구두를 사주었다. “지저분한 청바지에 운동화를 끌고 방송국에 갈 순 없잖니?” 그리고 엄마도 새 옷을 한 벌 장만했다.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엄마는 두 개 남은 여행가방을 꺼내서 짐을 쌌다. 다음 날 아빠는 2시간이나 걸리는 공항까지 두 사람을 데려다주었고, 두 사람은 곧장 뉴욕으로 날아갔다.
방송 녹화가 시작되자 엄마는 브루스 오빠에게 마지막으로 다짐했다. “샌드위치 이름은 네가 지었다고 해야지 엄마를 들먹이면 안돼, 알았지? 응모작이 본인의 것인지 확인할 테니까 말이야.” 마침내 오빠의 차례가 되었다. 머브 그리핀은 샌드위치 이름짓기 콘테스트의 우승자라며 브루스 오빠를 소개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 재미있는 표현은 어떻게 생각해냈나요?” “우리 집은 형제가 열 명이나 되다 보니 냉장고에 먹을 게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엄마가 무대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브루스 오빠가 엄마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계신 엄마가 도와주시기도 했고요.” 오빠는 엄마에게도 ‘약간의’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라벨리어 클럽 아줌마들
트라이엄프 자동차는 돈으로 바꾸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딜러에게 2,100달러를 받고 넘기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우리는 숨통이 좀 트였다. 엄마는 운전을 할 줄 몰랐고 배울 생각도 없었다. 우리 집안의 운전기사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운전 거부를 일종의 독립의지의 표현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근육과 뼈를 연료 삼아 도서관, 백화점, 병원, 우체국 등 어디든지 걸어다녔다. 걸음걸이를 보면 엄마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음을 예상하는 사람 같았다. 엄마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사뿐사뿐 발을 옮기며 걸었다. 4센트짜리 우표를 사러 우체국에 가는 길이라고 해도 이렇게 목표가 뚜렷한 여성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해 겨울 내내 엄마는 라벨리어 클럽의 도서 아주머니와 편지나 전화를 주고받으며 라벨리어 클럽의 소식을 들었다. 라벨리어 클럽은 TV 출연 이후 만난 콘테스트 애호가들의 모임이었다. 콘테스트마다 응모권에 라벨을 붙여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라벨을 모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라벨 뒤에 ‘리어’를 붙인 이름이었다. 콘테스트를 사랑하는 주부들이 엄마 말고도 많다는 것은 당연히 기뻤다. 외로움을 벗어던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알고 봤더니 도서 아주머니는 텔레비전 열한 대뿐만 아니라 라디오 서른아홉 대를 받은 적이 있는 베테랑 콘테스트 응모자였다. 라벨리어 클럽 아주머니들이 저마다 콘테스트 이야기며, 지난달에 어떤 작품에 응모했는지 편지로 써서 봉투 안에 넣고 다음 사람한테 돌리는 것을 ‘비둘기 통신’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는 콘테스트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고 각자 서로의 응모작에 대한 충고도 곁들였다. 콘테스트 상품의 발길도 끊긴 마당에 엄마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글짓기 기계, 우리 엄마
폭풍이 다가오고 있던 어느 날, 페이퍼 메이트는 콘테스트 당선자를 발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는 6등에조차 뽑히지 못했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분명 사기였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머리가 나쁜가봐. 그렇게 잘 된 작품들이 계속 떨어지면 앞으로 콘테스트를 포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내가 말했다. “글쎄다. 떨어지면 나도 슬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글짓기는 나한테 정원일과 똑같아.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나는 만족할 수 있거든. 그리고 ….” “말도 안 돼요! 모두 바보, 멍청이야!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다리미를 내려놓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터프, 누구보고 하는 말이니? 넌 지금 심사위원들이 아니라 엄마나 너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잣대질하는 사람들한테 화풀이를 하는 것 같구나.” “그게 아니라….” “너희 학교 선생님들이 널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거 기억나니? 넌 그때 네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여줬잖아. 안 그래?” “맞아요. 그랬지요. 하지만 엄마! 그 때 선생님들한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가만히 있는 우리를 못살게 괴롭히는데 왜 보고만 있었나요? 그 때 누구 생각이 났는지 알아요?” “누구? 아빠?” “그래요! 모두들 아빠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우리는 아빠한테 아무 소리 안 하고 참아야 하지요?”
엄마는 오래 전부터 이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밤 우리가 치르는 전쟁을 생각하면 당연한지도 몰라. 하지만 터프, 네가 정말로 미워하는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렴.”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는 오래 전에 인생을 단순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깨달은 적이 있어. 남의 잣대에 흔들리지 말 것, 그리고 남을 잣대질하지 말 것. 그 때부터 엄마는 남을 판단하게 될 때 두 번 생각하게 되었단다. 네 아빠의 경우에도 그랬고, 엄마는 내 작품이 잘 되었다느니 못 되었다느니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 몇 푼이나마 벌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을 뿐이야.”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잊지 말자꾸나.”
엄마는 빠르게 움직이는 먹구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비둘기 통신원 중 한 명인 엠마 아주머니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폭풍이 센 날이면 다른 회원들도 엠마 아주머니 걱정뿐이었다. 소아마비에다 천식이 심한 엠마 아주머니는 폭풍으로 전기가 나가면 다시 들어올 때까지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호흡 보조기에 펌프질을 계속 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엠마 아주머니는 며칠 뒤 씩씩하게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괜찮아요. 빌어먹을 폭풍이 계속 문을 두드렸을텐데 다른 분들은 모두 지하실로 안전하게 대피했나요?”
절망의 늪에 빠지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엠마 아주머니네 집에 다녀온 다음 날, 조간 신문을 펼쳐든 엄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뒷면에서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재산세 미납자’ 명단에 적혀 있는 이름은 다름 아닌 ‘리오 J. 라이언’이었다. 엄마는 다른 면은 보지도 않은 채 신문을 접었다. 이 즈음 또 다른 불행이 찾아오고 있었는데 워낙 살금살금 다가온 터라 비둘기 통신원들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콘테스트들이 점차 추첨식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글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재수가 좋은 사람들에게 밀려 발 딛고 설 땅이 없어지는 것이다. 콘테스트가 사라지면 엄마의 돈줄도 끊기는 셈이 아닌가!
그 해 겨울에는 콘테스트가 거의 열리지 않았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닥터 페퍼 콘테스트가 4월에 시작되자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셈이기에 라벨리어 회원들은 모두 분주해졌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넣어 5행시의 마지막을 채우는 것이었는데 상품이 푸짐했다.
내 생애 최고의 콘테스트는
맛이 기막힌 닥터 페퍼 콘테스트
독특하고 산뜻한 우리의 닥터 페퍼
신선하고 상큼한 우리의 닥터 페퍼
“닥터 페퍼가 있는 바로 지금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우체국에서 응모작을 붙이고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는 멈칫했다. 집을 잘못 들어왔나 착각할 만큼 분위기가 침울했던 것이다. 재산세 미납자로 신문에 이름이 오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사건이 터진 날이었다. 방금 누군가와 통화를 끝낸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은행원 커터 머피 씨 전화였는데 한 달 안으로 4,000달러를 갚지 않으면 이 집을 처분하겠다는구나.” 우리 다섯 명 모두 동시에 입이 딱 벌어졌다. “아빠가 1년 전에 엄마 몰래 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모양이야.” 엄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금세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별명이 ‘이 시대 최고의 낙관주의자’인 엄마마저도 극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브루스 오빠가 떠난 뒤 독차지하게 된 작은 침실로 걸어갔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기적밖에 없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저희들을 도와주실 수 있을 거예요. 예전에도 그러셨잖아요. 이번 한 번만 다시 도와주세요. 엄마가 어마어마한 콘테스트에 당첨될 수 있게 해주세요. 다음 번이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기도를 하느라 정신이 없던 내 귀에 옆방에서 중얼중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두 동생이 열심히 두 손을 모으고 있을 게 뻔했다. 우리 집에서 쏟아지는 기도를 접수하느라 천국의 전화교환수가 갑자기 바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도의 힘이 통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닥터 페퍼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이 1주일이 흘렀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얼이 빠진 것처럼 걸어다녔다. 대상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감과 못 받으면 어쩌지 하는 공포감 속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대출상환 만기일이 3일 후로 다가오자 엄마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드디어 닥터 페퍼에서 전화가 왔다. “라이언 부인, 대상 수상자로 확정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스위스 여행권 2장, 포드 머스탱 자동차, 론진 금 손목시계 남녀용 각각 한 개, 그리고 현금 3,440달러 64센트가 상품인 것은 아시지요?” 엄마는 두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아이구머니나, 세상에!” 이 소식을 들은 도서 아주머니의 반응이었다. “1등상을 받는 게 이번이 세 번째 아니에요? 이블린이 콘테스트에 소질이 있는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소질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도서,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도 하늘에서 힘을 좀 써 주신 것 같아요. 너무 평범해서 똑같은 작품이 많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 덕분에 아빠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행기 여행이 처음이었던 아빠는 기내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술마저 아껴가며 마셨다고 한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직장 동료들도 엄마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어깨를 치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엄마가 이렇게 큰상을 받은 것은 닥터 페퍼 콘테스트가 마지막이었지만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엄마가 백화점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에필로그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우리 남매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하나둘씩 집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우리를 집밖으로 내몰지는 않았지만 디파이언스에 남아 있어봐야 별 볼일 없다는 것만큼은 누누이 강조했다. “밖으로 나가보렴. 얼마나 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엄마의 말을 믿었다. 엄마는 글솜씨로 하는 콘테스트가 사라진 뒤에도 마이크, 바브, 벳시가 대학에 입학할 때마다 글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왜 우리 동생들이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지를 유창하게 설명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생들은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아빠는 1970년대 중반 당뇨병 판정을 받았다. 아빠는 그 길로 술을 끊었지만 건강을 회복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아빠는 그 뒤로 엄마에게 더 많은 부분을 의존했고, 1983년 일흔다섯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가 남긴 속죄의 흔적을 보고, 엄마와 우리 열 남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10년 전에 벳시를 불러 신신당부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지금 매달 은행에 연금을 꼬박꼬박 저금하고 있단다. 이 통장 보이지? 엄마를 위해서 준비하는 깜짝 선물이야. 이게 다 엄마 몫이란다. 그러니까 네가 나중에 엄마 몫 잘 챙겨드려, 알았지? 그때까진 비밀이야.”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금액은 6만 달러가 넘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백화점 일을 그만두셨다. 평생 시끌벅적한 집에서 살다 혼자 남게 된 엄마는 그 뒤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누비며 플로리다,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텍사스, 버지니아, 뉴욕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우리 형제들 집에 번갈아 들르셨다. 젊었을 때 여행하고 싶었던 소원을 그런 식으로 이루신 셈이었다. “이렇게 너희들 덕을 보게 될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아이를 몇 명 더 낳을 걸 그랬구나.”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다. 디파이언스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엄마는 늙은 할머니가 되기를 거부했다. 엄마는 쇼핑할 때마다 자전거로 3km를 왔다갔다했고, 도서관에서 내다보는 시내 풍경이나 강 위로 쏟아지는 반짝이는 햇살을 마음껏 감상했다. 80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100년이 넘은 집을 고치기보다는 적응하는 쪽을 택했다.
1998년 여름에 엄마는 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들은 길어야 한 달밖에 안 남았다고 진단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 열 남매는 이틀 만에 워싱턴 애비뉴 801번지로 모두 모였다.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도 의연한 태도로 우리 열 남매를 한 사람씩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하루는 기분이 어떠냐는 리 앤 언니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이란다.” 우리는 24시간 엄마 옆을 지키며 식사와 약을 챙기고 수다 상대가 되어드리면서 엄마가 하루하루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가 생명의 끈을 놓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엄마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사소한 불편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지막 주가 되자 엄마는 젊어지고 더 예뻐졌다. 우리 10남매보다도 어려 보일 정도였다. 우리는 마지막을 예감하며 엄마가 누운 침대 옆으로 다같이 모였다. “우리 병아리들이 걱정돼서 어떡하나.” 우리는 ‘병아리들’이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 어머니, 이블린 라이언은 1998년 8월 29일 이른 아침에 눈을 감으셨다. 향년 85세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 동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해도 이보다 더 슬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장례식 준비를 했고, 장례식을 마치고는 중요한 기념품이 있는지 집안을 둘러보았다. 과거의 흔적이 담긴 것이라면 종이 한 장 못 버리는 엄마의 흔적이 서랍이며 장식장이며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아빠가 남긴 6만 달러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통장을 보고 우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백화점에서 받는 연금과 이자로 생활하며 우리를 위해 그 돈을 남겨놓으셨던 것이다.
샘솟는 활기와 유머감각은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었는지 엄마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글을 쓰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1주일 전에 침대 옆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책을 들었더니 작은 쪽지 한 장이 떨어졌다. 쪽지에는 단어의 개수가 정확히 25개인 시가 한 편 적혀 있었다.
나는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러서 인사를 하지.
그래야 나중에 천국 문 앞에 가서 섰을 때
하나님이 “거기 누구냐?”하지 않으실 거 아니니.
내가 이 시를 큰소리로 읽어 주자 형제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딕 오빠의 새 자전거와 상금 5,000달러가 생겨서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집으로 이사왔던 1953년 가을이 생각났다. 엄마가 처음으로 대상을 받은 때였다. “걱정마세요, 엄마. 거기 누구냐 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나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엄마를 지켜보고 계셨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