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친구! 우리 동창회 카페에 종숙이 딸내미 예슬이가 쓴 시 두 편이 있네. 평 좀 부탁하네."
초등학교 동창회 총무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카페에 들어가 여고 2학년 예슬이가 쓴 <어머니>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홀로, 수십 년 간을 목을 조여 오는 바람에 몇 번을 기운 옷처럼 대궁까지 너덜너덜해진 갈대였습니다.
앙칼진 바람 몇 가닥이 다녀갈 때면 집안엔, 무성한 푸성귀처럼 어둠이 돋아나고 바람결에 조각난 세간은 분주히 아픔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홀로 앉아 방안에 가득찬 소주내음으로 상처를 소독하곤 다시금 생계의 끈을 쥐어 잡고 아물지 않는 상처를 한아름 안은 채 일터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홀로, 바람에 저당 잡힌 어머니는 묵묵히 작은 둥지를 지켜내셨습니다.
연두빛으로 일렁이는 아침 오늘도 변함없이 서걱이는 갈대를 생각하자 따스한 불꽃을 몸속에 지핀 연등이 내 마음에도 하나 둘씩 켜지고 있었습니다.
김예슬 <어머니> - 이 작품은 지난 8월 12일 제5회 대한민국 청소년 문학상 운문부문 대상(문화관광부장관상) 수상작입니다.
아무리 감정을 절제하려 해도 눈물이 맺힙니다. 읽는 내게는 눈물이지만 예슬이나 예슬이 엄마에겐 피눈물이었겠지요.
예슬이 엄마는 제 초등학교 친구입니다. 남편의 사업이 끝장 나면서 혼자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 엄마의 힘을 딸 예슬이는 '몇 번을 기운 옷처럼 대궁까지 너덜너덜해진 갈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나약한 갈대가 된 엄마는 수십 년 동안 '목을 조여 오는 바람'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엄마가 경험한 시련과 고통 역시 '목을 조여 오는 바람'입니다. 그 바람 속에서 예슬이는 부지런히 시를 썼고 공부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어둠이 찾아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세간은 조각났습니다. 조금 가진 것조차 차압을 당해 빼앗겨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아픔을 실어 날라야 했던 우리 시대 예슬이의 엄마, 그를 존경합니다.
예슬이 엄마는 소주로 아픔을 달래며 상처를 소독했습니다. 예슬이 엄마는 딸을 위해서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한아름 안고 부지런히 일터로 갔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시련 속에 살아온 예슬이 엄마는 작은 둥지를 지켜냈습니다. 예슬이는 '변함없이 서걱이는 갈대'인 엄마를 생각합니다. 예슬이는 그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빛나는 역설 속에서 예슬이의 아픔은 '연둣빛으로 일렁이는 아침'이 됩니다.
예슬이에게 '서걱이는 갈대'같던 엄마는 이내 '따스한 불꽃을 몸속에 지핀 연등'으로 승화합니다. 자비와 사랑 가득한 엄마가 됩니다.
이제 고교 2학년생인 예슬이가 지켜본 엄마가 이 시대 웬만한 엄마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벽화
성남 여인숙 촌 강줄기 갈리듯,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골목길 담벼락엔 성남 사람들이 그려 논 벽화가 성남의 생과 옹골차게 얽혀있다.
밤마다 술꾼들의 노상방뇨로 뼛속까지 누런 바탕에는 올챙이같은 꼬마들이 학교에서 슬쩍했을 분필로 그린 그림.
'신속배달'이 생명인 명동반점 배달아저씨가 흘렸을 짬뽕국물 한 자락 또르르 흘러내려 운치가 더해진 벽화.
간밤에 '경성단란주점' 신참 웨이터가 세상을 향해 던졌을 맥주병 괴로움 한 조각으로 박혀 벽화 한 자락을 수놓고 있다.
가끔은 술주정으로 얼룩진 이 골목길 담벼락이 싫어 강물을 빌려와 골목에 흘려보내고 싶은 내 고향 성남골목길 벽화. - 김예슬 <벽화>
여고 2학년 예슬이는 모란시장으로 유명한 성남에 삽니다. 성남 골목길 담장에 그려진 그림을 '벽화'로 규정해 도시 소시민들의 삶을 서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명동반점 배달 아저씨나 경성단란주점 신참 웨이터나 술주정뱅이들 모두 예슬이가 다니는 골목길에 삶의 애환을 그립니다. 그리하여 예슬이는 자신이 늘상 보아오던 골목길 서러운 벽화를, 강물을 빌려와 흘려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여고 2학년 예슬이가 보는 골목길 벽화는 성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여전히 힘들고 못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벽화를 그리고 있을 것입니다.
좀 뜬금없는 얘기지만 저는 예슬이의 시 두 편을 감상하면서 불리할 때면 '민생을 먼저 생각하자'고 말하는 국회의원들이 생각났습니다. 몇 십 억, 몇 백 억을 불법으로 탈법으로 꿀꺽꿀컥 삼키고도 여전히 당당한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여고 2학년 예슬이가 쓴 시를 차분하게 읽고 또 읽습니다. 기성 시인들의 시가 감동을 주는 데 인색하지만, 마흔 다섯의 나이에 여고 2학년 예슬이가 쓴 시를 읽고 눈시울을 적십니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유리 밑에 넣어 두고두고 보렵니다. 예슬아! 고맙다! 꼭 큰 시인이 되어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