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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에게 돌을 던질 자 몇이나 되는가
여원치를 내려서면 바로 이백면(二白) 땅이다.
옛 백암면(白岩)과 백파면(白波)을 통합해서 이백면이 된 지역이다.
여원정에서 24번국도(황산로)를 내리달아서 양가(陽街)와 강기(康基),
남계(藍鷄) 등 마을을 지나 남평삼거리에서 요천(蓼川橋)을 건넜다.
24번국도는 요천삼거리에서 산동면, 장수군으로 이어지는 19번국도와
함께 요천로가 되어 남원시 도통동을 관통한다.
도통동은 옛 남원군 갈치면(葛峙) 땅이었으며 그 때도 도통리였다.
칡이 많은 곳이라 갈치였는데 왕치면(王峙)으로 개명된 후 1955년에는
통째로 남원읍에 편입됨으로서 왕치면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길(道)이 장수, 함양, 구례, 곡성, 전주 등 사방으로 통(通)하는 곳이라
하여 도통리(道通里)라 했으며 1981년에 남원시 개청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통동이 되었단다.
마을주변에 심은 정자나무들이 튼실히 자란다 해서 심근정이었던 식정
마을(植亭), 갈치마을, 고죽(高竹)마을이 포함되어 있는 도통동을 지나
남원시의 다운타운으로 갔다.
고죽은 높은 산마을인 고산리(高山)와 황죽리(黃竹), 두 마을의 병합에
따른 새 이름이란다.
황죽은 유자광의 출생지인데 그가 태어날 때 마을의 대나무들이 모두
누렇게 변했다 하여 황죽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유자광이 태어나면서 마을의 정기를 다뽑아 대나무가 누렇게 죽었다고
하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부정적인 전설일 것이다.
유자광(柳子光/?~1512)은 연 5대 왕에 걸쳐 품계를 뛰어넘은 공신으로
갖은 영화를 누렸으나 이조500년사에서 대표적 문제의 인물이다.
당상관(正三品 이상)에 오르기만 해도 불세출의 인물 배출지역이라고
홍보에 열올리건만 영광유씨도 그가 태어났다는 지방도 다른 인물들과
달리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생연도와 출생지도 실은 확실하지 않다.
나는 유자광에 대해서 이미 언급했거니와(본란93번글참조) 서얼(庶孼)
이라는 이유로 그가 받은 온갖 괄시와 천대의 결과가 당대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일 뿐이다.
그에게 자신있게 돌을 던질 자가 몇이나 되는가.
왕조가 아닌데도, 민주국가를 표방한 현대에도,특히 군사쿠데타정부가
자행한 현대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 무오사화가 얼마나 많은가.
굵직한 간첩단 사건들이 시의적절하게 조작되고 이즘에는 가장 손쉬운
'종북몰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연일 무수한 유자광들이 날뛰고 있으니 말이다.
여원치와 20리 요천점(蓼川店)은 동도역이며 도통동 어느 곳이었을 터.
길이 사방으로 통하는 지점으로 남원(현 동충동)과는 10리거리인 위치
라면 고죽교차로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도통동 상가에서 디카 메모리칩을 구입한 후 다시 육모정찜질방으로.
일몰때까지는 시간이 여유로움에도 남원시내에는 늙은 길손에게 인력
(引力)을 발산할 만한 새로운 표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춘향이 없다면 남원도 없다
전라북도 통영별로에서 2번째 밤이 갔다.
반c세월에 남원의 변화는 내게 강렬한 이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다.
통영별로의 시종점인 통영에서 "이 충무공이 없다면 통영도 없다"고 말
했는데 남원에 대해서도 단어만 바꾼다.
"성춘향이 없다면 남원도 없다"고.
구전 픽션(oral fiction)에 불과한 춘향전에 매달려 '사랑의1번지','춘향
남원'등 심벌(symbol)도 브랜드(brand)도 모두 춘향이니까.
아침에 2번의 히치-하이킹으로 도통동 남원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갔다.
남원과 10리길 율치(栗峙)는 전주-남원-구례로 이어지는 17번국도상에
있으며 남원시내(광치동)와 사매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암행어사 이몽룡이 춘향과의 재회를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던 삼례 이후
남원까지의 옛길, 통영별로는 대부분이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닦였다.
지금은 춘향로로 바뀐 17번국도다.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자투리 옛길을 굳이 찾아가야 하는가.
광치천(용정교), 88올림픽고속국도, 남원천(구룡교), 향단교차로 등을
건너고 지나는 17번국도를 따르면 율치교차로, 율치마을이다.
야생 밤나무가 많아 밤치였는데 한자화 해서 율치가 된 마을이란다.
밤치(栗峙)들판을 지나면 고개를 올라야 했던 율치에도 터널이 뚫렸다.
율치터널이 아니고 춘향터널이다.
광석(廣石)과 율치마을이 병합된 광치동(廣峙)과 사매면의 경계인 춘향
터널을 벗어나면 사매면 월평리(巳梅月坪) 국도변에 2층 누정이 있다.
1953년에 건립했다는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6호'오리정(五里亭)'이다.
남원퇴기 월매의 딸 성춘향이 한양으로 떠나는 이몽룡과 이별한 지점?.
남원부에서 동행할 수 있는 한계가 5리였던가.
오리정을 비롯해 춘향의 족적들(위)
헤어진 후에도 먼발치로 관풍리(官豊)까지 10여분을 더 뒤따랐던가.
'춘향이고개'가 있다.
그러고서도 차마 돌아서지 못하고 버선발로 뒤를 밟았던가.
고약한 성미를 참지 못하고 버선을 벗어던졌던가.
춘향이 벗은 버선을 닮은 밭이라 해서 '춘향이버선밭'이라나.
구전되던 이야기가 판소리 춘향전으로 거듭났고 마침내 활자화된 소설
이기 때문에 구비문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오랜 세월 변화무쌍한 줄거리와 지명들에 연연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해도 춘향터널을 벗어나 오리정 전에 있는 박석고개(薄石峙)가
반대편에도 오리정 전에 또 있는 것은 짚고 갈 수 밖에 없다.
비포장 고갯마루가 지표유출에 의한 토양침식으로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얇고 넓적한 돌들을 깔아놓은 고개라 해서 박석치였다는데.
그러나 어떤 춘향전에서는 미녀가 아닌 박색(薄色)의 춘향에서 비롯된
고개라는 박색치 설화가 역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춘향은 통설과 달리 박색이었으며 몸종 향단이 미녀였다.
몽룡은 향단을 내세운 월매의 미인계에 걸려들어 춘향과 취중 동침을
했고 떠나간 몽룡을 그리던 춘향은 끝내 자살을 했다.
춘향을 불쌍히 여긴 남원인들은 몽룡이 떠난 고개에 춘향을 묻었는데
이 때부터 부르게 된 박색티(薄色峙)가 박석치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
춘향전이 회자되기 시작한 당시에는 꽤 높은 고개였는데 국도로 조성될
때 적잖이 낮아졌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재같지 않으며 길지 않은 잿길에 한쪽은 박석고개와 이도령고개,
또 한쪽은 춘향이고개와 박석고개 등 4개의 이름을 모아놓은 관계자들.
아무튼, 춘향과 관련된 온갖 이름에 신물날 정도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관풍리 세동마을(細洞)의 매계서원(梅溪書院)을 찾아갔다.
국도에서 상거가 제법 되는데도 그리 한 것은 아마도 춘향과 이도령에
싫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781년(22대정조5)대신리 상신마을에 건립해 8현을 봉향(奉享)하다가
1805년(순조5)에 기지(基地)의 저습으로 오수면 둔기리(임실)로 이건
(移建), 덕계서원(德溪)으로 개칭했으나 1868년(고종5)에 철폐되었다.
1993년, 남원 유림들이 관풍리(현장소)에 복건하고 이름도 매계로 환원
하였다"는 것이 이 서원의 이력서다.
8현(賢)은 이정숙(李正叔/?∼1521),이총(李灇/1488∼1544),이기(李祺),
이주(李柱/1562~1594),최원(崔薳/1599~1660),이도(李燾, 1639∼1713),
이유경(李裕慶),이여재(李如梓, 1685∼1763) 등.
관풍리의 매계서원
향토사학자 대풍시대에 양산되고 있는 황당한 설화들
사매교차로에서 새 17번국도를 떠나 군도로 추락한 옛 국도를 택했다.
매내천(매내교)을 건넌 후 사매면사무소를 지나고 율천(율천교)을 건너
가면 덕과면(德果)이다.
면계인 사율리 율천마을(栗川)에는 '3.1운동만세발상지' 돌비가 있다.
사율리(沙栗) 동해골에서 남원군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데
3.1독립운동 기념탑과 기념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1919년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점화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간 독립만세 불길이 남원에 붙은 날은 33일 만인 4월 3일.
식수기념식 집회를 빌어 덕과면장(이석기)이 주도한 만세 시위를 사매
면민과 함께 했으며 일본군의 발포로 시위대 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중상 10여명, 투옥 20여명의 희생이 따른 운동이었단다.
남원의 3.1운동 발상지와 기념탑(위)
사율리 사곡(沙谷)마을 뒤 동산에는 일명 참판림(參判林)이라는 우거진
송림(松林)이 한 전설을 지니고 있다.
이조중기(선조~인조)의 문신으로 치욕의 병자호란을 자결로 항거한 이
상길(李尙吉/1556∼1637)의 후손들이 조성했다는 350여년 된 솔숲이다.
숲속에는 이상길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 있고 3척 입석(立石이 있는데
이 선돌과 관련된 설화가 가관이다.
이 곳을 지나다가 잠시 쉬던 강감찬 장군이 많은 개미와 뱀을 보고 크게
꾸짖은 후로는 개미도 뱀도 모두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것.
덕과면 홈피에 있는 내용인데 같은 홈피의 사율리 사곡마을 소개글에는
강감찬이 이성계로 바뀌어 있다.
전남 구례군의 섬진강변 동해마을(문척면)에도 유사한 전설이 있다.
모기가 없는(無蚊) 마을인데 강감찬 장군의 일갈에 모기들이 혼비백산
달아난 후로 무문마을이 되었단다.
한데도,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기 위해 합천 권율 도원수의 진영으로
가는 중에 극성떠는 모기떼를 몰아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메뉴 '강따라길따라' 3번글 참조)
강감찬 장군이 민초들의 애로를 풀어준 설화들은 곳곳에 무속신앙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이성계, 이순신 띄우기 또한 물불 가리지 않고 있다.
그 뿐인가.
강감찬, 이성계가 이 곳을 지나갔다 해도 쉴만한 송림은 그들이 거쳐간
때로부터 600여년 또는 300여년 후에 자라기 시작했다.
비록 전설이기는 하나 이토록 분별없고 성의없이 관리하고 있다니?
바야흐로 향토사학자 대풍시대다.
이른바, 향토사학자들이 입맛대로 양산하는 황당한 설화들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곡마을의 송림
의견과 오수
덕과면소재지에서 17번국도의 오수교차로를 통해 임실땅에 진입했다.
율치에서 30리길 오수역(獒樹驛)이 있던 오수면 오수리.
어감으로는 산동원이라 부르기 십상인 원동산(園東山)소공원의 의견비
(義犬碑/전북도민속자료제1호)와 의견공원이 있는 면사무소 마을이다.
어느 이른 봄,장에 갔다가 친구들과 어울어져 대취한 김개인(金蓋仁)이
야심한 시각에 귀가하는 중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걷다가 냇가 둑방에 쓰려져서 깊은 잠에 빠져버린
주인을 곁에서 지키고 있던 개는 아연경색하고 말았다.
부근에서 일어난 들불이 주인 곁에 까지 타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을 깨우려고 온갖 시도를 다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는 주인.
깨우기를 포기하고 냇가의 물에 몸을 적셔 주인을 압박하고 있는 불길
위에서 뒹굴기를 무수히 반복하여 마침내 불을 잡는데 성공한 개.
그러나 그의 털은 이미 불에 다 타버렸고 그는 주인 곁에 쓰러진채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뒤늦게 깨어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주인은 개를 고이 장사지내고 그
곳을 잊지 않기 위해 개무덤 위에 자기의 지팡이를 꽂고 돌아왔다.
얼마쯤 세월이 지났을까.
지팡이에서 싹이 나더니 마침내 거목으로 자랐다.
이 나무를 개나무(오수/獒개오樹나무수)라고 이름지었으며 이 마을은
오수리로 개명되었다.
개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의견비가 마멸되어 1955년에 다시
세웠으며 1992년에는 면 이름까지 둔남면에서 오수면으로 바꿨다.
이처럼 주인에게 충성스런 개라면 충견(忠犬)인데 왜 의견인가.
주인에 대한 충성인가 의리인가의 논쟁보다 개도 중시하는 의리를 소품
쯤으로 가볍게 치부하는 인간의 세계가 날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주인을 향해 짖어대는 개에게 묻는 연유에 대한 개의 답변.
"저의 주인도 도둑인걸요"는 비록 개그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투호구주형(鬪虎求主型) 의우총(義牛塚)도 있다.
보은(報恩)의 날짐승과 맹수 이야기도 전래되고 있다.
토테미즘(totemism)에서 탈피하였다 하나 여전히 특정 동식물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국가는 물론, 지자체들도 각기 다른 동물 식물을 자기 고장의 상징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원동산공원의 의견비(위)와 비석거리(아래)
보신탕 단상
그러나 아이러니(irony)도 있다.
오수리의 신포집은 명성이 자자한 보신탕집 이름이다 .
단골 고객은 전국적이다.
나도 비록 어쩌다 들르게 되지만 35년이 넘는 단골이다.
생전에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것처럼 죽어서도 주인을 위해서 제 몸을
바치는 개를 기리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길은 최상의 음식을 만들어
맛있게 먹고 강건하는 것이라나.
견강부회(牽强附會)스런 식당 주인의 말인데 일리있는가 궤변인가.
보신탕은 유래와 설화가 다양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서 우리 민초의
보양식이었다.
농경사회에서 소를 잡아먹기는 지주계급 간에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고
돼지는 대사(大事)를 앞두고 기르는 것이 상례였다.
해서, 서민들은 복날(伏)을 대비해 새 해 초부터 개를 길렀다.
그런데도 말이 많다.
이즈음에는 계층에 무관하게 선택적 기호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혐오
하는 일각이 있다.
사람과 가장 친밀한데다 충견(忠犬),의구(義狗)등의 이미지와 애완견의
확산으로 양극 현상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복만 무사히 넘기면 1년이 보장된다던 개의 명(命)이었다.
그런데 애초에는 '개장국'으로 시작된 보신탕이 무더운 여름식(食)에서
사철식으로 진화한(?) 후로는 시도때도 없이 죽어간다.
이러저러한 계층도 사라졌고,심지어 미용에 효과적이라는 속설로 인해
미(美)지상주의 숙녀 팬까지 늘어나는 추세니까.
'보신탕'의 상징처럼 나부껴 오던 빨간 깃발이 사라지고 이름도'영양탕',
'사철탕'으로 바뀌게 된 것은 '88올림픽' 탓이다.
서양의 내로라 하는 나라들이 꼬투리를 잡았기 때문이었으니까.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드 바르도를 비롯해 서양의 극우 동물보호자들은
보신탕을 이유로 서울올림픽(1988)을 거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었다.
우리보다 더 극성적인 중국에서도 올림픽이 열렸지만(2008년) 한국을
향해 도도했던 나라들이 하나같이 잠잠했다.
우리가 너무 얕뵀기 때문이었겠거니 하니 분통이 터지려 했다.
강대약 약대강의 교활한 자들.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프랑스길에서 중상을 입은 1마리 개를 보았다.
어느 고약한 자동차가 좁은 카미노를 달리다가 사고내고 뺑소니쳤는가.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개가 몸시 고통스러워 했지만 대책이 없는
나는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했다.
사고낸 자와 내 앞에 지나간 순례자 거개가 서양인들인데 모두 방치한
이 자리에서 나는 그들의 두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각설하고,
나는 보신탕을 먹고 있다.
실로 70년여의 긴긴 세월에 걸쳐 보신탕은 내게 기호 음식이라기 보다
고비마다 나를 살린 구명식(求命食)이었다.
내가 개복수술에서 살아났을 때 래디오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승승장구중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의술에 기대를 걸기 어려운, 내가 7살인 1941년 12월의 일이다.
내 조부님은 손자 살리시려는 일념으로 기르던 개를 잡아 삼시(三時)를
거르지 않고 내가 다 먹어치우는 것을 곁에서 확인하셨다.
의사가 수술은 했으나 딱히 먹일 약이 없던 시대였기에 의사가 처방한
약이 바로 개고기였던 것.
결국, 내 의사(好否)와 관계없이 개는 나를 위해 계속 죽어갔다.
반세기도 더 지나는 동안 보신탕으로 부터 소원해 가던 1993년,
큰 교통사고로 입원 99일과 반년여의 통원치료를 받던 때, 보신탕이 또
한 번 위력을 발휘했다.
1996년 암수술 후 항암, 방사선치료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 역시 보신탕
효험을 톡톡히 보았다.
정녕, 내 집 앞뜰에 희견비(犧犬碑)라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치를 포장해야 하는가
신포집에 단골 도장(아침겸점심)을 찍은 후 옛 오수역을 찾아나선 늙은
길손에게 행운의 사나이가 출현했다.
오수면의 부면장이다.
율치와의 거리가 30리인 옛 오수역은 당시에는 남원부에 속해 있었으며
종6품 찰방이 파견되어 11개의 속역(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이었다.
그 때의 역터가 여기, 전라선 구 오수역이란다.(오수리시장터 어느 지점
이었다는데 그의 착각인가)
신포집(위)과 등록문화재제188호 오수망루(아래)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밍루로 잔존하는 전국의 망루 중 가장 높은 12m.
주변 지역의 화재를 감시하고 비상 상황과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데
사용했으며 사상적 격변기에는 빨치산 경계용 망루로 사용되기도.
의견공원에 있는 개 그림
전라선의 복선공사와 함께 새 역사(驛舍)로 이전하고 비어있는 구 역사.
1931년에 문을 열었고, 1951년에 빨치산에 의해 불탄 건물.
수년만에 재건, 2004년에 빈 집이 되기까지 70년 이상 남원 일부와 임실,
순창,장수 등 가고 오고 만나고 헤어진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
역사성을 고려하여 철거대신 등록문화재로 보존하기 위해 임실군에서
인수했단다.
전라선 철도 오수의 구 역사(위)와 의상정(아래)
김개인과 의견상(위)과 오촌마을 돌비(아래)
오수역에서 임실읍과의 경계인 마치(馬峙/말치재)를 넘어가는 길(통영
별로)을 상세히 안내해준 금암리(金岩) 거주 갑장도 만났다.
늙은 홀 아버지를 시골에 두고 도시에 산다는 1남 2녀는 마음 편할까.
고향이 편하다고 고집부리고 있으나 자식에게 짐되지 않으려고 그러는
촌로를 종종 만나는데 자식들은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갑장 촌로 김봉엽
오수역을 떠나 얼마쯤 가면 오암리 오촌마을(鰲岩鰲村)이다.
오(獒개) 일색 지역에 돌연한 오(鰲자라)의 등장은 길손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자라모양을 하고 있는 마을 앞 바위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단다.
'자라울'이 일제의 지명 한자화 과정에 오암, 오촌이 되었다는 것.
마을을 지나는 17번국도와 옛길의 접선지점, 오촌 돌비 이웃 의상정(義
想亭) 옆에도 '김개인과 의견상'이 서있다.
지명을 비롯해 기관,상호,크고 작은 공원,동상과 비석 등 작은 시골면을
온통 개로 채우고 있다.
영남대로 해평면(경북구미시) 의구총(義狗塚), 정읍시(전북) 구룡동의
의오비(義獒碑) 등 유사한 설화가 온 나라에 무수함은 물론 세계적이다.
설화의 유형(類型)도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 투호(鬪虎), 방독(防毒),
변신(變身) 등의 구주형을 비롯해 다양하다.
한데도, 이곳이 특별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른 지역에 없는 오수(개나무)가 설화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일 것이다.
'의(義)를 생각하는(想) 정자(亭)'라는 '의상정'에서 잠시 쉬며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한문의 본류인 중국이라면 상의정이 맞다고.
의상정의 뜻은 '의는 정자를 생각한다'(right thinks pavilion)가 되니까.
중국인이 영어를, 한국인이 일본어를 잘 하는데 그 까닭은 영어와 중국
어, 한국어와 일본어의 문법 형식이 각각 유사하기 때문이란다.
영어와 중국어 문장의 기본구조는 '주어+술어동사+목적어'인데 반하여
한국어와 일본어는 '주어+목적어+술어동사'로 구성된다.
17번국도의 등장 이전에는 오수와 임실읍, 두 지역 간에 주 도로였다는
비포장 시골길(통영별로)이 맛깔스러웠다.
특히 산야의 화사하게 활짝 핀 매화에 매료되어 아마 늙은 길손도 매화
처럼 환하게 웃으며 걷고 있었을 것이다.
원님이 행차중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우물물이 차고 시원해서 마을
이름을 냉천(冷泉)이라 했다는 봉천리(鳳泉)의 냉천마을을 지나고 마을
뒤 봉황산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봉산(鳳山/봉천리)마을도 지났다.
정지된 봉산들을 관통하는 긴 고가철도가 오밀조밀한 들에 옥의 티다.
토목기술이 열악했던 때,지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길게 또아리를 틀거나
꼬불꾸불했던 길들이 거침없이 직선으로 뻗는다.
산을 뚫기 힘겹기 때문에 산자락을 돌고 돌았으며 강폭 좁은 곳을 택해
도강했지만 지금의 토목기술에는 산이건 강이건 장애가 되지 않으니까
과감한 직선화 공사로 거리가 단축되고 있다.
마치길(위1.2.3)과 봉산들(위4.5)
마치고개(아래)
마치길이 야금야금 포장되어 가고 있다.
농로화 되었으며 차량이 이따금 다니지만 농사용 차량이며 농기계 전용
도로에 다름 아니다.
4차선 직선도로를 두고 꼬부랑 고갯길을 이용할 차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미구에 포장이 완료될 것이란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나라와 국민이다.
이 길에서 유익한 포장효과란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 뿐이다.
아스팔트 포장이건 시멘트 포장이건 남어지는 모두 해악이다.
소위 서양의 선진국들이 소 농로는 물론 활주로 같은 농로들을 포장하지
않는 이유를 정녕 모른단 말인가.
마치 고개마루를 넘을 때 오후 5시가 넘었다.
임실읍을 경유, 20리길 오원역(烏原驛)까지 강행은 무리라 판단되었다.
골짜기가 넓어 대곡리(大谷), 산신령의 계시 따라 샘을 파서 좋은 샘물을
얻었다 하여 감천(甘泉)이었다가 감성리(甘城)가 되었다는 마을을 거쳐
임실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감하고 전주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찜질방에 가기 위해서.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