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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째 청정지역 홍천강 사는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 소장 - 다정 김규현
너무 이른 시간에 와서 강변을 서성이다 해가 어느 정도 주변을 환하게 밝힐 무렵에야 그들 내외를 깨워 아침상을 앞에 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웰빙 인터뷰를 한답시고 올빼미과라 원래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그이를 아침상을 차려 함께 먹자고 했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상 위에 차려진 완전 무공해 음식들. 그들의 손으로 직접 수확한 소중한 음식들이었다. 두부와 김치를 넣은 된장국, 배추김치,무김치,물김치,무채,고추절임,멸치볶음을 반찬으로 잡곡밥. 거기에 소주 한 잔을 곁들였다.
외동아들 예슬이 이야기부터 꺼냈다. 엊그제 수능 성적을 받았는데 고득점인데 아이의 전공 선택과 대학 진학 문제를 놓고 밤새 아내와 토론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집 인근의 학교가 폐교 되어 춘천으로 유학을 보내 일찍부터 하숙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 예슬이는 지금 명문 춘천고 3학년. 본인은 뜬금없이 음악을 전공해보겠다는데 아버지로선 웬만하면 한의학을 했으면 한다. “아이가 태어날 때, 집 뜰에 오동나무가 있으니 ‘예맥의 현악기’란 뜻으로 예슬이라고 했지요. 그 이름 때문인지 음악적인 감성을 타고났나 보아요. 고2때 누가 가르쳐준 일도 없는데 기타도 혼자 배우더군요. 이런, 아이 이야기로 우리 대화를 시작하는군요. 허허.”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현실과는 잘 타협하지 않았을 그였던 터라 혹시 자녀의 진로에 대해서도 자연주의자 또는 방관주의자적 입장이 아닐까 싶었던 지레짐작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문학과 미술에 뛰어난 부모의 재능을 타고났으니 어떻게든 예술적 감성이 뛰어나지 않을리 없겠지만 이 아버지의 속마음은 외동이가 자신의 타고난 몸의 문제라도 스스로 고칠 수 있었으면 하는 여느 부모로서의 안타까운 바람 때문일 게다.
보이지 않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하다
“올해에는 배추 농사가 잘되어서 3백 포기를 땅에 묻어 두어서 2~3년은 넉넉히 먹을 것같네요.” 찬거리에 대해선 얼추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올 수확을 물었더니 그렇게 표정이 넉넉하게 바뀌면서 답했다. 가끔씩 들어오는 특강 요청에 응해주고, 원고를 써서 얻는 그의 수입이나 인세라고 해봐야 그리 많지 않지만 1천평이 넘는 그의 수리재가 요즘 자고나면 땅값이 오르는 모양이라 조금 여유로워지지나 않았을까? ‘삶에는 보이지 않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있나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동안 자신의 꿈만을 위해 너무나 돌아보지 못해서 고생만 시킨 아내를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긴 그에겐 잔소리하고 챙겨주었던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낮술은 잘 안해요. 하루 종일 정신을 못차리거든요. 옛날에야 술자리를 찾아다니면서 마셔댔지만 요즘은 피해 다닙니다. 술에 대해서 흥미를 잃은 거지요.” 이런, 집의 모양새처럼 술에 관한 그의 철학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해동의 나그네, 오랜 방랑과 만행
모든 일에는 운명적인 끈인 인연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이들의 삶이 그렇지만 그의 삶도 돌아보면 그런 운명적인 끈이 있었던 것같다. 홍천강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지 햇수로 벌써 25년째. 다섯 번째 수묵화 전시회를 지금 정신세계원 앞에 있는 ‘공간’에서 마치고 보따리를 싸서 내려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1979년의 일이다. 성균관대학 화공과를 다니다 설악산에서 잠시 낭인생활을 하는동안 출가를 결심하고 해인사에서 불문에 들었던 그다. 해인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를 하고 해인사 불교도서관장까지 지냈다. 그동안 경전공부를 하면서 한문에 통달했다. 수리재로 들어오기 전, 인사동 4거리에서 ‘죽림화실’이라고 차려놓고 사군자를 가르치고, 전통찻집의 원조격이었던 죽림다회를 만들어 전통차 보급을 했었다. 그때 의재 허백련, 효당 스님 두 분이 다정茶汀이란 호를 지어준 것. ‘다정’이란 말의 뜻은 차의 물가. 그런 때문인지 그에겐 물가에 살게 될 인연의 고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리재를 마련하게 된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치 전설과도 같다. “유신정권 말기였던 그 전해에 학생들을 데리고 스케치 여행을 왔지요. 해가 뉘엿뉘엿 질 녘에 청평에서 배를 타고 와서 민박집을 향해 가는데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애꾸에 절름발이 노인이 이야기 좀 하다가게나 하더군요. 좀 섬뜩하데요.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니까 자신은 아들집이 윗마을에 있어서 젊은이가 와서 살게나 해요. 그렇게 얼마나 드리면 되겠냐라고 물었더니 단돈 6만원이랍디다. 그래서 이 물가에 내려와 살면서 직접 나무 깎고, 흙벽돌 찍고, 초가지붕 얹고 해서 집을 만들었지요.” 홍천강변 2층 초가집 수리재는 그 뒤 이정희, 홍신자, 이외수 등등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의 교분을 나누는 명소가 되었다. 이로부터 4년 뒤 ’84년 8월 말에 많은이들을 불러모아놓고 며칠동안 수리재 완공 기념회를 가졌는데 며칠 뒤 첫 번째 물난리를 겪었다. 그 9월 1일을 잊을 수가 없다. 집이 물에 휩쓸려가자 인도 타골대학에 유학을 가겠다며 준비중이었는데 집을 잃고 그 꿈마저 접어야 했으니 삶의 의욕을 잠시 잃었었다. 하지만 흙벽돌을 찍고 집을 다시 지었다. 그해 12월 24일 서울역 앞을 지나가다가 불쑥 호남선 입석표를 사서 전라도 광주에 내려가 1년동안 전국을 주유하며 만행을 했다. 마지막으로 울릉도에서 오징어배를 타고 선원 일을 하다가 배가 전복이 되었다. 30명이 죽고 14명이 살았는데 그에겐 할 일이 아직 남아있었는지 살아남았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나니까 뭍으로 나오면 첫 번째 만나는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작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서 한 잡지의 리포터로 자신을 취재하러 왔던 지금의 예슬이 엄마 이승실 씨와 결혼하게 된 것. 하지만 그가 불문을 나와 장가를 늦게 간 것도 공부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 그의 방랑은 멈출 수가 없었다.
시련들은 티베트와 인연을 위한 담금질
얼마 전 『티베트 문화산책』을 출간하고 강남 교보문고에서 독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가졌던 그에게 최대의 관심사이자 화두와도 같은 티베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와 티베트과의 긴 인연을 알아보는 것부터 흥미로운 일이다. 젊어서부터 티베트 말만 들으면 가슴이 울렁거렸다는 그인터라 그동안 일본 NHK방송의 다큐멘터리 비디오와 티베트와 관련된 책들을 통해서만 티베트를 그려왔다. 그런데 ’92년에 중국의 문이 열려서 다도협회의 여행길에 동참해서 중국에 갔던 길에 그동안 꿈꾸었던 티베트에 들어가게 된다. 상해에서 양자강을 따라 배를 타고 무작정 성도까지 갔다. 거기에만 가면 티베트에 갈 수 있을텐데 하고 말이다. 돈도 떨어지고 개인여행이 안되기 때문에 여행사 앞에서 며칠을 서성이기 있었는데 마침 남편이 티베트 사람인 조선족 여자의 도움으로 돈도 어떻게 빌고 수속도 밟게 되어 티베트에 단신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갔다가 돌아오니까 티베트에 대한 열병이 생겨 이혼을 감수하고 ’93년에 중국 북경 중앙미술대학에 유학을 가게 된다. 2년동안 목판화를 공부하면서 마침 기숙사 옆방에 티베트 교수가 연수를 와서 티베트 말을 배우고 티베트 연수를 가게 된다. 그처럼 티베트와는 전생에서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던지 그와 티베트와 인연의 끈은 물처럼 이어졌다. “여기가 고향이구나. 이곳에서 생명을 얻은 내 영혼이 바람과 물에 녹아 흐르고 떠다니다 육신에 깃들고 끝내 고향에 되돌아왔구나.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내 젊은 시절 겪은 인생 유전과 풍파가 티베트에 닿기 위한 담금질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10여년동안 열다섯번 티베트를 드나들면서 티베트의 역사?불교?문화?예술에 흠뻑 젖어들었다. 불교사는 있지만 역사가 없는 나라, 가난한 삶 속에서 오히려 영혼을 살찌우는 나라, 끝없는 생명의 윤회가 시작되고 거듭되는 속에서 자연과 생명의 섭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는 나라, 티베트는 영혼의 땅이었다. 히말라야를 넘어 닿은 카일라스에서 수미산을 발견했다. 카일라스산 밑 마나사로바 호숫가에 앉아 3일동안 꼼짝 않고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용맹정진 사흘 만에 그가 본 것을 떼를 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이었다. 그 물고기들이 열을 지어 그의 앞을 지나가며 외치는 소리가 들였다. “이제야 오셨군요. 저희들 이곳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84년 홍수 때 홍천강에서 떠내려간 물고기들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하늘을 보니 별은 빛나고 강물이 반짝였습니다. 평생을 품고 다닌 물고기 화두가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물고기는 바로 모든 생명체의 바탕이었습니다.” 티베트를 갔다와선 생선을 안먹었다. 티베트에선 물고기가 용의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두로 황금물고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2000), 『티베트 역사산책』(2003),『티베트 문화산책』(2004)를 연거푸 냈다. 공중분해된 티베트의 역사를 복원하고 티베트 문화의 정수를 추슬러 정리해낸 작업이었다. 티베트 사람들도 감히 엄두를 모냈던 그런 일을 해낸 것이었다.
오색 물고기, 다정이 소화해낸 현대판 만다라
이제 자리 잡고 살만하니까 또 한 차례의 시련이 찾아왔다. 1997년, 그 때에도 9월, 그리고 11일이었다. 갑자기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이번에는 아예 그동안 모아둔 그림이며 책이며 고스란히 다 재로 날려보냈다. 30여년을 모아왔던 목판본 고서들을 못건진 것은 지금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지금은 그릇이 안되니까 다음 생에 저를 좀 더 키우기 위한 훈련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말을 잇는 그로부터 10년동안 매달려온 티베트를 글로 풀어놓는 작업을 잠시 접어두고 한동안 놓았던 붓을 다시 잡을 생각이라는 말을 듣는다. 자리를 옮겨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보았다는 이층의 작업실에 올라갔다. 그의 작업실을 두르고 있는 것은 오색 물고기 그림.
“티베트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개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청정지역인 티베트에선 무지개를 하루에도 여러번 볼 수 있지요. 우리의 색동옷과도 같은 오방색의 옷을 입고 선녀가 되고 싶어하는 티베트 사람들이지요. 그림으로 티베트와 연결고리를 삼는 겁니다. 우리 것이면서도 티베트적인 것, 영혼의 구도자이면서 환쟁이인 나를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 물고기 화두입니다. 오색 물고기에 풍경 소리와 같은 음향을 넣고, 여의주에선 옴마니반매훔 염송이 나오고. 수많은 비늘에 광원을 비추어서 입체적인 표현을 할 겁니다. 물고기 화두를 오색 물고기란 오브제를 통해서 구체화하는 행위 예술과도 같은 것이지요.”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다정이 소화해낸 현대적인 만다라와도 같은 것. 무지개 비늘로 변화된 오색 채색 물고기이다. “마음 속에 있는 무한대의 공간에 축적된 정보를 뽑아내는 것, 출력해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아요. 그림은 구상이 힘든 것이지요.” 그림에 관한한 그는 성실하게 파고들어 완성시키는 점수漸修형이 아니라, 속필에 가까운 ‘돈오頓悟’형이다. 티베트에서 만난 홍천강 물고기들은 수리재 곳곳에 그림으로 무리지어 살면서, 처마에 매달리고 흙벽돌에 새겨진 채 살아있다. 그 물고기들이 한꺼번에 꼬리치며 수미산 아래 마나사로바 호수로 헤엄쳐가는 날, 다정의 평생 화두인 황금 물고기가 오색찬란한 비늘을 털며 솟구쳐 오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해에는 그의 오색 물고기전을 통해 입체적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오색 물고기들이 펄떡이는 모습들을 볼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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