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저희에게도 희망의 빛을 주소서 - 차영일(강원 양구고 2)
오늘도 새벽안개를 가르며 난 이 집 저 집의 대문에 신문을 찔러 넣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소년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은 지금부터 약 5년전 어머니가 가출한 후 그 충격으로 인해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시던 아버지가 또 가출로 인하여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두 살 아래인 동생만 있어도 힘이 든 상황이었지만 우리에겐 팔순의 앞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도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나도 가출을 해버릴까?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고 방황도 했지만 거동조차 못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근근히 생활하던 차에 군청에서 소년가장세대로 책정이 되어 보호를 받게 되면서 정말 어렵게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집안청소며 가사 일을 돌보아 주시려 방문을 하면 처음에는 창피하고 귀찮아서 봉사자 분들이 오시면 숨어버리기거나 도망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할머니는 점점 건강이 안 좋아 지셨고 동생도 방황을 하는 듯하였으며 공부도 안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몇날 며칠을 학교에 가지 않고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고 어떠한 해결방법도 딱히 없는 상태에서 정말 밥도 먹기 싫고 모든 것이 다 싫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원봉사자 한 분이 저희 집을 방문하여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용기와 힘을 넣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가 행복하고 부유하게 성장하지는 않는다」고 하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날이 꼭 올 거라며 도움을 주시겠다며 격려의 말씀과 함께 나에게 옆에서 도와주길 약속을 하셨고 나는 모기 소리만 하게 목소리로 겨우 약속은 하였지만 자신도 없었고 그럴만한 여유도 갖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나에게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출을 했던 아버지가 춘천병원에 입원하여 있다는 읍사무소 직원의 연락이 왔습니다. 몇 년 동안 소식조차도 없다가 이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2시간여 걸리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난 몇 년만의 만남에 아버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병실 문을 여는 순간 목에는 구멍을 뚫어 호스를 연결하였으며 뇌졸중으로 거의 식물인간에 가까웠습니다.
병원에서는 간병인도 없고 많은 입원비로 퇴원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집에서 내가 병간호를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와 전혀 거동을 못하며 호스로 연결하여 죽으로 식사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14평 다가구주택(郡에서 지어줌)에서 생활을 하며 양구자원봉사센터와 연결하여 자원봉사자들이 매주 찾아오셔서 밑반찬이며 집안청소 및 세탁 등을 해주시는 덕분에 어렵지만 근근히 가정이 해체되지 않고 아침이면 피곤해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동생을 흔들어 깨워 우리 두형 제는 새벽을 가르며 이 집 저 집에 신분배달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자전거가 미끄러져 신문이 길거리에 나뒹그러질때나 학교 시험기간 중에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럴 때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또 일을 시작해야 했고 이젠 아버지 병간호와 약값을 위해서 더더욱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어깨만 자꾸자꾸 무거워 집니다.
그러나 어깨가 무겁다고 그냥 포기하고 가출을 해버리기엔 할머니, 아버지, 동생이 너무 가여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마음을 다잡아먹고 학교도 다니면서 가정 일을 돌보며 할머니 시중과 아버지 병 수발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집을 나가신 엄마라도 돌아와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 아닌 환상에도 젖어본답니다. 어제는 보건소 직원분이 나오셔서 도저히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며 아버지를 간병을 해줄 수 있는 시설로 보내야 할 것 같다며 알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막상 아버지가 회복가능성이 전혀 없어 시설로 들어가시게 되면 계시는 날까지 정말 그동안 효도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라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되기를 가슴속 깊이 간절히 바라며 우리 두형제와 할머니를 나 몰라라 내동댕이치신 아버지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나에겐 정말 소중한 아버지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회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도 그렇고 자원봉사자분들도 그렇고 거의 가망이 없는 듯싶습니다. 계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집안을 이끌어 나가고 열심히 병간호하며 하루하루를 참되게 살겠습니다.
이제 들녘에는 풍년을 알리는 황금물결의 벼들이 수확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정에도 그러한 넉넉한 마음과 즐거운 행복이 찾아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 뒤면 추석이 다가옵니다. 정말 몇 년만에 아버지와 함께 하는 추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고 아버지가 병마를 훌훌 털고 일어나셔서 우리할머니, 그리고 늘 사랑한번 받아보지 못한 불쌍한 내 동생과 함께 맛있는 송편을 나눠먹으면서 옛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2)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윤관성·경북 청송중학교 1년(휴학중)
나는 시각장애인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소년가장이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가출하신 아버지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이시다. 아버지가 떠나신 자리에 세상 모르는 철부지 어린 자식과 함께 남겨진 어머니의 슬픔은 가슴 무너지는 절망이었음을 철이 들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이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 집은 늘 가난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품팔이를 해서 벌어오신 돈으로 최저의 생계 유지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출하신 후에 어머니와 나의 생활은 하루에 두 끼의 밥을 먹기에도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렸다.
남편도 없이 시각장애인으로서 어린 자식과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의 걱정은 여덟 살 어린 내가 눈치 챌 수 있을 만큼의 큰 슬픔이셨다.
결국 몸져누운 어머니께서는 며칠만에 일어나시더니 안마를 배우겠다고 말씀을 하셨다. 안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나를 외할머니께 맡기고 어머니께서는 안마를 배우기 위해 집을 떠나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외가에서 여덟 살배기 어린 나의 하루하루는 슬픔뿐이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부터 밤에 잠이 들기 전까지 어린 내 마음속에는 어머니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 시간에도 어머니에 대한 보고픔에 눈물이 글썽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도 외로워지는 내 마음을 자애로우신 외할머니께서는 언제나 따뜻한 품속에 꼭 안아주셨다.
눈물 젖은 날들이 한 달쯤 지났을 때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의 손은 터져 버릴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일곱 살 때부터 앓아 오신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계신다. 포도각막염이라는 눈병으로 실명하시게 된 원인도 류머티스 관절염 합병증 때문이다.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변형이 되어 구부러진 손으로 안마를 결심할 수밖에 없으셨던 어머니의 절박한 심정을 그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철이 들면 들수록 가슴이 아팠다.
안마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마저도 좌절되어버린 어머니께서는 외가의 도움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셨다. 그러나 외가도 무척 가난했기 때문에 외가의 도움을 받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외가의 도움마저도 받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어머니께서 절망하고 계실 때, 마을 이장님께서 면사무소 복지과 선생님께 우리집의 딱한 사정을 말씀드렸다. 덕분에 그때부터 거택보호대상자로 책정된 어머니와 나는 지금까지도 정부에서 지급되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 이장님과 복지과 담당자님께 늘 감사드린다.
8년이란 긴 세월동안 언제나 찌든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아온 어머니와 내게는 가난으로 인한 힘겨움 따위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큰 슬픔이 있다. 어머니께서도 류머티스 관절염과 합병증인 포도각막염으로 실명하셨는데 나 역시 류머티스 관절염과 포도각막염이라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16년전 어머니께서 나를 가지셨을 때 류머티스 관절염과 포도각막염은 유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사선생님께 확인한 후 안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세살 때 류머티스 관절염 증세가 나타나면서부터 내 운명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때때로 고열과 함께 관절 마디마디가 부어 오르는 통증 때문에 울며 보채는 어린 나를 안고 어머니께서는 참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어린 자식의 고통을 대신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은 세상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우리 두 모자에게 끊임없이 닥치는 가혹한 시련은 내가 일곱 살 때 또 한번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안겨 주었다.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내 눈이 자꾸만 충혈된다는 말을 들으신 어머니께서는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나를 데리고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가셨다. 검사 결과 포도각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 아무 것도 모르던 철부지 어린 나이였지만 쓰러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난다.
류머티스 관절염과 포도각막염은 현대 의학으로도 완치가 거의 불가능한 난치병이라고 한다. 가끔씩 병원에서 일주일 이상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류머티스 관절염이 심할 때도 있고, 현재로써는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는 포도각막염은 언제 어느 때 실명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무서운 병이다. 그 까닭에 어머니와 나는 자나 깨나 불안한 긴장감 속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여덟 살 때나 열여섯 살이 된 지금이나 한창 열심히 공부하고 뛰어 놀아야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무서운 병마와 싸워야 하는 고통스런 나의 투병 생활은 암울한 날들의 연속이다. 공부를 할 때나 놀 때나 조금만 무리를 해도 지혈이 잘 안될 만큼 많은 양의 코피가 나고 눈이 충혈되고 관절 마디가 심하게 부어 오르는 통증으로 고통스러울 때마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동시에 나의 무기력함에 너무도 슬퍼진다.
나는 스포츠라면 어떤 종목이든지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축구를 가장 좋아한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친구들이 운동장을 맘껏 뛰놀며 축구를 할 때면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 때문에 친구들과 축구를 할 수 없는 나는 운동장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남모르는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가끔씩 악화되는 건강으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본이 아니게 결석을 해야 할 때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학교 생활에 충실했다. 그 결과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계속해서 반장을 했고 5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도 했다. 그리고 공부도 전교에서 5등 안에 들어갈 만큼 상위권에 속했고 각종 대회에서도 입상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우등상을 받았을 때나 대회에서 입상했을 때보다도 효행상과 모범상을 받아왔을 때 가장 기뻐하셨다. 우등상을 받아 왔을 때 제일 좋아하시는 친구들의 어머니와는 정반대이신 어머니를 나는 존경한다. 그 이유는 공부보다는 인성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두시는 어머니는 비록 장애인이시지만 정상인들보다 더 건강한 의식을 가진 훌륭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즐거웠지만 몸은 힘들었던 6년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한 지 3개월만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악화된 포도각막염 때문에 무리하게 학교생활을 계속하면 실명하게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학교생활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휴학을 해야 할 만큼 내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식을 들으신 파천면사무소와 청송군청, 그리고 한국복지재단 경북지부 선생님들께서 한마음 한뜻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KBS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있어서는 권위적이라는 병원에서 6개월 동안 치료받은 병원비는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모금한 성금으로 부담해 주셨다.
6개월 동안이나 치료를 받았는데 별 효과가 없어서 치료를 중단했지만 한국복지재단 경북지부 선생님들과 '사랑의 리퀘스트' 관계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어머니께서 관절염 때문에 앓아 누우실 때나 언제 실명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함에 과민해 질 때면 불행한 내 운명에 대한 비관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눈감은 20년의 세월 속에서 열여섯 살이나 된 자식의 얼굴도 모르시면서도 슬픈 내색 없이 굳건하게 살아가시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를 생각하면 나는 결코 약해질 수 없다. 비록 지금은 휴학하고 있지만 고입 검정고시를 대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는 희망찬 미래가 있다.
내 미래의 꿈은 슈바이처 박사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다. 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첫째도 둘째도 오직 공부뿐이라는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자신에게 다짐해 본다. 먼 훗날 내가 의사가 되었을 때쯤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발달된 의술로 우리 어머니의 눈을 고쳐드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
어머니께 단 하나뿐인 자식인 내 얼굴도 보여드리고 좋아하시는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보실 수 있게 해드려 눈감은 세월 속에 맺힌 한을 풀어 드리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또한 내가 의사가 되면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과 소년소녀가장, 무의탁노인들께 무료 진료를 해드리고 돈도 많이 벌고 싶다. 돈을 많이 벌어서 지금의 나처럼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이 그 동안 나를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인정이 메마른 각박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은 아름답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아껴서 모은 돈을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선뜻 내놓으시고 무의탁노인들을 친어버이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드리고 사회에서 소외되기 쉬운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는 고마운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분들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언제나 내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내 힘겨움에 의지가 되어 주시고 내 삶에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어머니 말씀처럼 이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차게 달려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