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초 마산봉에 돌탑을 쌓으면서 금년 연내에 대간 종주를 계획했지만 9월 중순을 넘도록 돌탑은 지난 토요일 비를 맞으며 4차례를 쌓아 1m도 세우지 못했고, 지난 5월경 진부령에서 미시령으로 대간 종주를 시작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산행을 하기로 했지만 역시 일상에 쫓겨 더 이상 종주를 하지 못하는 게으른 자신의 처지를 몹시 한심스럽게 생각하던 터였다.
더욱이 지난 7월 보직을 옮기면서 이제부터라도 부지런히 산을 찾아야지 했지만 그도 역시 생각뿐이고 토요일과 일요일 잦은 비를 핑계로 쉽게 산에 오르지 못했다.
미시령 길 중턱에 오르자 서서히 동해의 여명이 밝아 오면서 어둠의 대지는 조금씩 그 허물을 벗고 있었다. 동해의 구름에서 솟는 일출의 장관을 흥분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으로 간단하게 아침요기를 마치고 서둘러 길 건너 산으로 향했다.
황철봉 구간은 대간 길이긴 하지만 2002년까지 설악산 자연휴식년제 시행으로 그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2002년 이후에도 휴식년제 연장으로 계속해서 철문과 휀스로 일반인 출입을 허락하지 않고 있는 지역이다.
오전 6시20분경 오늘도 변함없이 굳게 닫힌 철문과 휀스 서쪽으로 내려가 윤형철조망을 밟고 산자락으로 접어들었다. 서쪽 휀스 끝을 돌자 휀스 밖에서 금방 휀스 안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렇게 한걸음이 굳게 닫힌 철문과 견고한 휀스를 무색케 하다니...
어제 내린 비로 산 숲은 너무 상큼하다. 그동안 자연휴식년제 덕분으로 인적이 드문 이곳의 식생은 한눈에 보아도 상태가 양호하고 숲이 무성하다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숲은 낮은 기온 때문에 생각만큼 이슬이 맺혀 있지 않았다. 새벽 산행은 심한 일교차로 아침녘엔 이슬을 많이 만나지만 오늘은 미시령을 넘은 선선한 바람과 낮은 기온으로 이슬이 거의 없는 산길이다. 황급히 숲을 헤치며 산을 오르자 화려한 동해의 일출과 속초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여 산길을 오른다.
이렇게 명분상으로 금년도 계획된 두 번째 대간 길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처럼의 산행은 맨 처음 산을 오를 때와 같이 들뜬 긴장감과 설레 임으로 산길을 오르자 황량했던 안부에 길게 자란 가녀린 들풀이 고개를 넘는 바람으로 누어있는 그 사잇길로 천상을 오르듯 휘적휘적 마루금을 오른 지 30여분만에 작은 안부에 도착해 잠시 한숨을 돌린다.
산 건너 상봉은 아직 잠이 덜깬 듯한 자태로 우주를 지키고 있고, 그 자락엔 동해가 안겨있다. 북서쪽 도적골로 길게 이어지는 하얀 산구름이 매봉과 연화동 실루엣의 허리를 감아 돈다. 촉촉한 산길에서 발견한 한 개의 큼직한 발자국 흔적으로 나보다 꽤 부지런한 한 사람이 산을 오른 듯 보이는 것 외에는 사람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황철봉 오름 길이다. 그동안 자연휴식제를 관리하면서 표지기를 고의적으로 제거해기 때문인지 산행중 흔히 보는표지기 조차 없는 정말 한적한 산길이다.
다시 안부를 출발해 마루금을 오른다. 한국전쟁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전투호를 지나 산길 중심의 작은 바위를 사이로 산길이 두 갈래로 나뉘지만 어떤 쪽으로 든 금방 다시 만나는 길이다. 황철봉은 북설악의 주봉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당시 전쟁에도 피아간의 치열한 격전지였던 설악산 전투의 현장이다. 산바람에 가늘게 떨고 있는 하얀 꽃잎의 함초롬한 구절초는 그 날의 아픔을 대신 말한다.
10여분 후 다시 아까보다 큰 바위를 만나는데 좌측으로 돌아간다. 이 길에선 습기와 이끼가 있는 바위 길을 조심해야 한다. 바위 길을 내려서면 울창한 숲이 있는 왼쪽 아래로 돌아가는데 이곳은 기온의 차이로 인해 산 이슬이 다른 곳보다 많다. 이곳을 벗어나면 산길 곳곳에 헤쳐진 흔적으로 보아 멧돼지 무리 지어 이동하는 야생동물의 길임을 알 수 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휘적휘적 오르는 산길 곁엔 보랏빛 투구꽃, 이름 모를 산초와 들풀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그러나, 예전에 가끔 보이던 다람쥐가 별로 보이지 않은 대신 영근 알밤 도토리가 산길 사방에 널려 있다.
미시령을 출발한지 50여분만에 울산바위과 내원골로 내려서는 1,092m능선의 갈림길에 도착한다. 완만한 안부엔 천연보호구역이란 하얀 대리석의 작은 표지석의 방향표시가 이 능선 길 방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서기 쉽다. 이 능선 길은 고성군과 속초시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1시간30분 가량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울산바위와 계조암으로 내려가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반드시 남서 방향의 주능선을 따라 내려가야 황철봉을 오를 수 있다.
5분 가량을 내려가다 산을 오르자 작은 너덜지대와 숲이 나온다. 2개의 작은 너덜과 숲을 벗어나자 황철봉을 오르는 본격적인 너덜지대가 산길을 막아선다. 어쩜 이렇게 큰 바위가 자갈처럼 저 산에서 흘러내렸을까? 바위 밭이라는 표현이 맞다. 대자연의 위용에 그저 신비스럽고 숙연할 따름이다. 흘러내린 듯한 바위를 이리저리 딛고 건너고 기면서 곧장 산정을 향해 오른다. 눈부신 파란 하늘과 짙은 산빛, 먼지조차 붙어있지 못할 정도의 강한 바람에 지친 전나무와 수목은 등을 돌리다 못해 아예 바위에 누어 버렸다.
땀을 훔쳐 가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너덜 중간에서 잠시 오름 길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오른 마루금은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섰고, 건너편 북동방향에 잠결인 듯 상봉과 누런 들판, 동해의 가진항이 어렴풋이 보인다. 동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원골을 따라 울산바위와 달마봉이 동해를 가로막고 섰고, 반대편 서북쪽 향로봉으로 연결되는 실루엣 뒤에는 북녘 금강산 정맥이 선명하게 눈에 다가선다. 그 아래엔 매봉과 용대골 산 구름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이토록 짙푸른 산을 홀로 바라보노라니 가히 선경이 바로 여기다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을 그 동안 찾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이번 주말은 전날 비로 인해 날이 맑을 것이라는 기상청의 반가운 예보 소식에 일단 산을 갈 수 있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일요일 낮에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자는 동생들의 부탁을 저녁시간으로 돌리고, 일요일 차량 운행계획도 토요일에 부지런히 당겨서 서둘러 마무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막상 일어나 출발하려 했지만 엊저녁 산행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 걱정이다. 늘 홀로 조용히 산을 다니곤 했지만 때마다 지쳐오는 산행에 은근히 겁도 나고, 모처럼 대간 종주 두 번째 구간 도전의 심리적 부담 때문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그만 준비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산이 보고 싶었다. 모처럼 산 숲에 홀로 있고 싶었다. 집에 있던 컵라면 두 개와 사과1개, 오이 1개, 수통에 정수기 물을채우고 끓인 물을 보온통에 넣은 다음 평소 우의와 필요한 장비가 든 배낭을 들고 살그머니 집을 나섰다. 이렇게 준비 없이 서둘러 나서면 고생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5시. 초롱초롱한 별빛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미시령을 달려 온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너덜지대를 힘겹게 통과해 1,318m영상에 도착한 시간은 8시경. 부지런히 좁은 능선 길로 걸음을 재촉하여 안부가 밋밋한 1,381m황철봉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9시경. 산정답지 않게 엉기성기한 풀섶으로 시계가 불량하지만 잠깐 비켜서면 남서방향에는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실루엣이 환상으로 다가서고,동편으로 길게 늘어진 북설악 문바위골 풍광에 찬사를 금할 수 없다. 황철봉 산정엔 이른 단풍이 숲 사이에서 빨갛게 타고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능선 길을 타고 내려선다.
사실 수도 없이 산을 오르내리면서도 보아왔지만 정작 아는 식물이름이 거의 없다. 하지만 북설악 황철봉 구간에는 여러 식생대가 있지만 유난히 마가목이 많다. 마가목은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자란다. 이 나무가 본래 춥고 메마른 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억센 생명력을 지닌 까닭에 높은 산꼭대기로 밀려난 비운의 나무다. 푸른 잎새가 어느새 낙엽으로 변해 있고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마가목. 그동안 산행에서 그냥 지나쳤던 마가목 열매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손이 닿을 만한 곳에는 이미 누군가 훑어간 뒤였다.
산길에 떨어진 작은 잣송이가 보였다. 발로 슬쩍 밀었더니 잣알이 투르륵 빠진다. '옳커니!' 지나온 길에서 알뜰하게 빈 잣송이 나뒹구는 것을 보고 알 없는 잣송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의외의 소득에 기분 좋게 비닐봉지에 담았다. 이렇게 나무 몇 그루와 잣송이에 매달리다가 산행시간은 지체되고 있었다. 아예 배낭을 벗어놓고 잣봉지에 마가목 열매를 주어 담는데 미시령을 늦게 출발해 대간 종주에 나선 산사람을 나타났다. 흠칫 놀랐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쑥스러워 얼른 배낭을 둘러매고 산길에 앞장을 섰다. '그 열매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도 마가목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글쎄요.잘 모르는데 집에 가서 알아보려고 한다'고 얼버무렸다. 그는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미시령에 도착해 가족은 차에 두고 7시경 출발했다고 했다. 처음 산행이라 걱정했는데 나를 만난 것이 그저 고맙고 반가운 인상이다. 그는 인터넷의 정보를 보고 대간 산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산행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황철봉 내려서는 위험한 너덜을 지나 저항령에 도착한 것이 9시20분경.
저항령은 설악동에서 올려다보면 완만한 마루금이지만 접근하는 양쪽 너덜은 보기와는 전혀 다르게 가파르고 험하다. 옛날 만해 한용운 선사가 이곳을 통해 백담사로 출가했다고 전하는 신흥사와 백담사를 잇는 유일한 오솔길이지만 지금은 관리하지 않아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포락으로 곳곳이 끊겨 있어 이용하기 불편하다. 이곳에는 텐트 몇 개정도의 공간이 있지만 물이 없다.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설악 방향의 길골로 10여분 가량 내려서면 차가운 계곡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10시경 저항령을 출발해 마등령으로 향하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숲을 오르자 바로 저항령 너덜이 산사람을 괴롭힌다. 너덜지대를 오르다 잠시 건너 황철봉을 보자 그곳엔 웅장하기 그지없는또다른 설악의 아름다움이 산사람의 탄성을 자아낸다. 역시 우주는 신비스럽고 설악은 아름답다. 더욱이 청명한 날씨가 그 설악의 아름다움에 한몫을 더하고 있었다.
10시30분경 너덜이 끝나면서 천리장성의 성벽처럼 놓여진 1,249m 영상에 도착했다. 이곳은 언제나 내설악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산사람들의 오름 길의 땀을 순식간 훔쳐 가는 곳. 이곳에서 남서방향으로 귀떼기 청봉과 용아능이 바로 건너다 보이고 그 아래엔 가야동과 수렴동계곡이 흐른다. 바위를 가로타고 내려서면 설악골은 보이지 않고 대신 수렴동과 가야동계곡과 함께 내설악을 비경을 보면서 능선을 타고 돌아간다. 얼마쯤 갔을까 사람에 놀랐는지 살 오른 뱀이 바로 앞에서 계곡으로 슬그머니 내려간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 뱀도 사실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북쪽으로 향하는 두 번째 산사람들을 만났다.
더러는 지난 태풍과 수해로 심하게 망가진 산길을 기어서 오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봉인 1,326m이 눈앞에 나타났다. 11시40분경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산정에 이르자 이번엔 외설악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불동 계곡과 화채봉, 공용능이 눈앞에 있고 그 뒤 대청봉과 중청봉이 버티고 있다. 조금전의 피로감은 씻은 듯이 날아가고 주변의 풍광에 취해 잠시 넋을 놓았다. 파란 가을하늘과 짙푸른 산빛, 기기묘묘한 암능, 눈부신 설악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첫댓글 고문님의 산행을 축하합니다. 저는 신성봉 산행을 했는데 정상에는 벌써 단풍으로 물들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