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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송계삼거리-덕산재) 종주 산행기
새벽 5시에 맞춰놓은 시계가 울리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준비해 둔 배낭을 매고 서둘러 출발장소로 나갔다. 어느덧 10월초, 한달여만에 다시 산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며 아침 공기에서 계절이 바뀌었음을 느끼며 퍽 달라졌을 것 같은 산의 느낌이 상상되었다. 8월에는 땜빵 산행을 자주 가면서 산을 더 차분히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염려가 되었는데 시간 간격이 생기니 다시 순수하게 산이 그리워진 상태로 나서게 되었다.
지하철역에 당도하니 열차가 바로 들어오고 있어서 약속 장소에 늦지 않게 당도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6시 30분 천호역에 도착했다. 이명철 대장과 정병섭 건축사 사모님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잠시 후 최진 회장과 이사장님이 차를 갖고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조금 후 채총무도 도착하여 함께 출발했다. 다시 경부고속도로 죽전 정류소로 가서 박정호 사장을 태우고 지난번 우천으로 다 마치지 못했던 송계삼거리서 신풍령까지를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대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8시 35분 인삼랜드 휴게소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하고 가다 9시 42분 무주리조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지난번 앉아 쉬던 목재 계단을 지나 리프트 타는 쪽으로 올라갔다. 리프트 승강기 주변으로 넓게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일행은 거기서 송계삼거리로 가기 위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리프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걸어서 올라가는 등산객도 눈에 띠었다. 9시 50분 위쪽 승강장에 도착해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 10시에 향적봉에 도착했다. 우리보다 일찍 올라온 사람들이 정상석 부근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주변이 조망되는 모습을 병풍처럼 만들어 놓은 곳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송계삼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향적봉 바로 아래에 있는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는 완만한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봉을 넘으니 구릉진 덕유평전이 시야에 넓게 펼쳐졌다. 천상의 화원길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가을이 찾아와서 추색을 띠어가고 있었다. 조릿대 철쭉등 관목 군락이 양탄자를 깔은 듯 가지런히 산을 덮고 있었다. 안개가 끼어 호쾌한 시선은 펼쳐 보이지 않지만 시원한 기분을 느끼며 지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송계삼거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남덕유산은 12.7km, 신풍리까지는 11km가 남아 있었다.
지난번 아들이 배탈이 나 삿갓재서 바로 내려갔던 이사장님은 따로 무룡산까지 다녀와서 차를 갖고 신풍령으로 오겠다고 했다. 11시 8분 지난 구간에 이어 신풍령쪽으로 백두대간 종주에 돌입하였다. 거기까지는 백두대간으로 접어드는 과정이었다. 서울 출발 때 오늘 산행이 지난번 다 마치지 못한 구간을 땜빵하는 일정인 것이 기분을 조금 김빠지게 하였지만 백두대간 길로 들어서자 본래 목적에 또렷한 정신 상태가 되었다. 내리막길을 걸어 숲으로 들어섰다. 부스러진 낙엽이 썩어 길의 흙 색깔이 까만색을 띠고 있었다. 산길을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걷는 동안 점점 걷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초록 일색이었던 숲의 빛깔이 바뀐 계절을 따라 달라져 있었다. 숲이 드문드문 다채로운 단풍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길에는 주변의 떡갈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널려 있었다. 번잡하고 무표정한 도시에서와 달리 산에서는 변화가 직접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많은 시간이 금새 흘러간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이 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산행은 혼자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을 걷게 된다. 일행이 있다 하지라도 걷기의 순간순간은 혼자 걸으며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게 된다. 나로서는 산행에서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이 소중하다.
올해 가을은 유난히 흐린 날이 많았다. 9월에 비가 온 날이 기상 관측이래 가장 많은 해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마때 고대하던 쾌청한 가을 날씨를 접하지 못했다. 오늘도 구름이 많이 낀 흐린 날씨였다. 하기야 산세가 큰 덕유산 부근은 전국이 맑은 날씨에도 구림이 끼고 비가 올 때가 많다고 들었다.
11시 23분 작은 봉우리를 지나 다시 참나무 숲길을 걸어갔다.
아까보다 더 굵은 도토리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이야 말로 산에 사는 동물들의 요긴한 식량이 될 것 같았다. 11시 45분 다시 언덕 같은 능선을 지나는 곳은 큰 철쭉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가까이 걷던 이대장이 100년쯤 되어 보인다고 했다. 산길은 여름철에 비해 낙엽이 지면서 공간이 더 트여 보였다. 패인 진흙길에 등산화가 미끄러진 자국이 줄을 그은 것처럼 보였다. 다시 봉우리 능선을 지나 내려가 11시 53분 황령재에(1350m)도착했다. 거기서도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눅눅한 날씨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막걸리 가져온 사람 있으면 한모금 마시고 가자고 했다. 박정호 사장이 갖고 온 막걸리 한통을 꺼내어 나눠 마셨다. 얼려온 상태여서 더 시원했다.
거기서는 신풍령이 7.8km 남아 있었다. 다시 출발해 내려가다 다시 오르막길에 접어 들었다. 안개가 자욱이 낀 숲길을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올라갔다. 12시 29분 경사가 급한 오르막 길을 올라 헬기장에 도착해 뒤의 일행을 가다렸다. 뒤이어 일행이 올라오면서 근처에서 더덕냄새가 난다고 했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상의하다 조금 남은 지봉에 가서 먹기로 했다. 12시 33분 지봉(못봉1,342m)에 도착했다. 헬기장서 보이던 바로 앞 봉우리가 지봉이었다. 그러나 식사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없어 앞으로 가면서 적당한 장소를 찾기로 하고 다시 걸어갔다. 그러나 계속해 걸어도 적당한 장소가 금새 나타나지 않았다. 능선을 지나며 나무에 부딫칠 때마다 자욱한 안개의 습기가 나뭇닢에 쌓여 빗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12시 57분 월음령에 도착했다. 거기서는 신풍령이 4.7km 남아 있었다. 오늘 대간길을 시작한 송계삼거리는 6.3km 지난 지점이었다.
앞 봉오리를 오르는 길에 다시 더덕냄새가 낫다. 그것은 산에서 자란 것이라 약효가 있을 것 같았다. 옆에서 캐볼까 하고 말했지만 줄기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어서 시도도 하지 않았다. 1시 10분 길가에 조금 너른 공터가 보였다. 앞에 가던 이대장이 그 곳을 식사 후보지로 삼고 앞으로 조금 더 가서 찾아보고 온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금새 졸아와 마땅한 곳이 없다며 자리를 펴자고 했다. 뒤이어 일행이 모두 조착하자 서로 기다린 듯이 배낭에 넣어 온 식사를 꺼내 놓았다. 박정호 사장이 훈제 오리고기와 돼지고기 편육 그리고 상추까지 꺼내어 푸짐한 식단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채 총무는 참석하지 않은 박기현 회장이 준 매실주를 꺼내 놓았다. 각 자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일행들은 빨리 예상보다 빨리 지나고 있다면서 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출발 때 예기를 꺼냈던 데로 덕산재까지 가보겠다고 했다. 최회장이 그럴꺼면 서둘러 먼저 출발하라고 했다. 머뭇거리면 시간이 애매해질 듯 하여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혼자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워 출정식 하듯 코펠에 끓이던 커피를 나눠 마시고 2시에 그 곳을 혼자서 출발했다.
잠시 후 2시 18분 대봉에 도착했다. 거기서 신풍령은 3.6km 거리였다. 바로 출발해 10분 쯤 후 작은 고개를 지나 오르막길을 걸었다. 길을 지나며 전북 완주, 경북 안동, 그리고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지나며 매어 놓은 리본들이 보였다. 다시 한 봉우리를 지나 2시 37분 갈미봉(1210.5m)에 도착했다. 그 곳도 거창권역이었다. 여전히 안개가 끼어 산행에서 멀리 주변을 조망하는 즐거움은 맛볼 수 없어 아쉬웠다. 추적추적한 공기와 부딧히며 게속해서 산길을 걷는 연속이었다. 이따금 숲을 벗어난 능선길에 접어들어 바람을 느끼게 된 것 즐거움이었다.
2시 53분 다시 봉우리를 넘어 철쭉군락을 지났다. 가는 도중 자작나무 갑옷 같은 비늘이 벗겨져 나불어진 모습이 보였다. 2시 46분 헬기장에 도착했다. 혼자 갈 먼 길을 의식해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걸어갔다. 진달래와 참나무 숲이 어우러진 오르막길을 올라 정상능선을 지나가니 신풍리가 1km 남은 이정표가 세워 있었다.
그 곳을 지나 3시 9분 다시 산봉우리 정상에 도착했다. 거기서 신풍령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했다. 이어진 내리막길로 가다 신풍령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둘러 길을 걸었다. 낙엽송 한그루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는 곳을 지나가자 3시 18분 좌측 숲 너머로 인공으로 절개한 높다란 벼랑길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아래쪽에 큰 송전탑이 보였다. 그 곳을 지나니 바로 아래에 신풍령을 지나가는 도로가 보였다.
3시 27분 신풍령(빼재)에 도착했다. 그곳은 무주와 거창을 잇는 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신풍령은 추풍령에 비해 새로운 고개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신풍령 고개에 지어 놓은 정자에 두 사람이 쉬고 있었다. 좌측 도로로 나가서 다음 구간으로 이어가는 길을 찾았으나 금새 잘 보이지 않았다. 가다 되돌아서다 하며 살펴보는데 무주쪽에서 넘어오던 차가 경적을 울렸다. 나와 무관할 듯 하여 바라보니 뜻 밖에 송계 삼거리에서 헤어졌던 이사장님이었다. 무룡산까지 갔다와 무주 리조트에 둔 차로 산행에서 차편이 없는 사람들을 태워 주고 있었다. 내가 덕산재까지 가려 한다고 하자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도로 건너에 달린 백두대간 리본을 보고 길을 찾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들머리 길의 경사가 심해서 힘이 들었다. 3시 40분 그 봉우리를 올라 완만한 오름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앞 봉우리 능선을 지났다. 다시 내리막 오르막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 4시 10분 삼봉산이 2.0km 남은 지점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내리막길을 걸어 5분 후에는 삼봉산이 1.0km 남은 지점에 당도했다. 목표로 한 덕산재까지 남은 거리를 몰라 최대한 빨리 걷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숲길을 걸어가는 도중 길 옆에서 갑자기 꿩이 푸드득 날아가 놀라 바라보게 되었다.
계속해 길어가니 소사재가 2.5km 남은 이정표가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4시 30분 덕유삼봉산(1254m)에 도착했다. 정상석 글에서 아직 그 곳이 덕유산 산세임을 알 수 있었다. 쉬지 않고 그 곳을 출발해 4시 48분 암릉 정상부를 지났다. 그 주변은 칼 바위가 널부러져 발을 디디기 어려웠다. 잠시후 4시 5분 우측으로 직각되게 꺽인 방향으로 급경사지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 곳은 곧바로 가다 길을 잃기 쉬운 지점이어서 주의하도록 많은 리본을 매달아 놓았다. 그 길은 경사가 급하고 미끄러운데다 구르는 자갈돌이 놓여 있는 갈이어서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사람의 자연스런 보폭으로 디딜 수 있는 지형이 아니어서 한걸음 땔 때마다 억지로 동작을 취해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한참을 내려가도 그 상태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짜증스럽게 되어 ‘지랄같은 길’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산길이란게 애초에 사람을 위헤 생겨난 길은 없을 듯 했다. 5시 2분 다소 평평한 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몇 번을 오르락 거리며 봉우리를 넘어가자 앞 쪽에 너른 밭이 보였다. 그 근방에서 나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걸어 내려가니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보였다. 5시 25분 무주 고제면 소사재에 도착했다.
그런데 차가 없어 서울로 가기 위해 이동할 일이 걱정이 되었다. 거기서는 지나는 차를 붙들고 사정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드문드문 차가 나타날 때마다 손을 들었으나 몇 대가 그냥 지나갔다. 잠시후 트럭이 다가와 손을 들으니 멈춰 서 주었다. 과일 포장 박스가 가득 실린 차량인데 사정을 말하니 차를 태워주었다. 5시 35분 그곳을 출발해 내려가면서 행선지를 물으니 대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버스를 탈 수 있게 무풍리에 내려 주겠다고 했다. 어딘지 알지 못하지만 차만 탈 수 있으면 된다고 했다. 기사님의 나이가 많은 편인데 인상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 분은 포장 박스를 운송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다니신다고 했다. 그런데 기름값을 절약하기 위해 과속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진실한 성품이 느껴졌다.
15분 후 무풍리에 도착했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내려 무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물어 보았다. 그러나 물어 본 사람이 그 시각에 가는 차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생각이 난 듯 영동으로 가는 과일 장수에게 가서 태워달라고 하라고 했다. 그 과일 장수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니 태워주겠다고 했다. 5시 55분 그 차를 얻어 타고 무풍리를 출발하여 영동으로 행했다. 얼마후 낮 익은 터널이 나타나 바라보니 나제통문이었다. 언젠가 가 보려고 했던 곳인데 우연히 그곳을 지나면 보게 되었다. 밤길을 지나며 기사가 하는 예기를 들었다. 그분은 용인에서 7년쯤 직장생활을 하다 내려왔다고 했다. 큰 벌이는 못되지만 인심이 좋아서 살기는 편하다고 했다. 7시 10분 영동역 앞에 도착했다. 그분이 팔다 남은 머루포도를 한 박스 사며 거스름돈은 받지 않았다.
영동역에서 표를 사고 바로 옆에 잇는 식당에서 올갱이국을 먹은 후 7시 28분 무궁화 열차를 탔다. 몸에 땀이 배어 앉아 잇기가 불편했지만 잠깐 잠이 들기도 했다. 10시 15분 서울역에 도착해 전철을 갈아타고 11시 10분 경 집에 도착했다. 산행에서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이 집에 오니 해결할 수 있어서 새삼 편안함을 느꼈다. 피곤한 상태여서 바로 잠을 자고 싶었지만 내일 할 일의 준비를 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12시 50분 버스를 놓치면 한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부안에 늦게 당도하면 재대로 일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금구원에 가서 일을 보고 전주로 나오니 10시 경이 되었다. 어제 마치지 못한 구간을 마치기 위해 무주로 갈 마음을 먹었었지만 자꾸 망설여졌다. 하지만 양복에 구두를 신고 있어서 과연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버스 운행이 끝나 있었다. 차 시간을 알아보고 있는데 택시 기사가 다가와 자기 차로 가자고 해서 이끄는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택시 안에서 눈을 부치려고 했으나 기사가 무료할 것 같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 11시 30분 무풍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숙박 장소가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아서 난감한 기분이 되어 가까이 있던 경찰 파출소에 들어가 머물 곳을 물어 보았다. 경찰관이 사정이 딱하다는 듯 전화번호부를 뒤져 택시 기사에게 전화로 불어 보았다. 전화를 받은 그가 숙소를 안다고 해서 택시를 부르니 바로 도착했다. 숙소로 가는 도중 산에 가기 위해 여기 온 목적을 말하니 대덕산이 웅장하여 구두 신고는 갈수 없으니 아예 올라갈 생각을 말라고 했다. 그에게 헌 신발이라도 구할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발이 커서 맞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가 안내하는 가든 산장에 도착했다. 내일 아침에 소사 고개까지 태워다 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어제도 잠을 제대로 못자서 힘들 것 같다며 다른 사람 전화를 알려 주었다.
2층 객실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내일 산을 올라갈 일이 걱정이었다. 숙소 주인에게 5시 30분에 깨워달라고 하고 자리에 누웠으나 산장 옆을 흐르는 계곡 물 소리가 크게 들려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잠이 들어 눈을 떴는데 시간이 일러 다시 자리에 누웠다. 5시 23분 주인이 와서 방문을 두드리며 깨우고 갔다.
자리를 개고 일어나 세면을 한 후 택시를 부르니 잠시 후 도착했다. 산행하기 앞서 아침을 먹어야겠기에 밥 먹을 곳으로 먼저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문을 연 곳이 없을거라며 소사 고개에 가면 민박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6시 2분 택시가 소사재에 도착해 내려주고 되돌아갔다. 기사가 말한 민박집으로 갔지만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문을 두드리니 주인이 나와 컵라면을 사 먹었다. 그리고 휴대한 사진기의 밧데리가 떨어져 거기서 일회용 카메라도 준비했다.
본격적으로 백두대간을 가기 위해 리본이 달린 출발지점에 섰다. 그런데 그제 오후 내려올때 마지막 구간에서 농로를 걸었는데 리본 달린 위치와 달라서 제 코스로 이어가기 위해 다시 올라갔다. 6시 36분 내려오며 걸었던 배추밭 길에 도착해 내려오던 곳을 확인하고 다시 되돌아 나왔다. 숲 속을 벗어나는 언저리에 제법 키가 큰 삼나무 숲이 있었다. 그 옆으로 개간하여 언덕진 곳이 보였다.
소사재로 내려와 리본이 가리키는 길로 대덕산 쪽으로 종주 산행을 시작하였다. 조금 올라가 뒤돌아보니 삼봉산에서 내려온 길이 보였다. 계속 앞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개간해 놓은 밭이 많았다. 산행에서 그런 구간을 지날 때는 팍팍하게 느껴진다. 잠시 후 11기의 묘가 있는 곳을 지났다. 그리고 밭을 우측에 보며 숲길을 나와 다시 나타난 서너기의 묘 사이를 지나갔다. 6시 50분 다시 1기의 표를 지나 숲길로 접어 들었다. 숲 안쪽 너머로 멀리 산세가 보였다. 다시 우측에 개간한 시금치 밭이 나타났다. 6시 56분 신작로 같은 콘크리트 포장길로 접어드니 우측 언덕에 대덕산 등산로라고 쓴 나무 간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길로 올라가니 부산 농장이 나왔다. 그 곳은 비닐하우스 안에 살림집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백두대간 길이 이어지는 우측 언덕을 올라가니 공터에 5대의 차량이 세워 있었다.
리본 표식을 따라 올라가는 길 가운데 들국화가 피어 있었다. 좌측 벼랑 아래 묘목 밭에서 자라는 나무가 갈색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앞서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산행 계획표가 길에 떨어져 있어 주워 펼쳐보니 앞으로 갈 삼도봉과, 대덕산, 그리고 덕산재가 나타나 있었다. 길을 선명하게 알 수 있게 되니 마음이 놓였다. 이제 밭을 다 지나왔겠거니 생각하고 걷고 있었는데 다시 농로가 나오고 좌측 뒤쪽에 밭이 나왔다. 거기서 5명의 아주머니가 무우를 수확하고 있었다. 농로를 오르다 좌측으로 돌아드니 우측 산허리에 리본이 많이 달려 그쪽으로 안내된 가파른 길을 올랐다.
7시 31분 산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삼봉산 위쪽이 구름에 가려 있고 그 앞쪽에 소사재의 산간 마을이 보였다. 소사재를 넘어 올 때는 산을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덕유산과 대덕산이 큰 산세로 이어진 깊은 산중이었다. 비탈길을 한참 오르니 정상 부근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봉우리에 이르니 싸릿대와 갈대가 섞여 자라는 능선 너머로 자욱한 안개가 바람을 타고 능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다시 가쁜 숨을 쉬며 정상인줄 알고 당도한 민무덤을 지낫다. 안개가 짙은 능선을 지나는 동안 바람이 불어 시원함을 느꼈다. 다시 앞으로 나가 싸릿대 터널길을 걸어 7시 55분 삼도봉(1248M)에 도착했다. 주변에 안개가 자욱했다. 그 곳은 전라북도 경상남북도 3도의 경계지점인데 백두대간에 있는 3개의 삼도봉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 본 것으로 세 곳을 모두 지나게 되었다.
민무덤 같이 평평한 정상을 까치가 물결처럼 흐르듯 날아갔다. 산을 가는 동안 신발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앞으로 남은 거리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다시 좌측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완만한 길이어서 걷기가 편했다. 하지만 안개가 자욱해 소슬한 느낌이 들었다. 8시 2분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평한 길이 나왔다. 그 곳에 흑염소 4마리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새끼였다. 조금 내려와 다시 오르막길을 걷는데 바람 소리가 쏴아하고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계속해서 조릿대가 사개 청소된 길을 지나 조금 후 작은 봉우리에 도착했다.
안개 속에서 앞쪽에 큰 산세가 느껴졌다. 다시 갈대와 싸릿대가 섞여 있는 부근에 사개 청소된 길을 걸어 산봉우리에 이르니 평평한 능선길이 나왔다. 평전 같은 그 곳을 지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바람소리가 들리고 안개 속에서 햇살이 비춰 주변이 환한 느낌이 들었다. 정상 같은 능선을 지나 더 먼 산 쪽으로 걸어갔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불어 전설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는 길에 드문드문 염소똥이 보여 아까 보았던 염소를 방목해 기르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8시 18분 다시 앞쪽에 정상처럼 봉우리가 보이는 능선길을 올랐다. 우측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 가지사이로 바람이 지나며 자동차가 달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헬기장을 지나 8시 27분 대덕산(1290m)에 도착했다. 거기서 내가 출발한 소사동은 5.2Km 그리고 남은 덕산재까지는 3.5KM거리였다. 그 곳에 세워 놓은 표지판에 대덕산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대덕산은 다락산(多樂山) 다악산( 多惡山)으로도 불리는데, 이 곳은 정유재란때 이광악이 왜적을 물리친 곳이며 영조 4년 이인좌 난 때는 이 고장에서 의병 일어나 진압했다. 그리고 명종 때 에언가 남사고는 무풍(茂豊)을 무릉도원 십승지라고 하였다. 실제 이 곳에는 천재지변이 생길 때마다 이주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 곳은 금강의 최상류 발원지이다. 그리고 해발 980m 동쪽 방아골 남벽 얼음폭포는 낙동강 지류의 발원지이기도 하다.”고 쓰여 있었다. 대덕산 산봉우리들은 애기봉, 투구봉 장군봉, 감투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정상 봉우리 이름이 투구봉이다.
덕유산과 대덕산 모두 덕(德)자가 들어가서인지 장엄하면서도 푸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러한 깊이감은 상대적으로 우리의 삶터로부터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간히 고개를 넘어 오가는 삶이 어우러진 곳들이 있지만 역시 백두 대간이 지나는 곳은 오지의 체취가 서려 있는 곳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사에 찌든 사람들을 치유 할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오늘 산행에 나서면서 신발이 가장 걱정이 되었는데 그때까지 발이 아프지 않은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제 내리막길만 무사히 내려가면 되었다.
안개 속에서 명산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머물다 잠시 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차를 차고 큰 재를 넘을 때처럼 지그재그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 길은 경사가 급한 편이었지만 흙이 푹신하여 충격은 크지 않았다. 조금 나아가니 우측 산세가 조망되었다. 내리막 숲길에 물기가 많아 미끄러웠다. 길에 떡갈나무 잎이 나뒹굴고 있었다. 빨리 내려가려고 지그재그로 난 길을 곧바로 내려가기도 했다. 한 참 내려오다 얼음골 약수터에 도착했다.
아까 정상 표지판에 탄산, 유황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약수터 옆에 매달린 표지에는 “얼음골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는 길손이시여 사랑하나 풀어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가닥 그리움으로 돋아나고 우리는 한모금 샘물에서 우리를 구원함이 산임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한모금 샘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니다 --대덕골 얼음골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라고 써 있었다.
물을 마시고 다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앞쪽에 까만털, 흰털이 난 염소가 각각 한 마리씩 함께 있다 까만 염소가 내리막길로 내달려 달아났다. 뒤에서 흰 염소 울음소리가 났다. 9시 4분 평평한 길에 점어 들었을 때 우측 계곡 너머로 푸른 산세가 보이고 앞쪽에도 봉우리가 보였다. 다시 뒤에서 염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해꾼인 내가 지나가자 헤어졌던 염소가 다시 만나기 위해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안개 낀 능선길로 앞 봉우리를 넘었다. 그리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평탄한 길을 지나 다시 오르며 뒤돌아보니 대덕산의 산세가 보였다. 다시 오름 능선을 걸어 9시 22분 앞산 봉우리에 올라 평평한 길을 걷다보니 아래쪽에 차가 지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니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으나 그 곳이 덕산재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내려오다 보니 나무 사이로 도로와 건물이 보였다.
9시 27분 도로로 내려와 보니 덕산재(640m)가 확실했다. 뜻 밖에 바로 나타나서 기분이 좋았다. 바로 그곳이었다. 2년전 산행을 출발하면서 몸을 풀었던 주차장 마당과 건물이 보였다. 정면에 수직으로 산신정, 약사여래불 등 두개의 주렴식 현판이 거려 있었다. 그리고 현판에는 대덕산 산삼이라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현판이 걸려 있었다. 대피소라고 생각했던 그 건물은 개인 소유의 기도소로 쓰이고 있었다. 안도감과 환희로운 마음이 일어났다.
맞은편에서 용달차가 막 올라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태워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으나 오랫만에 당도한 그 곳 분위기를 음미하기 위해 더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차가 그냥 통과하고 그 곳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바로 아래쪽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던 터널 입구가 보였다. 거기서 2년전 여기서 백두 대간을 처음 시작하던 그 느낌과 잇대일 생각으로, 그 때 시작했던 백두대간 길을 걸어 올라갔다. 도로에서 시작되는 들머리에 “진부령까지 무사히 종주하세요, 일산 알프스 산악회 2차 백두대간 종주대” 라는 리본이 눈에 띠었다. 산길로 접어들어 언덕 같은 낮은 봉우리를 올랐다. 거기서 평평한 길을 조금 걷다 앞에 놓인 산을 올라갔다. 그 산은 경사가 가파라서 빠르게 올라가는 동안 가쁜 숨을 내쉬었다. 9시 40분 그 산 봉우리에 오르니 좌측에 숲 사이로 먼 산줄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전에 그 곳으로 행해가던 기억이 무덤에서 깨어나듯 되살아났다. 그 때 느낌을 더 뚜렸이 느끼고 싶은 생각을 하여 발걸음이 되돌아 서지지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 능선 길을 걸어 내랴가다 9시 44분 그 때 첫 휴식을 가졌던 폐광터에 도착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때 일행과 함께 있었던 때를 떠올렸다. 다시 오르막 길을 더 걸어 올라갔다. 앞쪽이 훤히 조망되는 곳에서 전에 갈 때 펼쳐보인 산세를 바라보며 기억을 온전히 되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앞 산 정상에 오르려면 시간을 너무 지체하게 될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가 할 일을 생각하니 더 이상 머물기가 무리일 것 같아 되돌아섰다.
다시 덕산재로 되돌아 나오는 동안 눈에 익은 리본이 보였다. 보통 것보다 크기가 큰 노란 리본에 “2005년 8월 13일 호남/금.호남정맥/땅끝기맥종주에 이어 백두대간 종주 672km/ 현대중공업 자인 산악회”라고 적혀 있었다. 그 때 바람재에서 만낫던 일행이 그 부근을 함께 지나며 리본을 매다는 것을 보았었다. 그때 초행길이엇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이제 다른 사람들의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처녀지로 만나던 길이 시간이 흐르며 다시 다른 사람들의 새로운 발길의 자취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때 두려운 마음으로 나섰던 길이 그 후로 지나온 길과 나의 인식안에서 연속해서 이어지게 되었다. 다시 덕산재에 당도했다. 백두대간의 느낌을 온전히 이으려는 나만의 몸짓을 그렇게 하고나자 돌아갈 걱정만 남게 되었다.
차가 없는 나로서는 막연히 지나는 차량을 기다려 부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나는 차가 별로 없었다. 잠시 후 한 차량이 나타나 부탁을 하니 그 곳에 온 차량이라며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계속 서 있자니 피로가 몰려와서 도로경계석에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년전에는 그 곳이 그렇게 삭막하게만 여겨졌었는데 대덕산을 넘어온 후라 그런지 그 곳의 깊이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길이 나제통문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안 후라 더 유서 깊게 느껴지는 듯 했다.
간간히 아래쪽에서 재를 넘는 바람소리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려 귀를 쫑긋하게 했다. 마음 한편은 다급해지고 있었지만 혼자서 외진 곳에 앉아 있자니 백두대간이 지나는 그 곳의 장소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 시절 하룻밤을 자고나서 산행을 시작했던 추억이며, 오늘 그 길을 이으려 이 곳으로 걸어 온 것까지 갖가지 감회가 마음 안에서 일었다. 그렇게 나 홀로 덕산재의 추억을 깊이 되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론 외로움이 밀려 왔다. 산길은 그렇게 외로운 행차인 것이 문득 느껴졌다.
그 때 맞은편에서 차가 와서 다가서며 태워달라는 손짓을 했다. 차가 속력을 줄였으나 바로 서지 않아 지나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내 차가 섰다. 김천쪽 차를 기다리던 상태여서 운전석 쪽에서 다가가 차 안을 보니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운전은 여자분이 하고 있었다. 반대쪽 도로가에 가서 남자에게 사정을 말하려니 쉿 하는 손짓을 했다. 통화중에 내리고 있었다. 여자분께 말하니 태워주겠다고 했다. 차 안에 찬송가와 낱장으로 된 악보가 있었다.
통화를 하며 저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남자분이 통화를 마치고 차로 돌아왔다. 다시 그 분에게 허락을 구하니 타도 좋다고 했다. 두분 다 지적이고 반듯한 인상이었다. 남자분은 사진작가인 듯 좋은 사진기를 갖고 있었는데 이 쪽으로 작품 촬영을 나온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이 곳을 지나게 된 상황을 이야기하자 그는 대구에서 왔는데 방송국에서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했다. 작가인 분이라 그림과 건축 등을 화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제통문을 지난 삼거리부근에 당도하면서 여자분이 좌측 무주 구천동쪽으로 가야하지 않느냐고 해서 내리겠다고 하니 남자분이 그냥 무주를 거쳐 가자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니 어느덧 무주에 도착해 있었다. 먼 거리인데 신기할 만큼 금새 당도한 느낌이었다. 순간 나 때문에 시간을 더 쓰게 된 그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무 곳이나 바로 내리겠다고 했다. 크지 않은 시내여서 터미널은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리며 진심으로 대해준데 대해 감사의 작별 인사를 했다. 짧은 순간의 만남이었지만 인상이 깊게 남았다.
터미널에 도착해 창구에서 서울 가는 차표를 사려고 하니 그 차는 2시간 후나 있다며 대전으로 가서 갈아타고 올라가라고 했다. 5분 후에 대전가는 차가 바로 있었다. 차에 올라타니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난 안도감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우연히 만난 이들로부터 큰 배품을 받은 것에 기쁜 마음이 되어 명랑하게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07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