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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유세비우스 교회사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약 260-339)는 갈리에누스(Gallienus)의 통치 말기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며 청년시절 팔레스타인에 살면서 교육을 받았으나 누구에게서 세상 학문을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거룩한 학문에 있어서는 안디옥 교회의 장로였던 내시 도로테우스(Dorotheus)를 교사로 모셨음과 트리테미우스(Trithemius)와 함께 제자였음을 여러 가지 정황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직을 맡고 있던 대단히 경건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했던 아가피우스(Agapius)가 유세비우스에게 성직을 맡기므로 그는 당시 가이사랴 교회의 유명한 장로였던 팜필루스와 굳은 우정을 나누기 시작하여 팜필루스라는 이름도 취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황제 도미치안 핍박시기 즉 308년 경 감옥에 갇혀 있는 스승 팜필루스를 자주 방문했다. 그 옥중 가운데도 그들 두 사람은 ‘오리겐의 변증서’를 썼다. 그가 순교하자 유세비우스는 두로를 거쳐 이집트로 갔다. 그곳에서 311년 그는 감금되었지만 고문을 받지 않고 석방되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함께 구금되었다가 한 쪽 눈을 상실한 감독에 의해 비난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증명되지 않는다. 약 314년 그는 카이사리아 감독이 되어 종신토록 그 직을 수행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변증적 작품들로 ‘논증’과 ‘복음적 준비’이다. A.D 315년 ‘복음적 논증과 준비’라는 책들을 저술할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이단파문이 있었고 급기야 니케아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그 후 유명한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를 썼다. 자신의 초기 노력에서 얻은 평판 또는 자신이 가진 재간으로 인해 그는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틴의 호의를 받았다. 그래서 황제는 그와 깊은 교제를 가졌고 그가 교회적 연구를 하는 데 국가적 역사자료들을 접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318년경 아리안 논쟁이 일어나자 아리안은 지지를 얻기 위해 동방교회 감독들에게 청원하면서 자신의 견해와 그들의 견해가 같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지도아래 아리우스를 복권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에게 서신을 쓰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그는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동방교회 감독들 측에 속했다. 그런데 막상 니케아 범종교회의가 개최되자 알렉산더와 아리우스의 중립적 위치를 지킨 것처럼 여긴다.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상징에 대한 초안을 황제에게 올린 사람은 바로 유세비우스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묘사하거나 특정 위인을 옹호하는 글들을 많이 썼고, 황제를 감동시키며 진상되었던 부활절에 관한 글,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와 그곳에 헌납된 선물들에 대해 묘사한 책. 그리고 그가 아리우스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De Ecclesiastica Theologia' 등의 저서 외에 수많은 저서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그의 걸작은 ?교회사?라고 할 수 있다
제 1 권
저자의 목적은 우리 주님의 시대로부터 그 당시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거룩한 사도들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지만 오직 안내자 되시는 하나님을 기도로 의지하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도우실 것을 믿으며 이 책을 기록한다고 했다.
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본질과 본성, 위엄 및 근원은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성자 외에는 성부를 아는 자가 없고, 또 성자를 탄생시킨 성부 외에는 성자를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스도는 분명 우주의 창조자이시오 통치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그분은 아담 이후 너무도 타락해버린 인간의 본성이 메시야이신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 가까워진 시대에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며 성부께서는 그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만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예언 되었던 대로 주님의 시대에 세습적으로 유대 민족을 다스리던 유대인의 통치가 끊어지고 최초의 외국인 임금 헤롯이 유대 백성을 통치함으로 모세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과 오랜 시간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실 때 권세 잡은 자들이 반대하여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며 그중 헤롯은 그 악행의 벌은 오래지 않아 질병으로 몸이 썩고 창자에 종기가 생기고 여러 가지 고통으로 죽어갔다. 이런 모습을 본 거룩한 일들을 알고 있으며 지혜가 있어 그런 일들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왕의 큰 불경함 때문에 이런 형벌을 내리셨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할 때에는 4명의 제사장이 거론되어 주님의 사역 기간이 온전한 4년이 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제 2 권
그리스도의 승천이후의 사도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유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했으며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에 의한 핍박이 계속되어 최초의 그리스도 순교자라 불리는 영광을 안은 스데반이 순교하고 주의 형제 야고보도 순교 하였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졌다. 본디오 빌라도는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기적들을 자신이 조사해 확인 했으며 대다수의 백성이 그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고했다. 기독교 교리가 전 세계로 전파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일로 거룩한 섭리에 의해 감동을 받은 티베리우스가 있었다고 알려준다. 티베리우스 사후에 카이우스가 왕위에 올라 아그립바에게 유대 통치권을 주었고 그 후에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헤롯과 헤로디아는 추방 되었다.
그 후 베드로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귀한 사령관처럼 거룩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복음을 전했다. 로마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교리를 한번 듣거나 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엇었음으로 베드로의 동반자인 마가에게 구전으로 전해진 교리를 기록으로 남겨 달라고 간곡히 청했고 그리하여 오늘날 마가복음이라 불리는 역사서가 기록 되었다. 복음이 전파 되는 동안 예루살렘은 점점 타락하여 제사장의 양식을 빼앗는 대제사장이 있었으며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했으며 네로 황제의 박해는 극에 달해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 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반란으로 발생한 폭동으로 유대인들은 모든 민족의 대적이 되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제 3 권
사도들은 여러 곳으로 죽음도 불사하며 복음을 전파했으며 많은 무리들이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해 정경, 위경, 등으로 분류된 각종 말씀의 책들이 만들어 졌고 유대 땅에서는 타락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이어졌다. 도미티안은 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다루었으며 부당하게 살해하고 귀족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하기까지 했으며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는 반기독교 박해에서는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 당시 복음서의 필요성은 요구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던 사도들은 하나님 말씀의 문서화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가 믿는 자의 요구에 의해 마가와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고 마태는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하다가 다른 나라로 가야 했기에 자신이 없는 공백 보충하기의해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 기록들을 접한 요한은 진실성을 인정 하고 증언했으나 부족함을 더해 기록하게 하여 4복음서는 만들어 졌다.
그 무렵 악한 영들도 비슷하게 전파되어 시몬 마구스 후계자 메난더, 에비온 종파라 불리던 무리들, 세린투스, 니골라 당이라 불리던 무리들 등, 열러 이단들이 거짓 지식을 복음이라 전파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믿는 자와 교회를 힘들게 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거룩한 죽음은 이어졌다. 요한과 빌립이 수교했고 예루살렘 2대감독 시므온이 순교했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총독은 순교자가 많음에 감동하여 트라얀 황제에게 기독교인의 선함을 편지로 알렸으며 그로 인해 일부 박해가 줄어들었지만 악의 세력은 부분적으로 계속 역사하였다. 그럴수록 믿음을 확고히 하는 말씀의 책들은 더 많이 기록되고 퍼져나갔다.
제 4 권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교회는 나날이 번성하는 만큼 유대인의 재난도 증가 했으며 불행한 일도 발생하여 트라얀 황제 통치 때 유대인들의 소요로 유대 민족의 핍박이 또 다시 시작 되었다. 당시 정치적으로 보면 하드리안 황제가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내용 등에 따르면 로마 정부는 기독교에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메난더에게서 나온 상이한 두 이단집단인 안디옥사람 사투르니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바실리데스로 나뉘어져 교회의 교리를 부정하고 다른 이론을 내세워 미혹했으며 한편으로는 헤게시푸스, 저스틴, 안토닌 같은 사람은 기독교 교리를 훌륭히 변증하기도 했다.
이 무렵 아시아에서 큰 박해가 있었으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 그 시대 가장 훌륭하고 사도적이고 예언적 교사라 칭하던 폴리갑은 박해를 통한 여러 순교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순교하는 꿈을 꾸고서도 묵묵히 죽음을 받아 들였으며 저스틴은 견유학파 철학자 크레센스의 의 교활한 선동으로 순교 했으며 그의 저서에 언급된 톨레미, 루시우스 등도 순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퍼짐과 같이 사탄의 어둠이 성행해 무사누스, 타티아누스, 바르데사네스 등은 하나님 교리 전파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더불어 안디옥교회 감독 데오필루스, 고린도 교회 감독 디오니시우스, 고르티나 감독 필립, 사데교회 감독 멜리토, 등은 각자의 믿음을 지키며 저술 활동을 통하여 교회와 교리를 위협하는 이단으로부터 이겨나가는 힘이 되었다.
제 5 권
신앙을 위해 고난 받은 고올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어려운 상황을 아시아와 브리기아로 전했다. 그들은 이교도들이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며 원수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공격하며 하나님 종들을 대적하여 자기의 종들을 훈련하고 길들여 사용했으며 믿는 자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내어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으며 그런 고난 중에서도 믿는 자들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모습으로 이전에 믿었다 하나님을 떠났던 배교자들이 다시 믿음을 찾게 되었으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웠으며 연약한 자들을 구하셨으며 또 굳건한 기둥처럼 인내하여 원수의 폭력을 견뎌낼 인물들을 예비하셨다고 했다.
이레니우스란 사람은 4복음서에 대해서 “거짓 교리의 타도와 논박” 이라는 책에 마태가 히브리인들과 같이 머물며 히브리 방언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고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고 그들이 떠난 후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관이었던 마가가 베드로가 가르치던 것을 기록하여 남겼으며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도 바울이 전파하던 복음을 기록했으며 주님의 수제자 요한도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무는 동나 복음서를 기록했음을 언급하며 요한 계시록도 설명하고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추정했다.
여전히 이단들은 순수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빗나간 영적인 욕망과 육적인 욕망과 과도한 신비주의로 만들어져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술수를 부리며 사탄의 선동을 받아 사람들의 영을 악하게 만들어가며 자기들도 그 악함에 자멸해 갔다.
타티안의 제자 로도가 이단과 맞섰고 아시아와 브리기아에서 들어온 몬타누스파에 대하여 아폴로니우스는 몬타누수의 여선지자는 고귀하지 않고 음란하며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과 반하여 가난한 자에게서까지도 돈을 긁어내는 무리들이라는 것이라 반박했으며 안디옥 교회의 감독인 세라피온 역시 이 파에 대해 논박하였다. 그리고 이레니우스는 로마 교회의 건전한 제도를 훼손하려는 사람들을 대적하여 많은 서신을 기록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아폴로니우스가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유월절을 지키는 일에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감독들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주님의 부활의 신비는 다른 날이나 주일에 축하되어야하며 금식은 유월절날 끝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아시아 감독들은 관습을 지키기를 고집했으며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서로의 입장을 배격하지 않고 협상하라고 권면했다.
제 6 권
세베루스 황제 통치 때에 박해의 불길이 크게 번져 수천 명이 순교했다. 그 당시 소년이었던 오리겐은 체포되어 감옥에 있던 아버지에게 순교에 대한 격려 편지를 쓸 정도로 순교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순교하고 재산이 몰수되어 궁핍한 가운데서 학문에 전념하여 18세 때 이미 신앙의 기초를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했으며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었다. 그를 표현하는 말에는 “그의 교리는 생활이요, 그의 생활은 교리였다” 라는 말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님의 복음적 교훈들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르침으로 플루타크, 세베루스, 헤라클리데스, 헤론, 등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했으며 바실리데스는 오리겐 학파의 일곱 번째 순교자로 포타미애나를 처형장으로 끌고 갔던 사람이다. 포타미애나가 여인의 몸으로 순교하는 과정에서 그는 꿈속에 환상과 계시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포타미애가의 뒤를 곧 이어 순교하였다.
당시에 쓰인 책들을 보면 감독 중 세라피온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클레멘트 역시 8권의 책이 현존하고 있다. 성서 연구에 있어서 오리겐은 대단했다. 오리겐은 성경 주해에 힘썼고 히브리인들에 의해 정해진 성경은 모두 22권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약에 대해서는 4개의 복음서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며 유대인들의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본들을 확보하고 70인역 이외의 역본들도 연구하여 헬라인 사회의 이방 철학자들도 오리겐의 학문적 탁월함을 인정했다.
이시대의 다른 인물들로는 아프리카누스, 베릴루스의 오신, 헤라클라스의 후임 감독 디오니시우스 등이 있고 고르디아누스의 로마 통치 후 필립황제가 아들과 함께 통치할 때에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오리겐의 제자들은 그레고리라 알려진 데오도루스와 그의 형제 아데노도루스가 있었으며 학문이 탁월하여 젊은 나이에 폰투스 교회의 감독에 임명 되었다.
제 7 권
데시우스 이후 갈루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박해는 여전했고 당시 교회 감독들은 코르넬리우스 이후에 루시우스가 되었으나 8개월 만에 죽고 스데반이 감독이 되었으며 이단에 빠졌다 돌아온 이들이 세례만 받으면 정결케 되는가 하는 문제가 논쟁이 되었을 때에 한번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 정결케 되기 전에는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는 카르타고 교회 감독인 키프라인으로 인해 크게 분노 했었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는 서로의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당시 새로운 이단인 사벨리우스에 대해 불경한 견해와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과 말씀에 불신으로 가득 찼으며 성령도 불신한다고 했다. 갈루스 황제는 2년도 못되어 제거되고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황제가 되고 이집트 마술사 마크리아누스의 사술과 대적했다. 박해도 계속되어 디오니시우스가 도미티우스에 박해에 관한 편지에서 유세비우스도 언급된다. 이후 아들 갈리에누스가 집권하여 기독교 박해가 억제 되었다. 평화로운 기간에도 가이사랴의 마리누스란 사람은 백부장 승진을 앞두고 신앙을 고백하여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야고보는 주님으로부터 최초로 감독직을 받았고 디오니시우스는 ?절기 서신들?을 기록했으며 평화가 찾아오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 왔으나 다시 전쟁과 폭동이 일어나 여러 무리로 나눠진 형제들을 다스리기는 불가능 했다. 전쟁 후 페스트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전쟁과 기근이 다시 발생하여 힘들었으나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치료하며 형제를 돌보아 대신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 순교적 헌신이 있었다.
이집트의 감독인 네포스는 풍유가들의 논박이라는 책에서 육체적 향락의 천년왕국이 이 땅에 올 것이라고 추측하며 이상한 교리도 기록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약속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 그 의견을 반박하였고 그 마을의 장로와 교사를 소집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가운데 그 이상한 교리의 차시자 코라시오는 더 이상 그 교리를 신봉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되었으며 요한계시록에 대하여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난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는 일이 불가능하며 그 저자가 요한이기는 하나 세베대의 아들임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고 아시아에 있는 다른 요한일 것이라고 했다
디오니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시절 같은 이름을 가진 디오니시우스가 로마의 감독이 되었고 사모사타의 바울이 안디옥 감독이 되었다. 바울은 주님께서 본질상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교리에 어긋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소집된 공의회에는 당시의 훌륭한 감독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모였다. 바울의 추종자들과 반대 세력은 서로 논쟁을 거듭하였고 그러는 중 연로한 디오니시우스가 갈리에누스 황제 12년에 사망했다. 이후 클라디우스가 황제가 되었으며 2년 후 아우렐리안이 황제가 되었으며 아우렐리안 시대 마지막 공회때 안디옥의 이단자는 모든 것이 드러나 파문을 당한다. 그러나 바울은 아우렐리안 황제에게 항소하였고 정통파에 우호적이던 황제는 도리어 점차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고 칙령을 내리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었다. 그때에 마네스란 사람은 사탄의 선동을 받아 스스로가 그리스도며 자신이 성령과 보혜사라 칭하며 이전의 수많은 이단으로 발췌해 꾸며 맞춘 교리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으니 이것이 마니교였다.
로마교회는 펠릭스를 이어 유티키아누스, 카이우스, 마르셀리누스 감독으로 이어졌고 안디옥에스는 돔누스, 티메우스, 시릴루스, 티란누스로 이어졌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유세비우스가 다스렸고 그 후 학문에 탁월하고 선한 알렉산드리아 사람 아나톨리우스, 철학자 스데반, 데오도투스로 이어졌다.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에서는 데오텍누스, 아가피우스, 팜필루스가 감독을 맡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디오니시우스 이후 막시무스, 테오나스, 그리고 피터에게 감독직이 승계되었다.
제 8 권
박해가 있기 전 까지는 우리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헬라인과 야만인들까지 자유와 영광을 누렸었다. 그 은혜 속에서 우리는 나태하고 방종함으로 하나님의 작은 심판들을 자초했으나 그조차 우리는 알지 못했고 회개하지 못했다.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는 박해로 이어져 디오클레티안 통치 19년 디스트루스월에(로마력 3월) 교회들의 기초까지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고 신앙인들의 관직을 박탈하고 일반인도 신앙을 고수한다면 그 자유를 박탈하며 온 나라 성직자를 투옥하고 이방 신들에게 제사 지내게 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고귀하고 결연한 태도로 시련들을 견뎌내었거나 순교함으로 신앙을 위한 투쟁의 본을 보였으며 각처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쓰는 신앙인들이 보였다. 니코메디아에서는 황제의 칙령을 찢어버리는 일이 있었으며 황제의 궁전에 있었던 도로테우스와 그의 동료들과 그 하인들도 엄청난 박해를 당했으며 하인들 중 하나인 피터가 순교했다. 멜리티나 및 다른 지방 그리고 시리아에까지 반란이 있을 때 황제의 칙령이 선포되어 박해가 가해졌었고 두로와 베니게에서는 채찍질과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또는 불과 뜨거운 인두로 낙인찍히는 핍박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사나운 짐승들이 수차례 거룩한 사람들에게 달려들었으나 번번이 물러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집트, 테바이스, 브리기아 지방, 아라비아, 갑바도기아, 등지에서 핍박이 계속되었고 그 중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순교에 대하여 필레아스가 서신을 기록하였다.
박해는 시작된 지 8년째부터 완화되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통치자들과 박해자들을 변화시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하듯이 10년째 되는 해 완전히 종식되었다.
순교자들의 책
팔레스타인에서는 프로코피우스가 최초로 순교의 면류관을 쓰고 난 후 가이사랴의 많은 지방교회 감독들이 기쁜 마음으로 무서운 고문과 훌륭히 싸웠으며 알레우스와 작케우스도 순교자의 면류관을 썼다. 그 때에 안디옥에서는 로마우스 집사가 혀가 잘리는 고문에도 치 않고 순교 했으며 박해가 시작된 지 2년에 티모데우스는 약한 불에서 서서히 태워 죽이는 사형을 받았으며 아카피우스와 데클라라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했고 여섯 명의 청년들은 스스로 자기의 손을 묶고 서둘러 우르바누스에게 가서 순교의 열정을 보였다.
박해 5년에는 18세밖에 안된 처녀 데오도시아가 무자비한 고문 후에 바다에 던져졌으며 돔니우스는 화형 당했으며 팜필루스는 제사를 거부해 투옥 되었다. 박해 6년에는 포피리 채석장에 있던 아이들을 포함한 97명이 순교 했으며 그 후 발렌티나 사람 파울루스가 같은 시기에 순교하였다. 파울루스는 처형당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청하고 동료 신자들과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이방인과 주변의 군중들, 그리고 재판관, 통치자, 자기 목을 벨 형리를 위해 기도함으로 처형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하고 의연한 자세로 칼을 받고 순교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이집트에서 130명의 신앙인들이 눈이 뽑히고 발목에 인두질 당하는 고난을 받았었다.
박해는 더욱 심해지고 안토니우스와 제비나와 게르마누스는 제사 드리는 총독에게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전해 순교했으며 같은 날 시토폴리스의 여인 엔나타스는 호민관 막시스로부터 끔찍한 능욕을 당하고 순교했다.
누구보다 덕이 뛰어나고 철학적인 품행을 지닌 팜필루스와 일리아 교회 집사 랄렌스와 잠나의 바울과 다섯 명의 형제들이 순교 했으며 포피리라는 청년과 군인 셀류쿠스가 순교 했으며 데오둘루스가 순교하고 줄리아누스가 마지막으로 순교를 완성했다. 박해가 시작된 지 7년이 지나고 박해의 강도가 조금은 완화 되는 듯했지만 박해는 여전하여 팔레스타인 동 광산의 많은 증성 자들이 악독한 총독에 의해 추방되고 펠레우스와 닐루스와 어떤 장로와 파테르무티우스 이 네 사람은 신앙을 버리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순교하였으며 각기 다른 곳에서 신앙을 지키던 자들이 막시미누스의 명에 따라 하루에 39명이나 참수되기도 했다.
제 9 권
사비누스라는 지방 통치자 중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가 황제의 뜻에 따라 과거의 칙령을 폐지 한다는 명령의 서신을 각 지방 총독들에게 보냈다. 박해의 투쟁을 신실하게 통과해 낸 많은 믿는 자들이 자유롭게 되었다. 신앙 때문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석방되고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풀려나고 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선의 원수인 폭군과 동로마제국 황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형제들을 채포 했으며 기독교인들을 대적하기 위해 법령을 발표하고 또 다시 박해가 시작 되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었던 피터 짐승의 먹이가 되었고 안디옥 교회 장로 루시아누스는 니코메디아로 끌려가 교리를 옹호하다가 투옥되어 살해 되었다.
박해가 자행되고 있을 때 교회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개입하심을 보여 주었다. 비를 다스리시고 뒤이어 전에 없었던 기근과 페스트가 창궐했으며 또 다른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시력을 잃었고 동맹국이었던 아르메니아와 전쟁까지 치르고 패배하며 많은 생명이 전쟁과 기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교만한 막시미우스가 기독교인을 박해하기위해 전국에 발표한 법령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놀라운 일들을 한꺼번에 발생하게 하심으로 어둠속에 있던 기도교인들에게 평화의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막시미누스는 리시니우스와의 동맹을 깨고 전쟁하여 패배했다. 겨우 빠져나와 죽기 직전 이 분파를 채택하여 예배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자유로이 그렇게 할 특권을 부여하고 빼앗긴 모든 재산을 반환한다는 내용의 법을 발표했다. 막시미누스는 리시니우스에게 치욕적인 죽음을 당했으며 죽기 전에 기독교인을 난폭하게 대한 심판이라고 고백했다.
그 후에 막시미누스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제거되었으므로 교회는 그 기초부터 쇄신되기 시작했으며 그리스도의 교리는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어 전보다 더 큰 특권을 누렸으며 막시미누스를 추종하던 퓨세티우스와 쿨키아누스가 살해되고 안디옥에 동상을 세우고 박해를 지시했던 데오텍누스도 막시미누스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는 등 불경한 사람들은 모조리 제거 되었고 나라는 콘스탄틴과 리시니우스가 다스려 하나님의 은혜주심을 알고 나라를 다스려 안전하게 되었다.
제 10 권
하나님의 선한 역사하심으로 교회와 백성은 폭군의 압제에서 해방 되었다. 권세 가진 자 들이 우호적으로 많은 특권을 주었으므로 황폐해 졌던 곳이 다시 부흥하고 성전들이 전보다 더 화려하고 높이 세워졌으며 모든 도시에서 새로 건축한 기도의 집이 헌당되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콘스탄틴 황제와 리시니우스 황제는 종교의 자유를 부인해서는 안 되며 기독교를 보호하고 그 권위를 회복하는 칙령들을 발표하였고 과거 교회 소유의 재산은 교회에 반환하라고 했으며 교회 단결을 위하여 감독 회의를 개최하라는 서신도 보냈으며 황제가 교회에 돈을 하사한다는 내용의 서신도 기록되었다. 또한 황제는 심령이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이 교리를 변조하여 백성을 미혹하는 세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을 교회에 통보했다. 또한 교회의 성직자들에게는 정치적 일에 있어서의 국가에 대한 봉사를 면제해 준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처럼 은혜로운 날들 속에서 온전한 이성을 갖지 못한 리니시우스에게 사탄이 개입하여 근친결혼을 하고 우상을 섬기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콘스탄틴을 대적하여 전쟁을 치르며 자신이 예배 하여야할 하나님과도 대적하였다. 결국 리니시우스는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지고 하나님을 조력자로 모신 콘스탄틴은 쉽게 승리하였고 경건한 아들 케리스푸스 가이사와 함께 신앙의 덕으로 치장하고 선하고 참된 신앙을 나타내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후로 그의 아들들은 경쟁자 없이 굳건하게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았으며 온 세상에 하나님께 감사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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