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걸승전 경기 장면.. 일본이 세계 최강팀 소련을 격파하고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의 시상대에 오르게 된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한국 여자배구의 주포였던 조혜정 선수.. 날으는 작은 새라는 별명의 그녀의 맹활약에 한국은 올림픽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의 쾌거를 이루게 된다 .>
한국 여자배구 첫 동메달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의 쾌거였지만 메달을 향한 첫 여정은 1964년의 도
쿄에서 시작되었다. 57년 전인 1964년에도 도쿄 올림픽이 열렸다. 아시아에서의 첫 올림픽이자 전 세계로 생중계 된 최초의 올림픽 경기이기도 했다.
미국이 쏘아 올린 최초의 통신 위성 Tell Star(텔 스타) 덕분이었다.
또한 일본의 여자배구가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정상의 무대에 올라 서며 아시아 배구의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일본 여자배구의 전설 뒤에는 늘 다이마쓰 히로부미 감독이 따라 다닌다. 그는 여자 선수들에게 남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혹독한 지옥훈련흘 시켰다.
쇠사슬과 채찍을 휘돌려가며 점프력 훈련을 시켰다. 수백 차례의 스매싱으로 슬라이딩 캣치 훈련 중에는
혼절하는 선수가 있었는가 하면 감독의 바짓가랭이를 붙들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선수마져 있었지만
다이마쓰는 발로 걷어차는 냉혹함을 보였다.
악마라는 별명의 다이마쓰 감독에게서 가혹한 체벌과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일본 여자배구팀은 1961년의
유럽 원정 중에 무려 24연승을 거두며 '동양의 마녀' '동양의 폭풍'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1962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무대는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이었다.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던 일본 배구계에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게 되는데 올림픽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두고 그 유명한 '신금단 사건'이 터진 것이다.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 가운데 신금단이라는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다. 남한에 살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17년 전에 남으로 내려오면서 북에 두고 온 친딸을 만나기 위해 급거 일본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매정한 북한 측에서는 17년 만의 부녀 상봉에 단 7분 만을 허락한 뒤 매몰차게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이 비정한 사연이 서방언론에 의해 대서특필 되고 북한정권에 대한 맹비난으로 확대되자 발끈한 북측이 선수
단 전원을 평양으로 철수시켰다. 바로 이 사건이 일본 배구계에 치명타를 안기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평양으로 철수한 북한 선수단 중에 아시아를 대표한 여자배구팀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일본 배구계는 그야
말로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구기종목의 참가국이 6개국 미만이면
그 종목은 자동취소가 된다는사실이다. 북한팀의 보이콧으로 인해 남은 건 5개국 뿐인지라 도쿄 올림픽에서
의 여자배구 종목은 자동삭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일본 배구계로서는 핵폭탄급 재앙이었다.
일본 배구계는 물론 다이마쓰 히로부미 감독의 최대 숙원인 올림픽 금메달은 이대로 물거품이 되는 갓인가!!
패닉 상태의 일본 배구계가 활로를 모색하던 중 현해탄 너머 한국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게 된다.
일본 배구계 인사들이 급거 서울로 날아갔고, 한국팀의 참가를 애원하지만 그게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
지역예선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한국은 대표팀도 이미 해산되어 선수들은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선수단을 다시 소집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나 촉박했을 뿐 아니라 설령 팀이 꾸려져 도쿄로 간다해도,
실력면에서나 사기면에서나 모두가 바닥인지라 동네북 신세가 될 게 뻔했다.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은 결단을 내렸고 선수단이 꾸려졌다. 제대로 된 훈련은 커녕 손 한 번 맞춰보지
못한 여자 선수들은 손수 바느질로 헤진 유니폼을 꿰매고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았다.
도쿄 올림픽 개막을 불과 하루 앞둔 날,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는 일본 배구 관계자들이 애타게 한국선수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라한 모습의 한국 여자선수들이 도착하는 순간 배구협회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선수단을 맞았다. 그리고 한국 덕분에 기사회생한 일본 여자배구팀은 강호들을 연파하며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의 감격을 일궈 냈고,다이마쓰 감독은 국민영웅이 된다.
그리고 그건 끝이 아닌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일본 여자배구팀은 이후로도 1977년 까지 무려 13년 동안
세계 여자배구계의 정상을 지켜내며 '동양의 마녀' 시대를 열게 된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1968년의 멕시코시티 올림픽,1972년의 뮌휀 올림픽,1976년의 몬트리올 올림픽의 우승도 물론 일본의 몫이었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뒤, 한국 여자배구팀 감독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바로 다이마쓰
감독이었다. 한 때는 악마라 불리웠고 지금은 세계 배구계의 거인인 그가 한국 감독에게 90도로 인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일본 여자배구의 영광 뒤에 숨겨진 한국팀의 보이지 않는 희생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978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이마쓰는 수시로 현해탄을 건너며 한국의 선수들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하였다. 다이마쓰는 단지 강도 높은 훈련 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유럽 선수들에 비해 평균 신장이 10cm 이상 열세인 동양 선수들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창의적 기술들이
디이마쓰 감독에 의해 선보였는데 상대를 흔드는 서브, 회전 리시브, 시간차 공격 등이 그것이다.
다이마쓰의 열정 속에 배구 후진국이던 한국도 세계 무대에 점점 가까이 갈 수 있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기어이 동메달 시상대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2021년의 도쿄에 배구여제 김연경이 있었다면 1976년의 몬트리올에는 Flying Little Bird(날으는 작은 새)
라는 별명의 월드 스타 조혜정(164cm)이 있었다. 또한 이순복, 유경화, 윤영래, 백명선, 유정혜, 변경자,
김화복 선수 등도 그곳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늘 앙숙이고 적대관계였다는 일방적인 편견 속에만 갇혀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57년 전의 이야기처럼 서로 윈윈하고 가슴 푸근하게 만드는 사례들도 없지 않다는 사실도 조금은
잊지 않았으면......
왜놈들을 증오하던 조상님들의 DNA가 내게도 흐르는지라 일본이라면 거부감 먼저 드는 건 사실이다.
일본애게는 가위 바위 보에서도 결코 져서는 안된다는 주장에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게 자존심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될까?~~
균형잡힌 시각의 서구의 석학들에 의하면 세계 경제계의 두 거인인 한국과 일본이 단지 협력관계만 구축해도
세계의 질서와 역사마져 바꿀 수 있다는데 지금 두 나라의 현실은~~ㅠㅠ